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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점필재길 길라잡이(1)
점필재 김종직은 함양 군수로 5년간(성종 1년~6년, 1470. 12. 28~1475. 12. 28) 재임하면서 1472년 8월과 1475년 4월(?) 두차례에 거쳐 지리산을 유람한다. 유두류록은 1472년 8월 14일 함양관아를 출발하여 고열암과 성모사, 향적암, 영신사에서 숙박을 하며 4박 5일간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이다. 선인들의 유람록 옛길을 복원하려는 첫 시도는 '다큐멘타리 르포 지리산(1987년 발간)'의 저자 고 김경렬 선생이다. 김경렬 선생의 의탄설(의탄→청이당→하봉→중봉→천왕봉)을 동강으로 바로잡은 것은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2020)'의 저자 류정자 님이다. 2000년대 초반 지리99에 발표한 신유두류록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이세본기(秦二世本紀)〉》에 指鹿爲馬(지록위마)의 고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천은 여기에서 사람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잘못된 일에 눈치를 보고 침묵하는 사람, 잘못을 알면서도 아첨을 하고 동조하는 사람, 잘못된 일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유람록 복원도 그렇다. 필자가 선답자들의 답사 기록에 처음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영신사지이다. 2006년 10월 중순 청학연못과 세석산장 앞 영신사지라는 곳을 다녀온 후에, 의문을 가지고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과 유두류기행시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9월 26일~27일에 김종직선생 길 첫 답사를 시작하였다. 영신사지에 대한 의문은 김종직의 '영신암' 시에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창불대를 산책하고 영신암으로 들어가는 석문이 시어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靈神菴(영신암)
箭筈車箱散策回 : 전괄(창불대)와 거상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老禪方丈石門開 : 노선사의 방장(영신암)은 석문이 열려있네
明朝更踏紅塵路 : 내일 아침이면 다시 속세의 길을 밟으리니
須喚山都沽酒來 : 모름지기 촌장을 불러서 술이나 받아오게
注 箭筈과 車箱 : 전괄은 화살 끝처럼 좁은 산마루를 말하고, 거상은 마치 수레의 짐칸처럼 우묵한 골짜기를 말하는데, 또는 전괄령(箭筈嶺)과 거상곡(車箱谷)의 명칭으로도 쓰는바, 두보(杜甫)의 망악시(望岳詩)에 “거상의 골짝에 들어서니 돌아갈 길이 없고 전괄로 하늘을 통하는 문 하나가 있구려[車箱入谷無歸路 箭筈通天有一門]”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六》 方丈 : 사방 1장의 넓이(1장 : 10척) 절의 주지가 거처하는 방, 또는 그 주지. 주지스님. 삼신산의 하나(지리산) 禪 : 禪師 : 선사(선종의 고승의 칭호) 紅塵 : 붉운 먼지 속세. 湏(회)인가? 須(수)인가? 처음에는 湏(회)로 보았으나 須(수) 모름지기 꼭으로 당부하는 말로 쓰여진 듯하다. 山都 : 狒狒비비 중의 가장 큰 것. 豚尾狒狒 <爾雅, 釋獸> 狒狒. <郭璞注> 其狀如人, 面長, 唇黑, 身有毛, 反踵, 見人則笑. 交․廣及南康郡山中有此物, 俗呼之曰山都. /明, 袁宏道<新安江詩>山都吟復笑, 猩語是耶非. 山都는 猿鶴(은둔 선비)의 연장자(대표)
만약 선답자들의 노고와 기록이 없었다면, 점필재 길 답사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들이 모아놓은 자료와 시행착오는 나의 유람록 답사에 훌륭한 안내서가 되었다. 아무튼 선답자들과 이런저런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지만, 각설(却說)하고 점필재 길을 구간 별로 간단한 설명과 사진으로 유두류록 점필재 길을 안내하고자 한다. 나의 답사 기록에도 오류가 있을터, 후답하시는 분들이 밝은 눈으로 바로잡기를 바란다.
1. 두류산을 유람하기로 하다[엄천-고열암]
1472년 8월 14일 덕봉사(마천면 덕전리 766, 덕봉 마을 현 함양 마천 고담사) 승려 해공(解空)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여 함양 관아를 출발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과 함께 엄천을 지나 화암(花巖, 유림면 유평리 화암)에서 묘정암 스님 법종(法宗)을 만나 길 안내를 받는다. 이곳에서 지장사 갈림길까지는 유두류록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구시락재와 거머리재를 넘어 적조암을 지나 지장사 갈림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간 것으로 생각한다. 지장사 갈림길은 현재 노장대 마을 돌배나무 부근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지장사 터는 돌배나무에서 북동 쪽으로 직선거리 약 200m 지점에 있다. 김종직 선생은 갈림길에서 말에서 내려 짚신을 갈아 신고 환희대를 거쳐 선열암과 신열암에 들렀다가 독녀암으로 가는데, 선열암과 신열암에서 승려를 만나지 못하고 해거름에야 고열암에 도착한다. 김종직 선생은 홀로 의논대를 다녀오는 것으로 하루의 산행을 마친다. 김종직 선생은 고열암에서 머물면서 선열암과 의논대, 숙고열암 등 주옥과 같은 4수의 기행시를 남긴다. 유두류록에서 '향로봉이 발 아래에 있다.'라는 내용은 유람록의 오류로 보인다.
