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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학생출입금지구역
김홍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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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우물가에 놓여있는 금반지는 비낀 햇살을 받아 선명했다.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애써 누르고 얼른 금반지를 주워 이빨로 깨물었다. 이빨자국이 쉽게 생기면 진짜 순금반지이고 그렇지 않으면 구리반지라고 했는데, 들여다보니 반지에는 이빨자국이 뚜렷했다.
‘이건 정녕 행운이다.’
속으로 이렇게 외쳤지만 누군가 빠뜨리고 간 게 분명한 것이니 두 방망이질은 그치지 않았다. 굳이 금반지를 주웠다고 지서(支署)에 신고할 필요도 없었다. 우물가에서 금반지를 주웠다고 한마디만 하면 반지를 놓고 간 여자가 득달같이 달려올 게 뻔했다. 금학동 골짜기 마을은 가호가 그리 많지 않았고 그 우물을 사용하는 집은 고작 30가구 정도였다.
가슴은 연신 두근거렸다. 반지를 쥔 손에 금세 땀이 배었다. 꼭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아 앞만 보고 걸었지만 눈동자는 사방을 휘저었다. 멀쩡하던 발걸음이 왜 휘청거리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며 까치발을 세웠다. 행여 눈치 빠른 할머니가 내 거동을 수상쩍게 생각할까 걱정스러웠다. 만져보지 않아도 얼굴이 달아오른 걸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마실 갔는지 기척도 없었다. 나는 사랑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고 밑바닥에 금반지를 감췄다. 휴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지만 등줄기에 밴 땀은 쉬 식지 않았다. 행운은 이리 두렵게 오는 걸까?
화폐개혁으로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어머니는 내게 금반지를 주며 정말 급할 때 비상용으로 쓰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폐개혁을 몹시 원망했다. 화폐개혁 때문에 어머니가 왕주 노릇하던 계(契)가 깨져 곡경을 치렀다. 어머니가 궁지에 몰리면 애써 큰집이 있는 공주(公州)로 유학 보낸 나를 다시 데려가야 할지 모른다.
지난주에 차부까지 따라온 어머니는 내 손을 살픗 잡고 평소의 어머니답지 않게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긴 게 분명했다.
“꼭 쓸 디가 있어서 그러니께 담 주에 올 때 금반지 가져와야 헌다. 너헌티 못헐 짓을 시키는구먼.”
어머니 눈가에 맺힌 눈물이 아니었으면 나는 수중에 금반지가 없다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정말 급할 때 쓰라고 준 석 돈짜리 금반지의 쓸모를 어린 마음이지만 얼추 알고 있었다.
그날 성당에 가면서 서랍 밑바닥에 감춰두었던 금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낀 건 그 계집애한테 기죽지 않으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성가대에서 만난 가원이는 부잣집 딸 티를 내곤 했다. 읍내 큰 사거리의 가원이네 약국은 돈 잘 벌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성당 갈 때 입을 만한 옷이 마땅찮아 늘 교복만 입어야 하는 게 꽤나 쑥스러웠다. 가원이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 순간부터 나는 거울을 보는 횟수가 많아졌고 시도때도 없는 그놈의 여드름 때문에 속을 썩었다. 가원이는 성가대의 여학생들 중 제일 예뻤다. 남학생들이 그녀에게 서로 잘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걸 왜 모르랴.
내가 그녀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 드디어 답장이 왔다. 언제 들킬지 모르지만 여러 시집과 수필집에서 근사하고 그럴듯한 문장만 추려 마치 내가 쓴 글처럼 꾸며 보냈던 것이다.
가원이의 답장은 길지 않았다. 장래 희망은 시인이 되는 것이며 함께 문학의 길을 걸으며 좋은 동무가 되자는 내용이었다.
편지받던 날 저녁에 우리는 학생출입금지구역인 빵집에서 맛있는 빵과 우유로 저녁식사를 대신했다. 오복당은 여염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쉽지 않은 비싼 빵집이었고 어쩌다 거기서 빵과 우유를 사먹은 녀석들은 침이 마르게 자랑하곤 했다.
그날 빵값을 낸 건 가원이었다. 내 주머니에 있는 푼전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액수였는데 그녀는 내가 쭈빗거리는 까닭을 안 듯 지전을 얼른 내밀었다. 그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존심이 상한 탓인지 내 심장이 허약한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무작정 걸었다. 아니 그녀가 걷는 대로 따라 걸었다. 공산성(公山城)을 비껴 곰나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그녀는 내 팔을 잡았다. 천사가 하강한 듯했다. 금세 내 손바닥에 땀이 찼다. 밤바람은 살가웠고 초승달은 우리를 따라왔다. 마치 어린것들이 손잡고 자꾸 인적 끊긴 모래밭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것 같았다. 웃자란 풀더미들이 군데군데 모여 앉았고 키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흩어져 바람을 맞고 있었다.
