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스타 데이지가 춤추는 청옥산 육백마지기를 가다
뜰 윤창환
*정선 변방치
우리나라 국토의 80% 이상이 산이다.
그러나 막상 여러 지방을 다녀보면 90% 이상이 산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산이 차지하는 면적이 방대하다.
남한보다 북한에 분포해 있는 산이 높고 험하다.
남쪽지방 극히 일부를 빼면 우리는 평생 산과 산 사이에 있는 한정된 공간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 민족을 산의 민족이라고 부르는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우리들이 산을 터전으로 살았지만 자원을 이용하기 급급하다 보니 당대 이를 가꾸고 보존해야 한다는 관념이 부족했다.
여기에 산은 자연적으로 숲이 형성되고 치유된다는 무지와 함께 수많은 외침과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거의 황폐화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난방이나 식생활 연료를 대부분을 산림에서 조달하였기에 1950년과 60년대에 이르러 전국 대부분의 산은 민둥산으로 변했다.
정선 민둥산은 억새를 이용한 관광자원으로 얼굴 표정을 바꾸었지만 나무가 없는 민둥산은 보기에 좋고 나쁘고를 떠나 기후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악성 바이러스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지만 필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치산녹화에 대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투자에 관해 높이 평가한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전국의 산이 울창한 산림으로 바뀐 것은 자연의 치유나 속성이라기보다 정치적 결단이 만든 현격한 물리적 결과물이라는 게 필자 생각이다.
필자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게 1974년 무렵이었다.
당시 강원도 내륙까지 화전이 성행하여 깊고 높은 산 골골마다 화전민이 즐비했다.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웬만한 산지 능선까지 불을 질러 밭을 만들고 잡목이 탄 재를 거름 삼아 옥수수, 콩, 조, 수수 등 식량이 될만한 곡식들을 심어먹었다.
그러나 민둥산의 피해는 심각하여 매년 여름이면 산사태와 함께 엄청난 토사가 하천으로 밀려들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피해를 낳았다.
필자가 나무를 심기 시작할 때 해발 600~800의 산지는 큰 나무 한 그루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반반해서 나무를 심을 때 논에 줄을 치고 모내기를 하듯 나무를 심을 정도였다.
산을 불태워 밭을 만든 까닭이었다.
50년이 흐른 지금, 그때 심은 나무가 거목으로 자란 모습을 바라보면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것 같다.
그때와 180도로 달라진 삼림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봄날 따스한 양지에 앉아 한 자락 꿈을 꾼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나무를 심었지만 태양과 바람, 흙과 물이 끈질긴 시간과 타협하며 키워낸 장대한 나무들의 도열은 언제 불러도 그리운 어머니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원 얘기를 하려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다.
1,200m가 넘는 고원에 백옥 같은 꽃들이 가득하게 피어나 고혹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을 반기는 곳이 있다.
그곳의 풍경과 닮아있는 이름을 가진 청옥산( 靑玉山 )이다.
청옥산은 강옥의 하나인 사파이어가 많이 나서 이름이 붙여진 게 아니라 청옥이라는 산나물이 많이 나서 그리 불렸다고 한다.
우리에게 600마지기로 알려진 청옥산은 강원도 평창군과 미탄면 회동리, 지동리와 정선군 정선읍에 걸쳐있는 산으로 높이 1250m에 이른다.
주변으로 1000m가 넘는 고산들( 고적대(1,354m)·망지봉(1,210m)·중봉산(1,284m)·두타산(1,353m) 이 즐비하다.
산의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이렇게 썼지만 시험을 보기 위해 산 높이를 외우고, 어디 어디에 무슨 산이 있는가를 알려면 인터넷을 뒤지면 되기에 여기서 숫자놀음을 할 필요는 없겠다.
말 그대로 고원은 높은 산 위에 있는 비교적 평평하고 넓은 땅을 말한다.
북한의 개마고원이나 울릉도의 나리분지처럼 험준한 산맥 사이에 형성된 평평한 산지는 동식물은 물론 인간에게 유리한 삶의 터전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근간의 일이지 한국의 고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곳이었다.
