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마음산책, 2006 (프롤로그, 1~3장 발제)
프롤로그, 이야기를 위한 몇 개의 이야기
▌ 『아라비안나이트』의 셰에라자드
이 이야기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사색하게 한다.
이야기가 우리를 살게 한다(구원한다)
이야기에 의해 내일과 내일이, 그러니까 삶이 계속 이어진다.
이야기의 부재는 죽음이고 이야기의 존재는 삶이다. 삶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가 삶을 만드는 것 또한 진실이다. 이야기가 없으면 삶도 없는 것.
▌출애굽, 이스라엘인의 광야
그들의 삶은 그들의 이야기가 만든 삶이다. 이야기가 없으면 삶도 없다.
▌누가 고인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는가 (기억-이야기)
공통의 기억이 많은 사람은 많이 운다. 울게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이다. 공유한 기억이 많으면 헤어지기가 괴롭다. 그와 함께 만든 이야기가 나의 삶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의 부재는 나의 이야기, 나의 삶을 충격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 독자, 혹은 몰래카메라를 보는 사람
이야기를 짓고 듣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타인의 삶, 타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정말로 궁금한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처럼 살고 있는가가 아닌가.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을 확인함으로써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살고 있지 않다고 안도하려고 하는 심리. 아마도 동일시 욕구의 발현일 것. 뿐만 아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새로운 자기 이야기를 꿈꾼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이야기에 참여한다. 참여는 창조적인 행위다. 책은 독자가 읽음으로써 완성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글쓰기의 일종이다. 우리의 삶이 이야기와 섞인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는다.
▌작가,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쓰는 사람
글쓰기의 숨은 동기. 이해받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편이며 나름의 치유책인 것. 소설은 가장 먼저 그 글을 쓴 작가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유익하다.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세상을 견딜 힘을 얻는다. 세상의 불합리와 파렴치와 몰인정을 견딜 힘을 얻는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그 힘을 얻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작가다.
1장. 잘 읽어야 잘 쓴다
▌읽어야 쓴다
배워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다. 방법이 아니라 태도다. 우리가 알아야 할 소설 창작의 방법에 대한 모든 것은 소설 속에 들어있다. 책은 기억의 확장이며 상상력의 확장이다. 보르헤스는 과거를 기억해내는 것과 꿈을 기억해내는 것이 책의 기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책을 기억해내는 것이 보다 중요한 책의 기능이다. 책을 읽다가 책을 쓴다. 소설을 읽으면 소설 창작의 방법이 보인다. 소설 창작의 교과서가 따로 없다. 좋은 작품이, 좋은 작품만이 교과서다. 그러니까 소설 창작의 방법론의 첫 장은 읽기다. 읽은 사람만이 쓴다. 잘 읽은 사람이 잘 쓴다.
▌느리게 읽기
다르게 읽어야 한다. 문장을 음미하고 문장 속의 생각을 곱씹고 그 생각을 그 문장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작가를 만나라. 꼼꼼하게 천천히,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심지어 문장부호 하나에 집중하는 책 읽기. 단어와 문장, 심지어 문장부호 하나하나의 쓰임새를 음미하는 책 읽기. 소설 쓰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2장.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불만과 의혹, 욕망과 의도
불만과 의혹, 욕망과 의도가 말을 만들고 소설을 쓰게 한다. 이청준은 그것을 복수심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거울이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불만과 의혹, 어떤 욕망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소설은, 어떻게 말하든 소설을 쓰는 사람의 세계 해석이고, 그 해석의 뿌리는 그의 욕망과 의도이기 때문이다. 말을 하겠다는 건 말할 내용이 있어서이고 소설을 쓰겠다는 건 쓸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절실한 이야기여야 한다
절실한가? 적어도 누군가 들어주기를 기대한다면, 그런 요청이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가치를 가진 말을 들려주어야 한다. 여기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크기나 무게가 아니라 깊이다. 말을 하는(소설을 쓰는) 사람이 자기가 말하려는(쓰려는) 내용을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절실한 것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의 한 처소는 기억이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것을 써야 한다. 그러나 기억은 단순한 과거 경험의 퇴적이 아니고 편집된 과거다.
또한 그 절실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들, 이미지나 사상,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영혼이나 다름없는 그것들에 실체를 부여하는 육화의 과정이다.
3장. 발상에서 소설이 태어난다
▌순간의 포착
소설 쓰기는 발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작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을 쓸 것인가를 찾고 궁리하고 결정하는 것부터가 글쓰기다. 아니, 그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글의 성격과 수준과 성향의 상당 부분이 이 단계, 즉 발상의 단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걸 소설로 쓴다면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쳐 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소중하다. 이 세상에 쓰인 모든 좋은 소설들의 작가는 그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예를 들면 이청준의 ‘전짓불’이나 하성란의 ‘쓰레기’. 이것들은 아직 소설이 아니지만 완상된(될) 소설의 핵심을 이룬다. 소설의 체질을 결정하는 유전인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이것들이다.
