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산 화상과『금강심론』
벽산은 『금강심론』의 저자로 구한말에서 해방 전후를 살다간 불교계 선지식이다. 그렇지만 일반에게는 물론 교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의 제자인 무주가 편집한 『금강심론』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쉰 해를 살다간 그의 이력이 당시로는 짧다고 할 수 없지만, 불교계로 보자면 유능하고 뛰어난 지도자를 잃은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다만 그의 유고집인 『금강심론』이 세상에 나와 빛을 발하게 되어, 조금은 그의 유훈을 받들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벽산의 간략한 생애와 『금강심론』의 저술과 편집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무주에 의해 유고가 편집‧출판되며, 대중에게 유포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서술할 것이다. 또 『금강심론』을 전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도록 목차를 내용과 과단으로 세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벽산(碧山)의 생애
벽산의 생애는 아쉽게도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제자인 무주가 쓴 벽산당금타대화상 탑비명의 단편적인 사실과 문도들이 전하는 약간의 일화만 전해질 뿐이다. 본 연구에서는 탑비명을 위주로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
벽산은 1898년 윤3월 29일에 전북 고창의 무장에서 부친 김병룡과 모친 밀양 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속명은 영대이며 자는 성일이다.
그의 출가 동기는 1919년 당시 삼일운동으로 고창 문수사로 피신 중에, 우연히 『금강경』을 보고 견해가 열려 보리심을 내게 된다. 그 후 출가를 결심하고 전남 장성 백양사의 만암 선사를 스승으로 모신다. 이후 수계하여 상눌(尙訥)이라는 법명을 받고, 후에는 벽산이라는 법호를 받게 된다.
처음 불법의 가르침인 경전을 자세히 배우고, 실천 수행으로 열여덟 해 동안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참구한다. 그렇게 정진하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다가, 1936년 서른아홉 되던 해에 운문암의 동안거에 용맹정진을 감행한다. 결국 『원각경』 삼정관의 스물다섯 청정륜법으로 선정 가운데 『보리방편문』을 감득하고, 그해 1월 17일 새벽에 견성 오도하게 된다. 삼매 중에 금색 종이 위의 '타(陀)'자를 발견하고 스스로 금타(金陀)로 작명한다.
원각(圓覺)의 삼정관이란 첫째, 정관(靜觀)으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번뇌를 멸하여 자기에 머문다. 둘째, 환관(幻觀)으로 선정으로부터 행을 일으켜 중생에 응한다. 셋째, 적관(寂觀)으로 쌍으로 일어나고 멸함을 잊어 자취도 두지 않는다. 세 가지를 가지런히 닦으면 셋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므로 묘하다고 말한다. 첫째는 지(止), 둘째는 관(觀), 셋째는 지관쌍수(止觀雙修)를 각기 의미하며, 삼관을 하나에서 셋씩 조합하며 닦는 수행방편이다.
이후 벽산은 전북 부안 내소사 월명암에서 안거를 지내고, 정읍 내장사 벽련암과 백양사 운문암에서 출입을 삼가고 수행에만 매진한다. 운문암으로 옮겨 수행한 시기는 우주의 본질과 형량을 저술하고, 1942년 봄에 책을 발송한 이후로 추측된다. 스승인 만암이 벽산의 선법과 청규로 운문암에서 법을 펼칠 것을 권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만암은 벽산의 깨달음을 인가하고, 그의 수행과 가풍을 신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임 정진과 중생 교화를 십수 년 하던 중에, 1947년 11월 17일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동안거 해제 후의 다음 해 1월 24일[음력], 정오 무렵에 향년 51세로 입적하게 된다.
벽산이 제자들을 지도하고 저술 활동을 펼 때는 "보리방편문의 수행은 지관‧사유‧행상의 일심법계 관법으로 피안에 이르는 묘법이며, 이를 의지해 수행한 자가 이백여 명이며 가행 성취자도 여러 명이었다."고 전한다.
