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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비 외 4편 (시) 김윤자』
안개비
김윤자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보이지 않기에 모른 척
외면하였습니다.
자동차 문을 힘주어 닫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분명 뒤에 두고 왔는데
어느새 저만치 앞서 가 있습니다.
끝내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차창에 한줌 눈물로 다가와 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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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돌이 그리움
김윤자
한동안 너와 함께 지냈던
시간들로 인해 행복했다.
짧지만 그래도 긴 시간들, 일 년 육 개월
산에 가면 네가 따라오는 것 같아
뒤돌아 보아도, 먼 앞을 보아도 지금은 없는데
네가 눈에 어려 보이는 듯하다.
나무 숲, 너와 머물던 자리
떼어놓고 갈까봐 엉덩이 잘래잘래 흔들며
두 발이 공중에 뜬듯 쫓아오던 모습
맨발 벗은 발바닥으로 아픔도 참고
산을 한 바퀴씩 돌았지
사람들은 널 신기한 듯 바라보지만
넌 우리 가족만 알아보고 쫓아왔지
베란다, 네가 머문 그 자리
때론 지저분한 녀석이라고
오빠들 한테 구박을 받아도
마냥 사람의 손끝을 좋아하던 너
사랑 받기를 좋아하던 너
어느 날 큰 오빠 방에서
밤 늦도록 시간을 보냈지
큰 함지박 안에 둥지를 틀고
그때 기분이 좋았던지 실례를 했지
아빠의 손에 들려 네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
집안 어느 구석 네 숨결 없는 곳이 없다.
거실, 소파, 주방까지
넌 전생에 양반집 규수
아니 그보다 더 지체 높은 왕족
그러기에 먹는 것보다도 좋아하던 몸 단장
깨끗이 목욕하고 온몸을 정갈하게 다듬던 모습
네 마음에 들 때까지
해 지는 줄 모르고 깃털 털고, 고르고
배고픔도 참고
긴 목을 빼어 꽁무니까지 함함이 다듬던 모습
그리고나서야 넌 먹이를 먹었지
그런데 넌 겁쟁이
베란다에서 함께 살던 개구리가
네 목욕통에 들어오면
넌 놀라서 펄쩍 뛰어 나와 달아났지
이 바보야, 왜 네가 도망가
네 영역에 침범한 개구리를 쫓아 내보내야지
손바닥만한 큰 개구리의 몸체가 무서워서가 아니고
그건 개구리에 대한 너의 사랑이었지
1997년 추석날
그날을 우린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아침에 큰 오빠가 베란다에 탁구공인지, 뭔지
이상한 것이 있다고 식구들을 다 깨웠지
너의 분신을 처음 출산하던 날
우린 경사 났다고 환호성을 터트렸지
그리고 널 더욱 사랑했고
넌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의 식탁에 기쁨을 주었지
꼭 아침이면 생산하던
감자 크기만한 하얀 분신, 오리알
오돌아! 어디 있니? 시골집에 잘 있니?
인간도 나이들어 돌아갈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듯이
너도 나이들어 시골 흙밭으로 보냈는데
생사를 알 수 없구나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운명, 아파트라는 공동주택에서
네가 머무르는 동안 힘들었던 세월
이젠 모두 잊고 네 고향 흙에서 잘 살길 빈다.
네 이름 석 자 오돌이, 늘 그리움이 맴돈다.
화분에 둥지 틀던 모습, 일 저질러 놓고
혼이 날까봐 도망가던 모습
옷자락 덮어 품어주면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어 안기던 모습
널 우리 집 막내 아이마냥 키웠는데, 아가였는데
지금쯤은 할미가 되었겠지?
잘 지내, 오돌아 안녕
* 1999년 5월 29일 토요일 쓰다
오돌이는 1년 6개월 동안 가족으로 함께 지낸 오리의 애칭이다.
