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布德式 덕을 퍼트리는 의식
人有願入者, 則先入者傳道之時, 正衣冠, 禮以授之事. 사람 중에 입도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먼저 입도한 사람이 도를 전할 때에 의관을 정제하고 예로써 그것을 전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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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맨 마지막의 ‘事(사)’자는 보통 ‘~할 일’ 또는 ‘~할 것’ 등으로 번역합니다.
【박맹수】 그동안 동학의 종교의식에 대해서는 별로 연구가 되지 않았는데, 그런 점에서도 이 사료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의관을 정제한다(正衣冠)”는 말은 단순하게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동학이 들불처럼 퍼져 나갈 때 해월이 「통유십조」라는 강령을 하달한 적이 있는데, 이 열 개의 실천강령 속에도 “의관을 정제한다”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공개적인 신원운동을 하는 「광화문복합상소」 때에도 “의관을 단정히 한 사람을 뽑아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의관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 동학에서 매우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동학이 1905년에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공식종교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불법이었다는 사정과 맞물려 있는 것 같습니다.
入道式 도에 들어가는 의식
入道之時, 或向東或北設位, 致誠行祀, 焚香四拜後, 以初入呪文, 敬以受之事. 입도할 때에는 동쪽을 향하거나 북쪽을 향해서 자리를 설치하고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행하고 향불을 사르고 네 번 절한 후에 초입주문으로 공경하게 받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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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먼저 입도자 주문은 동경대전에 나와 있는데 “하늘님을 위하면 내 사정을 돌아보시고 영원히 잊지 않으면 모든 일이 잘된다”(爲天主顧我情, 永世不忘萬事宜)입니다. 그리고 ‘設位’(설위)는 보통 “위패를 설치한다”고 번역되어 있던데, “의식의 자리를 편다”는 번역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박맹수】 제 생각에도 “의식의 자리를 편다”는 번역이 좋을 것 같습니다. 1860년대에 동학이 퍼져가는 과정을 ‘처남포덕’(각주 설명)이라고 하고, 1880년대 이후에 들불처럼 전파되는 과정을 ‘마당포덕’(각주 설명)이라고 하는데, 마당포덕의 입도식은 기록에도 나옵니다. 홍종식의 「동학난실화」를 보면 “접주 집 마당에 상을 하나 놓고 청수를 떠놓고 의관을 정제하고 선생과 제자 주문을 외우고....”이라고 나옵니다. 이렇게 청수를 떠놓았다는 기록은 많이 나와도 위패를 설치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位’는 위패라기보다는 ‘자리’나 ‘식전’의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성환】 제 생각에 이것은 입도식이라서 하늘님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위패를 안 모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해월이 말한 “향벽설위”나 “향아설위”(각주 설명)라고 할 때의 ‘위’도 ‘자리’로 보아야 하나요?
【박맹수】 그 때는 ‘위패’라는 의미이죠. 위패의 방향을 벽쪽으로 할 것인가 내쪽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이니까요. 아울러 자리를 까는 방향이 왜 동쪽이고 북쪽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쪽일 수도 있고 남쪽일 수도 있는데요...가령 오행(五行)사상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동쪽이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동쪽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성환】 그러면 “향아설위”는 “나를 향해 위패를 세우라”는 말이 되는데, 나의 신위도 썼다는 것인가요?
致祭式 제사지내는 의식
入道後, 致祭節次, 設位四拜, 後讀祝而卽誦降靈呪及本呪之事. 입도한 후에 제사지내는 절차는 자리를 펴고 네 번 절한 후에 축문을 읽고 곧바로 강령주문과 본주문을 외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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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참고로 동경대전에 소개되어 있는 「축문」과 본주문 그리고 강령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축문」 “조선에 태어나 살면서 욕되이 인륜에 처하여 천지의 덮고 실어주는 은혜를 느끼며 일월이 비추어 주는 덕을 입었으나, 아직 참에 돌아가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해에 잠기어 마음에 잊고 잃음이 많더니, 이제 이 성세에 도를 선생께 깨달아 이전의 허물을 참회하고 일체의 선에 따르기를 원하여, 길이 모셔 잊지 아니하고 도를 마음공부에 두어 거의 수련하는데 이르렀습니다. 이제 좋은 날에 도장을 깨끗이 하고, 삼가 청작과 서수로써 받들어 청하오니 흠향하옵소서.”
