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규 선생님
〓대한민국 문단 활동의 시작,
- 문단에 이끈 최도규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
- 강원아동문학 3집(강원아동문학회).
다시 50년이 지나 태백(황지)에 와서 …
시, ‘호수’ 작품으로 문인의 첫 길을 열다
남 진 원
1975년 늦은 봄이었다. 이곳 황지는 지대가 높아서 늦은 봄이지만 겨울을 많이 닮아 있었다. 날씨가 추워서 5월까지는 교무실에 난로를 피우기도 하였다. 가끔 그랬듯이 저녁 식사를 한 후, 교무실로 향했다. 국민 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고 온 곳이 이곳 황지읍, 지금의 태백시인 화전 국민 학교였다. 학교 건물 뒷편으로 광산 사택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숙직실이 없기에 교사들은 숙직을 교무실에서 하였다. 잠들 때엔 큰 책상 위에 요를 깔고 누웠다. 이불을 덮고 있으면 더울 정도였다. 교무실 조개탄의 난로 열기가 훈훈하게 뎁혀 주었기 때문이었다. 학교 아저씨인 김씨와 하루 한 번 조개탄 연탄재를 청소해놓으면 조개탄의 열기로 교무실이 아늑하였다.
탄가루 먼지가 덮인 책상을 물걸레로 잘 닦았다. 이불을 널따란 책상 위에 펴놓고 난롯가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최도규 선생님이 이 학교에 온 후부터 나는 ‘시’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다. 시라면 국민 학교 다닐 때 김상옥의 ‘봉선화’와 길재의 시조 ‘오백년 도읍지를’ 작품을 좋아하여 외운 적이 있기도하다. 고등학교에 와서는 박목월의 ‘나그네’, 조지훈의 ‘승무’, 조병화의 ‘의자’라는 시가 눈에 띄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이호우의 시조 ‘살구꽃 피는 마을’ 작품엔 흠뻑 빠지기도 하였다. 내가 최고의 아름다운 시로 평가하는 작품이다.
1974년 나는 5학년 담임을 맡았다. 나는 2학기가 끝날 무렵, 우리 학급 5학년 아이들의 시를 ‘나룻배’란 제호로 만들었다. 물론 동시짓기를 가르친 후에 창작한 아이들의 작품이었다. 물론 첨삭도 하고 가필도 하였다. 그리고 가리방으로 긁어서 만든 문집이었다.
1975년 3월 2일자로 황지 국민 학교에서 화전 국민 학교에 전근을 온 최도규 선생님은 교실 어느 구석에선가, 그 문집을 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시를 쓰는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여겼던 것일까? 직원들과의 술자리에선 꼭 내 이름을 부르며 주위 선생님들을 향해 외쳤다. 시를 잘 쓴다는 칭찬의 외침이었고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 나는 당시 ‘멀지 않았다’는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몰랐다. 최도규 선생님은 이곳에 오시기 전에 이미 『교육자료』[교자문원]과 『새교실』의 [지우문예] 란에서 시 추천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1972년에 창립한 [강원아동문학회]의 창립 회원이기도 했다.
『교육자료」와 『새교실』은 교사들이 보는 월간지 교육잡지였다. 『교육자료』 는 한국교육출판사에서 제작하는 교육 전문 잡지였고 『새교실』은 대한교육연합회에서 발간하는 교육 전문 잡지였다. 선생님들은 당시 의무적으로 이 두권의 서적 중에 하나는 보아야만 하였다. 이곳에서는 교사들의 우수한 문예 작품을 추천하였는데 심사위원은 우리나라의 권위 있는 원로 시인이나 작가였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 역시 이 잡지의 추천을 받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시 쓰기에 골몰하고 있던 중, ‘드르륵’ 교무실 문이 열렸다. 최도규 선생님이셨다. 이곳에 근무하는 선생님들 중엔 저녁이면 식사를 한 후에 교무실로 놀러 오시기도 하였다. 교무실엔 텔레비전이 있어서 심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선생, 숙직이야?”
“네, 형님!”
나는 반색을 하며 반겼다. 연세가 열 살 위인 최도규 선생님께 현님과 같은 친근함이 느껴져 평상시엔 ‘형님’이러고 불렀다.
“마무리가 잘 안 되네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마침, 쓰던 작품을 보여드렸다. 한참 들여다 보던 도규 형님은 볼펜으로 끝 부분을 고쳐놓았다. 나는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글자 몇 개를 바뀐 것인데 완전히 작품의 품격이 달라져 있었다. 느슨하던 글이 팽팽해져 있었다.
이렇게 하여 쓴 시가 [강원아동문학]3집에 게재되었다. 최초로 아동문학단체 전문지에 작품이 실린 것이었다. 물론 최도규 선생님의 배려로 된 일이었다. 그 작품 발표로 나는 [강원아동문학회] 회원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50년 2024년 까지 강원아동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발표하였다. 2015년에서 2018년까지는 강원아동문학회를 운영하는 회장 직을 맡아 아동문학의 새로운 방향성과 확장성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다음은 바로 [강원아동문학] 3집에 발표한 작품이다.
