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그리스.암스델탐 여행기 2006.5.8~5.16
사삼여동회 회원가족 25명이 멀리 터키와 그리스로 역사문화탐방 여행을 다녀 왔다. 덤으로 마지막 귀국날 네델란드의 암스델탐을 여행스케쥴에 하루를 추가하여 어느 여행보다 알찬 여행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 일정이 타이트하여 환갑,진갑을 다 지난 나이에는 좀 무리여서 고생을 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니 그 어느 한곳도 빼서는 안되는 명승지와 유적지였다. 특히 마지막 암스텔담 여정은 여성들에게 큰 인기였다.
먼저 다녀온 여행지를 간략히 소개하면~ 네델란드항공편을 이용하여 인천에서 5월8일 오후2시에 출발, 비행10시간만에 암스델탐에 도착,3시간 대기후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3시간 비행)하니 밤 12시.- 시차 계산 6시간.
1일차: 인천-암스델탐-아테네 도착 2일차: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파르테논신전,아쿠디스음악당,뷸레의 문,니케(나이키)신전,에렉티온신전, 아크로폴리스 박물관,근대올림픽 경기장,포세이돈신전.대통령궁,산티그마광장 수니온곶(발칸반도의 끝)방문 땅끝에 서다. 국회의사당,아카데미대학,고고학도서관 3일차: 섬 애기나 크루즈 피레오스항구, 애기나섬쿠루즈,버스관광(2시간)페스타치오농장(비스타쵸,아몬드),기원전 6세기 사람살던 마을,아페아 신전,살라미스해협과 섬,산타마리아 성당,아디오스니콜라우스 성당(아기오스낵더디오스 신부의 오른손 이 은관 속에) 자피온공원,까뫼보석가게,국회의사당,석식후 낙조구경,선상파티후 취침 4일차: 그리스 히오스섬도착 조식후 출발,터키 체스메도착 에베소로 이동,에베소유적지 관광-아르테메스신전, 셀수스도서관,원형극장, 파묵깔레 도착-히에라폴리스 족욕,면공장방문,호텔 온천욕 5일차: 갑바도키아행-핫산산,에르지에르산조망,지하동굴도시 갑바도키아 데린구유 지하동굴,괴레메 스몰 그랜 드캐년- 6일차: 이스탄불행-소금호수, 마르마르해,누루오스마니에거리,그랜드바자르(남대문시장),발리댄스 구경 7일차: 보스포러스해협 크루즈,히퍼드럼 블루모스크,아야소피아성당,톱카피궁정, 8일차: 네델란드 암스델타행-코스타 다이아몬드전시장,잔세스칸스 풍차마을,담 광장,운하 탑승관광,공항도착 인천행 9일차: 인천도착 해산
1.그리스 유적관광/2일차(5월9일)
<아크로폴리스> 아테네의 첫 관광이 시작되었다. 박일환사장이 가이드를 맡는다고 한다. 박사장은 52세의 연만한 나이로 이곳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리스 뿐만아니라 터키까지 관장하는 현지관광회사 사장이시다.아는 것도 워낙 많고 말솜씨도 있어서 아주 편안했다.아크로폴리스는 높은 도시국가라는 뜻이란다.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미끄러지기 쉬워서 주의를 주었다. 아크로폴리스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시대에서 각 도시의 심장부에 해당한다. 아테네시의 아크로폴리스가 매우 유명해져서 지금은 파르테논신전이 그 위에 서있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거의 고유명사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위의 파르테논신전, 그 조형건축물을 보려고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스를 방문할 것이다. 파르테논신전은 찬란한 고대 그리스 건축예술물의 백미라 아니할 수 없다. 3단의 기단위에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늘어서있는 동서 8개 기둥 남북 17개 기둥으로 건축물을 떠받히고 있는 직사각형 클로네이드 열주(列柱)들은 지금도 매우 인상적이다. 19세기 서구제국주의 외세에 꿇려 그 건축물 몸체 일부가 해체당하여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코펜하겐 박물관에 팔려나가 만신창이된 파르테논 신전 이지만, 오늘도 전세계 관광객들이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위 파르테논 신전을 찾는 것이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위 파르테논 신전은 BC 438년에 완성되었는데, 그 신전 안에는 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아테나 여신상이 안치되었다. 여신상뿐만 아니라, 파르테논신전 자체가 고도의 건축학적 조형미, 조각기법, 대칭미등이 어우러져 그 종교적 위엄과 예술적 아름다움이 보는 사람들의 심혼을 흔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 여기에 있다. 바로 디자인 싸움에 이기려면 이 신전을 연구하는 것이 첩경이라고--세계3대 건축물의 하나이다. 피라밑,파르테논신전,앞으로 방문할 터키의 아야소피아성당이 바로 3대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아쿠디스음악당 이데로스아쿠디스온데온극장 아쿠디스음악당이다.6,000명을 수용하고 금토요일만 공연을 한다. 파파로치가 고별공연을 하였고, 우리 조수미와 도밍고가 합동공연을 하여 유명하다. 카라얀도 이곳에서 공연을 하였다.
니이케(나이키)신전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승리의 신 니케를 모시는 신전. BC420년경에 건축가 칼리크라테스(Kallikrates)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오니아 양식이다. 이 신전 역시 1686년 터키에 의해 분해되어 입구에 거대한 대포가 놓여져 있었다. 1836년~1842년 사이에 복원되었다. 1936년에 플랫폼이 다시 붕괴되어 재복원하였다. 현재도 복원공사 중이다.
에렉티온신전 파르테논신전 북쪽에 세워진 이오니아 양식의 작은 신전. 파르테논신전이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념물이긴 하나 그것은 신전이라기보다는 전시기념물에 가까웁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신전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이 에렉티온신전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곳에 세워졌으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의 삼지창을 내던져 꽂힌 곳이 이곳이며, 지혜의 신 아테나가 올리브나무를 심은 곳이 이곳이다. 따라서 이 신전에는 이들 신들의 전설을 본뜬 조각상들이 있다.이 신전은 아테네의 신화상의 왕인 에릭토니우스(Erichthonius)의 이름을 따 붙인 신전이다. 따라서 아테나, 포세이돈, 에릭토니우스를 제사지내왔다. 2개의 신실(神室)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아테나신실, 또하나는 포세이돈신실이다. 이 신전은 아름다운 여인상기둥(女像柱)들로 유명하다. 원래 이 신전은 페리클레스가 아크로폴리스를 위하여 설립 계획을 꾸몄으나 펠레폰네소스전쟁으로 그의 생전에 이룩되지 못하고, 그가 죽은지 8년 후인 BC421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BC406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박물관 아크로폴리스 동남쪽에 있는 박물관으로 전시품은 19세기 발굴 당시에 출토된 유물이 중심을 이룬다.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된 옛 신전을 장식하고 있던 조각 종류가 많다.
올림픽 스타디움 1896년 제1회 국제올림픽경기가 열렸던 경기장. 신타그마광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원래는 일리소스(Ilissos)강을 끼고 아그라(Agra)계곡과 아르데토스(Ardettos)계곡 사이에 자연스런 홈이 나 있어 이것을 스타디움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BC330~329년에 리코우르고스(Lykourgos)에 의해 '위대한 판 아테나 축제(Great Panathinaea Festivities)'의 운동 경기를 위한 스타디움으로 변형되었다. 그후 AD140~144년 사이에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에 의해 스타디움이 복원되었는데, 이것이 1870년에 발굴된 현재의 모습이다. 즉 길이 204.07m, 넓이 33.35m의 말발굽모양 구조이다. 약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로마시대에는 스타디움이 투기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는 19세기 말엽에 애버로프(G.Averof)에 의해 스타디움이 복원되었는데, 1896년에 부활된 최초의 올림픽게임이 여기에서 개최되었다.
