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알이 된 토마스 선교사
요한복음 12:24
박시영 목사(무지개전원교회 담임, 경남성시화운동본부 대표 본부장)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는 1840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교사의 꿈을 품었다. 1863년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땅에 도착한 그는 그로부터 2년 뒤 조선에 대한 정도를 듣게 된다. 조선에 가보고 싶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작은 목선을 타고 1865년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1865년, 토마스는 산둥성의 지푸항을 출발하여 한국 전도의 장도에 올랐고, 9일간의 항해 끝에 황해도 장연 부근의 어느 해안에 상륙하여 약 2개월 반 동안 황해도 서해안과 도서지방에서 전도를 하고, 2월 초순 한국을 떠나 요동반도를 거쳐 육로로 북경에 귀환한다.
그러던 중에 토마스 선교사는 우연히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황해도 장연에서 목선을 필사적으로 탈출한 김자평, 최선일 등 천주교인 2명을 만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것을 보고 자극을 받은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더욱 확고히 하고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에게 조선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미국 제너럴셔먼 호가 조선과 통상을 시도하려고 통역관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자원하여 그 배를 타고 성경책을 가지고서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토마스는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로부터 받을 환영을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 오르고 희망에 부풉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하기 위하여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반드시 인정해 주시리라 믿으며 나는 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함 뒤에는 조선의 정치적 상황이 주는 위험도 함께하고 있었다. “아주 잔인하고 사악한 대학살이 최근 조선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조선에 들어가 선교의 문을 여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아 제가 조선에 들어가기를 결정하였습니다” 이 대학살이 바로 1866년 2월에 시작된 병인박해이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절두봉(절두산)에서 목베임 당했으며, 전국적으로 8,0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죽임을 당했던 사건이 일어난 해가 바로 1866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조선에 들어가 선교의 문을 열어야 함을 알기에 그 해 8월, 제너널 셔먼호에 몸을 실었다.
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4일, 우려했던 대로 조선군과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복음을 전했다.
그것은 그의 사명이었다. 씨를 뿌리는 사명! 열매가 없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을지언정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씨를 뿌리는 사명... 젊디젊은 27세의 나이, 죽는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평양 대동강변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질 것을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피를 흘리며 그가 전해 주었던 성경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는 훗날 평양에서 신앙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대동강변서 토마스의 목을 쳤던 조선 군인 박춘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오문환 《토마스 목사전》 중에서)
조선 군인 박춘권은 후에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 당하기 전, 다른 사람에게도 성경을 나눠 줬는데 최치량이라는 당시 12세 소년이 그것을 받아서 박영식이라는 당시 평양성 관리(영문 주사)에게 건네주었다. 그 성경은 한문 성경이었는데 박영식은 성경을 보고 참 좋아했다. 당시에는 책이나 종이가 매우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문 성경을 찢어서 그 종이로 자기 집 방에 도배를 했다. 도배를 하고 보니, 아침에 눈을 떠도 성경, 밥을 먹을 때도 성경, 몸을 이리 뒤척여도 성경, 저리 뒤척여도 성경이 보였다. 그래서 도배한 성경을 읽다가 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또한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종이가 너무 좋다고 그 성경을 한 장 한 장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 교회의 예배 처소가 되었다. 널다리 교회는 나중에 이름이 평양 장대현 교회로 바뀌었다. 그 장대현 교회에서 1907년 한국에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이다.
몇년 후에, 조선이 개화되고, 평양에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들어왔다. 그가 박영식의 집에 들어가 보니까, 그 벽에 중국어 성경책이 벽에 도배되어 있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가 평양에 최초로 선교사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먼저 평양에 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다. . 마펫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뜨겁게 기도했다. '주여,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올해는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9월 5일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토마스 선교사 순교기념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오랜 인습(因襲)과 흑암(黑暗)에 갇혀있던 우리 민족을 품고 이 땅에 두 번째로 발을 내딛은 복음전도자 토마스 선교사는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위해서 순교의 피를 흘린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계기가 되어 한국교회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 우뚝 서 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거듭한 이유는 순교자들의 순교 피의 위에 교회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선교사 이후 약 2,600여명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을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수 많은 순교자들의 밀알 정신을 본받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