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서後序
道德經上下二篇, 余於己丑年, 因郊居無事, 爲之註解. 自是七八年間, 奔馳東西, 不復知. 有此書, 久矣. 及丁酉冬, 以事塩州, 搜檢箱篋中, 復得此書. 盖吾兒浩修, 爲余, 謫中消適之資, 而內此書也. 於是蚤夜手披, 又見其所未見, 聞其所未聞, 則胸中之言, 日益多遂. 就前日所註解, 吡者正之, 踈者補之, 晦者明之, 名曰道德經解有疑.
(이) 『도덕경道德經』 상上·하下 두 편은 내가 1769년 한양 밖에 살며 나랏일을 맡아보지 않을 때 (처음) 풀이했던 책이다. (그러나 내가) 그로부터 7~8년 동안 (나랏일을 맡아) 동서東西로 바삐 뛰어다니느라, 다시 (이 책을) 살펴보지 못했다. (처음) 이 책을 풀이한 지가 (그만큼) 오래 되었다. 그러다 1777년 겨울 (내가 귀양을 가야 할) 일이 생겨 염주(塩州; 지금의 황해남도 연안군 연안읍延安邑)에서 지낼 때, (한양 집에서 붙여온) 보따리를 풀어보고 바구니를 열어보다가, 다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아마, 나의 (큰) 아들 호수(徐浩修; 1736~1799)가 나를 위해 유배 중의 적적함을 달랠 거리로 삼으라고 이 책을 넣어 보냈던 것 같다. 그 날부터 밤낮으로 책장을 넘겼는데, 따라서 (처음 이 책을 풀이할 때에는) 보지 못하던 바를 보게 되었고, 듣지 못하던 바를 듣게 되었으며, 따라서 가슴 속의 말言이 날마다 더해지고 많아지는 데 이르게 되었다. 이제, 앞날의 풀이가 (아름답지 못하게 거침없이) 나무랐던 바를 바로잡고, 빠뜨렸던 바를 채워 넣고, 흐릿했던 바를 또렷하게 했는데, (지금 따라서 앞날에 이름 지어 붙였던 『도덕지귀道德指歸』를 다시) 이름 지어 붙여, 『도덕경해유의道德經解有疑』라 일컫는다.
余謫中註此書, 或如韓文公之貶潮州, 惑太顚云爾, 夫豈其然乎! 余見前輩號稱醇儒者, 如宋之涑水司馬氏, 元之臨川吳氏, 我東之栗谷李氏, 皆註解老子. 至於康節邵子龜山楊子晦庵朱子, 皆儒門正脉, 以衛道作爲己任. 而其於老子之言, 若不容口, 又何也! 儒者之學, 本欲當於理合於天而已. 苟其言當於理合於天也, 則雖媜孺之言, 猶且取之, 况老子乎!
내가 귀양 중에 이 책을 풀이한 일이 이른바 마치 (중국 당唐나라 때 유학자儒學者였던) 한유(韓愈, 768~824)가 (자사刺史로 좌천左遷되어) 조주(潮州; 지금의 광저우성廣東省 차오저우시趙州市)에 유배되었을 때, (승려였던) 태전(太顚和尙, 731~824)이 자신에게 설명한 선종禪宗에 미혹되었던 일처럼 보이겠지만, 이른바 어찌 내 실상이 그러하겠는가! 내가 살피건대 (유학儒學의 집안에) 앞서 들어선 사람들이 유학儒學에 (아주) 오롯했던 사람들이라 이름 붙여져 일컬어지지만, 예컨대 (중국) 송宋나라 때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 원元나라 때의 오징(吳澄, 1249~1333), 우리나라 조선 때의 이이(李珥, 1536~1584)는 모두 (유학儒學의 집안에 앞서 들어선 사람들이지만) 『도덕경』을 풀이했다. 나아가, (중국 송宋나라 때의) 소옹(邵雍, 1011~1077), (정자程顥의 제자) 양시(楊時, 1053~1135), 주자(朱熹, 1130~1200)는 모두 (노자가 가르친 바와 관계한 사람들이지만, 비유컨대) 유학儒學 집안의 원가지가 되었는데, (모두 불교와 도교의 위세가 날마다 새로워지고 달마다 두터워지던 당시에 유학儒學의) 도(道; 仁·義)를 지키고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노자가 가르친 바에 대해 마음으로 품거나 입으로 일컬은 바가 없었다고 한다면, 또한 어찌 (그것이 실상에 맞겠는가)! (이른바) 유학자儒學者는 리(理; 仁·義)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근본으로 삼고, 하늘(天; 理)과 (더불어) 아우러지는 바를 일삼고자 하는 사람일 따름이다. 따라서 그 말言이 리理와 (더불어) 어우러지고, 하늘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라면, 이른바 아녀자나 어린아이의 말言일지라도 이른바 따라서 그것을 취해야 한다. 하물며, 노자(의 말)임에야!
