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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는 전치사이고, 레쉬트는 명사입니다. 그래서 문법에서 전치사+명사는 전치사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시간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보면 태초에가 되는것이고, 장소로 보면 레쉬트가 머리, 첫열매, 시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 머리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첫 열매안에서,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레쉬트는 왕이 통치를 시작하는 원년도 레쉬트입니다. 그러니까 베레쉬트를 단순히 태초에라고 번역을 해버리면 성경에서 말할려고 하는 베레쉬트의 의미하고는 많이 벗어나게 되는겁니다.
그러니까 시간의 시작을 의미한다면 이 시작도 어떠한 시작을 말하느냐면 하나님께서 직접 무엇인가 통치하는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알지 못하는 까마득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시작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가시죠?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 시작 되어지는 시점을 “베레쉬트”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베레쉬트가 어떤 단어하고 연결되어서 사용되어지고 있느냐를 볼 필요가 있죠?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단어가 “빠라” “창조했다”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럼 베레쉬트가 장소이고 시작이니까 거기에서 창조가 되었다는것입니다. 무엇이? 뭐가 창조되었나요? 엘로힘?
여기에서 보면 바라는 동사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주어는 항상 동사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라라는 동사의 주어를 찾아보니까 3인칭 단수가 등장하는데 1장 1절에서 3인칭 단수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라 다음에 나오는 엘로힘은 “복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가 될수 없습니다. (( 게제니우스의 장엄한 복수 )) 그러니까 단순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라고 말해버리면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를 모르고 시작합니다. 성경에 의도대로 해석을 하자면, 그가 그리스도라는 머리를 둔 성전안에서 하나님을 창조하셨다. (( 요10:32 ))이렇게 번역하는게 맞는 번역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을 하면 하나님이라는 전능자가 졸지에 피조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창조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이 창조라는 단어가지고 많은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무에서 유의 창조라고 귀에 베이도록 들어왔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성경을 자세히 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창세기 1장에 물을 창조하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창조하기 전에 물이 벌써 존재해 있습니다. 흑암도 그렇구요! 하나님이 물을 창조했다는 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라라는 단어와 연관되어있는 성경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바라라고 하는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조하다, 나무를 찍어내다(안좋은의미), 선택하다, 먹이다, 뚱뚱하게 하다, 살찌다. 라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라의 의미가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지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상황을 보면 단순히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것보다는 이 단어의 의미들을 한번 살펴보고갈께요!! 자, 뚱뚱하고, 살찌는 것 좋은것인가요? 안 좋은가요? 성경에서 살찌는것은 미련한거하고 관련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르고 자기의 부유만을 생각할때 뚱뚱하다고 합니다.
[신31:20]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신32:15]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이렇게 살찌고 뚱뚱해졌는데 그냥 두면 되나요? 어떻게 해야하나요? 찍어내야합니다. 그냥 두면 안됩니다. 반드시 찍어내야 합니다.. 찍어버리면 끝나나요? 다시 심습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다음에 등장하는 바라는 21절에 등장합니다. 여기에서는 “큰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 1장 1절과 원문으로 비교 )) 그 다음에는 27절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27절에는 세번 사용되었는데 한글성경은 2번만 번역하고 한번은 번역안했습니다. 첫번째는 사람을 창조하고, 두번째는 그 사람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그들을 창조했다 이렇게 세번 바라가 사용되었습니다. 세번창조했다는 말이 아니고 똑같은 의미을 풀어서 설명해놓은것 뿐입니다.
그런데 21절의 창조와 27저의 창조가 완성되면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 데 바로 “복”이라는 단어입니다. “바라크” 그러니까 이렇게 창조되는것들이 복이 되는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반드시 바라= 창조되어야만 복이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는 사람들이 할수있는 창조가 아닙니다.
창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그러니까 바라=창조가 되면 그것이 복이 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로 연관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면 창조가 뭐길래 복과 연결이 되는것일까요?