리카베루스 언덕 아테네의 두 언덕 중 아크로폴리스와 달리 정상이 가파른 언덕. 높이 295m. 리카베투스는 '늑대들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고대로부터 이 언덕은 지방민으로 둘러싸여 있고 소나무로 뒤덮인 비탈에는 늑대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 언덕에 오르면 아테네 시 전경이 내려다 보인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로우키아노우(Loukianou)의 꼭대기에서 오르는 소로가 있고 또 플로우타르호우(Ploutarhou)의 꼭대기에서 케이블카로 오를 수가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카페가 있으며 정상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또한 정상에는 아기오스 요르고스(Chapel of Agios Giorgios)라는 그리스정교회가 있다. 정상의 남동쪽에 야외극장 리카베투스극장(Lykavittos Theatre)이 있다.
발칸반도 땅끝 수니온 오후에는 발칸반도의 땅끝인 수니온을 찾았다. 수니온으로 가는 길은 지중해응 옆에 끼고 해변가를 달리는 최고의 드라이브길이다. 너무나 아름다워 버스 내에서 연신 카메라샷다를 눌러댄다. 5월의 뭉게구름과 옥색의 바닷빛이 어우러져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하다.유럽을 관통하는 핀토스산맥이 이곳 수니온에서 멈춘다. 수니온 곶은 발칸반도와 핀토스산맥의 끝으로 모든 배들이 이곳을 통과한다. 등대의 역할을 하는데 바람이 세기로 유명하다.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신전이 있다.드라이브 길에는 유도화가 빨갛게 피어 있다. 오른쪽 서핑장에는 마치 나비가 물위에 떠 있는 착각을 일으킨다. 가이드가 일러주는 산에 핀 둥글둥글한 열매를 단 나무를 보라기에 보았더니 그것이 해초란다. 지진에 의해 바닷속의 해초가 산위에서 자란다고- 산위에 한국인의 별장이 있다기에 모두들 쳐다본다. 담이 쳐 있는 것이 특징이란다.
땅끝인 수니온곶에는 야생화들이 경쟁을 하듯 허드러지게 피어 있다. 땅끝 표시인듯 돌기둥에서 모두들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나라에도 해남 땅끝마을(土末)에 가면 느낌이 이상해진다. 발칸반도의 끝에 서 있다는 느낌이 색다르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아쿠디스 음악당
니이케 신전 에렉티온 신전
올림픽 스타디움
2. 에기나섬 크루즈 에기나섬 (AEGINA ΑΙΓΙΝΑ) 오늘일정은 아침 7시에 호텔을 떠나 피레오스항구로 간다. 9시의 에기나행 페리를 타기 위해서다. 피레오스항구는 그리스 아테네 제2의 항구이다. 가는 도중에 고린도로 가는 진입고속도로가 보인다. 여기서 89km를 가면 고린도가 나온단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으로 유적지가 많다. 인류최초의 운하도 이곳 에 있다. 루마니아,불가리아 소피아로 가는 고속도로이며, 터키로 가는 고속도로이기도 하다. 그리스는 세계선박의 42%를 점하는 세계선박강국이며, 선박물류산업이 발달해 있다. 관광산업은 그 다음 이다. 가는 길이 아침이지만 트래픽이 심하다. 집시들이 장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에기나섬은 면적(87평방m)이 울릉도와 비슷하다. 피레오스항구에서 30km정도 떨어져 있다. 에기나 섬은 고대에 독립된 도시 국가로 한때 아테네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을 정도로 그 세력이 막강했다. 성질이 급하고 과격하고 아테네 사람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은 에기나를 칭해서 '피레우스의 방해물'이라고 한다. 에기나의 민예품은 수준이 높다.특히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물 항아리 등의 도자기 가 유명하다. 또한 아테네의 거리 모퉁이에서 땅콩류를 파는 노점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피스타쵸는 이 섬의 특산물이기도 하다.
에기나섬 투어는 버스투어(두시간)로 옵션이었다. 30유로를 내고 에기나 섬을 골고루 볼수 있는 기회가 주 어졌다. 먼저 비스타쵸를 재배하는 농장을 구경하였다. 비스타쵸와 아몬드나무가 열매를 맺고 있다. 가을에 수확을 한다고 한다. 버스로 조금 이동하여 에기나섬 해변가 최고의 관광명소인 에기나마리나로 안내되었 다. 아름다운 해변의 풍경이 그림같다. 이곳은 기념촬영하는 곳이란다. 모두 몇사람씩 무리지어 사진 찍기에 바빴다. 아기나마리나 Agina Marina 는 에기나 섬 제일의 리조트 지역이다.신전에서 아기나 마리나 만을 바라보는 경관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아페아신전 다음 찾은 곳은 아페아신전. 그리스 3대신전 중의 하나인 '아페아신전'은 도리아식의 아름다운 신전이다. 에기나 시에서 북동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 기원전 6세기 말~5세기 초에 걸쳐서 세워졌다. 아르카이크 시대 후기의 신전 중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물의 하나라고 한다. 32개의 돌기둥 중에 지금은 24개가 남아 있다. 이들 기둥은 에기나 섬에서 생산된 석회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대부분이 하나로 된 바위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주목거리이다. 이런 하나의 바위로 돌기둥을 만드는 방법은 아르카이크 시대의 특색이기도 했다.
아기우스넥다리우스(산타마리아)성당 아페아신전 관광을 마치고 나애심의 노래로 유명한 산타마리아 성당을 찾았다. 이 성당은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성당의 축소판이라고들 할만큼 아름다운 성당이다. 비잔틱형식으로 건축된 돔형태의 걸작품이다. 그 유명한 '아기오스넥다리우스'의 오른손이 든 은관을 볼수 있다. 은관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아픈 곳을 낫게 해준다고 - 신자들은 물론 모두 은관에 손을 얹고 눈을 지그시 감고 아픈곳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아기우스넥다리우스 성당은 1968년에 세워진 그리 오래된 성당은 아니나 아픈사람에게 안수의 기적이 있다 해서 그리스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성당중 하나다. 이 곳에 있던 넥다리우스 성인은 죽기 직전 한 신도가 찾아와 죽음을 준비하여 기도를 부탁하였을때 그 신도의 아픈 부위에 신부가 오른손을 놓고 간절함과 정성의 기도를 올려 주었다. 예기치도 않게 그 신도는 아픔을 치유받게 되었고 이소문은 빠른 시간내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넥다리우스 신부를 찾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넥다리우스 신부는 많은 아픈 사람들을 위해 그의 오른손을 아픈 부위에 놓고 기도를 해주었다 한다. 신부는 죽으면서 자신의 오른손을 아픈 사람들을 위해 놓고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그의 오른손은 오늘날에도 성당에 안치 되 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성당이 지어 졌고 그는 성인의 대열에 오르게 된다.
에기나섬에서 현지식으로 중식을 마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식당 주변은 바로 시장으로 연결되었다. 시장과 어물시장에서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모처럼 한가로운 산책을 하였다. 가게에서 빨갛게 잘 익은 체리를 사먹기도 하고, 잡화상점에서 기념품으로 선물준비를 하는 회원도 있었다. 짙푸른 물결이 찰랑이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항구에서 그물을 메만지는 어부의 모습도 보이고, 갈매기가 유유히 바다를 나르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아디오스니클라우스성당 에기나섬 항구쪽에 깃발을 펄럭이며 서 있는 흰색의 작은 성당이 단연 시선을 끈다. 아디오스니클라우스성당이다. 일명 크리스마스성당이라고 불린다. 에기나섬 관광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배를 타고 귀환했다.벤츠 리무진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새차인데 번호가 마음에 들었다. 요즘 우리의 건배구호인 "9988 234'의 9988 이 반갑기조차 하였다. 아테네시내는 오늘 저녁에 데모시위가 있다고 한다.가이드 박사장은 은근히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다행히 길은 소통이 잘 되었다. 까뫼 보석가게에 들렀다. 여자들에겐 쇼핑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인가 보다. 왜 쇼핑장소로 가느냐고 하면서도 가기만 하면 시간을 어기고 가게에서 나올줄 모른다. 아름다운 보석에 취하는 것일까?
