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문자전[廣文者傳]-박지원
-유형: 작품
-시대: 조선
-성격: 한문소설, 한문 단편소설
-작가: 박지원
-정의: 조선 후기에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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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서광문전후 書廣文傳後>와 함께 박지원의 ≪연암집 燕巖集≫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다. 저작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754년(영조 30)경 18세 무렵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서문에서 그가 18세 때 병을 얻어 밤이면 문하의 옛 청지기들을 불러 여염의 기이한 일들을 즐겨 듣곤 하였는데, 대개 광문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광문자전>을 쓰게 된 동기에 관하여 작자는 그 서문에서 “광문은 궁한 걸인으로서 그 명성이 실상보다 훨씬 더 컸다. 즉, 실제 모습(실상)은 더럽고 추하여 보잘것없었지만, 그의 성품과 행적으로 나타난 모습(명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원래 세상에서 명성 얻기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형벌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물며 도둑질로 명성을 훔치고, 돈으로 산 가짜 명성을 가지고 다툴 일인가.”라 하여, 당시 양반을 사고판 어지러운 세태를 꾸짖었다.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문은 종로 네거리를 다니며 구걸하는 걸인이었다. 여러 걸인들이 그를 추대하여 두목으로 삼아 소굴을 지키게 하였다. 어느 겨울밤 걸인 하나가 병이 들어 앓다가 갑자기 죽게 된다. 그러자 이를 광문이 죽인 것으로 의심하여 쫓아낸다. 그는 마을에 들어가 숨으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되어 도둑으로 몰렸다. 그러나 그의 말이 너무나 순박하여 풀려난다. 그는 주인에게 거적 한닢을 얻어 수표교(水標橋) 밑으로 가서 숨어 있다가, 걸인들이 버리는 동료걸인의 시체를 가지고 있던 거적으로 잘 싸서 서문 밖에 장사지내 준다.
전에 숨으러 들어갔던 집주인이 계속 그를 미행하고 있었다. 그는 광문으로부터 그동안의 내력을 듣고는 가상히 여겨 광문을 어떤 약방에 추천하여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 어느날 약방에서 돈이 없어져 광문이 또 다시 의심받게 된다. 며칠 뒤에 약방 주인의 처 이질이 가져간 사실이 드러나 광문의 무고함이 밝혀진다. 주인은 광문이 의심을 받고도 별로 변명함이 없음을 가상히 여겨 크게 사과한다. 그리고 자기 친구들에게 널리 광문의 사람됨을 퍼뜨려 장안사람 모두가 광문과 그 주인을 칭송하게 된다.
광문은 남의 보증서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보증하면 전당하는 물건이 없어도 많은 돈을 빌 수 있게 된다. 광문은 얼굴이 추하고 말은 남을 잘 감동시키지 못하였다. 입은 크고 망석중이놀이를 잘 하였으며, 철괴춤을 곧잘 추었다. 아이들이 서로 상대방을 놀릴 때는 “네 형이 광문이지.”라고 할 정도였다.
길을 가다 남이 싸움하는 것을 보고 그도 웃옷을 벗고 덤벼들어 벙어리 흉내를 내면서 땅에 금을 그어 시비를 가리는 것같이 하면, 싸우던 사람도 그만 웃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광문은 마흔이 되어서도 머리를 땋고 있었다. 사람들이 장가들기를 권하면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하는 것은 여자들도 마찬가지이므로 얼굴이 추해서 장가들 수 없다고 말하였다. 집을 지으라 권하면 부모처자도 없는데 집은 지어 무엇하느냐고 하였다. 장안의 명기들도 광문이 기리지 않으면 값이 없었다. 전일 장안의 명기 운심(雲心)이가 우림아(羽林兒)·별감·부마도위(駙馬都尉)의 겸인들이 모여 술상을 벌인 자리에서 가무(歌舞)하라는 영을 듣지 않다가, 광문이 자리에 들어와 우스운 짓을 하며 콧노래를 부르자 운심이도 따라 칼춤을 추게 되었다. 이를 보고 모인 사람들이 모두 즐기며 광문과 벗을 맺고 헤어졌다.