호 수
남진원
쑤욱 쑥 나무들
누구 키가 더 크나
들여다보고
울긋불긋 나무들
누가 더 예쁜가
들여다보고
볼 때마다
커지는
나무들의 꿈
클 때마다
보고 싶은
나무들 마음
그때마다
빙그르르
바람 따라 웃고
그때마다
방글
해님 따라 웃는
나무들의
꿈이 크는
호수
(1975. 8. 강원아동문학 제3집)
처음 쓴 작품은 ‘물’을 소재로 한 시 작품이다. ‘물과 불, 공기’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질들이다. 호수는 물이 높은 곳에서부터 흘러와 깊고 넓은 곳에 모여 있는 물이다.
호수는 땅의 바닥이 둥글고 크게 파인 낮은 곳에 많은 물이 고인 곳이다. 산 정성에 호수가 있는 것은 산 가운데가 푹 파였기 때문이다.한라산 백록담이나 백두산 천지 호수는 그 예라고 하겠다.이러한 호수는 옛사람이나 문인들로부터 경이로움의 시적 대상이 되었다.
어느 분은 우리 민족이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살다가 동남쪽으로 이주한 민족이라고도 한다. 사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의 얼굴과 많이 닮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은 물을 사랑한 민족이 아니었을까.
호수의 작품으로는.조선 시대 강릉의 시인 박수량의 유명한 한시 ‘호수’를 들 수 있다. 호수 옆에 지어놓은 관동8경의 하나인‘경포대에 올라’라는 작품으로 경포 호수를 보며 쓴 작품이다.
강릉의 위인 중에 의롭고 선(善)하게 살다 가신 분으로 박수량이란 분이 있다. 참으로 깨끗한 성품으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좋은 본이 되는 분이다.
연산조 10년에 사마시에 등과하였고 용궁현감을 지냈다. 현감으로 지낼 때에는 인과 덕으로 다스리고 청렴한 관리로 그 이름이 빛났다.강릉12향현의 한 분으로 관직에 있은 지 30년이지만 집 한 채 장만하지 않으신 청렴한 분이었다.
박수량 선생께서‘경포대에 올라서’라는 시를 지었는데,시를 보면 그의 인품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등경포대登鏡浦臺
박수량
鏡面磨平水府深 (경면마평수부심) 깊은 물 경호는 그림 같은데
只監形影未監心 (지감형영미감심) 아름다운 겉모습 마음까지 비칠 수 있으랴
若敎肝膽俱明照 (약교간담구명조) 사람의 깊은 마음 비춰 보인다면
臺上應知客罕臨 (대상응지객한림) 경포대 오를 사람 몇이나 될까.
선생은 호를 삼가三可라고 하는데 세 가지 가하다는 뜻이다. 그 세 가지 중의 첫째는 학문이 없으면서도 사마시에 올라 욕되지 아니하니 가하고 둘째는 전답이 없으면서도 하루 두 끼를 굶지 아니하니 가하다고 했으며 셋째는 어질고 지혜롭지도 못한 사람이 산과 물을 벗할 수 있으니 속되지 않아서 가하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지초와 난초 같은 삼가 박수량 선생의 고아하고 담백한 인품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찌 오늘 작은 욕심에 연연해하는 우리들에게 큰 위안이 되지 않을 분인가!
요즘 항간에 떠도는 재밌는 유머가 하나 있다. 서울의 한강에 거지와 국회의원이 빠져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를 본 구조 대원이 거지는 두고 국회의원을 먼저 거져 구해 주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구조한 사람을 향해 말했다.
“역시, 권력자이기에 먼저 구해 주었구먼, 쯧쯧 거지만 불쌍하지!” 하며 구조대원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그 구조대원이 국회의원을 먼저 구조한 이유를 말해 주었다.
“ 한강의 맑은 물이 더 빨리 오염될까 봐 그렇게 하였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의아해 하였으나 잠시후, “그래, 그렇군!” 하며 큰 소리로 무릎을 치며 웃었다고 한다.
나는 박수량, 그분의 청렴함과 도덕성에 손을 모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조 한 수를 지었다.
박 수 량
남진원
참으로 곧은 마음 청렴으로 빛나셨네
선함을 실천하여 만세의 거울 되고
덕으로 베푼 선정은 청사 속에 우뚝하오
박수량의 ‘등 경포대에 올라’의 작품은 인간의 반성에 대한 도덕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시적 상징에서, 호수를 ‘마음을 비추는 반성의 거울’로 본 것이다.
1975년, 내가 쓴 앞의 작품, 동시 ‘호수’는 호수를 거울로 상징하였다. 나무들의 희망과 꿈을 그린 작품이다. 나무들은 또한 어린이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강릉의 경포 호수는 강릉의 바닷가에 인접해 있다. 호수가 보고 싶으면 거침없이 차를 타고 내달린다. 경포로 가는 버스도 많고 택시나 콜밴도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곳이었다.
호수 주위를 걷고 있으면 호숫가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나무들이 모두 모습을 호수에 드리우고 있었던 것. 그걸 보고 있으려면 희망을 품고 자라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떠오르곤 하였다.
그러니 호수는 단순한 호수가 아니라, 꿈의 거울이었고 나무들은 푸릇푸릇 자라는 어린이들의 모습처럼 보였다.
지금도 강릉의 경포 호수를 거닐 때면 그런 모습을 떠올리곤 미소 짓는다. 내 시의 꿈이 자랐던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