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1918-1972. 정치가.
유형 |
인물 |
시대 |
현대 |
출생 - 사망 |
1918년 ~ 1972년 |
성격 |
정치가 |
성별 |
남 |
관련사건 |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
정의
1918∼1972. 정치가.
개설
독립운동가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고아나 다름없는 부랑아생활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우리 나라의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장군’의 아들임을 긍지로 삼아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하거나 조선인 상인을 보호하는 등의 협객으로도 행동하였다. 광복 이후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신익희(申翼熙) 등이 주도하는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을 맡아 반공대열의 최선봉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반공투쟁과정에서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아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었다. 사형집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맞아 그 집행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면서 반공·노동운동을 계속하였다. 1954년 서울 종로을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5년에도 제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등 정치사에도 행적을 남겼다.
용산구의 보궐선거로 제6대 국회에 등단하자마자 한독당 내란음모사건과 관련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야당은 물론 여당인 민주공화당 소속의 국회의원까지 석방결의안에 106표의 찬성표를 던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사카린밀수사건을 논란중일 때 국무위원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운,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의정사상 전대미문의 오점을 남기고 다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는 기이한 행적을 남겼다.
결국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정치생활은 막을 내렸다. 정계은퇴 후 고혈압으로 1972년 11월 타계하였다. 묘지는 서울 수유리에 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의송(義松)이다. 3·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울 교동국민학교를 마치고 협객으로 활동하면서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하였다. 광복 후 한독당(韓獨黨) 재정위원·대한민주청년연맹 부위원장·대한노조총연합회 최고위원 등을 지냈고, 반탁운동과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목적으로 한 사사오입(四捨五入改憲)에 반대함으로써 자유당에서 제명되어 야당 생활을 하였다. 1965년 제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이른바 한독당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1966년 9월 삼성그룹 계열의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 원료를 밀수한 사건과 관련하여 국회 본회의에서 국무위원석에 오물을 던진 '국회오물투척사건'을 일으켜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같은 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야인 생활을 하다 1972년 11월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