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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 주일설교
희망이 있는 세 가지 이유
마태복음 2:13~23
며칠 전 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남자 86.3세, 여자 90.7세라고 합니다. 이 수치는 보험개발원이 생명보험 가입자 통계를 바탕으로 산출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살아야 한다고. 그런데 진짜 100세 시대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수명이 늘어간 것은 경제력이 높아지고 음식이 좋아지고 의술이 발달하면서 그만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날이 길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수명이 늘어간 것은 행복하게 살날만 길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명이 길어지면 고달프고 슬프고 한숨 쉴 날도 그만큼 길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살든지, 남보다 부자로 살고 출세를 하든지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고달픔과 슬픔은 다 있습니다. 그래서 120세를 살았던 모세는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습니다. 자랑거리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오래 사는 것이 저주란 말일까요? 될 수 있으면 오래 살지 말고 40~50세에 죽으면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어떤 여건에서 살든지 수고와 슬픔이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사는 사람은 반드시 희망을 품고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잘 말해주십니다.
함께 성경으로 들어가 봅시다.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고 떠난 후에 요셉의 꿈에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이 천사는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실 임마누엘이라고 알려준 그 천사입니다.
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헤롯 왕이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니까 빨리 애굽으로 피신하라.” 당시 예수님은 태어난 지 오래되지 않은 아기입니다. 그런 아기를 데리고 머나먼 애굽으로 가야 하는 것은 참 고달픈 상황입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빨리 달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밤중에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아무도 몰라야 추격을 피할 수 있겠지요.
요즘 같은 교통시설이나 숙박 시설이 없던 시절에 요셉은 연고도 없는 애굽으로 가야 했습니다. 나귀 한 마리에 아기와 엄마가 타고 가면서 먹을 것도 싣고 걷고 또 걸어서 그 먼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리고 애굽에 도착해서는 임시 거처를 정하고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을 텐데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할까요?
다행히 요셉에게는 박사들이 준 예물이 있어서 당분간 생활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에게 예상치 않은 돈이 생기면 꼭 쓸 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갑자기 돈이 들어갈 문제가 생기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필요를 알아서 공급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행히 오래 있지 않아서 천사가 세 번째로 꿈에 찾아왔습니다. 이제 헤롯이 죽었으니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로 와서 보니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이 되어 있습니다. 아켈라오도 잔인하기로 유명한 왕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저 멀리 나사렛에 가서 살기로 했습니다.
한편, 요셉이 애굽으로 피신해 있는 동안 베들레헴에서는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이 돌아와서 아기 왕이 누구인지 알려주기를 기다렸는데 박사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헤롯은 군인을 보내어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7절에 보면 헤롯은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는 자세히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날짜에 오차가 생겨서 아기 왕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 살 아래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두 살 아래의 아기는 다 죽였습니다. 이처럼 헤롯은 정신이 파탄 난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잃은 사람들은 정신을 잃었고 아무도 그들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고달픈 상황, 극도로 슬픈 상황, 여전히 문제가 많은 이 상황 속에 사는 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헤롯 같은 폭군이 없습니다. 대신에 질병이라는 폭군, 사고라는 폭군 등 예상치 않은 상황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수명이 길어지면 슬프고 고달픈 일을 겪을 일이 더 많아집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 안에 사는 신자에게는 그런 사건과 사고 속에서는 희망을 품을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 신자들도 희망을 품을 수 있고 21세기 신자 여러분도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신자의 삶에서 고달픈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주님의 계획을 이루고 있다면 소망을 품고 감내할 수 있다.