석식을 하러 가는 도중에 가리키는 호텔이 보였다. 오나시스 소유의 그랜드호텔의 웅장한 모습이 압도했다. 이호텔은 오나시스와 제클린의 결혼 피로연장으로 사용하여 더욱 유명하다. 국회의사당과 무명용사의 기념탑 앞에는 수천마리의 비둘기들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다가선다. 어제 먹었던 VIP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 자파스 형제가 기금을 내놓아 만든 자피온공원을 지나고, 폐유리로 멋지게 만들어 세워놓은 조각품이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밤이면 불빛을 받아 휘황찬란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식당의 메뉴는 돼지불고기와 미역국이었다. 에기나섬에 다녀왔다고 애기 낳은거냐? 왠 미역국이냐고들 하면서 즐거워한다. 식사후 페리호를 타고 밤을 세워 터키땅으로 건넌다고 한다.
오후 5시20분에 승선을 하였다. 지중해를 건너 맞은편 그리스땅인 히오스섬을 거쳐, 다시 배를 타고 터키땅인 체시메로 간다. 3만톤급의 대형선박으로 지중해의는 물결이 세지않아 배멀미 걱정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고 멀미약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선승후 방 배정이 문제였다.4인1실이라 두부부씩 배정을 하느냐 남자,여자 구분하여 방배정을 하느냐가 관심이었다. 2층침대방이라 남여 두부부가 같이 잔다는 것도 이상하여 남여구분하여 방배정을 마쳤다. 농담이 진하다. 배위에서 또 배를 타면 위험하니 남여를 띄워놓아야 한다나? 그 중에서도 배상남은 배위의 남자라 더더욱-- 짝이 맞지않아 우리부부는 일행중 결혼30주년 기념으로 여행온 부부와 동거하게 되었다.
방안의 천정에 달린 쿨링장치가 말을 듣지않아 신고를 했더니 엔지니어가 와서 온통 먼지투성이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결국 딴방으로 옮겨야만 했다. 우리만 멀리 떨어져 자게 되었다. 방 이사를 마치고 선상으로 친구들을 찾으러 가니 이미 갑상에서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각자 가져온 소주와 안주, 그리고 배에서 죠니워커 한병을 구해와서 곧 있을 낙조 구경겸 배위에서 파티를 벌인 것이다. 여자들은 과일과 쥬스 맥주를 기울이며 즐거운 수다를 떨고 있었다. 8시가 넘자 하늘이 붉게 물들고 아름다운 낙조가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지중해에서 지는 낙조는 훨씬 아름다운 건 공기 때문일까? 모두들 술에 취한건지 절경에 취한 건지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대희 왕회장은 '가거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를 개작하여 " 가거라 그리스야,다시보자 에게해야-세월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멋드러지게 읊어댄다.
내일 아침은 3시에 기상이란다. 점입가경이라더니- 배위에서 술과 절경에 취한 일행은 내일 3시 기상이라는 말에 전혀 동요되지 않앗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들 자기 방으로 찾아든다. 곤한 탓에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다음 여행이 즐겁다. 2층 침대에서 누우니 파도가 심한지 배의 흔들림이 느껴진다. 파도 부딛치는 소리가 마치 어두운 밤에 비내리는 소리 같다. 몸을 뒤척이며 3~4시간 눈을 붙이고 깨니 모두들 어김없이 다 일어나 있었다.
에기나섬 아페아 신전
아기우스넥다리우스 성당
청과시장
3. 터키 에베소와 파묵깔레 그리스 히오스섬에 새벽 5시에 도착하여 빵으로 간단히 조식을 한후 일출모습을 기다리며, 한가로운 아침 시간을 보냈다. 7시45분에 승선을 하고 8시25분에 출발하였다. 터키 땅인 체시메 항구까지는 50분이 걸린 다. 체시메에 도착하니 터키의 새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윤혜숙-베테랑급이다. 우리일행의 나이나 단체구성에 맞추어 우스개 소리를 해가며 즐거운 가이드 역할을 잘 하는 것 같다. 왼손을 펴면 그것이 바로 터키의 모습이란다. 왼쪽 상단의 끝 부분 3%가 유럽이고 나머지 97%가 동양이다. 한국크기의 7.5배의 큰 국토를 갖고 있으나 국민소득은 낮아 3대도시가 6,000불, 나머지는 4,000불에 불과하다. 1차상품은 자급자족이 되지만 공산품 은 엄청 비싸다.수도는 앙카라이고 제1의 도시는 이스탄불이다. 터키는 평균 770m의 고지대로 갑바도끼아는 1,200m에 위치한다. 종교는 99%가 이슬람이다. 터키여행은 하루종일 버스를 타야만 관광이 가능하다. 가장 먼저 찾을 명소는 에베소이다. 에베소 에게해를 끼고 내지로 버스는 한없이 달린다. 좌측에 에게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면서 싱그러운 아침여행이 시작되었다.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는 빨간 유도화가 제철을 만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오른쪽 초지에는 한가로이 양떼들이 나타나고,젓소도 보인다. 야산에는 오렌지나무와 올리브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새빨간 야생 양귀비들이 특별히 시선을 끈다. 복숭아,살구나무도 많이 보인다.
에베소(efes:에페스)는 터키에서 가장 큰 고대 도시였던 곳으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는 관광명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기원전 1,100년경 아테네의 왕자 안드로클레스가 델피 신전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여인들이 다스리는 아마존 토착민들을 추방하고 처음으로 에베소를 건설하였다고 하는데, 로마제국 당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몬에서 에베소로 옮겨 오게 됨에 따라 많은 건축물이 조성되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그 이후 기원전 33년경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이곳에 와서 체류한 다음 더욱 번창 하여 당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상업, 종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인구 25만명이 되는 ‘아시아 최대의 도시'라는 명예를 누렸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에페소는 로마 시대 세 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로마 제국 아시아 지역의 수도였던 셈으로 지금 남아 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헬레니즘 시대의 것으로 에게 문명과 이오니아 문명이 혼합된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도시 곳곳에 유적품으로 남아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처녀와 정절,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인 아르테미스를 모시기 위해 에페수스 사람들이 범국민적으로 건설한 신전으로 기원전 6세기 중엽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 때 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120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지금은 오직 기둥 하나만 남아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여신 헤스타의 성화가 항상 불을 밝히고 있었다는 폴리타네이온과 온데온(음악당)과 바리우스 목욕탕, 헤라클레스의 문과 메비우스의 비가 있는 크레타의 거리를 걸어가면서 한없는 신비감에 젖어든다.
크레타의 거리는 돌바닥이며 거리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유적지는 도심가의 주요도로망에 따라 발달한 그 시대의 생활상을 볼 수 있었다. 트리아누스 신전과 하이드라누스 신전, 공중화장실은 귀족들의 공중화장실로서 노예들은 귀족들이 볼일을 보기전에 자신의 신체로 돌바닥을 데워 따뜻하게 했다니.... 그 곳을 돌자 셀수스 도서관이 보인다. 장서 2만권을 보관했다는 셀수스 도서관은 통풍을 위해 2중 벽 구조를 했으며 도서관 앞에 있는 4개의 여신상은 이 도시의 도서관 즉 교육문화 여건을 느낄수 있게 한다.
도서관 앞의 창관은 공부에 지친 남성들이 잠시 휴식을 즐겼을 창녀촌 거리로 거리 바닥에 돌로 새겨진 이 그림인 일종의 창녀촌 포스터는 최초의 광고용 포스터가 아닐까? 여자그림과 남성의 발 그리고 작은 동전크기의 홈- 예쁜여자들이 있으니 돈이 있으면 우리에게 걸어오라는 의미라나? 또는 이만한 발이 되야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자격조건이 된다나? 우측 하단의 사각은 현대의 카드로도 된다는 광고일까? 의회를 열었던 원형글장과, 셀수스 도서관, 귀족들의 집터, 야외 원형극장 등과 헤라클레스의 문, 승리의 여신인 나이키 조각도 만날 수 있다. 에페소에는 귀족을 위한 공동화장실도 있고, 공동 목욕탕(찜질방), 여전히 세계적 아티스트들의 콘서트가 자주 열린다는 원형극장, 사열이라도 하듯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있는 크레타거리, 이오니아식과 코린토양식인 기둥장식으로 가득한 유적들, 야외시장(아고라) 등 에페소가 그 당시 얼마나 번창했던 고대 도시국가였는지를 알수 있다.
