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는 산뜻한 고층 건물들과 그 사이로 쭉 뻗은 넓은 중심가가 있고 그 배후에 고가의, 초고가의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강남에는 그곳만의 멋들어진 스타일이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택시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강남의 거리 분위기는 그다지 품격 있어 보이지 않았다. 간선도로 옆으로 늘어선 3-4층짜리 상가 건물들은 낡아 보였고, 거기에, 아마도 세든, 작은 영업점—곰탕집, 중국집, 피자가게, 편의점, 부동산중개업소, 성형외과나 이비인후과 등 개인병원, 약국, 각종 학원들, 스마트폰 가게, 카페, 세탁소, 미장원 등—들이 대박에의 염원을 담은 간판들을 명찰처럼 달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런 거리 모습은 지방인 우리 동네 풍경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차이라면 그곳에 드나드는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어머,”라는 감탄사를 사용하는데 비해서, 교양 없는 우리 동네 사람들은 “오메”라는 표현을 내뱉는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내 눈에 비친 강남의 거리 풍경이 서울의 진면목은 아닐 것이다. 서울에 어엿한 내 집을 마련하여 자리 잡고 살지 않는다면 그곳의 고매한 문화와 막강한 부의 힘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주마간산으로 둘러보아서는 서울 시민들의 우월감과 자긍심의 원천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서울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강남에 고가의 아파트 한 채 가지고 있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간혹 해볼 때가 있다. 집값이 일 년 사이에 두 배 세 배 올라가는 걸 보고만 있어도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상상을 실행에 옮기려고 마음먹은 적은 없다. 그게 현실적으로 언감생심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지 못했던 것이다.
내 눈에도 한때는 서울이 찬란한 꿈의 도시로 비쳐진 적이 있다. 대학생 시절에 방학 때, 버스 외벽에 날렵한 거북이 모습이 그려진 광주고속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 서울에 가서 한 달 정도 친척집에 머물다 광주로 돌아오면 그전까지 나의 신나는 활동무대였던 광주 거리가 한적해 보이고, 그곳의 행인들이 촌스럽고 느려 보였다. 하지만 광주에 살다가 목포나 순천에 가면 내 눈이 또 다시 그곳의 한가하고 나른한 분위기를 그런 방식으로 얕잡아 인식했다. 내 눈은 정말 간사하고 사삭스러웠다. 그러다가 30대 초반의 나이에 부랴부랴 뉴욕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9년 가까이 살다 한국에 돌아오니 서울이 화려해 보이지도 으리으리해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좀 촌스러워 보였다.
대도시는, 뉴욕이든 시카고든 서울이든 도쿄든 베이징이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은 흡인력을 가졌다. 나는 그 자력이 도시와 문명, 문화에 대한 인간의 본성적 욕망에서 생겨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현상을 두고 미국 소설가 드라이저(Theodore Dreiser)는 『시스터 캐리』(Sister Carrie)라는 소설에서 19세기 말 시카고를 “거대한 자석”(a giant magnet)이라고 묘사한다. 대도시가 부와 성공과 쾌락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한편 피츠제럴드 (Scott Fitzgerald)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서 20세기 초반 뉴욕 맨해튼을 “쌓아올려진 하얀 각설탕 덩어리들”(white heaps and sugar lumps)이라고 표현한다. 소설의 화자가 이스트리버 위로 나 있는 퀸즈보로 브릿지(Queensboro Bridge)를 자동차로 건너가면서 햇빛이 비쳐진 맨해튼을 바라보며 그곳의 고층건물들과 스카이라인을 그렇게 표현한다. 자본주의(capitalism)의 수도(capital city)로 불리는 뉴욕이나 대한민국의 심장인 수도 서울, 그곳의 핵심인 강남의 스타일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우리의 특별한 광주시도 멀리에서 보면 쌓아올려진 하얀 건물 덩어리들로 보인다. 엊그제도 무안-광주 고속도로를 통해 광주시도 들어올 때 나주에서 서광산 IC 사이를 지나면서 2시 방향을 바라보니 저 멀리에 무등산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자락에 하얀 각설탕 덩어리들로 쌓여 올려진 광주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를 지향하는 인간의 욕망은, 어찌 보면, 우리의 비인간적인 측면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인간적인 측면이다. 우리에게서 성공과 부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는 도시 욕망의 속성들을 완전히 제거해 버린다면 우리가 다른 어떤 방식으로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드라이저는 『시스터 캐리』에서 “만약 인간에게 환락이라는 인위적인 불꽃이 없다면, 이윤을 찾아 몰리는 사업체들이나 쾌락을 팔고 사는 오락이 없다면, 만약 모든 상인들이 그들의 진열장 안팎에 그 모든 물건을 차려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의 거리들이 화려한 색깔의 간판들로 즐비하지 않고 물건을 사러 몰려다니는 군중들로 북적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장에 겨울의 냉혹한 손길이 얼마나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지 알게 될 것이다. ... [만약 그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태양열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그 열이 사라져버리면 죽어버리는 벌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인위적인 불꽃”으로 상징되는 도시가 우리에게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인간만의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마다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인위적인 불꽃” 축제가 행해지고 수백만의 서울사람들이 모여 이를 우러러 보며 열광한다. 서울에는 123층짜리 롯데월드타워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고, 거기에 들어선 당당한 규모의 콘서트홀에서는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연주회가 열린다. 그에 비해 광주시에는 48층짜리 호반써밋이 세워져 있고, 옛 도청 자리 지하에 들어선 아시아문화센터의 연주홀에서는 소박한 연주회가 열린다. 서울특별시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주시보다 훨씬 우월하다. 그곳이 이곳보다 사람들이 훨씬 더 많고, 돈이 훨씬 더 많고, 욕망의 열기가 훨씬 더 높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나의 마음 한구석에 감히 서울을 얕잡아보려는 무모한 심리가 생겨나 있는듯하다. 서울에 사는 친척들이나 지인들의 생활을 다소라도 들여다보거나, 티비 일일드라마에서 서울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감상하며 내가 느끼는 것은 그들의 일상생활이 나의 그것과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옷차림이나 집안 구조, 그들이 사용하는 자동차나 가구나 가전제품 등이 내가 사용하는 그것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이 구입해서 먹고 사는 식료품이 내가 마트에서 사다가, 혹은 쿠팡에서 로켓배송해서 먹는 농수축산 식품들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그래서인지 나는 서울 생활이나 그곳 사람들이 별로 부럽지 않다. 어쩌다 내가 답답하고도 편안한 시골쥐가 되었나 보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지방’—중소도시와 시골—에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의 ‘지방’에도 나와 같은 부류의 시골쥐들이 살고 있다. 비록 대부분이 노인들이지만, 그들은 자기 동네가 가장 살기 좋다고 믿으며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가슴속에 욕망의 불꽃이 거의 사그라져 버린 시골쥐인 나에게 요즘 「반야심경」을 수시로 암송하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 「반야심경」에서는 쌓아 올려진 하얀 각설탕의 물질세계(色)도, 그걸 지각하거나 인식하는 인간의 내면세계(受想行識)도 모두 공하다고, 즉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설한다. 그 참뜻을 내가 아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는 괜스레 중얼거린다, “색즉시공 ... 무색성향미촉법 ...”
첫댓글 다 알지 못 함는 것 같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표현 입니다.
저는 조금은 느슨한 광주의 삶이 좋아요.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광주행 ktx에 올랐을 때의 안도감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