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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인잔치 / 사 62:1-5, 요 2:1-12
현대인들은 기적이란 단어를 쉽게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이 우리에게 기적이라는 단어를 생소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문명의 발달은 반대로 인간에게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안겨주었다. 우리 주변에는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운 국가간의 문제, 환경문제, 인종문제와 같은 골칫거리들이 쌓여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과 한계를 느낀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더 기적을 필요로 하는 시대이다. 만약 여러분이 기적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여러분에게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에 둔감하다면 그 결과는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역사할 때 제일 먼저 깨닫는 것은 영적 위기에 대한 것이다. 내 삶이 절망과 가난에 허덕이고 있음과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다. 아직 이런 성령의 깨우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성령이 우리 마음 속에 역사하실 때 비로소 기적을 요청한다. 그러나 주님의 기적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기적과는 상당히 다르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의 특성은 세가지로 요약된다.
첬재로, 예수께서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자신을 선전하는데 기적을 이용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기적을 행하시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도 진치집 주인에게 통보하지 않으셨다. 심부름을 한 하인들말고는 아무도 이 기적을 알지 못했다. 요란한 선전과 함께 공연되는 오늘날의 마술과 비교할 때 예수님의 기적은 그 근본에서부터 다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가장 필요한 상황에서만 기적을 행하셨다. 사람들은 ‘지금도 기적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기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엿나이다.’ 예수께서는 원하시면 언제라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말 필요할 때 기적을 행하기 원하셨다. 예수께서는 기적이 없어서는 안 될 가장 필요한 순간에만 기적을 행하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기적을 통해 영적인 교훈을 주실 수 있을 때 기적을 행하셨다. 주님의 기적은 기적(miracle)이 아니라 표적(sign)이다. 11절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표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적이 가리키는 최종 목적이 더 중요하다. 도로표지판이 길 안내를 잘하고 있음을 보고 기뻐서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있는가? 도로표지판을 따라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정상인의 행동이다. 마찬가지로 표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병든 자가 고침받는 기적 그 자체에만 놀란다.
특별히 요한복음에 기록된 기적들은 표적들이다. 그러므로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씀이 더 중요하다. 요 20:30-31절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표적의 목적을 두가지로 밝혔다. 첫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표적의 대부분은 육체와 관련된 것이다. 병든 자를 고친다든지, 배고픈 군중들을 먹인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육체의 필요를 채워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께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영적인 필요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점이다. 이 점이 표적을 행하시는 목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요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오간 대화는 물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런데 결국 이 대화의 결론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는 말씀에 있다. 요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도 예수께서 배고픈 군중을 먹이신 것이 초점이 아니라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라는 말씀에 표적의 핵심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표적이 담긴 말씀들은 바로 인류를 구원할 열쇠를 제시하고 있다.