파묵깔레 에게해 연안의 최대항구 이즈미르에서 남동쪽 350km를 가면 데니즐리라는 평화로운 휴양도시가 있다. 이곳에서 다시 22km 떨어진 곳에 그 유명한 목화의 성으로 불리는 파묵깔레가 자리하고 있다. Cotton castle(목화의 성)이라는 뜻의 터어키어인 파묵칼레는 자연이 빚어낸 예술품이다. 멀리서 보면 목화 뭉텅이로 덮인 산 같기도 하고 눈덮인 산 같기도 하지만, 실은 수천년에 걸친 산화칼슘 성분의 온천수가 흘러내려 만들어진 노천 온천탕이다. 온천수에 표면이 둥글게 깎여 마치 솜덩이 처럼 보 인다. 바위색갈은 크림색이고 온천수가 든 탕은 연한 녹색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중국의 구채구를 연상 케 한다. 마치 어린애마냥 일행들은 바지를 걷어올리고 걸어나간다. 소위 걸으면서 족욕을 한다. 사진찍기 에 여념이 없다. 좀처럼 보기 힘든 아름다운 광경에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저 아래쪽에 옥색 담(潭)이 시선 을 끌어 당긴다.
파묵깔레는 이 목화솜 같은 온천만 있는게 아니다. 로마시대의 유적지 히에라폴리스가 있다. 기원전 190년경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2세가 건립한 것으로 수십세기 동안 폐허가 되었으나 그 유적 만으로도 그 옛날의 번성했던 시대를 가늠할 수 있다. 페르가몬 왕국의 실질적 창건자인 텔레포스의 아내 히에라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이곳 유적은 히에라폴 리스라 불렸다. 유적지 입구에는 봉분형,석관형,가옥형 등 다양한 형태의 고대무덤을 볼 수 있다. 15,000명 을 수용했다는 원형극장은 계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족욕과 유적지를 둘러보고 인근 호텔에 묵게 되었다. 호텔 창을 통해 내다본 파묵깔레는 마치 스키장에 온듯한 착각을 일 으키기에 충분했다. 호텔에서 석식을 하고 호텔내에 있는 온천탕에서 온천욕을 하러 갔다 수영복을 가져오라 하여 모두들 옛날 입었던 수영복을 들고 오긴 했지만 어쩐지 어색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온천수처럼 데운 물이 아니라서 미지근한 게 감기가 걸릴까 겁이 났다. 피로를 푸려다가 감기나 걸리지 않을까 싶어 금방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석양에 물든 이곳의 절경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저녁식사는 뷔페인데 나물비빔밥으로 모두들 요령껏 입맛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더블침대방을 배정 받은 이대희 왕회장은 내일 다시 에기나 섬으로 가서 미역국 먹는 거 아니냐며 좋아한다. 이대원 왕총무는 창문에 이상이 있다고 이사를 갔다. 그런데 방에 침대가 더블에 튄 2개 모두 3개나 되는 특실을 배정받아 싱글벙글거리며 집들이를 해야겠다고- 내일은 지하동굴도시인 갑바도키아를 간다. 내일도 새벽 별보기 운동을 해야하나 보다.
파묵깔레
에베소 원형극장
4. 갑바도키아/앙카라 강행군은 계속되었다. 좀 봐준다고 30분 늦추어 3시반 기상이란다. 5시에는 출발해야 오늘의 목적지 갑바도키아와 앙카라까지 관광을 마칠수 있다. 버스에서 잠을 보충하는 수밖에 없다. 짧은 일정에 늦잠을 자면 차만 싫컷 타고 정작 볼 것은 보지 못한다. 이번 버스의 기사는 이슬람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 까탈스럽다. 지저분한 것은 보지 못하는 성격이다. 버스 안은 물론 바깥도 쉬는 틈만 있으면 청소를 한다. 아예 음식은 버스내에서 먹지 못하게 한다. 50분 가량 가니 큰 호수가 나온다. 미네랄이 많다고 소개한다. 그래서 여기서 식용소다를 채취한다고-
산에는 나무가 없고 대리석만 많은가 보다. 그래도 가장 많은 나무는 체리나무이다. 왼쪽에 집시들의 집단 텐트촌도 보인다. 광활한 평야는 모두 밀밭이란다. 사탕수수밭도 있고 자연 설탕공장도 있게 마련이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젓소도 보이고 양떼도 무리를 지어 있다. 양가죽제품도 많이 생산된다고 한다.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2시간 간격으로 휴게소에 들린다. 터키는 공중화장실이 없고 휴게소 화장실도 유료이다. 인심이 고약하다. 터키돈으로 50ykr인데 늘 집단으로 용무를 마치고 공동비용으로 지불했다.
궁금해서 물어 보았더니 여기서는 유명한 현자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우상 같은 인물이란다. "호자"선생이라고-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대동강 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의 얘기와 유사한 전설의 사나이다. 자동차앞이나 가게문, 나무가지에까지 달고 있는 부적 같은 것이 있어 물었더니 역시 부적의 일종인데 어디든 이것이 안달린데가 없다.0시가 좀 넘자 터키 제6의 도시인 콘야를 지나고 있었다. 콘야(KONYA)는 지금 건축붐이 한창인 것 같다.
도로 주변에는 야생화가 만발해 있고 양쪽에 밀,보리밭이 계속된다. 야생화 중에서도 우리나라에도 많은 엉겅키를 알아보고 반색을 한다. 엉겅키는 안약의 재료가 된다하여 재배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2만년전 바다이었던 곳인데 뭍으로 바뀐 것이란다. 콘야는 셀쥭트루크의 수도였다. 그 당시에는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도 전성기를 맞아 찬란한 꽃을 피웠다고 한다. 징키스칸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지만 콘야는 이슬람 세력이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곳이다. 실크로드를 다니는 대상들에게 세금만 받고 3일간 이곳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말도 먹고 쉬게 하여 이 도시가 크게 번창할 수 있었다 하니 그 당시의 마케팅을 엿볼 수 있다.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당시 셀쥭트루크의 수도로 번성했던 옛 유적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 옥색의 호수를 감상할 수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색갈이 선명하다. 그래서 이름도 오부즈칸(깊은 호수라는 뜻)이라 부른다고- 셀쥭트루크가 징키스칸에 멸망하고 그 후 부족국가들이 형성되었고 그 중에서 오스만이 부족국가를 통일하여 유명한 오스만터키를 건국하게 된 것이다.
