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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시는 하나님 / 사 61:1-8, 막 1:4-11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 두 번째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다. 여기서 애통하는 자란 마음에 상처를 받고 슬퍼하는 사람, 고난을 당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지난 한해는 유별나게 사고가 많았다. 그래서 졸지에 사랑하는 부모님을, 사랑하는 자식을 하루아침에 사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또는 유난히도 많이 잡아들였던 양심수들, 그래서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잡혀가서 밤을 지새우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바로 애통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슬픔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위로하지 못하며, 또 어느 누구도 위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는 이런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성서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이 위로를 선포하고 있다. ‘행복하다. 슬퍼하는 이들이여,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라고 말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마음에 상처받은 자를 고치시며, 슬픔을 당한 자를 위로하실 수 있는 분임을 성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위로의 말씀선포
구약성서에서 가장 분명하게 위로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는 이사야이다. 특히 40장 이후에 이 위로의 말씀이 강하게 울려 퍼진다. 40:1절에 보면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 말씀이 울려퍼질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생활하던 때이다. 완전히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이다. 포로된지 수십 년이 지나 이제는 전혀 돌아갈 가망이 없는 것같이 보이던 때였다. 낙심과 체념 속에 살고 있을 때이다. 그런데 이사야의 이 놀라운 말씀이 울려 퍼지자 그들은 깜짝 놀란 것이다. 사 51:12-13절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이사야의 위로의 말씀은 그들의 육체적인 피로를 풀어주고, 그들의 주린 창자를 채워주고,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돌이켜주고, 그들의 모욕적인 대우를 개선해 주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사야의 위로의 말씀은 그들의 눈을 역사의 주재자요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과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는 길은 어떤 정치적인 변동이나 사회적인 제도의 변화, 또는 세상적인 어떤 위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해방된 것은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 왕국이 세워졌을 때 고레스 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바로 이런 정치적인 변화를 하나님이 이룩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고레스왕을 기름부음 받은 자, 또는 목자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이 세워 일하게 하신 자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위로가 고레스왕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는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한 고레스왕이 위대해 보였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힘든 것이다. 그러기에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놀라운 능력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사 40:28-31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보이지는 않지만 바로 하나님이 보이는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모든 삶의 원동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신앙을 갖지 못한다는데 있다.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해 그 생각이 지배를 받고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보이는 권력과 물질의 힘을 더 가까이 느끼며 살아가기 때문에 이 신앙을 갖기가 힘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눈이나 생각은 영적인 세게를 보거나 깨닫는 일에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 오직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보고 깨달아 알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기가 힘든 것이다. 바로 이 영적인 세계를 깨달아 알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죄로 말미암아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이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되찾지 아니하고는 사실상 하나님을 믿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우리의 모든 인생관이 달라질 것이다. 전에는 전혀 알지 못하던 영적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 삶의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거기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조차 믿으려 하지 않고, 또 있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도 영력을 얻지 못해서 그들이 가진 슬픔을 위로받지 못하며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는 것이다.
2. 위로받는 길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길은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그 돌보심에 온전히 내맡기는데 있다. 자기 자신의 무능력함과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완전히 몸 전체로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자만이 그의 위로와 돌보심을 받을 수 있다. 이사야에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두가지 비유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목자의 비유이다. 사 40:11절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다른 비유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젖먹이는 어머니로 하나님의 위로를 나타내고 있다. 사 66:11절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이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린 양들이 목자를 신뢰하듯, 젖먹이가 어머니를 완전히 의지하듯,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품에 완전히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목자를 따르는 양의 순진성, 어머니 품에 안겨 티없이 웃으며 만족하게 젖을 빠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완전하신 보호에 전적으로 나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진정 아름다운 위로와 평안을 얻을 것이다. 사 66:13-14절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순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 똑똑한 체 한다. 자기가 약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았다가도 완전히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종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직도 무엇인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이 곧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위로하려고 해도 위로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 대해서는 기다리신다. 그가 온전히 기진하여 자기의 무능을 철저하게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저하게 애통하는 자라야 복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하였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무능과 약함을 인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하시어 구원하시며 위로하신다. 시편 다른 곳에 보면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스올에 까지 내려갔다는 말은 철저한 절망을 뜻한다. 생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도우심을 온전히 간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알고 간구하자 하나님은 이 사람을 구원하시고 위로하셨다. 시 30: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우리가 위로받고 구원얻고자 할 때, 우리는 철저하게 낮아지고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 가졌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무엇인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고후 1: 절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는 말씀도 이런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고난당하셨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죽기까지 순종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넘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3. 위로의 전달 경로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될까요? 하나님의 위로는 직접 전달되기보다는 어떤 매개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나는 성서를 통해서요, 다른 하나는 교회를 통해서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이 된다. 시 119:50, 52절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하나님이 말씀에 대한 증거인 이 성서의 말씀이 이미 많은 사람에게 놀라운 위로가 되었고, 새 생명을 얻는 원천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성서 말씀은 하나님의 위로가 전당되는 통로요,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위로가 전달되는 매개체는 교회라고 말씀드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친히 우리의 모든 고난을 감당하심으로 그는 우리를 위로하실 수가 있게 된 분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와 같이 슬픔을 당한 모든 이들을 초청하여 위로하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고후 1:4절에 보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하였다. 교회의 사명은 우리가 위로를 받을 뿐만아니라, 위로 받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려함에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를 먼저 발견한 우리가 교회에 처음 나온 분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여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하여 위로와 평안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일수록 초신자가 발붙이기 어렵고 자기들끼리만 잘믿고 잘살자는 식이다. 위로와 평안을 주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
오늘 교회의 문턱들이 너무 높아서 진정 위로를 받아야 할 장애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꺼린다.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는 위로와 평안을 얻는 곳이다. 교회가 이것을 주지 못할 때, 다른 일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 교회는 위로와 평강을 누구에게나 고루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쳐주시기를 원하며, 우리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주시기를 바란다. (199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