그 단적인 예가 대관령이다.
1960년대만 해도 대관령은 1년 중 반 가까이 눈으로 덮여있는 설국이었다.
강릉으로 넘어가는 횡계 지역은 지금은 천지개벽을 하여 국민 관광지가 되었지만 당시로만 본다면 이런 세상이 오리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바람과 눈과 잡목이 우거진 고원의 환경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기껏해야 고랭지 채소나 가축을 기르던, 땅 한 평 가격이 수백 원에 머물던 대관령은 고랭지채소와 감자 등의 농사와 목축업이 시작되고 동계올림픽을 치르면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라선다.
우리가 팔자를 고친다는 농담을 하는데 그야말로 대관령은 팔자를 고친 것에 머물지 않고 얼굴 전체를 성형하여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쥐구멍에 볕 들날이 있다는 말은 이런데 써먹어야 한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땅은 목장으로 개발이 되어 축산물은 물론 관광자원으로 그 역할이 바뀌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자 전원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근간에 부는 웰빙바람을 타고 전국의 유명 관광지나 청랼한 고원을 찾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교통 인프라가 획기적으로 바뀌면서 전 같으면 꿈도꾸지 못할 지대를 내 집 드나들 듯 다니게 된 것이다.
혁명이 정치나 산업에만 있는 게 아니라 유배지나 다름없었던 흉악한 산골짝까지 관광 혁명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 아닐까 한다.
그 바탕엔 60년대 치산녹화 10개년 사업이 큰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정옥산은 그리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경사가 급하고 구비가 심한 데다 청옥산 정상부위의 고원까지 거리가 상당하여 자동차로 오르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평창에서 미탄으로 나가다 보면 청옥산으로 들러서는 입구에 회동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회동리 새터길로 우회전하면 청옥산길이 나오는데 좌회전하여 9.5km를 30분 정도 굽이굽이 오르면 비포장 도로가 끝나고 좌측 방향으로 비포장 신작로가 나온다.
울퉁불퉁한 신작로를 오르노라면 수많은 자동차 행렬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흙먼지바람이 부는 바람에 이곳이 해발 1200미터 고원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인적이 거의 없었던 이곳이 관광화 되면서 겪는 실로 엄청난 시련이었다.
산이 높고 험준하여 찾는 이 많지 않았지만 포장도로가 놓이면서 전국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산 정상에 위치한 주차장이 꽤 넓은 편이지만 끝 없이 밀려드는 차량들로 주차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산 정상 가까이 오르면 넓고 평평한 농지가 펼쳐진다.
1200m가 넘는 산 높이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버덩의 어느 한 곳을 보는 것 같아서 신비한 느낌이었다.
이 땅에서 고랭지 채소와 약초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한쪽 비닐하우스 안에는 선인장과 꽃이 자라고 있었다.
그 근처에 카페까지 있어서 해가 진 밤에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면 무슨 느낌이 들까 궁금해졌다.
좋게 바라보면 첨단 기기의 혜택으로 전에는 꿈도 못 꾸던 것들에게 손쉽게 다가서서 상상 이상의 행복을 얻는 것이지만 반대로 바라보면 침묵으로 존재하면서 유 무형으로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갈 자연을 못살게 구는 것 같아 계면쩍은 생각이 들었다.
육 백미지기라는 말은 이곳의 땅 크기가 볍씨 육백말을 뿌릴 만큼 넓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땅의 넓이가 육백마지기(한 마지기 200평* 600= 약 12만 평) 정도 된다고 해서 불린다고도 한다.
비슷한 얘기로 600 두락( 斗落 1 두락- 씨 한 말을 뿌릴 수 있는 땅 넓이) 정도가 된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여러 설이 전해지는데 어찌 되었든 산 정상 부위에 이렇게 넓은 평평한 땅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청옥산 고원부 600마지기는 오랜 침식작용으로 생겨 난 고위도 평탄면이다.