<갑바도키아> 버섯바위 악사라이,니데,내브쉐이르 등 아나톨리아 도시들의 경계지점은 옛날부터 갑바도키아라 불리었다. 독특한 지질형태와 수많은 유적들은 이곳을 방문한 모든 여행객들을 놀라게 한다. 수많은 형태의 기이한 바위들이 한없이 펼쳐진다. 버섯바위,낙타바위,성모마리아상 바위,아이스크림바위 등이 연속으로 시선을 끌어들인다. 단연 버섯바위가 대표적이다. 갑바도키아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는 버섯바위는 수백만년에 걸쳐 지속되어온 지질현상의 결과로 만들어졌다. 높이가 40m에 달하는 것도 있으며, 형태는 원추형이고 꼭대기에 현무암 모자를 쓰고 있다
작은 그랜드캐년 마치 미국 서부 그랜드캐년에 온 느낌이다.엄청난 규모의 절벽을 깎아지른듯한 수십미터의 절벽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수백만년의 지질변화에 의한 것이라는데 장관을 이룬다. 지하동굴도시 데린쿠유/동굴집 괴레메 갑바도키아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여전히 발견되고 있는 지하도시들이다. 이 지역의 수많은 지하도시 중에서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막클러와 데린쿠유에 있는 지하도시이다. 지하동굴도시에서 20만명이 거주하고 2000채가 넘는 집이 있었다 한다. 공동우물도 있었고 교회도 있었다는 안내판이 이 지하도시의 생활모습을 가늠하게 한다. 지하동굴은 오렌지와 레몬의 저장고로도 훌륭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랍인들은 수없이 이 지역을 침입했지만, 한번도 정복하지 못했고, 후에 기독교인들이 이 지하도시들은 박해를 피하는 은둔처로써 임시적으로 사용하였다. 좁은 터널과 맷돌문,환기시스템 등 너무나 완벽한 건축기술을 보여주어 관광객들을 놀라게 한다. 데린구유의 지하도시는 18~20층으로 추정되며 갑바도키아의 부드러운 응회암에 40m깊이로 세워졌다.
괴레메는 고대에는 마찬이라 불리웠고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곳의 하나이다. 이 지역의 가장 인상깊은 정착지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괴레메 마을이다. 화산지형과 역사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동굴집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살고 있거나 또는 그 암석집을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괴레메마을은 동굴 거주지 뿐만 아니라 동굴식당과 호텔이 있어서 방문객들에게 새로운 기쁨을 준다.
갑바도키아에는 카펫과 도자기가 유명하다. 그리고 열기구 관광이 유명하다. 열기구를 타고 내려다보는 경관은 평면관광보다 훨씬 웅장하고 박진감이 날 것이다. 일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일정상 참가할 수가 없었다. 길가에는 노란 벽돌집이 계속된다. 해발 1,200m의 갑바도키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이 노란색 벽돌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특이한 돌로 만들어 진다고-. 푸라타나스 미루나무가 길가의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아이들 성장의 바로미터로 생각한다고 하여 애지중지 한다고 한다. 갑바도키아에서 1박을 한다. 가는 도중 계속 보이는 설산- 하산다(Hasandagi)산은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지상 2,300m에 해발 3,300m이다. 두개의 봉우리가 있는 이 산은 일년 내내 흰눈으로 덮여 있어 갑바도키아를 찾는 손님들을 장엄함으로 반긴다.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르지예스산(3,917m)이며,카이세리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히타이트인들이 백색의 산이라고 불렀던 이 화산의 정상은 항상 눈으로 덮여 있다.
아랍인들은 수없이 이 지역을 침입했지만, 한번도 정복하지 못했고, 후에 기독교인들이 이 지하도시들은 박해를 피하는 은둔처로써 임시적으로 사용하였다. 좁은 터널과 맷돌문,환기시스템 등 너무나 완벽한 건축기술을 보여주어 관광객들을 놀라게 한다. 데린구유의 지하도시는 18~20층으로 추정되며 갑바도키아의 부드러운 응회암에 40m깊이로 세워졌다.
숙소인 갑바도키아의 호텔은 경치도 좋지만 시설도 괜찮았다. 수학여행을 왔는지 어린애들의 재잘거림이 귀엽다. 신기한듯 우리를 보고 인사를 한다. 성격이 쾌활하고 사교적이다. 사진찍기를 좋아한다. 식사후 우리 일행은 달빛이 휘영청 밝은 정원에서 가든파티를 하기로 했다. 남자 대부분이 정원으로 모여들었다. 미리 준비한 위스키와 안주거리를 들고 나왔다. 만리타향 먼 이국 터키 땅에서 밤하늘에 뜬 보름달 아래 우정의 술잔을 기울인다. 날씨도 선선하여 상쾌한 기분 더 말할 수 없이 좋다.
내일은 이 나라 수도인 앙카라의 한국공원에 들러 육이오전쟁시 터키군 전몰 참전용사들 묘소를 참배할 예정이다. 그리고 바로 이스탄불로 가서 터키 제1의 도시의 관광을 시작할 것이다. 역사와 관광의 도시 이스탄불 관광을 앞두고 새로운 기대속에 가슴이 설렌다.
행정수도 앙카라를 가다. 오늘은 앙카라를 거쳐 이스탄불로 입성하는 날이다. 워낙 장거리라 역시 잠을 줄였다. 12시간 이상을 달려야 한다. 벤츠 버스이고 기사가 워낙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닦아주어 버스가 문제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1시간 이상을 달리는데 석유냄사가 계속 나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냄새가 많이 난다는 말이 기폭제가 되어 버스 윗창문을 열기도 하며 공기순환을 하려 했으나,헛수고였다. 결국 휴게소까지 가서 점검을 제대로 하기로. 근 한시간반 이상을 휴게소에서 기다려야 했다. 정비공장으로 버스는 떠나고-- 소금호수를 가까이 가서 보려 했으나 시간관계상 드라이브를 하면서 지나갔다. 사해(死海)다음으로 큰 이 호수는 둘레가 1,600km나 된다. 소금호수를 옆으로 끼고 한없이 달린다. 밀밭과 초지, 그리고 이름 모를 노란 야생화가 들판의 색갈을 노랑으로 물들여 놓았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더니 비와 해가 번갈아 가며 임무교대를 한다.
앙카라 한국공원 앙카라의 옛 이름은 Angora. 터키 북서부에 있는 터키의 수도이자 앙카라 주의 주도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터키의 민족주의 지도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곳을 오스만 술탄 정부와 그리스 침략군에 저항하는 저항운동의 중심지로 삼고, 1919년에 본부를 설치했다. 1923년 앙카라는 터키의 수도로 공표되었다. 앙카라의 인구는 450만명,인당 국민소득은 6천불. 앙카라에 들어가자 우선 한국공원을 찾았다. 육이오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의 가입국가 중에서 미국과 함께 가장 먼저 참전한 터키군의 전몰용사들에 묵념이라도 드리고 가야 도리이다. 한국공원에는 한국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용사들 이름을 우리말과 터키어로 새겨놓았고, 우리의 다보탑 모양의 기념탑이 하늘 높이 서 있었다. 우리 모두 경건한 감사의 묵념을 드리고 방명록에 기념글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한국공원에서 참배를 마치고 시내에 있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공원을 버스로 투어했다. 전국민의 아버지로 칭송받던 케말 국부가 묻혀있는 공원 둘레를 버스로 돌아보았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란? 본명 Mustafa Kemal. 살로니카 출생. 케말 파샤라고도 한다. 아타튀르크란 ‘터키의 아버지’를 뜻하는데, 1934년에 대국민의회(터키의 국회)에서 증정한 칭호이며, 파샤는 군사령관 ·고급관료에게 보내지는 칭호이다. 청년장교 시절부터 술탄의 전제지배에 반대하여 지방의 혁명단체에 가입, 청년 터키당의 진보적인 개혁주의자들과도 교우관계가 있었다. 1911∼1912년의 이탈리아-터키전쟁 때에는 소피아의 주재무관에서 북아프리카의 벵가지 방면으로 전속되어 활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사령관으로서 다르다넬스 해협과 동부국경의 방위를 맡아 공훈을 세웠다.
전후 수도 이스탄불과 마르마라 해변의 이즈미트, 에게해를 면하는 이즈미르 등지가 연합군에게 점령당하자 조국의 구제에 나서, 1919년 5월 흑해 연안의 삼순항에서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8월에는 에르주룸에서 ‘국민의 제권리를 수호하는 동방 제주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이어 시바스에서 민족항전의 협의를 거듭하였다. 이듬해 4월 앙카라에 ‘대국민회의’를 개설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8월 술탄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세브르조약을 강요당하자 민족독립전쟁을 일으켰으며, 1921년 8∼9월에는 앙카라를 향해 진격하는 그리스군을 사카리아 강변에서 격퇴하였다. 그후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서 1922년 11월에 술탄제도를 폐지하고, 이듬해 7월 연합국과의 사이에 새로 로잔조약을 체결하였다. 10월 앙카라를 수도로 정한 공화제를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인민공화당을 창설하여 정당정치를 확립하였다. 재임중 이스탄불에서 죽었다.