최근에 알려진 사실로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의 처소였던 심우장이 벽산의 토지 제공으로 지어진 것이다. 벽산이 만해에게 찾아와서 자신의 땅을 기증하며, 집을 지으라고 말한 사실을 만해의 지인이 전한 바 있다. 만해는 당시 민족해방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핵심 인물로 중앙학림에서도 강의했고, 거기서 수학한 바 있는 벽산과 교류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만해는 삼일운동 때 학인들에게 참가를 권유한 사실도 있으며, 두 사람은 불교와 민족의식의 고취라는 점에서 의기투합했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는 지인의 진술뿐이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개연성이 충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벽산의 청년기는 민족의식과 자기 주관이 뚜렷한 지성인의 면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깨달음의 노래는 아래와 같다.
연잎 둥글고 뾰족한 모서리가 바로 진실이며, 바람 불고 비가 뿌리는 일이 허망한 경계 아니로다. 버들꽃 날리는 곳에 연꽃이 피고, 송곳 끝과 거울 바닥에서 금빛이 빛나도다.
무주는 『금강심론』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편적인 지도원리를 간구하는 시대적 요청은 다행히도 우리 한국 불교계에서 고벽산당 금타화상의 굴기로 말미암아 … 비단 불교계의 공헌에만 그칠 뿐 아니라, 당래 할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고귀한 금자탑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또한, 화상은 원효‧보조‧서산 등 제대 선각자들이 한결같이 창도‧선양한바, 한국불교의 정통인 통불교의 제창에 그칠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이 무주는 벽산의 대중교화와 저술은 불교계만 아니라, 인류의 복지와 공영에도 크게 이바지하는 것임을 설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전통인 회통불교의 제창에도 앞장섰는데, 통불교의 수행은 참선‧간경‧염불 등이 두루 융합된 수행이다.
또 불교사적으로 초기‧대승‧밀교의 사상과 교학적으로 중관‧유식‧진언 등의 해행(解行)이 회통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 살펴볼 『금강심론』의 수행 역시 통불교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표 1> 벽산화상 소년보
연 대 | 행 적 | 비 고 |
1898년 윤3월 29일 | 출생 | 전북 고창 |
1919년 3월 1일[22세] | 삼일운동 | 문수사 피신 |
1921년 3월[24세]? | 중앙학림 수학 | 1922년 휴교 |
1936년 음10월 15일[39세] | 용맹정진 | 운문암 동안거 |
1936년 11월 17일 | 견성 오도 | 금타 작명 |
1939년[42세] | 벽련암 보림 | 내장사[선(禪)農一致] |
1942년 봄[45세] | 운문암 정진 | 개당 권유[蔓庵師] |
1947년 11월 17일[50세] | 구경각 성취 | 두문불출 수행 |
1948년 1월 24일[51세] | 입적 | 대중 탁발 |
2.저술과 편집
『금강심론』은 벽산의 유고인 저작(1942~1947)들을 무주가 월출산 상견성암에서 1979년 5월에 처음 출판하였다. 유고의 영인본은 모두 다섯 편인데, 첫째는 「관음문자」[366호‧석판본], 둘째는 「보리방편문」[석판본], 셋째는 「해탈육지요간」[석판본], 넷째는 「수능엄삼매도결」상편[필사본], 다섯째는 「우주의 본질과 형량」[등사본] 등이다.
그리고 유고집 외에 다른 곳에도 발견되었는데, 「관음문자」가 군산 동국사(237호)와 평창 월정사 박물관(373호)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또 「우주의 본질과 형량」은 일본 동양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관음문자」는 1949년 6월 30일 전주 발송 제237호 석판본이 발견되었고, 월정사 박물관 소장본은 사중 소임자의 가족이 가지고 있던 것을 기증한 것이다. 「우주의 본질과 형량」은 동양대학 도서관 검색에서 발견되어 유학생을 통해 복사 입수한 것이다.
