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카페의 모든 게시물은 복사ㆍ절취(캡쳐 포함)ㆍ이동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게시물의 내용은 필자의 판단에 따라 언제라도 수정ㆍ보완ㆍ변경ㆍ삭제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일러두기: 이 시리즈는 반남박씨 족보(세보)와 씨족사(氏族史)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글의 내용과 관련하여 의문이 있으면 언제라도 아래 댓글을 이용하시기 바라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성심을 다해 답변할 것을 약속합니다.
반남박씨 씨족 이야기 2
본관 명칭 이야기
반남박씨의 본관은 물론 '반남(潘南)'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역사 문헌 자료를 열람해 보면 '나주(羅州)'로 되어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조선 태종 12년(1412년) 12월 13일 실록 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번역문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의 본향(本鄕)을 나주(羅州)로 내려 주었다. 박은은 본래 나주 임내(任內) 반남현(潘南縣) 사람인데, 이제 예(例)에 따라 임내(任內)를 혁파(革罷)하여 나주에 합치었으므로, 이같은 명이 있었으니 박은의 청을 따름이었다. 뒤에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 봉(封)하였다.(賜潘城君朴訔鄕羅州。 訔, 本羅州任內潘南縣人。 今例革任內, 合于羅州, 故有是命, 從訔之請也。 後改封錦川君。)>
박은(朴訔: 1370~1422)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계축호구의 호주 박수(朴秀)의 장남 박상충(朴尙衷:1332~1375)의 외아들로 조선 건국 초기 태종 이방원(李芳遠: 재위 1401~1418)을 도와 조선의 문물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태종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에 책훈(策勳)되었고 본관의 이름을 딴 반남군(潘南君)의 봉호(封號)를 받았으며 뒤에 반성군(潘城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반성(潘城)'은 '반남(潘南)'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위의 실록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반남현이 폐지되어 나주(羅州)에 합쳐짐으로써 반남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종은 박은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본관명을 '나주'로 내려 준 것이다. 그리하여 박은의 본관은 '반남(潘南)'에서 '나주(羅州)'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반성군이라는 봉호도 금천군(錦川君)으로 바뀌었다. '금천(錦川)'은 나주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나주는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이었는데 통일신라 신문왕 6년(686년)에 통의군(通義郡)으로, 경덕왕 16년(757년)에 다시 금성군(錦城郡)으로 개칭되었다(나주에는 금성산(錦城山)이 있음). 그 후 고려 때 나주목(羅州牧)이 설치되었으나 금성(錦城)ㆍ금천(錦川) 등 옛 이름도 함께 사용되었다.
위에서 간략히 살펴 본 바와 같이, 태종 12년 이후 박은과 그 후손들은 본관을 '나주(羅州)'로 쓰게 되었으며 간혹 '금성(錦城)'이라는 별칭(別稱)이 쓰인 경우도 발견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원래 나주목(羅州牧) 임내(任內)에는 주읍(主邑=나주목)의 나주박씨, 반남현의 반남박씨, 압해현(押海縣)의 압해박씨, 복룡현(伏龍縣)의 복룡박씨, 종남현(從南縣)(=종의현從義縣)의 종의박씨, 임성부곡(任城部曲)의 임성박씨 등 본관이 서로 다른 6개의 박씨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 와서 나주목의 임내가 혁파되어 속현들이 없어지자 본관명이 서로 다른 6개의 박씨들이 함께 '나주'를 본관명으로 사용하게 되는 혼란이 예상될 수 있었다. 이러한 혼란을 우려하여 숙종 9년(1683년) 제2차 족보(세보)인 계해보(癸亥譜)를 간행하면서 본관명을 '나주'에서 다시 '반남'으로 환원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반남의 나주박씨가 아닌 다른 지역의 나주박씨들은 족세(族勢)가 미미하여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나주박씨' 인물들은 대부분 '반남박씨'라고 보면 된다. 반남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간혹 반성(潘城)ㆍ반천(潘川)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반양(潘陽)으로 표기된 예도 발견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반남박씨 4세(世) 밀직공 박수(朴秀)의 계축호구(1373년)에 박수의 본관(=관적ㆍ관향)은 반남(潘南)으로 표기되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 태종 12년(1412년) 반남현이 폐현(廢縣) 되면서 6세(世) 박은(朴訔)의 청에 의해 태종으로부터 본관을 '나주(羅州)'로 내려 받았다. 나주라는 본관명은 그 후 270여 년 동안 사용되다가 숙종 9년(1683년) 성관(姓貫)들 사이의 혼동을 방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시 본관명을 '반남'으로 환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그 이후에도 '나주'라는 본관명을 사용한 예가 많이 발견된다. 간혹 '나주'는 '금성'ㆍ'금천' 등으로, '반남'은 '반양'ㆍ'반성'ㆍ'반천' 등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참고로, 2015년 대한민국 인구통계(통계청)에 보면, 본관명이 금산, 금성, 금천, 반계, 반람, 반암, 반양, 반원, 반주, 반지, 발남, 발랑, 발림, 번남, 번암, 번양 등이 보이는데, 이 중에는 반남박씨가 혼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특히 금성박씨가 3,872명, 번남박씨가 4,651명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은 반남박씨일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추기: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예: 박상충, 박은)에 대해서는 뒤에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鶴山
첨부자료1: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12월 13일 갑자 3번째기사. 반성군 박은의 본향을 '羅州'로 정해 주다
첨부자료2: 계해보(1683년) 범례. 본관을 '羅州'에서 '潘南'으로 환원.
<이 카페의 모든 게시물은 복사ㆍ절취(캡쳐 포함)ㆍ이동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게시물의 내용은 필자의 판단에 따라 언제라도 수정ㆍ보완ㆍ변경ㆍ삭제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