<광문자전>에서 박지원은 여항인(閭巷人)의 기이한 일을 끌어와서 풍교(風敎)에 쓰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정 있고 정직하고 소탈한 새로운 인간상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작가가 살고 있던 당시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사실주의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광문자전>의 소원관계(遡源關係)는 허균의 <장생전 蔣生傳>과 어느 면에서 상통한다. 판소리계 소설인 <무숙이타령>, 일명 ‘왈짜타령’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한편, 이유원(李裕元)의 ≪춘명일사 春明逸事≫에 나오는 <장도령전>과도 통하여 당시 이런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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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문은 비렁뱅이다. 그는 예전부터 종루(鐘樓) 시장 바닥에 돌아다니며 밥을 빌었다. 길거리의 여러 비렁뱅이 아이들이 광문을 두목으로 추대하여, (자기들의 보금자리인) 구멍집을 지키게 하였다.
하루는 날씨가 춥고 진눈깨비가 흩날렸는데, 여러 아이들이 서로 이끌고 밥을 빌러 나갔다. 한 아이만 병에 걸려 따라가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그 아이가 더욱 추워하더니, 신음소리마저 아주 구슬퍼졌다. 광문이 그를 매우 불쌍히 여겨, 직접 구걸하러 나가서 밥을 얻었다. 병든 아이에게 먹이려고 하였지만, 아이는 벌써 죽어 버렸다.
여러 아이들이 돌아와서는, '광문이 그 아이를 죽였다.'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서로 의논하여 광문을 두들기고는 내쫓았다. 광문이 밤중에 엉금엉금 기어서 동네 안으로 들어가, 그 집 개를 놀래 깨웠다. 집주인이 광문을 잡아 묶자, 광문이 이렇게 외쳤다.
"나는 원수를 피해서 온 놈이유. 도둑질할 뜻은 없어유. 영감님이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아침나절 종루 시장 바다에서 밝혀 드리겠어유.“
그의 말씨가 순박하였으므로, 주인 영감도 마음속으로 광문이 도둑이 아닌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새벽에 풀어 주었다. 광문은 고맙다고 인사한 뒤에, 거적때기를 얻어 가지고 가 버렸다. 주인영감이 끝내 그를 괴이하게 여겨, 그의 뒤를 밟았다. 마침 여러 거지 아이들이 한 시체를 끌어다가 수표교에 이르더니, 그 시체를 다리 아래에 던지는 것이 보였다. 광문이 다리 아래에 숨었다가 그 시체를 거적때기에 싸더니, 남몰래 지고 갔다. 서문 밖 무덤 사이에 묻고 나서는, 울면서 무슨 말인지 중얼거렸다.
집주인이 광문을 잡고서 그 영문을 물었다. 광문이 그제야 앞서 있었던 일과 어제 한 일들을 다 말해 주었다. 주인영감은 마음속으로 광문을 의롭게 여겨서,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광문에게 옷을 주고는 두텁게 대하였다. 그리고 광문을 약방 부자에게 추천하여, 고용살이를 시켰다.
오래 뒤에 부자가 문밖으로 나섰다가 자꾸만 돌아왔다. 다시 방 안에 들어와 자물쇠를 살펴보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그의 얼굴빛은 자못 불쾌한 듯 하였다가 돌아와 깜짝 놀라더니, 광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얼굴빛이 바뀌더니 그만두었다.
광문은 그 이유를 정말 몰랐다. 날마다 잠자코 일했을 뿐이지, 감히 하직하고 떠나지도 못했다. 며칠이 지나자 부자의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와서 부자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지난번 제가 아저씨께 돈을 꾸러 왔더니, 마침 아저씨가 계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스스로 방에 들어가 돈을 가지고 갔었지요, 아마 아저씨께서는 모르고 계셨겠지요."
그제야 부자는 광문에게 매우 부끄러워하면 사과하였다.