<표 2 >『금강심론』 수행론의 저술 연대
제 목 | 수행론 | 저술 시기 | 편‧장 수 |
「보리방편문」 | 阿彌陀佛‧一相三昧 析空觀‧五輪觀 | 1943, 겨울 | 1편 2장 |
「해탈십육지」 | 金剛地‧無餘地 등 | 1944, 여름 | 2편 |
「수능엄삼매도결」 | 수능엄삼매‧四禪定 金剛三昧‧五智如來 | 1946, 봄 | 3편 |
금강삼매송 | 五相觀 | 1947, 정월 | 1편 2장 |
이후 『금강심론』의 편집은 「관음문자」와「보리방편문」을 합하여 제1편 일인전에 일인도에 넣고, 제2편 「해탈육지」 제3편 「수능엄삼매도결」 제4편 「우주의 본질과 형량」 등으로 구성하여 발간되었다. 「우주의 본질과 형량」 은 별도로 1974년에 경기도 시흥[광명] 성도회의 주관으로 비매품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초판 발행 이후 여러 번 책이 간행되었고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석금타 저, 청화 편(1979). 『금강심론』, 서울: 보련각[월출산 상견성암]
②석금타 저, 청화 편(1986). 『금강심론』, 서울: 보련각[동리산 태안사]
③석금타 저, 청화 편(1992). 『금강심론』, 서울: 을지출판공사[동리산 태안사]
④석금타 저, 청화 편(1997). 『금강심론』, 곡성: 성륜각[설령산 성륜사]
⑤석금타 저, 청화 편(2000). 『금강심론』, 곡성: 성륜각[설령산 성륜사]
⑥석금타 저, 청화 편(2003). 『금강심론』, 곡성: 성륜각[설령산 성륜사]
⑦석금타 저, 청화 편(2009). 『금강심론』, 서울: 광륜출판사[도봉산 광륜사]
⑧석금타 저, 청화 편(2017). 『금강심론』(영인본 포함), 곡성: 성륜불교문화재단‧벽산문도회[광륜사‧성륜사]
⑨석금타 저, 청화 편(2019a). 『금강심론』 영인본, 제주: 벽산문도회
⑩석금타 저, 청화 편(2019b). 『금강심론』 운문암본, 제주: 벽산문도회
⑪석금타 저, 청화 편(2019c). 『금강심론』 태안사본, 제주: 벽산문도회
이외에도 다수가 간행되었으며 초판에는 원문을 편집자가 조금 풀었지만, 이후에는 저자의 원문 그대로 발간되었다. 또 2017년 발행된 『금강심론』은 영인본까지 추가하였고, 최근에 발행된 『금강심론』은 세 판본으로 나누어 출판되었다. 유고집인 영인본을 단행본으로 출간하고, 이것을 저본으로 현대적 편집의 운문암본이 발간되었다. 마지막으로 초판본과 90년대 태안사본, 운문암본[영인본] 등을 비교 교정하여 태안사본이 나온 것이다. 『금강심론』을 편집한 무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금타(金陀) 화상께서는 일찍이 십수 년의 좌선을 감행하여 본분 자성의 실상(實相)을 확철히 증오(證悟)하고, 석존 이후 가장 소상히 형이상적 경계를 천명하였으며, 또한 그 실상을 견증(見證)하는 방법 계제를 실증과학과 대비하여 체계화하는 등 형이상하(形而上下)를 지양 종합한 점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문화사상 희유한 일대 성사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벽산은 열여덟 해 동안 간화선 수행 후에, 선정수행으로 '보리방편문'을 감득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실상을 증득하였다. 이후 실증과학과 대비하여 형이상하학(形而上下學)을 통합하고, 통불교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저술은 문화사상에 보기 드문 일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즉, 관념적인 불교 수행론을 실증학문과 비교하여 회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공관(析空觀)이나 오륜관 등의 실증적인 수증론(修證論)을 전개하여, 실질적으로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증명하는 수행론을 지향한 것이다.
<『금강심론』 수행론연구/ 박기남(普圓)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