먼저 13~15절을 생각해 봅시다. 요셉에게 나약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머나먼 애굽으로 피신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 동네방네 소문이 나니까, 또 한시가 급하니까 밤중에 떠났습니다(14절). 원래 야반도주(夜半逃走)는 남의 돈 떼어먹은 나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인데 아무 잘못 없으면서 야반도주하는 요셉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래서 아무런 연고도 없고 언어도 안 통하는 외국에 무작정 가서 살아야 하니 얼마나 암담했을까요? 요셉의 상황은 참 고달팠습니다. 마리아가 낳은 그 아기는 천사도 말했고 동방박사들도 말했듯이 하나님의 아기이고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해줄 수 있을 텐데 그러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신자의 삶도 때로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잘 섬기고 주일마다 예배 잘 드리고 십일조 잘 드리고 매일 기도하는데 제발 아프지 말고 하는 일도 남달리 잘 풀리고 사람들의 존경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 하나님은 신자의 삶에도 고달픈 상황을 허락하실까요?
그런데 15절에서는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그 먼 애굽으로 간 그 상황은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15절에서 “이는....이루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은 바로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메시아 예언은 호세아 11:1에 나오는 말입니다. 원래 그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구원해 주셨는데 왜 내 말을 순종하지 않느냐고 탄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내 아들”은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세아의 말이 장차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낼 것을 의미하는 예언인 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또 요셉이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갈 때만 해도 호세아를 통해 주신 예언을 성취하는 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마태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는 상황은 고달팠지만 메시아 예언을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살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불편하고 심지어 고달프더라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희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2. 신자의 삶에서 위로받기 어려운 슬픔이 발생할 때라도 이제 구원자가 와 계시기에 소망을 품을 수 있다.
16~18절을 보면 요셉이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간 후에 베들레헴에는 너무나 뜻밖의 슬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먼저 유대인 율법학자들에게 왕의 탄생 예언을 물어서 거기가 베들레헴인 것을 알아 내었습니다. 또 조용히 박사들을 불러서 대화하고 별이 나타난 시기를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를 꼭 찾아내고 찾으면 자기에게도 알려달라고 합니다. 자기도 가서 아이 왕에게 경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박사들은 헤롯의 말을 믿었을까요? 천사가 박사들의 꿈에 나타나서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고 바로 고향으로 가라고 지시한 것을 보면 박사들도 헤롯의 음흉한 계략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헤롯은 마음을 졸이면서 박사들을 기다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은 걸어서 2시간이면 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서 하루 이틀 머문다고 하더라도 며칠 내로 와야 맞습니다. 며칠 동안 기다려도 박사들이 돌아오지 않자 헤롯은 군인들을 보내어 두 살 아래의 아기는 한 명도 빼놓지 말고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박사들이 동방에서 온 기간을 다 합쳐도 1년이 못 되었을 텐데 헤롯은 두 살까지 죽였습니다.
베들레헴 주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 군인들이 왔으며 왜 아기들을 학살하는지 모르는 채 그런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군인들을 다짜고짜 집집마다 들어가서 아기란 아기는 모두 죽였습니다. 한 살이든 두 살이든 일단 어리게 보이면 죽여 버렸습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서로 가족이고 친척이었습니다. 폭군 헤롯에 의해 수십 명의 영아가 살해당한 사건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위로받기 어려운 슬픈 사건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위로받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가 30대 중반의 부목사일 때 아기가 죽은 집이 있었습니다. 그런 댁에는 담임목사님이 가시면 좋을 텐데 저에게 심방을 보냈습니다. 저는 당황해서 뭐라고 설교하고 어떻게 기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말을 한들 젊은 부부에게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무고한 사람이 인질로 잡히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70년 전에는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죽고 가난으로 굶어 죽고 전염병이 오면 속수무책으로 죽었습니다.
꼭 죽는 일이 아니어도 갖가지 슬픈 일로 위로받기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애인이 변심해서 슬프고 전세금 사기를 당해서 슬프고 갖가지 슬픈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슬픈 일들을 통해 일찍이 예레미야 31:15에서 말한 메시아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사건을 두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조상 라헬이 통곡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메시아가 오신 때에 어머니들이 죽은 자식 때문에 통곡할 것에 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아기 어머니들은 영문도 모르고 슬픈 일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마태를 통해 그것이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극심한 슬픔 가운데서도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이제 메시아가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에서는 극도의 슬품이 존재하지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함께 모든 죄와 슬픔을 다 해결해 주시므로 여러분은 희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승리만 있네
고통은 모두 다 사라져버리고 영광만 가득하겠네
우리의 주님과 나 함께 있을 때 영원한 기쁨 넘치네
3. 신자의 삶이 뜻대로 안 되고 문제가 남아 있지만 새로운 가지가 움 돋고 있으므로 새로운 소망을 품을 수 있다.
