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포엠 시 원고 - 남진원
한참동안 외 9편
한참 동안
길과 나무와 개울물이 함께 어슴푸레해지는 시간
저녁 먹은 빈 그릇을 개수대에 쓸어 담아 넣고 문을 나선다
길과 나무와 개울물이 나를 끼워 넣어 준다
한참 동안 함께 어슴푸레해진다
겨울 산방
헌 난로
같은 내가,
깨다가 졸다 보니 …
어둠이
舊友인 냥
커피 향에
묻어 든다.
고요히 깃드는 무심 …
이 수수한
삶
한 끼
虛空 葬
매주 손수레에 생활 쓰레기를 한 짐씩 싣는다.
쓰레기하치장을 향해 길을 나섰다.
새것들이 점차 못 쓰거나 고물이 되어
시간 속에서
쓰레기가 되는 것들이
찾아가는
쓰레기 葬地
종내는 내 몸뚱어리
이 물건도
이리 될,
虛空
葬
거미줄
거미가 만들어놓은 허공 그물
거미줄,
나비, 매미, 잠자리, 똥파리까지 …
다 걸렸다
왜 죽었는지도 모른 채
허공 그물에 매달려 있다
사람살이도,
허공 그물
누가 쳐놓은 그물일까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걸리고 넘어지고 부딪치고 깨지고
욕망과 집착, 다 걸렸다
왜 사는 지도 모른 채 …
허공 그물에 매달려
죽자 살자 살아가고 있다.
휴대폰
밖에 나왔다
허전하고 이상하다
그렇지!
두고 온 휴대폰
한 발짝도 갈 수가 없다
움직일 수가 없다
어느새 내 발길
묶이고
내 자유까지 모두
휴대폰에게 묶여버렸구나.
나는 늘, 오늘입니다
나는 늘,
오늘입니다
나를, 나는 장사지냈습니다
69년의 육신과
영혼을 불 질렀습니다
최고의善, 최대의惡도
불질렀습니다.
善도 없습니다
惡도 없습니다
육신과 영혼도 없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는 없는,
나로 삽니다
나는 늘, 오늘입니다
늘, 현재일
뿐입니다.
바위 앞에서
입이 없다고
뜻도 없으랴
진정한
귀
열린 자는
들어라
온몸으로
말하는
저,
침묵의 언어를.
아프면 다, 보인다
몸이 아프면
다 보인다
평소에
밥 먹는 일
그냥
걷는 일
사람들과
말하는 일
가끔
미소 짓는 일
그리고
편히 잠드는 일
깨어나면
조용히 눈뜨고
숨쉴 수 있는 일
이 보다 더
행복한 일 없는 것을.
우리네 삶, 늘 흔들리며 살지 않느냐
흔들리며 사는 일이
어제,오늘의 일이었던가
내 인생은 늘 4.8의 지진이 일어났으니
삶의 곳곳이 허기진 채
수 차례 여진도 다반사였지
선반의 그릇 흔들리듯 자네도
흔들리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오늘 전북 부안 땅 엉덩이에 4.8의 지진이 났는데도
전국 곳곳,
비틀
비틀
그래,
우리네 정치도 교육도 문화도 사회 곳곳에서
이미 지진수치 4,8도를 넘어
비틀거리고
우리네 삶,늘
흔들리며 살지 않느냐.
전환문법
누구나 인사 끝에 하는 말
‘행복하세요!’ 하지
그래, 행복하게 사는 거,
최상이지, 최고로 힘도 세지
그런데,
행복보다 힘센 거 있었어
수시로 찾아오는
고통이야
그래, 행복보다 힘센 거
고통인 줄만 알았어
그런데,
고통보다 더 힘센 거 있었어
病이야
앓으면서 알았어
병보다 무서운 거
죽음이라는 것을
그런데,
진짜 죽음이 두려워하는 게
뭐인지 알았어
나야,,
나였어.
시론
배설과 만족, 나아가 소통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시 쓰기
남진원
시에서의 의미와 이미지 표출은 궁극적으로 사랑이다. 그리고 행복한 생활이다.
나는 문학을 특히, 시를 쓰면서 문학 모임에 자주 가는 기회가 생긴다. 그곳에서 혹여 문학 강의라도 할 기회가 있으면 맨 마지막 말로는 ‘문학으로 행복하세요!’ 하는 말을 하곤 하였다.
나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나 문학을 접하는 독자들이나 모두 자기 만족을 넘어 행복에 이르기를 기도한다.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글을 쓰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에게 문학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지금까지 시를 접하고 보니, 시는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행복에 닿아있다는 점이다.
인간 사회는 욕망이 있기에 유지된다. 욕망은 인간이 갖는 최고의 자산이지만 경계하지 않으면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인간의 욕망 중에 물질적인 것들은 세속적이고 타산적이기 쉽다.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욕망은 고도의 문화적 유산을 생산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시적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시적 욕망 또한 사랑이고 행복이다.