태맥산맥에 위치한 오대산, 육백산, 태백산 사이에 한반도가 지각변동으로 높이 솟아오르는 요곡운동을 거친 후 생성된
정상부 평평한 지역이 있는 곳이 많은데 도계의 육백산 청옥산 600마지기, 대관령 정상부근도 여기에 속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청옥산 육백마지기 역시 1960년대 이곳에 정착한 화전민들이 약 60만 m2의 거친 땅을 개간하여 고랭지 채소를 시작한 데서 유래했다.
육백마지기란 이름이 화전민들이나 우리들에 의해 불려지긴 했지만 육백이라는 말이 이미 이곳에 있었던 지명으로 조선시대 금성을 지칭하는 걸로 보아 후대의 사람들이 그 이름을 차용했을 거라는 게 유력하다 하겠다.
이곳에는 잡초 공적비라는 특이한 비가 세워져 있다.
1960년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고원의 거친 땅을 개간했던 당시의 화전민들과 험한 세월을 살아간 민초들을 기리기 위해 익명의 독지가가 자비를 들여 세웠다고 한다.
지나온 이야기는 그렇지만 막상 산 정상부에 오르면 입이 딱 벌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오염된 지역을 벗어나 깨끗한 자연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려는 인간의 욕구가 만들어 낸 풍경들이 아름다우면서도 애틋한 느낌을 받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결코 만만치 않은 꽃밭을 가꾸느라 땀 흘렸을 사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산 정상부에 펼쳐진 하얀 샤스타데이지의 무리가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모습은 가히 천상의 모습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지경이다.
꽃 사이를 오가는 연인이나 친구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국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나만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단일품종의 꽃이 드넓은 곳에 피어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일종의 착시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그 현상이 싫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대상이 자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행복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과 금전을 아끼지 않고 험하고 먼 이곳을 찾아온다.
우리가 감성을 찾아 이렇게 높은 지역까지 찾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가슴에 삶의 갈증이 많다는 얘기다.
꽃길을 걷는 순간, 어떤 이유로도 해결이 되지 않았던 일상의 스트레스가 날아간다면 꽃은 위대한 나이팅게일이자 페스탈로찌다.
꽃길 한 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걷는 속도에 따라 다르지만 가까운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담소하며 천천히 걸으면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지형은 걷기에 크게 무리가 없지만 돌이 많아 주의해야 하므로 운동화 등의 간편하고 무겁지 않은 신발을 신고 가는 게 좋다.
샤스타데이지는 꽃 색감이 맑고 화려하여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국화과의 다년생(여러해살이) 식물로 1890년대 미국의 원예가이자 식물학자인 루서 버뱅크(Luther Burbank)라는 사람이 여러 종의 데이지를 교배해 만들었다. 샤스타데이지란 이름은 미국 캘리포니아 북쪽에 있는 샤스타 산(Mt. Shasta)에서 딴 것이라 한다.
샤스타 산은 만년설이 있는 화산으로 늘 눈이 쌓여있어 흰 산(White Mountain)이란 별명이 있다. 샤스타데이지의 깨끗한 흰색 꽃잎이 눈을 연상시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봄에서 초여름에 이르기까지 피어나는 샤스타데이지는 고원의 맑은 바람과 높은 기온차로 인해 꽃색이 곱고 청아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봄이 무르익는 5월과 여름이 시작되는 6월에 청옥산 육백마지기로 떠나보자.
삶의 찌꺼기들이 껌딱지처럼 눌어붙어 머리가 개운하지 않은 날
훌쩍 떠나간 청옥산 고원에서 만난 경이로운 풍경 한 자락에 불편한 내 심신을 얹어보는 일도 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잔잔한 동기부여가 되리라 확신한다.
*찾아가는 길
주소
강원특별 자치도 평창군 미탄면 회동리 산 50-1
서울-청옥산 약 198km 2시간 50~3시간 10분 소요
서울--중부 고속도로-- 광주 원주 고속도로--영동 고속도로--평창--미탄--회동리--청옥산길-- 약 10km 산길 25분 정도 이동-- 청옥산 육백마지기 주차장 도착-- 바로 옆과 아래 꽃밭이 펼쳐짐
청일문학 기자 윤창환
yun-0323@hanmail.net
|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