출 3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행하지” 이 단어가 빠라입니다. 행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요? 이적입니다. 그 이적이 무엇인가요? 온 땅 아무 국민과 언약을 세우지 않았는데 이제 그 이적을 백성 앞에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과 언약을 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언약은 어떤 언약인가요? 백성들과 처음 세운 언약입니다. 아직 어떤 나라의 백성과는 행하지 않는 언약이쟎아요? 그럼 이 언약을 1장 1절에 등장하는 베레쉬트와 연결지을수 있죠? 왜? 시작이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친히 언약을 맺는것입니다. 언약을 맺기전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언약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하고 맺은것이지 백성들하고 직접 맺은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직접 언약을 맺는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는 “이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적이라고 하는 것이 죽은 자가 살아나고? 암이 떠나가고, 소경이 눈을 뜨고 이런 거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 아직까지 세상에 한번도 행해지지 않는 일을 하시는 것이 빠라입니다. 이것을 창조라고 이야기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보이지 않는 그 분이 백성들과 언약을 맺는다? 이것은 믿어지는게 아닙니다.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억지로 믿는게 믿음은 더욱 더 아니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그 언약으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에 바라가 등장합니다. 그럼 이것이 복이 되겠죠?
수 17: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이미 있는 나무를 찍어내고 새로운 사람의 터전을 만들라는 의미이다. 이것도 빠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그 땅에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것이 창조입니다.
삼상 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찌게 하느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가장 좋은것으로 그들이 살쪄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고기 잘먹고 음식 잘먹어서 살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고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좋아하는 방법으로 제사를 지내는 상태를 가리켜서 마음이 살찐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냥 두나요? 이것을 찍어버립니다. 이것이 빠라이고, 창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나요? 새역사를 시작합니다. 누구를 시작하나요? 사무엘을 시작합니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빠라)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중심사이에 확고하게 세우는 영(말)으로 다시 새것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꼐서 내 안에, 우리 안에 어떤 마음이죠? 정한 마음!! 정하다는 이 단어가 “타호르” 깨끗한, 순결한, 흠이없는 흠이 없다는것은 하나님께 드려질수 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영이 등장하나요? 정직한 영!! 정직이라는 이 단어가 “쿤”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똑바로 세우다, 확고하게 세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하도쉬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새것이 되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질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질수 있는 마음이 되도록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창조해주시고, 확고하게 세우는 말로 다시 새것이 되게 해달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하나님께 정한 제물로 드려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문장에서 다시 새것이 되게 하소서라는 말이 앞부분의 어떤 말과 연결이 되나요? 창조하시고 라는 문장과 연결돼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창조는 드려질수 없는 마음이 하나님이께 깨끗하게 드려질 수 있는 새것이 되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죽이고 다시 만드나요? 아니죠? 내 몸은 그냥있는데 내 속의 있는 영과 마음을 새것으로 바꾸시는 겁니다. 이것이 새 창조입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땅입니다. 이것을 누구만 할수 있나요? 하나님만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빠라”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시 102:18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여기에서는 창조함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그러니까 창조함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찬양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빠라가 된, 창조가 된 사람들의 찬양을 받을까요? 그들의 마음은 정직한 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 미 새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찬양할려면 창조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거 아닙니다. 그들이 가난하냐? 부자냐? 남자냐? 여자냐? 기타로 하냐? 수금으로하냐? 잘하냐? 못하냐? 피아노로 하냐? 성악으로 하냐? 풍금으로하냐? 이런거 상관없어요! 하나님은 그 사람의 속!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창조되었는가? 이것으로 찬양을 받는것입니다. 뽕짝이면 어떠고, 트로트면 어때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명백해지다, 빛을 밝히다. ) 하려 함이니라 (기록하다)
열린예배라고 말씀의 내용은 없고 자신들의 감정에 취해서 찬양 몇시간동안 부르면서 스스로 위로받으면서 열린예배? 열리긴 뭐가 열려?.. 봉투열리죠!!