아파트에서의 생활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아 시골 농장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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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와 피아노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
김윤자
1.꾸륵이
고향은 시골 들녘이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동물을 사랑하는 어린 아들의 손에 안겨 왔다.
야생의 옷을 벗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사람과 함께 산다.
연못과 풀숲을 만들어 주었지만
삭막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강산도 변한다는 긴 세월을 살아주니 고맙다
우리는 그를 꾸륵이라 부른다.
예쁜 개구리의 애칭이다.
2.아가
꾸륵이는 아가다.
종(種)이 다른데도 막둥이 마냥 귀엽다.
우리 가족은 아침에 눈뜨면 꾸륵이를 찾는다.
안 보이는 날이면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밤새도록 혼자 놀다가 늦잠 자는 아가
풀숲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는 줄도 모르고
숨바꼭질을 잘 하여 여기저기 숨어 놀라게 한다.
뜀뛰기도 잘 하여 고추장 항아리 망 위에 올라앉는다.
빠지면 위험하다고 타일러 내려놓아도 자꾸 올라간다.
3.예쁜짓
문만 열면 들어와 예쁜짓을 한다.
어느 날 저녁 사람도, 바람도 아닌 것이
문을 툭툭 치는 소리에 나가보니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노크했다.
문이 열려 있는데도 선뜻 들어오지 않고
마치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는 것처럼
하루는 학교에 간 아이 방에 숨어들어
책꽂이 위에 앉아 윙크했다.
승낙없이 들어와 미안하다는 듯
4.일기예보
날이 궂음을 잘 맞춘다.
저녁에 울면 다음 날 아침에 비가 오고
아침에 울면 그날 저녁나절 비가 온다.
하늘이 아무리 맑게 개여 있어도
꾸륵이의 울음은 비를 몰고 온다.
'꾸르륵, 꾸르륵' 울 때, 우리는 우산을 챙긴다.
5.기적
어느 해 무더운 여름날
집수리 할 때 베란다에 가구를 내어놓느라
꾸륵이의 집을 망가뜨린 적이 있다.
연못과 화분을 다 치워 발붙일 곳 없이
손바닥만한 그릇에 물 한 모금 떠다 놓았을 뿐
일주일 후 가구를 들일 때 겁이 났다.
말라 죽은 모습이 보일 것 같아서
아, 그런데 가구 사이에서 툭 튀어 나왔다.
먹이도 없거니와 피부호흡으로 몸이 마르면 안 되는데
어떻게 일주일을 견뎠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다.
6.피아노
피아노를 치면 꾸륵이는 노래를 부른다
피아노 음정이 높아지면 따라서 높아지고
피아노 가락이 빨라지면 따라서 빨라진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하나 되어 합창을 한다.
피아노를 그치면 꾸륵이도 노래를 멈춘다.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다른 소리에는 아무 대꾸도 없는데
피아노 소리에는 반응을 한다.
그래서 피아노 위에 앉으면 행복하다.
아름다운 선율에 꾸륵이의 노래를 실으니 더욱 좋다.
7.봄의 전령사
추워지면 흙 속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잔다.
화분을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다칠까봐, 하지만 꾸륵이가 나오는 날을 안다.
경칩이 지나고 이삼 일 후면 나온다.
꾸륵이가 나오면 경사가 난듯 좋다.
한동안 보지 못 했음에
바싹 마르고 핏기 없는 모습이지만
어김없이 희망을 실어 오는 봄의 전령사다.
8.사랑
우리 가족은 정말 꾸륵이를 사랑한다.
이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이
손에 품어 안아주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체온이 흘러 사랑으로 퍼진다.
누군가 그랬지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꾸륵이는 우리에게 길들여지고
우리는 꾸륵이에게 길들여져 있다.
9.인연
사람 나이로 치면 백사십 살쯤 된다.
