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20대~40대에 강한 의지로 내 몸을 주도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몸이 따라왔다. 예를 들면, 오늘 밤샘한다고 하면 내 몸은 그것에 순응했다. 이 일을 마쳐야 한다고 하면, 거의 몸의 컨디션과 무관하게 수행했다. 그리고 몸의 회복을 위해 잘 먹고, 잘 자고, 잘했다. 나만 아니라 40대를 지난 자는 그렇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20대보단, 30대, 40대는 뭔가 모르게 몸 컨디션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요즘에 와서 깨달았지만 30대부터 근육량이 조금 줄어진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맨손 운동을 비롯하여 달리기를 하곤 했지만 꾸준하거나 유지하지 못했다. 아프거나 뭔가 이상 기온을 느낄 때마다 이따금 했다. 그래도 회복이 되다 보니 자만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튼 50대부턴 내 몸이 의지에 순응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고, 60대에 이르러선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과거부터 해온 달리기 운동에 더해 근육 운동을 한다. 몸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회복보단 더 나빠지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늘 무산소와 유산소 운동을 할 것이라고 결의, 결심, 다짐한다. 영어에 결의한다를 I am prepared that ... 이다. 영어엔 수동태를 사용하곤 하는데 매우 영어식이다. prepare라는 단어는 미리 준비하다는 동사인데 이것이 수동태가 되니 형용사 역할을 해서 주어를 수식한다. 단어의 해석은 나는 준비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의 또는 결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뿐만 아니다. I was given은 받았다는 뜻이고, I was taken은 빼앗겼다는 뜻이고, I am belonged to sb는 누구의 것이라는 뜻이다. 동사를 형용사로 사용하는 문법이 영어의 매력이다. 한국어에선 형용사가 발달돼 있지만 영어와 유럽어에는 동사가 발전돼 있다. 동사에서 명사도, 부사도, 형용사도, 관계절과 관계사도 만들어 낸다. 형용사는 형용사 대로 사용하면서도 동사와 명사를 형용사와 부사로 대용하여 쓴다.
몸의 컨디션을 위해 운동하기로 결의한다. 운동하기로 준비됐다. 이것은 만반의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이제 행동만 남았다. 이것이 결의이다. 행동은 자연스럽게 귀결한다. 이것은 믿음과 순종의 관계, 칭의와 성화의 관계, 의와 거룩의 관계와 같다. 믿음 없이 순종이 있거나 순종 없이 믿임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거나 신뢰하면서 그분의 명령에 따라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함정과 속임수가 있다. 그분의 명령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명령 수행인지,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는 명령 수행인지, 할 수 없지만 해야 하는 명령 수행인지 등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인간이 재간을 부려선 안 된다. 모든 명령을 수행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서도 안 된다. 어차피 완벽하게 못할 것이라는 핑계삼아 순종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순종의 자만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불순종으로 자책에 빠져 오히려 어긋난 행동을 택할 수도 있고, 원한 역할만 하여 순종했다고 만족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모두 잘못된 것이다. 정말 진정한 마음을 가졌다면 진실한 순종이 따른다. 진정하여 진실하다면, 겸손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모든 온전하게 못 할 것이기에 겸손하고, 순종했으니 자만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을 했으니 자만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자세를 청지기의 자세라 한다.
우리 몸은 내 것이라고 착각하면 내가 내 몸을 악용할 수도 있고 악용하고 한다. 내 몸은 그분께 속했다. 내가 자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만이다. 그분의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수동태로 대응해야 한다.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이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에 따라서, 로 말미암아 행해야 한다. 이것은 능동적인 자세보다 훨씬 강하다. 조동사 must보다 have to가 더 강력한 뜻을 갖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분에 의해 결의, 결심, 결정하여 수행하고 실행한다. 나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Because I am belonged to H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