19~23절에 보면 애굽에서 돌아온 요셉은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저 변방 나사렛으로 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잔인한 헤롯이 죽었으나 그의 아들 아켈라오 역시 잔인한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들레헴 예수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가 된 이것조차 중요한 메시야 예언을 성취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사야 11:1에 보면 장차 이새의 가문에서 새로운 싹, 새로운 가지가 나서 크게 번성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1차적으로는 다윗을 뜻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싹 혹은 가지가 네체르인데 나사렛과 글자(히브리어 子音)이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 사심으로 ㄴㅊ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자의 삶도 그처럼 내 뜻대로 안 될 때가 많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데 또 새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목회만 잘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설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열심히 설교해서 교회 부흥시키고 싶은데 아스팔트에 나가서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을 막을 일만 많이 생깁니다.
여러분도 살고 싶은 곳에 살지 못하고 하고 싶은 직종에서 일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올리브나무가 오래되어 죽은 것 같지만 그 뿌리에서 새싹이 올라와서 크게 자라 열매를 맺게 되듯이 예수님을 믿는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서 살고 싶은 곳에 살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시계는 돌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그 길이 더 좋은 길이었고 가장 좋은 길이었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자의 삶이고 이것을 미리 알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또 다른 작은 싹이 자라는 것으로 인해 희망을 품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평생의 모든 꿈 허물어져 세상의 친구 다 떠날때
어둠에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아오시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입은 너를 고치시리
뜻대로 되지 않고 고달프고 슬픈 일 발생하는 인생을 살면서 신자는 무엇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요?
1. 신자의 삶에서 고달픈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주님의 계획을 이루고 있다면 소망을 품고 감내할 수 있다.
2. 신자의 삶에서 위로받기 어려운 슬픔이 발생할 때라도 이제 구원자가 와 계시기에 소망을 품을 수 있다.
3. 신자의 삶이 뜻대로 안 되고 문제가 남아 있지만 새로운 가지가 움 돋고 있으므로 새로운 소망을 품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이유로 여러분은 희망을 품고 2024년 한 해동안 주님과 동행하시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설교준비 과정>
본문의 중심사상: 예수는 약속하신 그 메시아가 확실하다.
설교의 중심사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희망을 가져라.
본문 분석
13~15절. 예수님이 애굽으로 이주하는 것은 고달픈 상황이지만 이는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는 과정이다.
선행본문/ 호세아 11:1
16~18절, 헤롯의 영아 살해는 위로받기 어려운 슬픈 사건이지만 이제는 메시아가 오셨기에 새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선행본문/ 예레미야 31:15
19~23절, 헤롯이 죽었으나 아켈라오가 건재하기에 고향이 아닌 나사렛으로 가야 했던 것은 그가 네체르(싹, 가지)의 사람이라는 예언을 성취한 것이다.
선행본문/ 이사야 11:1
세 가지 대지 도출
1. 영아와 어머니를 데리고 외국까지 피신해야 하는 요셉의 상황은 참 고달프다. --> 신자의 삶에서 고달픈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주님의 계획을 이루고 있다면 소망을 품고 감내할 수 있다.
2. 폭군에 의해 수십 명의 아기가 살해당한 마을 사람들은 위로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 신자의 삶에서 위로받기 어려운 슬픔이 발생할 때라도 이제 구원자가 와 계시기에 소망을 품을 수 있다.
3. 예수님은 아켈라오 때문에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되면서 그가 네체르(싹, 가지)의 사람임을 증명해 주셨다. --> 신자의 삶에 아직 문제가 남아 있지만 새로운 가지가 움 돋고 있으므로 새로운 소망을 품을 수 있다.
첫댓글 오늘 설교 영상(유투브)
https://youtu.be/vX-yAyVxU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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