개구리의 평균 수명이 오 년이라는데
그보다 배, 십 년을 살고 있으니
사람의 평균 수명을 칠십 살 정도로 보면
그 배인 백사십 살쯤 된 것이 아닌가
전생에 인간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가보다.
그러기에 사람의 집에서 저리도 오래 살지
10.바람
걱정이다. 꾸륵이가 너무 늙어서
손으로 잡을 수 없을 만큼 크던 몸집이
왜소해져 뼈만 앙상하게 튀어 나왔다.
커다란 두 눈만 껌벅이며 시름에 잠기곤 한다.
오래도록 함께 살고 싶다.
내년 봄에도 꾸륵이가 나와야 할 텐데
꾸륵아 알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도 좋아하던 피아노 더 많이 쳐 줄게
이 간절한 우리의 바람을 잊지말고
화분 속 새싹 곁에서 목청 가다듬고 꼭 나오렴
* 1999년 11월 25일 목요일 쓰다
꾸륵이는 10년 동안 가족으로 함께 지낸 개구리의 애칭이다.
해마다 경칩 무렵이면 화분에서 나왔는데, 2000년 봄에는 나오지 않았다.
겨울잠과 함께 고이 영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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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나무
김윤자
낯선 집에 와서 잘도 사는구나
삼 년 전 밑동 잘린 알몸으로 화단에 나둥굴던
널 데려와 화분에 꽂았는데 키가 훤칠하다.
내가 네게 해준 것이라고는
말라죽지 않을 만큼의 양식
물을 준 것 밖에는 없는데
낯선 터에 뿌리를 쉽게도 내리는구나
몇 달은 비틀거리더니 금새 털고 일어나
밝고 명랑한 얼굴로 생기가 돈다.
내가 네게 해준 것이라고는
몸살기 가실 만큼의 약
영양제 한 병 놓아준 것 밖에는 없는데
낯선 형제를 잘도 보살피는구나
지난 해 너와 똑같은 처지로 길가에 나와 있는
동생을 데려다 네 곁에 놓아주니 사랑으로 보듬는다.
내가 네게 해준 것이라고는
좁은 화분에 둘이 사는 것이 안쓰러워
따스한 눈길로 바라본 것 밖에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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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충이 그리고 돈벌레, 詩충이 그리고 詩人
김윤자
아침 식탁에서 내가 말했다.
엄마는 아침마다 세 남자를 위해 운전하니
이 집의 운전사다.
한 달 월급이 오륙십만 원은 되겠지?
그것만으로도 엄마는 이 집에서
그냥 먹고 살아도 된다. 그렇지?
그럼 너희들은 이 집의 무엇이냐?
두 아이가 내 예상을 뒤엎는 대답을 했다.
작은 아이:나는 이 집의 食충이야
큰 아이:나도 이 집의 食충이야
우리 집의 보물덩이로 여기는 두 아들이
식충이라고 자처하니 기가 막혀서 껄껄 웃었다.
식충이1, 식충이2, 라고 손가락질을 하며
잠시 후 작은 아이가 말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돈벌레로 탈바꿈 할 거야
큰 아이도 마찬가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종일 생각해 보았다.
두 아이의 말을 되새기며 나를 다시 해석해 보니
내가 이 집의 운전사라는 말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나는 이 집의 詩충이야
잠시 후 또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중에는 詩人으로 탈바꿈 할 거야
* 1999년 10월 11일 월요일 쓰다.
결국 나는 2000년 8월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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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자 약력
충남보령 출생,옥계초등,대천여중,공주사대부고,공주교대 졸업
조선문학 2000년 등단,국제펜한국본부이사 역임,한국문인협회위원 역임,
한국시인협회,서울서초문인협회,충남문인협회,보령문인협회출향문인,세계여성문학관 회원
시집8권:「푸른 새벽 서정」,「알래스카 빙하 소야곡」외
황희문학상,한국은유문학상,작가와문학상,충남문학작품상,충남문학대상,서초문학상,가온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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