시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그러니까 창조는 누구에 의해 창조되나요? 주의 영에 의해 창조되는것이고, 새롭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반드시 새창조를 이루어내는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지면이라는 단어가 아다마입니다. 여기서 아다마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땅을 말하지않고, 흙의 먼지로 지어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을 다시 새롭게 하는것입니다. 누가요? 주의 영을 보내셔서....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호와께서 누구를 창조하시나요? 야곱을 창조합니다.이스라엘은 어떻게 하시나요? 지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라는 한 사람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되어 이김이 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 이미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되는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시나요?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이가.. 여기서 “지으신”이라는 단어가 “야차르= 손으로 빗다. 토기장이”의 뜻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첫째는 두려워하지않는것입니다. 둘째는 구속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기업무를자라는 뜻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상속자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이말은 지명이라는 단어가 “쉠”입니다. 쉡은 무슨 뜻이죠? 이름,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것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 부분을 다신 번역을 하자면,
“ 이 때에 이와같이 야곱을 창조하신 그리고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너는 두려워하지말라 왜냐하면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는 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말씀 안에서 불렀기때문이다”
그러니까 빠라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것으로 만들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의 뜻 “ 하나님과 하나되어 이김이 되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연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말하면 뭐합니까? 내가 새 창조가 안되면 아무 의미가 없는데... 그러니까 창조는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분이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만드신것 인정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자연세계의 창조를 증명할려고 창세기 1장을 기록한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43장 7절을 보겠습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불려지나요? 내 이름은 누구의 이름일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라는것을 인정하시나요? 지금의 교회가 이것을 인정을 못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말하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고, 못할것없는 능력있는 초자연적인 하나님 말하는것 아니잖아요!! 그쵸? 우리는 어디까지 인정하나요? 하나님의 자녀까지만 인정합니다. 아니, 자녀가 크면 뭐가 되나요?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잖아요!! 강아지가 크면 개가 되잖아요? 강아지하고 개하고 뭐가 달라요? 크기차이입니다. 시간지나면 자연스럽게 큰 개가 되는것입니다. 망아지는 크면 뭐가 되나요? 말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크면 뭐돼요? 하나님! 겉에 외뫼이야기하는거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하고 하나도 안닮았다고 자녀아닌가요? 유전자 검사해보세요.. 100% 일치라고 나옵니다. 근데 하나님 된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수용을 못합니다. 아니, 구원받았다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는거죠? 그러면 생명으로 사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생명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그런가요? 그런거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이름으로 불려지면 그것이 뭐가 되나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었고 (야차르-손으로 빚다) 그리고 만들었다.(아사-안에 되게만들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빠라 – 야차르 – 아사 3개의 동사가 등장하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빠라는 어디에서 창조되나요? 반드시 베레쉬트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성전안에서 창조되는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베레쉬트안에서 우리를 손작업으로 빚어가는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성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베레쉬트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수없는것입니다.
사 43: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내가 하나님으로 부터 창조가 되면 하나님은 나에 뭐가 되는거죠? 왕이 되는것입니다. 그때 나는 그의 백성이 되는것이고 그분이 나를 통치하는 왕이 되는것입니다.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요? 거룩한 분입니다. 거룩이 뭔가요? 하나님의 거룩은 우리에게 곧 멸망입니다.
이사야에서 빠라, 창조의 의미에 결정적인 구절이 등장합니다.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천 지를 창조했다고 하면 여기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합니다. 그럼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는 지금 이 말씀에 기록되어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염두해 두고 창조하신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전것이 지나가면 새하늘과 새땅이 오는것입니다.
렘 31: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이것이 창조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시는 새 일입니다. 결혼시켜준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닙니다. 여자는 누구인가요? 교회입니다. 신부입니다. 남자는 누구인가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둘이 하나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요? 여자가 남자를 안는것입니다. 둘러싸리라 이 의미는 영접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새일입니다. 이 말씀이 신약성경 전부를 통틀어서 하나의 말씀구절로 묶어버린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있는 목적 사랑 구속 약속. 언약 다 빠라안에 담겨져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하겠다는것입니까? 엘로힘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엘로힘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엘로힘이 일을 하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