앙카라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길은 역시 좋았다. 고개길을 지나고 있다. 높은 곳은 무려 1,580m나 되었다. 중식을 먹은 식당도 해발 960m 지점이란다. 중식은 현지식인 양고기와 케밥이었다. 오후에도 계속 이스탄불을 향해 달린다. 오른쪽 언덕에 현대자동차 Assam공장 광고판이 우리를 반긴다. 오스만터키의 흥망성쇄의 역사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이스탄불이 가까워 오는지 아파트와 주택단지가 계속 보인다. 벽이 붙은 집들이 대부분이다. 집과 집사이의 벽은 하나로 붙이는 것이 경제적인 설계로 통용되는 모양이다. 마르마르해가 보인다. 이스탄불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오늘 중으로 이스탄불 그랜드바자르 등시내관광을 일부 마칠 예정이다.
괴레메 마을
갑바토끼아 6.25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5.이스탄불 이스탄불이 가까이 오고 있다. 신비감, 경이로움이 함께하는 이스탄불- 인구 1,600만의 대도시답게 그 규모도 굉장하다. 옛 역사를 간직한채 동서양이 공존하는 이스탄불 관광이 시작된다. 감개가 무량하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이다.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의 원래 지명은 비잔티움이다. B.C. 7세기경 그리스의 지도자 비자스가 "눈 먼땅에 새 도시를 건설하라"는 델피 신전의 신탁을 받아 도시 국가를 건설한 것이 유래가 되어 비잔티움으로 불리웠다. 비잔티움의 시대는 이 도시의 그리스 문화를 대표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A.D.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A.D. 330년 5월 11일 히포드럼(마차 경기장)에서 도시의 완공식을 갖고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태어난 이 도시의 이름은 비잔틴제국의 기독교 문화를 대표한다. 기독교 국가로서 1230년동안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터키 마호멧 술탄에 의해 망하게 되고 이 도시는 3일간의 약탈이 행해진 후 이스탄불이라는 이슬람식 명칭으로 불리워지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스탄불은 이슬람 문화를 나타내는 지명이다. 아름다운 고도이자,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그 옛날 실크로드의 여정이 마무리 되던 곳.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 도시를 일컬어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하였다.
그랜드바자르 우리는 먼저 '그랜드바자르'를 향했다. 우리의 남대문시장을 비교하면서-- 내일은 일요일이라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선 이곳부터 먼저 구경하기로 하였다. 한마디로 우리의 재래시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고 깨끗했다. 외국관광객도 무척 많았다. 단지 에누리가 하도 심해서 겁이 나서 함부로 물건을 살 수가 없었다. 값은 재주껏 깎되 자기가 산 가격은 일체 말하지 말라는 철칙을 지켜야만 될것 같다. 조금 비싸게 샀다면 기분은 빵점- 도자기구절판이 하도 화려하고 예뻐서 값을 물었더니 25불인데 15불만 내라고 했다. 그냥 오려고 하니 10불-다시 5불로 내려갔다. 도무지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모르겠다.
이스탄불의 첫 저녁식사는 호박스푸와 빵,생선튀김이 메뉴였다. 모처럼 터키의 민속주인 라크를 시켰다. 도수가 45도나 되는 독주인데 1병에 30유로로 고가였다. 전통민속주이니 꼭 맛을 보고 싶었다. 우리의 안동소주 비슷한 술로 생각된다. 맛이 독특하다. 늘 마시는 양주와는 전혀 다르다. 이곳 사람들은 물에 타서 마신다고 하는데 물을 부으면 투명 색갈이 흰 우유처럼 변했다.
발리댄스 식사후 발리댄스를 보기 위해 버스를 탔다. 31명 중 옵션으로 참가희망자가 18명으로 인원이 줄었다. 과거에 발리댄스를 구경한 사람들이 별 재미가 없다는 소문이 있어서인지- 가면서 윤혜숙 가이드는 장담을 했다. 재미없다고 생각하면 돈을 돌려드리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가이드의 실력도 한번 보여드리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300명이 수용되는 Orient House라는 장소에 입장하니 벌써 분위기가 달아 오른다. 아랫층은 식사까지 같이 하는 자리이고 윗층이 우리들처럼 식사없이 구경만 하는 자리였다. 우리 자리는 기둥이 없이 맨 한가운데 앞자리가 예약되어 있었다. 와인,음료수 등이 제공되고-- 자리에는 촛불과 그 나라 국기가 꽂혀 있다. 시간이 되자 사회자가 흥겹게 사회를 본다. Ladies and gentlemen 그리고는 유창한 한국말로 '신사숙녀 여러분'으로 시작된다. 각나라 국기를 중심으로 참가한 나라를 말하며 박수를 유도한다. 전세계 각국에서 많이도 왔다. 가장 많은 나라는 불가리아와 대한민국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특별배려를 했다. 응원가 "대~한민국, 짜짜-짜"로 흥을 돋구어 준다.
한국팀은 네곳에 흩어져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좋은 명당을 자리잡고 있어 부러워한 다고 했다. 전통민속춤과 밸리댄서걸의 춤이 교대로 추어졌다. 배꼽을 흔드는 발리댄스는 처음 구경하는 것이지만 마치 예술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세 아가씨가 모두 황홀한 춤을 잘 추었지만 마지막 나오는 댄서가 경력이 많은 최고수준의 댄서라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이가 40대라는데 전혀 모르겠다. 테이블마다 다니며 사진도 찍고 흥을 돋구는데- 특히 우리자리로 와서는 오랫동안 머물며 특별이벤트를 벌였다.
배동문을 엉덩이로 밀어 옆으로 꽈당 넘어지는 해프닝도 있었고, 김 동문을 팔로 안으면서 그 큰유방으로 어깨를 누르니 순진한 김동문은 아마도 그 황홀했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우리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차사장이 대표로 무대까지 나가서 댄서와 같이 발리댄서를 추는 모습에 배꼽을 잡았다. 결혼 30주년기념으로 여행을 온 것인데 우리보다 서너살 아래로, 흥이 많은 사람이었다. 발리댄스의 황홀한 춤사위와 전통민속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느끼는 자부심마저 드는 감격의 밤 이었다. 가이드의 실력을 한껏 본 셈이다. 모두들 가이드에게 고맙다는 인사말까지- 내일은 본격적인 이스탄불 관광이 시작된다. 이스탄불 시내관광만 해도 며칠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 하루동안 바쁜 일정의 이스탄불 관광을 마치고 다음날 새벽에 암스델담으로 가야하는 스케쥴이라 안타깝기만 하다. 보스포러스해협 크루즈 모처럼 아침 7시에 일으나는 여유를 보였다. 9시부터 관광이 시작되었다. 이스탄불을 관광하면 보스포러스해협 크르즈는 필수코스이다. 파리의 세느강 크루즈, 항가리 부다페스트 의 다뉴브강 크루즈가 떠오른다.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해협은 강이 아니지만 해협 양쪽에 자리한 이스탄 불의 명승지를 구경할 수 있다. 한시간 남짓 배 위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블루모스크(술탄아흐멧사원) 1603년~1617년까지 통치했던 오토만의 14번째 술탄인 '아흐멧1세'에 의해 세워진 술탄아흐멧 사원은 이 스탄불에서 가장 훌륭한 사원이다. 사원의 건축은 1609년 위대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였던 '메흐멧 아 아'에 의해 시작되어 1616년에 완성되었다. 술탄아흐멧사원은 이스탄불과 터키에서 6개의 첨탑이 있는 유 일한 사원이며, 이 때문에 이 사원은 다른 오토만 사원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사원의 네코너와 첨탑들 은 모두 16개의 발코니를 가지고 있다. 블루모스크는 오스만제국의 마호멧 1세가 서오피아 성당의 건축양식을 모방하여 1616년에 세운 이슬람 사원이다. 보통의 이슬람 사원이 4개의 첨탑을 갖고 있는데 반해 블루모스크는 6개의 첨탑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풍의 청색타일로 장식되어 '블루모스크'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블루 모스크를 통해 이슬람 사원의 아름다운 건축미를 느끼게 된다. 이곳에서 오스만 황제들이 중요한 의전을 집행했으며 현재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히포드럼(Hippodrome;마차경기장) 블루모스크에 들어가기에 앞서 히포드럼 술탄아흐멧 광장,에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 뱀기둥 등을 인상깊게 보았다. 히포드럼은 지금은 광장이 되었지만 이곳은 원래 검투경기장이었다. 4세기 검투가 금지된 이래 마차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10만명 정도를 수용하는 이곳은 비잔틴 제국의 대표적 문화장소였다. 많은 유적들이 13세기초 삽저군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현재 오벨리스크는 비잔틴 제국의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A.D. 390년 이집트 룩소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다. 오벨리스크 옆에 청동제 뱀 기둥은 콘스탄티누스 1세때 그리스의 델피(Delphi)에 있는 아폴론(Apollon) 신전에 있는 것을 갖다 놓은 것이다.