▌신호에 반응하라
발상을 얻는다는 것은 이를테면 떠도는 신호들 가운데 어떤 것을 포착하는 일이다. 포착하기 전까지 그것들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다. 신호들,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은 붙잡아두지 않으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떠돌아다니는 것들을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두지 말고 붙잡아야 한다.
▌소설의 자장
중요한 것은 삶 속에서 착상의 단서를 잡아내는 일이다. 거미줄을 친 거미만이 잠자리를 잡는다. 사물과 현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호기심, 그것들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을 꿰뚫어보는 상상력, 그리고 지속적인 독서와 사유(나는 그것을 문학적 자장이라고 표현하는데)를 유지하는 사람이 소설의 씨앗을 찾아낸다.
좋은 소설을 얻기 위해서는 소설의 자장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 자장 안에서 놀아야 한다. 소설을 생각하고 소설을 읽고 소설 쓰기를 계속 하는 것. 소설 쓰기를 계속 하는 한 소설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발제를 마치며
생각해 보면 나를 기른 것도 ‘이야기’다. 주로 엄마가 해 준 이야기가 뼈대를 이루고 있다. 엄마는 뇌병변 장애가 있어서 이야기를 많이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야기를 심어준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단연코 그건 엄마다. 콩쥐팥쥐 이야기도, 장화홍련 이야기도, 백설공주 이야기도 모두 엄마가 이야기 들려주던 상황을 토대로 기억을 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가 짓던 표정, 목소리, 엄마 몸에 기대던 순간 느껴지던 체온, 그리고 이야기 때문에 일어난 두려움이나 분노 같은 감정들까지. 뿐만 아니다. 엄마가 해주는 이야기들은 어떤 에피소드를 넘어서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메시지, 혹은 축복을 넘어 강력한 예언이 되기도 했다.
나와 관련해 일어났지만 내가 태어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일이나 어려서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들까지 마치 겪어서 아는 일처럼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기억하게 되었다. 결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던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게 된 이야기, 엄마 뱃속에 일곱 달 동안 살았다는 언니가 인큐베이터에 보낼 형편이 못 되어서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이런 저런 상황을 두고 보면 나는 사실 태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태어나기까지 엄마는 어떻게 입덧을 했으며 어떤 태몽을 꿨으며, 식구들은 모두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렸다는 이야기, 내가 태어나고 엄마와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는지 경쟁하듯 들여다봤다는 이야기.
나에게 피를 물려준 외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또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할머니는 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그들의 자손인 나는 어떤 모습으로 자라서 엄마를 놀래켜 왔는지, 그래서 엄마나 아빠가 아프더라도 나는 무엇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지……. 눈에 보이는, 집안의 각종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알고 보면 내가 상당히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까지도, 모두가 엄마가 해주는 이야기가 씨앗이 되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 씨앗이 만든 방향성을 어긋난 발걸음은 뗄 수조차 없는 지경이기도 하다.
별 것 아닌 이 몇 줄 글을 쓰는 동안 울음 같은 것이 자꾸만 올라와서 애를 먹었다.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기억이 건들렸던 모양이다. 나를 울게 만드는 이 기억(이야기)들을 어떻게든 쓰고 싶다는 욕망을 늘 가지고 있다. 아직도 어떻게 하면 잘(!) 쓸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를 살게 하고 누군가를 살게하는 ‘글’을 제대로 한번 써 보고 싶다.
첫댓글 글 과제를 할때면, 왜 글을 못쓸까 자책하게 됩니다. 그건 읽기를 게으르게 한 탓이었네요. ㅋ 책 읽는 재미를 못느껴, 책을 많이 읽지도 아이들에게 많이 읽어 주지도 못했습니다. 행간 수업을 받으며 읽기 시작한 책들이 조금씩 재미를 주기도 하고, '아하' 머리를 치게 하는 지혜도 얻게 되었습니다. 서은혜님의 매력은 이야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행간을 통해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며 기대해 보겠습니다. 감상문 잘 읽었습니다. 수업시간 더 많은 이야기 기대해 봅니다.
꾸준하게 곁을 지켜주시는 연옥님 댓글 덕분에 늘 기분이 좋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옥님 늘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통해 '엄마의 딸' 뿐만 아니라 '서은혜'라는 새로운 딸이 탄생한 느낌입니다. 어쩌면 은혜님의 열정은 어머니 '한'의 다른 면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맞아요. 엄마와 나의 경계를 잘 그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어쨌거나 각자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르게 말해서 말해지지 못한 엄마의 이야기와 동일한 처지의 누군가가 목소리로 연결되고, 스스로 말할 수 있기까지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까지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깊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