오늘은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첫 표적을 행하신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명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로 말씀드릴 것은, 결혼잔치는 본래 풍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혼잔치에는 기쁨이 많고 먹을 것이 많고 사람이 많다. 결혼잔치에서 싸우거나 인상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날은 개인 감정이 있더라도 참는 날이다. 그러므로 결혼잔치는 기쁨이 많은 곳이다. 결혼잔치에는 먹을 것이 많다.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는 열려진 식탁이다. 그런데 요즘은 티켓을 주어 참석하게 한다. 그러나 원래 결혼 식탁은 열려져서 축하하는 식탁인 것이다. 누구나 와서 잘 먹어주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결혼식은 마을 전체의 축제인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결혼은 지금하고는 조금 달랐다. 가정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1주일 동안 계속해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 경우 얼마나 많은 손님을 모시겠나? 유대인 결혼식의 주된 음식은 포도주였다. 대개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고 나중에는 나쁜 포도주를 내었다고 한다. 초청받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나 혼인 잔치에 들어섰을 때 그 잔치집은 포도주가 떨어져 당황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들어서시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다가와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였다. 여러분, 상상해 보라. 기쁨이 많아야 하고 음식이 많아야 할 이 잔치에 음식이 떨어졌다. 얼마나 당황했겠나? 갑자기 만들 수 없으니 많은 손님을 어떻게 하겠나? 이때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집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다. 이적을 행하는 분이다. 물 위를 걷기도 하시는 것을 성서에서 본다. 예수는 능력의 근본이요 실체인 것을 성서의 여기저기에서 여러 이적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집안에는 걱정거리가 가득했던 것이다. 결혼식에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주님이 오셨을 때 당황과 걱정과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역설적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실패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이 결혼잔치는 결핍, 모자람, 당황함, 걱정이 폭풍처럼 다가왔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살 때에 떨림이 있다. 양심에 가책이 있다. 두려움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이런 생각을 가져도 될까 하는 당황함과 걱정이 있을 때가 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만사는 형통하고 모든 세상적인 걱정, 물질적인 것, 도덕적인 것이 일시에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내 죄가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내 부족한 성격이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내가 고쳐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이 드러날 때에 당황하게 되지 않나? 당황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떳떳하고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하나?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죄된 마음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아직도 내게 부족한 것이 그대로 있다면 예수님께서 찾아온 잔치집처럼 당황함과 걱정과 불안이 있는 것이다. 부족이라든지 모자람이든지 당황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하신 얘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겠다.
둘째로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혼인잔치에 오신 주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다. 돌항아리는 손님이 오셨을 때 발을 씻어드리기 위해 준비되는 물통이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할 때 예수님은 이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신다. 하인들은 여섯 항아리 가득 물을 채웠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다. 연회장은 그 포도주 맛을 보고 놀랐다. ‘어디서 이런 포도주가 났느냐?’ 연회장은 몰랐지만 물을 떠갔던 하인들은 알 수 있었다. 초자연적인 예수님의 능력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하인들이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명령에 순종하였을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던 것이다.
여러분, 그 가정은 포도주가 필요한데 물 항아리에 물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그러나 예수님께서 명령하실 때 순종하였더니 필요한 포도주를 얻었다. 예수님의 명령이 내 논리에 맞지 않고 기준이나 판단에, 상식에 맞지 않을지라도 순종하는 것이 신앙의 세계이다. 신앙은 반이성이나 반논리, 반합리의 세계가 아니다. 신앙은 초논리요 초이성이며 초합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복종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합리나 이성이나 논리를 떠나 있는 것이다. 잠을 설치면서 아이를 돌보고 가정을 지키는 주부들의 사랑하는 마음은 타산적인 이해나 합리적인 비판의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세계는 논리를 넘어서서 있다. 사랑의 세계는 합리를 넘는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자기로 초논리, 초합리적인 복종의 세계인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순종합니다‘ 하고 순종했을 때에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이다.
물을 떠다 연회장에게 드렸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성서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적이고 표적이고 기적이다. 포도주가 필요한 가정에 물은 쓸모가 없다. 더욱이 돌항아리에 있는 물은 지저분한 물이다. 하인들이 오시는 손님의 더럽혀진 발을 씻겨드리기 위한 물이다. 그 항아리에 물을 담아 연회장에게 갖다주어 손님들을 대접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추하고 볼품없고 가치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손을 거치면, 예수님에게 영접되면 새로운 모습, 가치있는 것으로, 보람있는 것으로, 쓸모있는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적이요 기적이며 표적이다. 이것이 중생이며 구원받은 백성의 과정인 것을 성서를 통해 깨닫게 된다. 포도주가 떨어져 당황하던 가정에 평안함을, 결핍이 있는 곳에 풍부를 주신 예수님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네가 돌항아리에 물ㄹ을 채울 수가 있느냐?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고, 그것을 손님에게 갖다 줄 용기가 너희에게 있느냐? 이렇게 물으신다. ‘주가 명령하시니 내가 그물을 바다에 던지리이다. 밤새도록 노력하였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였지만 주께서 말씀하시니 내가 명령을 지키리이다.’ 그 결과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어부 베드로의 체험을 성서를 통해 우리가 보지 않나? 예수 그리스도는 시시때때로 우리의 마음과 신앙공동체를 통하여 명령하고 계신다.