「강령주문」 “지극한 기운이 지금 여기에 크게 내리기를 기원합니다.”(至氣今至願爲大降)
「본주문」 “하늘님을 모시면 조화가 정해지고 영원히 잊지 않으면 모든 일이 정해진다”(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定)
祭需式 제사음식을 바치는 의식
設其醴酒, 餠麵魚?ㅡ 果種脯?, 菜蔬香燭用之, 而以肉種論之, 雉則例用, 需之多少, 隨其力而行之也. 술과 떡과 국수 어물 생선 과일 포...채소와 향과 초 등을 고기 종류를 논하면 쇠고기는 의례적으로 사용하고, 제수의 양은 형편에 따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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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醴(예)’는 ‘단술’을 말합니다. 제사지낼 때 ‘청주’ 같은 것이죠. ‘병’은 ‘떡’이고,
‘脯(포)’는
‘雉(치)’는 꿩을 말하는데 대부분 ‘쇠고기’라고 번역합니다. ‘例用(예용)’은 “통상 쓴다” 또는 “늘 쓴다”는 뜻입니다. ‘力’은 그 사람의 ‘형편’을 말합니다.
先生布德之初, 以牛羊豬肉通用矣. 至於癸亥八月, 先生顧予傳道之日. 此道兼儒彿仙三道之敎, 故不用肉腫事. 선생께서 덕을 펴시는 초기에는 소고기와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통상 썼다. 계해년(1863년) 8월에 이르러, 선생께서 나를 보고서 도를 전해주는 날에, 이 도는 유불선 삼도의 가르침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고기 종류는 쓰지 말라(고 하셨다). |
【김봉곤】 ‘양(羊)’은 우리나라에는 양이 없으니까 아마 염소고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顧(고)’는 ‘돌아보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주 초기에는 고기를 썼다가 1863년에 최시형이 제2대 교주가 되고 나서는 그냥 청수만 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맹수】 앞의 「포덕식」·「입도식」이 입도와 관련된 의식이라고 한다면, 뒤의 「치제식」과 「제수식」은 제사와 관련된 의식입니다. 초기 동학에서는 크게 세 번의 제사를 지냅니다. 해월은 스승인 최시형이 순교한 뒤에 일월산에 숨어 들어가는데, 어느 정도 탄압도 누그러지고 제자들과 연락도 되니까 1년에 세 번의 제사를 지냅니다.
하나는 수운이 죽은 3월 10일의 기제사(忌祭祀)이고, 두 번째는 수운이 득도한 4월 5일이고, 세 번째는 수운이 태어난 10월 28일의 탄신제입니다. 제수식은 이때 쓰는 의식입니다. 해월은 이 세 차례의 제사를 통해서 동학재건을 도모합니다.
동학의식은 1870년에 강원도로 옮겨 가면서 체계화되고 정리가 됩니다. 거기에서 인등제(引燈祭)와 구성제(九星祭)가 차례로 시행되는데, 이 의식의 궁극적인 목적도 동학의 재건과 조직화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네트워크를 만들고 돈을 마련합니다. 그 성과가 다시 개접(開接)인데, ‘개접’이란 정기훈련이나 수련회를 말합니다. 원래는 수운이 했는데, 그 뒤로 십여 년 동안 못하다가, 이것을 파접(罷接)이라고 합니다, 파접하고 십여 년 만에 해월이 강원도에서 다시 개접을 한 것이지요. 이처럼 개접은 동학조직이 살아나는 변화를 상징하는데, 이것을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바로 동학의 제사입니다. 즉 제사는 동학 재건의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의식을 정비한 다음의 작업은 경전편찬이었습니다. 1880년에 동경대전 초판이 나오는데, 그 간행 비용을 댄 사람들이 다 이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입니다. 사실 어떤 운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요인의 절반 이상은 재정문제입니다. 1860년에 동학이 탄압받기 시작한 뒤에 어떻게 갑오년까지 성장해 올 수 있었는가의 비결도 바로 이런 방식의 재정조달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정부쪽 기록에도 동학의 종교의식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데요, 수운을 체포한 선전관 정운구의 보고서(서계(書啓))와 수운을 심문한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의 심문기록(장계(狀啓))이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에 실려 있는데, 이 자료를 보면 수운이 살아 있을 때에 초하루와 보름에 산에 올라가서 천제(天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천제가 동학의 중요한 종교의식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동학 내의 기록에는 천제에 관한 내용은 거의 안 나옵니다.