☞ 코스 : 함양관아→엄천→화암→지장사 갈림길→환희대→선열암→신열암→독녀암→고열암→의논대→고열암(宿)
注 조위(曺偉, 1454~1503)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김종직의 처남. * 유호인(兪好仁, 1445~1494) : 본관 고령.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뇌계(㵢溪) * 한인효(韓仁孝, ?~?) 자는 百源, * 임대동(林大仝, 1432~1503) 字는 정숙(貞叔)羅州人。號는 매헌(晦軒)
blog.daum.net/lyg4533/16488365
☞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장사지에 대하여
한 번 짚었던 내용으로 유두류록의 구두점에 오류가 보이는 부분이다. 다시 읽어보니 점필재 일행이 지장사에 들른 것이 아니고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으로 갈아 신은 것이다. 또한 선답자들이 지장암지라고 발표한 곳은 물이 없기 때문에 암자의 입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 김종직의 유두류록 지장사 부분 발췌(1472년 08월 14일)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버리고)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이미 경치가 매우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1里를 나아가니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라 하였다.(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舍馬著芒鞋。策杖而登。林壑幽窅。已覺勝絶。一里許有巖。曰歡喜臺。)
암자나 사찰의 폐사지에 반드시 기와 편이 있어야한다는 설은 모든 암자의 지붕이 기와였다는 논리인데,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선인들의 유람록에 '영신사만이 기와 지붕이다.'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암자와 기와를 무조건 연결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불일암 산신각은 너와집 불일암 법당은 띠집(茅屋)이었으니, 퇴락한 불일평전의 봉명산방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나는 지장사가 샘이 있는 곳이라고 추정하며, 지장암에서 하룻밤 묵으며 시를 남긴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시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라는 내용을 근거하여 점필재의 지장사 경유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장암의 위치는 노진의 시에서 '바위틈의 샘물소리가 새벽 단꿈을 깨우네.'의 구절로 미루어 계곡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천거로 박사가 되었다.'라는 기록에서 증광문과 급제 이전(1546년)이니, 1472년에서 1546年間에 지장사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뱀사골 도탄에 띠집으로 桃灘精舍(도탄정사)를 짓고 은거한 변사정(1529~1596)은 盧禛(1518~1578)의 제자이다.
☞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장사와 지장사 갈림길 : blog.daum.net/lyg4533/16488288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우뚝 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운근(雲根)은 공기가 차가운 바위에 부딪쳐 구름이 생기고 물방울이 맺히는 커다란 바위를 뜻하고
촉촉수(矗矗水)는 높은 곳에서 톡톡(촉촉 : 의성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인데 절묘한 시어입니다.
先涅庵[선열암]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우뚝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高僧結夏還飛錫 :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갔는데
只有林間猿鶴驚 : 다만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는 선비가 놀라는구나
議論臺(의논대)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宿古涅庵(숙고열암)
病骨欲支撑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 : 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 : 구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 : 한밤중 산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贈古涅僧(고열암 중에게 주다)
求名逐利兩紛紛 :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좇는 것 둘 다 어지러우니
緇俗而今未易分 : 지금은 승려와 속인을 구분하기 어렵구나
須陟頭流最高頂 : 모름지기 두류산 최고봉 상봉에 올라보게나.
世間塵土不饒君 : 세간의 흙먼지는 그대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네
☞ 위 내용은 저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두류산을 유람하기로 하다[엄천-고열암]
나는 영남(嶺南)에서 나고 자랐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아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느라 나이 이미 마흔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년, 성종2년)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고개만 들면 푸르게 우뚝 솟은 산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흉년으로 인한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한 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원문]
某生長嶺南. 頭流. 乃吾鄕之山也. 而遊宦南北. 塵埃汨沒. 年齒已四十. 尙不得一遊焉. 辛卯春. 持左符于咸陽. 頭流在其封內. 嵬然蒼翠. 擧眼斯得. 而凶年民事. 簿書倥傯. 殆二期. 又不敢一遊焉. 每與兪克己,林貞叔語此. 未嘗不介介于懷.
그런데 금년(1472년, 성종 3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두류산을 함께 유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생각해보니, 몸은 날이 갈수록 파리해지고 다리의 힘도 더욱 노쇠해지니, 이번 해에 유람하지 못하면 다음 해를 기약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어, 보름날 밤에는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감상하고, 다음날 닭이 울면 해 돋는 모습을 바라보고, 그런 다음 사방을 두루 유람한다면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유극기(兪克己)를 불러 조태허(曺太虛)와 《수친서(壽親書)》에 ‘유산에 필요한 도구(遊山具)’를 살펴보고, 유람에 휴대할 것을 약간 더하거나 줄였다.