패션쇼 터키는 카페트와 면방직 그리고 가죽제품이 유명하다. 가죽제품 전시장에 들렀다. 늘씬한 미녀들 패션쇼가 있다니 눈요기를 즐길 수 있다. 남여 모델들이 각가지 가죽제품을 입고 패션쇼를 벌였다. 우리 일행 중에서 뽑혀 나간 장수남,서상우 그리고 일행 중 신혼부부 남여 그리고 이대희회장 부인 이명희여사가 모델로 기용(?)되어 멋진 퍼레이드를 보였다.
아야소피아성당(The Aya Sofya Museum,하기아성당,성소피아 성당) 성(聖)은 그리스어로 '하기아' 또는 '아기아'인데 터키식으로는 '아야'라 발음한다. 인류의 유산이라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성소피아(거룩한 지혜) 성당은 비잔틴 제국(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A.D. 537년 건립되었다. 이 성을 지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내가 이제 솔로몬 당신을 이겼소"라고 고백했다고 전해 지듯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로마 비잔틴 양식의 극치를 이룬다.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 정교회의 본산지로서 역할을 하던 이 성당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개조되어 500여 년간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이 때 성당 주변에 4개의 교회 첨탑이 세워진 것이다. 지금은(1935년 이후)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양식의 견본으로서 그 후 비잔틴 건축 양식의 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교 사원 양식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날 회교 사원을 보면 가운데 거대한 돔과 보조돔으로 구성된 것을 볼수 있다.
비잔틴 시대에 도시에서 가장 위대하고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던 성소피아는 오늘날 건축물 중에서 최대 걸작으로서 관광객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는 박물관이다. 성소피아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로마식 기념비이다. 교회가 건축된 이래로 제국의 멸망까지 약 800여년동안 새로운 많은 건축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이 성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물도 건축되지 못했다. 537년에 건축되어 이스탄불이 오토만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916년간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그후 1453년부터 1934년까지 481년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터키공화국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튜르크의 명령으로 대규모의 복구사업을 거친 후에 회칠로 감추어졌던 비잔틴 모자이크들이 빛을 보게 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터키에서 세번째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726년에 시작된 우상타파시대에 성소피아를 비롯한 모든 교회의 성화모자이크가 파괴되면서 단순한 십자가 형상이 그려졌고 그뒤 다시 종교적인 성화들이 그려지고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장식되었다. 십자군에 의한 파괴, 비잔틴 왕족의 재탈환,지진에 의항 파괴, 오스만터키의 점령과 이슬람사원화 등 수많은 역사를 간직한채 세계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복도는 외랑과 내랑으로 되어 있고,내랑 천장은 완전히 금색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9개인데 가운데 문이 황제의 문이다. 황제의 문 위의 박공 머리에는 9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가 있는데 가운데는 예수가, 왼쪽에 성모마리아,오른쩍 원에는 대천가 가브리엘의 모습이 있고, 앞에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6세가 무릎을 꿇고 있다. 성당은 돔형태로 내부에 중간 기둥이 없이 어떻게 지탱을 하는지 그 당시의 건축기술에 혀를 내두를수 밖에 없다.천정 높이가 무려 56m나 된다고 한다. 설명을 들으며 본당과 2층갤러리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톱카프궁전 약 400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이었던 오토만 제국의 행정 중심지였던 톱카프궁전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유물이다. 톱카프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들을 유치하는 박물관 중의 하나이며, 일년에 25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아드는 터키에서도 방문 제1위를 기록하는 곳이다. 궁전 정문 앞에 있는 거대한 대포 때문에 "톱카프"라고 불렀고 이 명칭은 궁전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궁전의 전체 면적은 약 21만평에 달하여 바티칸의 두배, 모나코의 절반 크기이다. 화려한 왕궁 내의 모습과 장식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톱카프는 오스만 제국의 왕을 일컫는 술탄이 거하던 궁이었다. 1478년부터 1853년까지 세계의 대제국 오스만 터키제국의 중심지였으며 1839년 새로운 궁전 돌마바흐체 궁으로 옮길때까지 22명의 술탄이 거주하였다.오스만 제국의 명성에 걸맞게 화려한 궁중생활을 알수 잇는 각각의 방들을 박물관으로 꾸며 놓았다. 중국, 일본, 유럽의 도자기 1만 5백여점이 전시되어 있고 보석관에는 세계에서 3번째 가는 86캐럿자리 다이아몬드를 비롯 세계제일의 에머랄드, 6666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순금 촛대, 250kg의 순금 바이람 왕좌를 비롯하여 진기한 보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독교 유물로는 세례요한의 머리, 손 뼈,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아브라함의 식기가 있다
톱카프 궁전의 관람을 마치고 서울의 명동거리 같은 인파가 많은 곳을 구경하였다. 유럽풍이라서인지 거리의 노상카페 같은 멋있는 풍경이 시선을 끈다. 파리,오스트리아 빈,프라하 등 유럽의 도시 어느곳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같은 풍경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지가 없고 날씨가 좋은 지역이라야 할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터키에서 유명한 아이스크림을 모두 하나씩 맛을 보았다. 그 지방에 가면 유명하다는 음식과 기호품의 경험은 기행의 기본이다. 가이드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고 싶다고 했더니 오랫도록 미루다가 오늘에사 먹이는 이유를 알았다. 사진에 나오는 이 사람은 한국 TV에 소개된 유명인사다. 깜짝 놀라게 하며 기발한 행동으로 유혹한다.아이스크림을 모두 하나씩 들고 길거리를 거니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내일은 터키를 떠나 네델란드 암스델담으로 가는 날이다. 암스델담을 하루라도 구경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하루관광을 마쳐야 저녁 비행기로 귀국길에 오를 수 있다. 아예 서울로 갈 짐은 큰 가방에 넣고 손가방만 들고 여행길에 올라야 한다. 호텔에 도착하자 장곡에게서 연락이 왔다. 밤구경을 가자고- 박정희,허진호,권중화,서상우와 다섯이 이스탄불의 지하철을 타 보기로 했다. 지하철이 아니라 지상 전철이다. 야간 조명을 받으며 찬란한 모습의 블루모스크와 성 소피아성당도 멋있는 풍경이었다. 오전에 유람선을 탔던 해협도 야간의 조명 탓인지 더욱 멋지게 보였다. 이제 마지막 이스탄불의 밤도 깊어만 간다. 내일을 열 준비를 하면서--
그랜드바자르
블루모스크 오벨리스크
성소피아성당 톱카프궁전
6. 암스델담 편 오늘 저녁이면 인천으로 귀국하는 날인데, 암스델담에서 갈아타는 비행시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근 7시간 의 암스델담 시내관광이 가능해진 것이다. 새벽 5시40분 이스탄불을 떠난 비행기는 근 세시간이 걸려 암스델담 스키폴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풍차, 운하,튤립하면 떠오르는 나라 네덜란드. 중세 도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전원 풍경이 아름 다운 네덜란드는 현재 세계 꽃시장의 60%를 차지하는 유럽의 꽃 왕국으로도 유명하다. 국민소득 25,000불의 낙농 선진국이다. 1,600만 인구에 국토는 한반도의 1/5 이지만 산악지대가 없는 점 이 우리와 비교하기가 곤란하다.