그리고 천제 뿐만 아니라 주문이나 부적도 동학에서 먼저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주문을 대중화시킨 것은 증산도를 창시한 강증산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은 수운 최제우가 원조입니다. 강증산은 그것을 민중들의 마음속에 확실하게 심은 사람이지요. 부적, 즉 영부 역시 수운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민초들이 수운의 등장을 계기로 천제를 지내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천제가 지니는 사상사적 의미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조성환 박사님께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동학 이전까지는 그럼 누가 천제를 지냈을까요?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조성환】 제가 천재가 아니라서...(웃음)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최종성 교수님의 논문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도 민중들이 숨어서 천제를 지냈다고 합니다(각주). 그러나 공식적으로 또는 교단적 차원에서 천제를 지내게 된 건 역시 동학에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그 누구도 천제를 지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리학적 질서에 따르면 오직 중국의 천자만이 천제를 지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천제에 관한 논쟁이 나옵니다.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인 이상 천제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다수의 주장에 대해 변계량이라는 학자가 반론을 펼치는데, 그것의 핵심은 “우리 동방은 단군이 시조인데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지 중국에서 책봉한 제후가 아니다. 따라서 천제를 지내도 상관없다. 실제로 지난 천여년 이상 천제를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폐지하는 것은 불가하다.” 이것을 기록한 사관은 변계량의 이 주장을 ‘동국사천설(東國祀天說)’이라고 하였는데, 저는 보통 ‘동국제천설(東國祭天說)’이라고 부릅니다. “동국, 즉 동방의 나라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주장”이라는 뜻이지요.
변계량의 이 주장은 제천행사와 단군신화를 교묘하게 섞어서 천제를 지내야 된다는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13세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단군신화에는 천제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천제에 관한 기록은 3~4세기 무렵에 쓰여진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위지의 「동이전」에 나옵니다. 이 사료에 의하면 고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분포하고 있던 부족국가들이 대부분 제천행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국중대회, 음주가무” 또는 “비단 옷을 입었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전국적인 축제 같은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공회’라고도 표현했는데, 직역하면 ‘공공모임’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촛불집회와 같은 전국민적 행사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당시 중국인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이색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천자 일인만이 천제를 지낼 수 있는데 이 동이족의 국가들은 모두가 모여서 다 함께 천제를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이 점이야말로 중국의 ‘天’과 한국의 ‘하늘’이 갈리는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중국에서 天은 공식적으로는 천자만이 소통할 수 있는 대단히 제한된 것이고, 그래서 제천의례도 천자에게만 허용된 정치적인 행사인 반면에, 한국의 하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그래서 제천의례도 모두가 참여하는 공공적인 행사였고, 이것이 부활된 것이 중국적인 천하 질서가 깨진 구한말이었다는 것이지요.