이 지구상에 인류의 출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뭔가 다른 특이한 점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 중에 가장 특징적인 점의 하나는 욕망이다.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 명예를 얻고 싶은 욕망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 역시 욕망의 인간이다. 나는 시를 쓰고 싶은 욕망이 컸기에 시 쓰는 일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시를 쓰는 욕망이 사랑을 저변으로 하기에, 행복으로 이어지는 삶을 확인하며 꾸준히 창작에 임하고 있다. 나를 잘 살펴보지 못할 때에는 시를 썼다. 시를 쓰는 과정에서 나를 돌아보고 나의 면목을 찾는 일이 자주 있었다..
사람들은 욕망의 크기가 클수록 영원하기를 바란다. 또 계절의 순환을 보면서 늙어버리는 모습과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보고 경이로움이 아닌 경악함으로 놀란다. 자신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아버린다. 너무도 절망적인 사실 앞에서 고뇌하고 또 고뇌하여 얻은 결론은 종교적 신앙이었다. 절대에 가까운 신앙이어야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 한 예가 이집트의 피라미드이다. 파라오라는 권력자는 죽음이 오는 것을 알고 영원성을 꿈꾼다. 사후 세계에 대한 마음은 곧 종교적 믿음으로 나아가 피라미드를 건축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가지고, 죽어서도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삶은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어도 육신의 삶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신이고 가장 어리석은 마음일 것이다.
다행히 지혜로운 사람들은 영원히 사는 방법을 알아내었다. 그것은 육신의 삶이 아니라 정신의 삶이란 것을.
예수는 ‘인간의 사랑 속에 영원을’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속에서의 사랑이었다. 석가모니는 ‘해탈’ 이란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여 보여주었다.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 그래서 내 안의 우주가 가득히 비어버리게 하는 실체가 사랑이다. 삶도 죽음도 없으니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닌가. 요즘은 이런 내적 사유와 체험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 내 작품의 모습들이다.
나는 사유의 이런 체험을 내 작품으로 나타내었다. 정신의 오묘함은 알고 보면 가장 쉽고도 단순하다. 인간에게 사랑을 빼고 그 어떤 것을 진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문학도, 문학 중에 시를 쓰는 행위도 그래서 사랑이다.
서양의 예술, 문학이 헬레니즘(알렉산더 제국이 존속했던 BC 4세기 - BC 1세기 간의 약 300년 동안은 현대 유럽 문명의 원천을 형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과 헤브라이즘이라는 양대 산맥으로 이어져 왔다면 한국의 예술 내지 문학은 헬레니즘 문화의 인간중심과 헤브라이즘 문화의 윤리적, 신적인 사상이 중화된 ‘중도문화(中道文化)’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중시되면서 인간은 곧 신(神)과 분리된 개체가 아닌 신성(神性)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그러기에 신(神)처럼 스스로를 존중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 왔다. 다른 서양의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조상에 대한 숭배와 효(孝)사상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일면이라 하겠다.
이런 정신의 뿌리에서 우리 시는 우리 정신세계(精神世界) 언어 표출(表出) 중의 한 부분이다. 지정의(知情意)는 정신세계의 영역이다. 지성과 감성, 의지는 시에서 관념과 이미지로 드러난다. 문학은 감성과 지적 능력을 언어로 표출시키는 창조적 행위이다. 이러한 문학의 행위는 미적 쾌감이라는 인간의 정신적 욕망을 고양시키고 위대한 존재로 인식시키는 데 얼마 정도 공헌을 한 점도 부인하지 않겠다. 괴테(Goethe)는 ‘위대한 작품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고 변화시킨다’고 하였다. 그 말처럼 문학은 전달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교화시켜 주고 시공(時空)을 초월한 신의 영역에 까지 감동적으로 닿을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시인의 정신적인 욕망에 의해 구현된 시! 시에 있어서의 미의식은 진리에 가깝다. 감감적 미의식에 대한 형상화는 시에 있어서 중요한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인의 관념의 과도한 노출성은 미적 흥취를 격감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시의 지성 화를 꾀하면서 시의 모던화에 본격적으로 힘써오기도 하였다.
문학의 지성적 표출이 꾸준히 이루어져왔지만 문학의 자기 생명성이란 문제에서는 책임지지 않는 방관자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중요한 것은 문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美)’라는 점이다. . ‘미’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즐겁고 기쁘고 쾌락적인 성질’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럽고 추악하고 혐오스런 것도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이 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도 ‘죽음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찬미하기도 했다.
시 창작에서 미를 발견하고 미를 창조해 가는 시인은 외로운 고갯길과 무성한 숲을 헤치는 나그네와 같다. 그는 아름다움을 찾아 길을 떠나는 고단하고도 행복한 방랑자이다.
사람은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우리가 영양에 적절한 음식을 먹고 소회를 한 후에 배설을 잘하면 대체로 병 없이 건강하게 산다.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작품을 쓰는 행위는 정신적인 배설 행위이기도 하다. 시 쓰기에서 소재를 선별하여 잘 쓰면 자신에게 만족되고, 그 작품은 발표를 통하여 독자들과 소통하며 공감을 얻는다. 그러면 작가와 독자는 모두 함께 문학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시 쓰기에 있어서의 의미와 이미지 표출은 궁극적으로 사랑이다. 그리고 행복한 생활이다. 시를 밤하늘에 뜬 예쁜 별이나 아름다운 꽃에만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늘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시(詩)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시를 발견하여 읽고 소설을 읽으며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시인과 작가들은, 더 치열한 문학정신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