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대결
2025. 1. 12(주일낮설교) 요나 4;10-11
공부에 한이 맺힌 목사님이 미국에 잠깐 유학을 다녀왔다. 그 후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미국이야기를 했다. 한두번도 아니고, 설교할 때마다 미국이야기를 들었던 성도들은 목사님께 미국 이야기를 앞으로는 그만 하셨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설교시간에 미국이야기는 계속되었는데, 어느날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미국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깜짝 놀란 성도는 그날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예배의 제일 마지막 순서인 축도시간이 되었다. 두 팔을 높이 든 목사님은 이렇게 축도한다.
지금은 내가 미국에 있을 때 함께하여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내게 지혜를 주어서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미국에서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실 지어다.
그날 성도들은 축도 때문에 받은 은혜 다 까먹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왜 목사님은 강단에 설 때마다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는가? 국어사전에서 고집을 찾으면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팀, 또는 그렇게 버티는 성미라고 정의한다. 쉽게 말하면 고집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바꿀 의향이 전혀 없는 성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혹시 저와 여러분에게 이 고집된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오늘 본문인 요나서를 보시기 바란다. 요나서의 시작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욘 1:1)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아밋대의 요나(BC 760년 경)에게 임하여서 니느웨로 가서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외치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요나는 우상숭배는 물론이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주변국가를 약탈과 살육하는 앗수르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다.
그래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요나는 어떤 일을 경험하는가? 요나는 풍랑을 만나야 했고, 또 물고기 뱃속에서 3일동안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자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므로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니느웨로 간 요나는 3일길을 걸어야 하는 니느웨를 하룻길만 걸으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고 외친다. 그런데 니느웨 성읍이 무너지지 않음으로 불평하는 자가 된다.
이상하지 않는가? 선지자(נָבִיא)라는 단어의 뜻은 대언자이다. 선지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대신하여 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에 전하라는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나는 왜 니느웨가 멸망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멸망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욘 1:2)고 말씀하였는데, 요나는 니느웨의 악독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요나는 자신이 선포한 말씀에 대한 응답을 보지 못하여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왜 선지자로 부름받은 요나는 선지자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겠는가? 요나서 4장 1-3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욘 4:1-3)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 악독하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커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는 분이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요나는 풍랑도 만나야하고, 또 물고기 뱃속에도 들어가야 하고, 또 불평이 가득찬 자가 되었던 것이다.
왜 요나가 이렇게 불평이 가득한 자가 되었는가? 2023년 카이스트 학위 수여식에서 차유진 박사과정 졸업생이 졸업생대표 연설을 하였다. 2004년 카이스트에 입학하여 2008년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충남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진학하여 방사선 종양학과 방사선종양학과 전문의가 되었다. 과학자의 길을 걷던 차유진 박사는 불투명한 과학자의 길보다는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는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그랬던 차유진 박사는 2018년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2023년에 졸업을 한 것이다.
왜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의사의 길을 걷던 차유진 박사가 다시 의학을 공부했겠는가? 그 이유는 동영상을 보고 찾아보기 바란다.
차유진 박사는 과학도가 아니라,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의사가 되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환자가 한쪽 다리에 골육종(뼈암)을 앓고 있었던 민지였다. 암을 이겨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가졌던 민지는 한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그 고통을 이겨내면서 차유진 박사에게 감동을 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암이 폐로 전이되면서 결국 민지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렇게 민지를 하늘나라로 보내는 날 차유진 박사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펑펑 울었다. 그리고 왜 민지를 살리지 못했을까? 하는 고민으로 오랜 시간 방황하였다. 민지도 나을 의지가 있었고, 또 차유진 박사도 최선을 다하였는데, 민지가 죽은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차유진 박사는 의학의 한계를 깨닫고, 그 한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과학기술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가 되어 그 답을 찾겠다는 꿈을 가지고 카이스트로 가서 거듭된 실패를 이겨내고 결국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과 요나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지 않는가? 요나도 자기 생각과 뜻을 굽히지 않았고, 또 차유진 박사도 자기 생각과 뜻을 굽히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요나의 고집에는 인상이 찡그려지는데, 차유진 박사의 고집에는 감동이 있다.
왜 같은 고집인데, 다른 반응이 나오게 되었는가? 요나서는 BC 760년 경에 기록된다. 그리고 40년이 지나 BC 721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요나의 고집대로 앗수르를 멸망시켰다면 북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역사를 보면 요나가 옳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서를 읽으면 요나의 고집에 감동을 받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요나서를 묵상하면 하나님의 고집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를 부르신 하나님은 요나가 다시스로 갈 때 풍랑으로 그를 바다에 던져지게 하시고, 또 물고기를 준비하여 3일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게 하신다. 그리고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신 후 하나님은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다시 임하신다. 그래서 요나는 어쩔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멸망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선언으로 니느웨를 회개케 하신 하나님은 불평하는 요나에게 오늘 본문으로 말씀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함께 읽기 바란다.
(욘 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는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져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여만명과 많은 가축을 아껴서 그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떤 일에 고집을 부리고 있는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세번째 간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진 하늘을 천국이라고 하고, 이제 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천국을 꿈꾸며 이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려면 내 뜻은 어떻게 되어야 하겠는가? 우리 가정에서 내 뜻이 온전히 이루어 질 때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천국이 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의 뜻은 죽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자여교회는 천국이 되는 것이다.
잘 기억하기 바란다. 천국은 내 뜻을 관철시키는 고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고집이 내 고집이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천국을 이루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제가 한빛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길 때 부교역자 자녀 에피소드가 몇 개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부목사님이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는데, 아들은 이사를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그래서 부목사님은 아빠가 한빛교회 온 지 오래 되어서 이제 다른 교회로 가야 한다고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그 아들이 윤희구 목사님은 아빠보다 더 먼저 왔는데, 왜 아빠가 가야해!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버금가는 에피소드가 주현이다. 아내가 담임목사님 댁에 주현이 심부름을 보내었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갑자기 찾아온 주현이에게 줄 것이 없어서 천원을 주었는데, 주현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어서 왜 안가니? 하고 물었더니 언니도 있는데 하고 말했다고 한다. 주머니를 뒤져도 천원짜리 하나 밖에 없었던 사모님은 그날 진땀을 뺐다고 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이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해도 이해되지 않고 설득되지 않는 아이들의 고집 때문에 한번씩 웃는다. 그런데 장년이 되어서도 자기 생각에 빠진 고집을 피우고 있다면 그 모습에는 귀여움도 감동도 없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나 내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고집이 내 고집이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짐을 믿기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고집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