余之氣質多暴露少含蓄. 其於處世亦以尙口. 屢憎於人. 幾陷顚躓者數矣. 自縕理此書, 多有省悟. 欲自今兼取其冲虛謙下之道, 以資於養生處世之方.
(비유컨대) 나는 (밖으로) 거칠게 적시는 바를 많게 하는 일에 (일부러 일삼아) 기운(氣; 몸)을 쓰고, (안으로) 머금어 쌓아두는 바를 적게 하는 일에 (일부러 일삼아) 마음(心; 質)을 쓴다. 나는 처세를 또한 따라서 (그러한) 입으로써 한다. (비유컨대,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의 씨앗을 (자주) 뿌린다. (비유컨대,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의 빠뜨려지고 넘어뜨려지며 자빠뜨려지는 바가 자주 있다. (따라서 나는 지금) 스스로 이 책을 채우고 다듬는데, (내가 써 온 기운과 마음의 모습을 스스로 지금) 살피고 (내가 모자랐던 바나 미치지 못했던 바를 지금 스스로) 깨닫는 바를 가짐이 많아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른바, 나는 지금 스스로 이 책을 풀이함으로써) 스스로 지금 (노자가 가르친) 그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비고 텅 빈 도(道; 自然·命·德)와 (상대를) 존중하여 (자신의 위로 높이고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의) 아래가 되게 하는 도(道; 無爲·性·德)를 더불어 취하고자 하며, (그것들을 나의) 양생법養生法과 처세술의 근본으로 삼고자 한다.
夫攘人之物, 而逐其人, 尙謂之盜. 况心知其美, 取補吾身, 而斥之絶之, 諱之秘之, 使不在門墻! 如楊墨申韓釋佛之類乎! 非仁也, 非禮也. 非仁非也, 君子不居矣.
이른바, 다른 사람의 물건을 (자기 마음대로) 덜어내는 사람,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물건을 덜어냈던) 그 (다른) 사람을 쫓아내는 사람, 이른바 그러한 사람을 일컬어 도둑이라 한다. 하물며, (비유컨대) 그 (자신의) 마음이 (그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美; 自然·無爲)을 알아차려서, (그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몸에 취하고 (자신의 마음에) 더했으면서, 그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끊어내며, 꺼리고, 피한 채, (그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집안의) 대문이나 담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함에야! (그 자신의 마음이 그 다른 사람의 물건을 아름답게 알아차리지 않아서, 그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그 자신의 몸에 취하거나 마음에 더하지 않는) 양주(楊朱, BC.440~360), 묵적(墨翟, BC.470~391), 신불해(申不害, BC.385~337), 한비자(韓非子, BC.281~233), 석가모니(釋迦牟尼, BC.560~480) 등과 같이 여김에야! (이른바, 노자를 대하는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의 모습은 비유컨대 도둑의 모습인데, 따라서 그것은 유학儒學이 근본으로 삼는) 인仁에 맞지 않으며, 예禮에 맞지 않는다. (이른바,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가 노자를 대하는 모습은 유학儒學이 근본으로 삼는) 인仁에도 맞지 않고, 예禮에도 맞지 않는데, (따라서 인仁과 예禮를 근본으로 삼는 유학儒學의 양생법과 처세술을 일삼고자 하는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가 머무를 바가 아니다.
蒙宥還家. 令吾兒浩修繕寫一通. 欲於桑楡暮境, 作爲絃韋之佩, 而復爲之序.
(나라에 죄罪를 지어 목에 찼던 칼의) 비녀장이 빠지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유배 중에 풀이했던 것을) 나의 (큰) 아들 호수(徐浩修; 1736~1799)에게 한 권으로 베껴 쓰게 했다. (내 삶의 해가) 뽕나무와 느릅나무에 걸리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지금, 명주실로 엮고, 가죽끈으로 묶어, 책으로 내고자, (앞날의) 서문을 다시 썼다.
歲丁酉 南至月 上澣 達城徐 命膺書
1777년 음력 11월 초 달성 서씨 명응이 쓰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