네델란드의 서북쪽 72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암스텔담은 '암스텔 강의 둑'이란 뜻으로 13세기 경에 암스 텔강 하구에 살던 어민들이 댐을 쌓아 만든 도시이다. 시내에는 160개의 운하를 연결하는 500여개의 다리가 볼만하다.
예로부터 각국의 뱃사람들이 출입한 항구 도시답게 개방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아울러 암스델담은 유럽의 종착역으로서의 면모를 담고 있으며 도로, 철도, 항공등 교통의 중심지이며, 기 계, 조선, 화학, 다이아몬드 연마기술 등의 산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약 700년 전에 세워져, 17세기의 네 덜란드 황금시대에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21만 명 인구를 가졌던 유럽 4대 도시였다.
풍차마을 먼저 찾은 곳은 암스델담의 상징 풍차마을-잔세스칸스의 풍차마을은 얼마 남지않은 풍차의 풍물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풍차마을로 널리 알려진 잔세스칸스는 암스텔담 북쪽 약 15km 지점의 잔강가에 위치 하고 있다. 동화나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17~18세기의 목조가옥과 크고 작은 풍차들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잔 강변을 끼고 풍차 4기가 돌고 있다. 풍차외에도 나막신과 치즈를 만드는 곳이 있어 관 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리스나 터키에서 며칠동안 역사유물만을 보던 눈이 갑자기 달라 진 이국적인 풍물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여자들 취향의 전원 풍경에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노란 유채꽃과 이름모를 야 생화들이 풍요로운 전원도시를 그리고 있다. 이쁘게도 생긴 젖소가 멍하니 새로 나타난 방문객들을 바라 본다. 풍차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치즈가게가 있었다. 모두들 치즈 사느라 야단이다.
평소 애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잘 먹지도 않는 사람들도 선물용으로 많이들 산다. 이곳의 산양치즈인 고투치즈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는 치즈이다. 낙농국가이니 당연히 치즈가 좋을 수 밖에--종류도 많고 맛도 여러가지였다. 도자기와 나막신 가게도 유명하다. 물과 습기가 많은 나라이어서 옛부터 포퓰라나무로 만드는 나막신이 생산되었고 관광상품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다이아몬드 전시장 암스델담 하면 다이아몬드로 유명하다. 생산지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연마기 술이 세계 최일류이다. KOSTER전시장은 외국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다이아몬드 PR과 판매를 하는 곳이다. 다이아몬드 연마기술과 다이아몬드의 종류별 설명회가 진행되었다. 설명시간에는 보안상 출입이 통제되었 다. 엄청난 카라트(538캐럿)의 다이아를 구경할 수 있었다. 운하투어의 한국어 방송도 이 전시장에서 제공하고 있었다.
담광장 암스델담의 중심으로 시 중심부를 가로 지르는 담라크와 로킨 도로가 만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담광장 에서는 각종 공식행사와 축제, 콘서트, 노천시장이 펼쳐진다. 암스델담은 항구이다. 담광장 끝에는 중앙역이 자리하고 있다. 네델란드가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모든 국가정책이 오픈된 것이 많다. 동성결혼이 허용되고, 마약이 합법화 된 나라이다. 또 안락사 도 허용되었으며,임신중절도 합법화된 나라이다. 성(섹스)문화가 개방적이고 섹스박물관까지 있다. 그래서 이 담광장의 왼쪽 뒤로 들어가면 홍등가가 즐비하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마약소굴이 나온단다. 가이드의 특별 단속령이 계속된다. 무조건 중앙로만 다녀오라는 신신당부다. 중앙로에는 관광객들을 태우 는 WIELER 택시의 모습도 보인다. 커피점과 노천카페, 그리고 패스트푸드점도 있다. 우리는 가져간 빵을 커피점에서 커피나 쥬스를 시켜놓고 점심대용으로 먹었다. 담광장에서 50분간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담광장의 자유시간이 끝나고 운하 선착장인 Lovers라는 곳으로 집결했다. 1시에 탑승하는 티켓을 예약한 것이다. 운하투어 1시에 우리일행 32명을 태우고 단독으로 운행하였다. 그래서 안내방송도 우리말로 진행되었다. 암스델담은 운하의 도시이다. 도시의 사방이 운하로 연결된다. 160개의 운하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있고 500개의 다리가 놓여있는 과연 운하의 도시라 할만 하였다. 운하투어를 하는 도중 양옆의 아름다운 건물들 중 유명한 건축물은 소개해 주었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땅이 좁았던 지형상의 특징이라고- 건물이나 안내판에 X자를 세로로 3개씩 그려 놓은 것이 있었다. 가이드가 무슨 의미이냐고 물었다.
네델란드의 3대 경계주의사항이란다. 화재, 홍수, 전염병을 결코 잊지 말라는 뜻이다. 다닥다닥 붙은 집 때문에 불이 난다면 대형화재이니 첫째는 화재주의, 물이 많은 나라- 전국토의 25%가 지면이 수면보다 낮은 나라이니 자연 홍수가 걱정되고, 침수로 인한 전염병 예방에 각별히 주의를 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세계적인 튜립축제-큐켄호프 꽃축제 한시간의 운하투어를 마치고 대망의 튜립축제가 열리는 큐켄호프 꽃축제장으로 갔다. 꽃축제가 열리는 지역은 큐켄호프의 리세지역으로 매년 4월부터 5월중순까지 열린다. 기대를 잔뜩하고 왔는데 혹시 축제가 끝났으면 하는 걱정이 앞선다. 다행히도 아직 사흘이 남았다고 한다.
85,000평에서 펼치는 이곳 꽃축제는 유럽의 백만명이라는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소 문이 나서 많은 꽃관광객들이 이 꽃축제에 참가한다고 한다. 말만 들은 네델란드의 화훼산업의 현주소를 직접 눈으로 실감하는 자리였다. 아름다운 꽃들에 도취하여 정신없이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제한시간이 한시간이라 너무나 짧은 시간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하나라도 더 보려고 급히 다니느라 아름다움의 감상을 제대로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카메라에 담고 가서라도 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위안이 된다.
특히 여성들은 이번 여행에서 꽃축제 관람을 대단한 이벤트로 여기고 있었다. 모두 만족하는 것 같아 다행 이었다. 비행시간 때문에 관람시간을 늦출수도 없었다. 5시정각에 모두 모여 마지막 공항으로 가는 버스 에 올랐다. 이로써 8박9일의 전 일정이 끝나는 순간이다.
암스텔담 풍차마을
운하투어 튜립축제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나는 이번 여행의 책임자로서 끝맺음의 인사말을 했다. 사실 단체를 인솔한다는 게 은연중 책임감을 느껴 모든 면에서 제약이 많았다. 밤에 야간 산책도 하고 싶었지만 혹 사고라고 나면- 하면 걱정으로 자제하게 되고-- 고된 여행길, 우리 친구와 가족 모두 하나같이 똘똘 뭉쳐 서로 위하고 양 보하는 마음으로 협조해 준데 대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서울로 돌아온 사흘뒤 금요일 밤에 교대역 부근에 있는 '기와집순두부집'에서 여행 뒷풀이 쫑파티를 열었 다. 고생과 즐거움이 함께한 여행길- 모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며- 두시간반 동안 웃음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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