동학을 비롯하여, 천도교, 대종교, 증산교, 원불교와 같이 식민지시대를 전후로 탄생한 이른바 민족종교들이 하나같이 천제를 지냈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하늘’이야말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이자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신령한 존재였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사상적으로는 퇴계의 경천사상이나 다산의 천주교 수용 또는 동학의 “인내천”(모두가 하늘이다) 등으로 나타나고, 문학적으로는 윤동주의 「서시」나 박노해의 「너의 하늘을 보라」 등으로 표현되며, 언어적으로는 한글의 창제원리(초중종 삼성 중의 중성), ‘하느님’이나 하늘이 붙은 다양한 명사어로 나타나고, 종교적으로는 천제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박맹수】 감사합니다. 그럼 철학적으로 보면 한국인에게 ‘하늘’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조성환】 그것은 동학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한국인의 하늘사상이나 하늘관념이 하나의 학문형태로 집대성된 것이 바로 동학입니다. 그것은 동학을 ‘천도(天道)’라고 부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데요, 동학의 “사람이 하늘이다”는 사상은 민중들에게 강한 자존감과 주체의식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래서 역사를 변혁시키는 주체로 거듭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것도 유독 한국에서만 가능했던 이유는,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민’이 주체라는 사상이 강했고, 그것이 고대 부족국가에서 모두가 하늘에 제사지낸다는 제천의례로 표현되었고, 동학에서는 “모두가 하늘을 모신다”는 인내천 사상으로 재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박맹수】 잘 알겠습니다. 그럼 종교학을 하시는 허남진 박사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남진】 저는 동학 내부에서의 ‘천’에 대한 의례의 변천과정에 주목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늘을 바라보는 고천제를 지내다가, 그 다음에는 하늘에 있는 별을 제사지내는 구성제, 그리고 마지막에는 멀리 있는 하늘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시천주나 향아설위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박맹수】 예. 확실히 최종적으로 정리되는 것은 ‘향아설위’라고 보아야겠지요. 향아설위는 1896년, 해월이 죽기 1년 전에 설파한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초기의 유교나 도교의 영향이 산발적으로 보이는 것이 구성제 단계라고 한다면, 향아설위는 거기에서 벗어나서 동학 이론이 정립된 시기의 제사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박맹수】 유교에서는 천제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김봉곤】 유교에서는 보통 자기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초월적인 것을 제사지내는 것은 ‘음사’라고 해서 경계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조상 제사를 지내고, 천제는 역시 천자만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반란을 일으킬 때에 보면 대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산천에 지냅니다. 가령 1860년대에 변산에서 일어난 민란은 .....
그래서 천제를 지내는 것은 동학에나 와야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허남진】 그럼 동학에서 천제를 지낸 다음에는 어디에서 지내나요? 증산교인가요?
【조성환】 대종교에서도 지내고 증산계의 여러 계파에서도 지내고, 여기저기에서 다 부활되는 거죠.
【박맹수】 동학 이후에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이 “나는 후동학이다”고 했고, 이어서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이 강증산을 비난하자 “증산선생은 선지자다”고 옹호했고, 수운의 무덤에 가서 는 “자기가 자기 무덤에 절하는 것을 보았느냐?라며 자신이 수운의 환생이라고 스스로 자임한 것을 보면,
종교의식도 약간의 형식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동학-증산교-원불교에 흐르는 기본정신은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원불교의 경우에는 사실을 합리화하려는 경향, 근대적인 이성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그것을 원불교 교리에서는 ‘진리적 신앙’, ‘사실적 도덕’ 등으로 표현합니다만, 신비적인 것을 모두 합리적인 것으로 바꾼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록에 보면 신비적인 흔적들이 다 있습니다. 소태산도 처음에는 아무런 기반이 없으니까 증산교에서 천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여 천제를 지내게 됩니다. 이것이 이후에 원불교 의례가 제도화됨에 따라 다 제거되게 되지요.
【조성환】 참고로 한국과 하늘의 관계에 대해서 보충설명을 드리면, 최제우가 ‘동학’을 ‘천도’라고도 했는데, ‘동학’은 지역을 중심으로 붙인 명칭이고 ‘천도’는 주제를 중심으로 만든 개념입니다. 즉 이때의 ‘동’이 지역적으로 한반도 일대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동학은 곧 한국학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데, 그 한국학의 테마를 왜 하필 하늘로 잡았을까요? 아마도 한국=하늘이라는 의식이 강해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제를 부활시킨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연결고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동학에서 왜 천제를 지냈는지에 대한...
【박맹수】 야규 박사님, 일본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제3자의 입장에서 다른 각도로 한 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규 마코토】 고사기나 일본서기와 같은 고대 일본의 역사서를 보면, 신들이 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여기에서는 신들이 말을 하는데, 천리교나 오오모토교와 같은 근대의 신종교에 오면 알려주지 않던 신이 지상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계시를 준다는 모티브가 강합니다. 신도에서는 하늘에 있는 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하늘에게 직접 제사를 지내는 경우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