"나는 소인이야. 이 일 때문에 점잖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네 그려. 내 이제 자네를 볼 낯이 없네.“
그리고는 자기의 모든 친구와 다른 부자나 큰 장사치들에게까지 '광문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두루 칭찬하였다. 그는 또 종실(宗室)의 손님들과 공경(公卿)의 문하에 다니는 이들에게 이르는 곳마다 광문을 칭찬하였다. 그래서 공경의 문하에 다니는 이들과 종실의 손님들이 모두 광문을 이야깃거리로 삼아, 밤마다 그들의 배갯머리에서 들려주었다. 그리하여 몇 달 사이에 사대부들이 광문의 이름을 모두 옛날 훌륭한 사람의 이름처럼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양 사람들이 모두들
"광문을 우대하던 중인 영감이야말로 참으로 어질고도 사람을 잘 알아보는 분이지.“
칭찬하였고, 더욱이
"약방 부자야말로 정말 점잖은 사람이야.“
하고 칭찬하였다.
이때 돈놀이꾼들은 대체로 머리 장식품이나 구슬 비취옥 따위 또는 옷·그릇·집·농장·종 등의 문서를 전당 잡고서 밑천을 계산해서 빌려주었다. 그러나 광문은 남의 빚을 보증서면서도 전당 잡을 물건이 있는지를 묻지 않았다. 천 냥도 대번에 승낙하였다.
광문의 사람됨을 말한다면, 그의 모습은 아주 더러웠고, 그의 말씨도 남을 움직이지 못했다. 입이 넓어서 두 주먹이 한꺼번에 드나들었다. 그는 또 만석(曼碩) 중놀이를 잘하고, 철괴(鐵拐) 춤을 잘 추었다. 당시에 아이들이 서로 헐뜯는 말로써
"니네 형이야말로 달문(達文)이지.“
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달문'이란 광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광문이 길에서 싸우는 이들을 만나면, 자기도 역시 옷을 벗어젖히고 함께 싸웠다. 그러다가 무슨 말인가 지껄이면서 머리를 숙이고 땅바닥에 금을 그었다. 마치 그들의 옳고그름을 따지는 듯했다. 그러는 꼴을 보고서 시장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싸우던 자들도 역시 웃다가 모두 흩어져 버리곤 하였다.
광문은 나이 마흔이 넘도록 그대로 총각머리를 땋았다. 남들이 장가 들기를 권하면 그는
"대체로 아름다운 얼굴을 모두 좋아하는 법이지. 그런데 사내만 그런 게 아니라 여인네들도 역시 그렇거든. 그러니 나처럼 못생긴 놈이 어떻게 장가를 들겠어? “
하였다. 남들이 살림을 차리라고 하면 이렇게 사양하였다.
"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처자도 없으니, 무엇으로 살림을 차리겠소? 게다가 아침나절이면 노래 부르며 시장바닥으로 들어갔다가 날이 저물면 부잣집 문턱 아래서 잠을 잔다오. 한양에 집이 팔만이나 되니, 날마다 잠자는 집을 옮겨 다녀도 내가 죽을 때까지 다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라오.“
한양의 이름난 기생들이 모두 아리땁고 예쁘며 말쑥하였다. 그러나 광문이 칭찬해 주지 않으면 한 푼어치의 값도 나가지 못하였다. 지난번에 우림아(羽林兒)와 각전(各殿) 별감 또는 부마도위의 겸종들이 소매를 나란히 하여 운심을 찾았다. 운심은 이름난 기생이었다. 당(堂) 위에다 술자리를 벌이고 비파를 뜯으며, 운심의 춤을 즐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운심은 일부러 시간을 늦추면서 춤을 추려하지 않았다.
광문이 밤에 찾아가 당 아래에서 어정이다가, 곧 들어가서 그들의 윗자리에 서슴지 않고 앉았다. 광문은 비록 옷이 다 떨어지고 그 행동이 창피하였지만, 그의 뜻은 몹시 자유로웠다. 눈구석이 짓물러서 눈곱이 낀 채로 술 취한 듯 트림하여 양털처럼 생긴 그 머리로서 뒷꼭지에다 상투를 틀었다.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서로 눈짓해서 광문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광문은 더 앞으로 다가앉아 무릎을 어루만지며 가락을 뽑아, 콧노래로 장단을 맞추었다.
운심이 그제야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광문을 위해서 칼춤을 추었다.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들은 다시금 광문과 벗으로 사귀고 흩어졌다.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