셋째로 말씀드릴 것은, 이 표적을 통한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표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몇가지가 있다.
먼저는 인간이 노력한 제도나 인간이 성취한 하나님 없는 행복은 한계가 있고 결국에는 결핍이 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재료, 인간의 성취한 결과, 인간이 노력한 그 어떤 것도 한계가 있고 싫증이 나게 되고 결핍이 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능력,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하나님이 주시는 해결, 거기에는 다함이 없는 풍요가 언제나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된다. 결혼하기 위하여 많은 음식을 준비했다. 동네 손님들을 많이 청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다 가기 전에 음식이 떨어져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자기 자신이 먹을 것과 제자들이 먹을 것까지 해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가 되시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만든 생수, 우물은 다함이 있다. 그러나 참 생명의 우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참 행복이나 참 풍요나 참 풍성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참된 성공도, 개혁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길과 비밀을 찾아야 한다는 진리를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변화의 명령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변하여 필요한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예수에게 속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내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새로운 인격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에게 접붙임을 당하라는 것이다. 예수를 모셔라. 예수 안에 거하라.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인 것이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히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변화가 일어나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분문을 통해 발견해야 한다. 쓸모없던 물이 예수님의 손을 거칠 때에 잔치를 빛나게, 잔치를 풍성하게 하는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물과 같은 존재이다. 쓸모없었던 존재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주셨고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자녀가 되게 하셨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새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이 본문 속에 있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는 성화의 과정이 있다. 세월이 갈수록 아름다워지고 더 귀해지는 승화의 과정이 본문 속에 있다. 연회장과 손님들의 말 속에 있다. ‘다른 잔치집에서는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가 나오나 취기가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 나쁜 포도주를 내는데 이 집은 시간이 다 간 지금에 더 좋은 포도주가 나오는가?’ 여기에 비밀이 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고 신앙을 가졌을 때와 세월이 흘러간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 않나? 우리의 인격이 변화가 오지 않나? 우리의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인간관계가 달라진다. 점점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훌륭한 인격이 되고 인간다운 인격이 되어가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약점이 성화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강조를 하면서 믿는 사람으로서의 변화, 성화를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오늘의 현실이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행동의 변화가 없다.
어느 교단에서는 ‘신앙협동설’이라고 하여, 하나님 50%, 인간의 노력 50%가 합해져 구원된다고 한다. 그러나 장로교에서는 내가 노력하는 것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깊은 이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믿는 자로서 내 행위가 얼마나 달라지고 있나?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에는 민감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여러분께서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을 때의 태도와 지금의 자신을 비교했을 때 인격이 얼마나 발전했는가 보라. 혹시 처음보다 인격이 하락하지는 않았나? 점점 더 맛이 좋은 포도주가 나오듯이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화되는 갈보리의 가족이 되기를 바란다.
가나 혼인잔치 집은 어디인가? 우리 삶의 현장이며, 우리의 심령상태이다. 우리에게 기쁨이 있다. 세상적인 행복도 있다. 어떤 이는 재산도 있다. 건강도 있다. 지식도 있다. 기술도 있으니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부족한 것이 많다고 고백할 우리들이 아니겠나? 그리수도를 영접하고 그를 따르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우물이 여러분이 것이 될 것이다. 이 가나 혼인잔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신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이적 중의 이적이다. 결핍이 있는 삶, 오늘의 현실에 주님이 오시면 새로운 풍요와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도덕관, 새로운 사회구조가 새로운 삶의 형태로 부각될 수 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심령의 해결자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해결자, 역사의 길이 되신다. 올 한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자. (1996-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