[원문]
今年夏. 曺太虛自關東來. 從余讀禮. 及秋. 將返于庭闈. 而求遊玆山. 余亦念羸瘵日增. 脚力益衰. 今年不遊. 則明年難卜. 況時方仲秋. 䨧霾已霽. 三五之夜. 翫月於天王峯. 鷄鳴. 觀日出. 明朝. 又周覽四方. 可一擧而兼得. 遂決策遊焉. 乃邀克己. 共太虛. 按壽親書所云遊山具. 稍增損其所齎.
○ 14일, 무인일.
덕봉사(德峯寺)의 승려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출발하여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고 있는데, 승려 법종(法宗)이 뒤따라왔다. 그에게 지나온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도 길을 인도하게 하고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원문]
十四日戊寅. 德峯寺僧解空來. 使爲鄕導. 韓百源請從. 遂歷嚴川. 憩于花巖. 僧法宗尾至. 問其所歷. 阻折頗詳. 亦令導行至地藏寺. 路岐. 舍馬著芒鞋. 策杖而登. 林壑幽窅. 已覺勝絶.
여기서 1리쯤 더 가니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조태허(曺太虛)와 한백원(韓百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절이 내려다보였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지고 지어져 있는데, 절벽 밑에 두 샘이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너른 바위가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 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 되어 보였다.
[원문]
一里許有巖. 曰歡喜臺. 太虛,百源. 上其巓. 其下千仞. 俯見金臺,紅蓮,白蓮諸刹. 訪先涅菴. 菴負峭壁而構. 二泉在壁底極冽. 墻外. 水自半巖缺泐. 津溜而落. 盤石承之. 稍坳處. 瀅然渟滀. 其罅生赤楊龍須草. 皆數寸.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덩굴〔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승려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이 있는데, 결하(結夏)와 우란(盂蘭)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원문]
傍有磴路. 繫藤蔓一條于樹. 攀之上下. 以往來于妙貞及地藏. 宗云. 有一比丘. 結夏盂蘭. 罷後雲遊. 不知所向. 種小瓜及蘿葍於石上. 有小砧杵糠籺數升許而已.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았더니 승려는 없고, 그 암자 또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원문]
訪新涅. 無僧. 亦負峭壁. 菴東北有巖. 曰獨女. 五條離立. 高皆千餘尺. 宗云. 聞有一婦人. 累石巖間. 獨棲其中. 鍊道沖空. 故爲號云. 所累石猶存. 柏生巖腰. 欲上者. 梯木挽其柏. 廻繞巖闕. 肯腹俱盪磨. 然後達其頂. 然不能辦命者. 不能上. 從吏玉崑聳山. 能上而超足麾手. 予嘗往來山陰. 望見是巖. 與諸峯角出. 若柱天然. 今而身跨玆地. 毛骨愯然. 恍疑非我也.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오랫동안 불가에서 수행하여 불도의 지식을 많이 쌓은 승려)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납의(衲衣)를 입은 요주승(寮主僧)이 와서 합장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라고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 지금 요주승은 한 낮선 노인네를 보았을 뿐인데,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을 시험하여 20여리를 걸었는데 극도의 피곤으로 깊은 잠을 잤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원문]
稍西迤抵古涅菴. 日已曛矣. 議論臺. 在其西岡. 克己等後. 余獨倚杖于三盤石. 香爐峯,彌陁峯. 皆在脚底. 空云. 崖下有石窟. 老宿優陁居之. 嘗與三涅僧. 居此石. 論大小乘. 頓悟. 仍以爲號. 少選. 寮主僧荷衲來. 合掌云. 聞使君來遊. 何在. 空目僧休說. 僧面稍赤. 余用蒙莊語. 慰藉云. 我欲煬者爭䆴. 舍者爭席. 今寮主見一野翁耳. 豈知某爲使君. 空等皆笑. 是日. 余初試險. 步幾二十里. 極勞憊. 熟睡夜半而覺. 月色呑吐諸峯. 雲氣騰湧. 余默慮焉.
안녕하세요.
저는 대전 서구 도마동 도솔산 아래 제비네에 살고 있습니다.
90년대 초반 자일산악 고수일 사장과 산행을 많이 했습니다.
대전제일고등학교에서 한문교사로 정년 퇴직을 하고,
지금은 지리산 역사문화조사단에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자료지만 자일산악 회원님들께 공유합니다.
블로그 : 도솔산 연소재(兜率山 燕巢齋) (tistory.com)
도솔 드림 전번 010-5404-6316
첫댓글 지리산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네요
좀 어렵지만 ㅎㅎ
계속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고
산행도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