“날 좋아해?”
그녀가 팔을 놓고 서너 발자국 앞서 걸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가원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왜 그럴까?”
“하늘이 내게 명령했으니까.”
“정말 그랬을까...”
“난 언제나 가원이와 함께 있거든.”
억지소리는 아니었다. 가원이를 좋아하면서부터 내 머리 속과 가슴에는 늘 그녀가 들어앉아 있었다.
“그럼 저 달을 따다 줘.”
그녀가 따라오는 초승달을 가리켰다.
그 순간 나는 숨이 막혔다. 조금 전까지는 가원이를 만나면 말해야지 하면서 마련해둔 말이 있었지만 느닷없이 달을 따달라고 할 줄이야. 무어라 대꾸해야 그녀를 사로잡을까, 무슨 말을 해야 싯귀 같을까, 그럴듯한 표현이, 그녀가 흡족해 하며 소리 내어 웃을 낱말이 왜 떠오르지 않을까. 심장이 또 두근거렸다. 가원이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폴짝폴짝 뛰며 웃었다. 치맛자락이 들까불어 허벅지가 보이는데도 괘념치 않았다. 분명 천사가 되려다 만 계집애였다.
“바보, 하늘 닿는 사다리를 만들어달라고 하면 되잖아.”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계집애의 치맛자락과 밤에도 뽀얗기만 한 허벅지와
‘달 따러 가자’는 노랫말과 뭔지 모르지만 이 밤에 신기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과 기대가 마구 얽혔기 때문이리라.
“넌 참 입술이 예뻐.”
가원이가 이렇게 지껄이더니 내 손을 힘주어 쥐었다.
간절히 원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했다. 나는 기적을 믿기로 했다.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과 성모 마리아가 무염시태(無染始胎)했다거나 오병이어(五餠二魚) 같은 기적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었는데 이제는 모든 걸 믿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아랫배가 슬근슬근 톱질을 하기 시작했다. 애써 참았던 방광이 동시에 크게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빵집에서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칠 때마다 쑥스러워서 그랬는지 자꾸 물을 들이켰다. 마른 입술을 적시고 타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마신 물이 방광을 채운 듯했다. 빵집을 나올 때 화장실에 갈까 하다가 참은 건 왠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우유 마시면 속이 편치 않은 걸 뻔히 알면서도 마셔댄 건 나도 우유쯤은 평소에 곧잘 마실 만큼 가정형편이 괜찮다는 걸 은연중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탈이 날 줄이야.
아, 하늘도 무심할사!
슬근슬근 톱질하던 아랫배는 창자가 꼬이고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송곳으로 찌르는 듯 나를 괴롭혔다. 방광은 팽창 속도가 마치 풍선을 힘껏 부는 듯했다. 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사타구니를 조이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은 배가했다. 계집애는 그런 사정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재잘거리며 걸었다. 엉치에 힘을 주고 허벅지를 잔뜩 꼰 걸음새는 모래를 긁는 듯 했다. 금방이라도 뱃속에서 마구 쏟아질 것 같았다.
애써 다려입은 한 벌 뿐인 바지에 그걸 쏟아놓으면 내 인생은 도대체 어찌 되겠는가. 가원이는 떠나겠지. 천사는 날개를 펼쳐 날아가겠지. 성가대 여학생들이 박장대소하고 내 근처에도 오지 않으려고 하겠지. 소문은 공주 바닥을 휘감고 돌고 돌아 어디까지 갈까.
기를 쓰고 항문을 조이고 터질 것 같은 방광을 온몸으로 옥죄며 걷던 나는 항문을 치밀고, 요로를 박차고 나오려는 액체를 감당할 수 없어 모래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내가 장난치는 줄 알고 등짝을 때렸다. 땀을 비질거리며 악다구니를 삼키며 애써 참았지만 이마와 콧사등이와 등허리에 진땀이 배었다. 일그러진 내 표정과 온몸을 꼬는 내 모습에 그녀는 비로소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안 듯했다.
“왜 그래?”
나는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하기는 정말 싫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기적은 일어날 수 없었다. 아랫배와 방광의 고통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 입을 열게 만들었다.
“배가 무지하게 아파.”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싱겁게 말했다.
“진작 말하지...”
어떻게 신작로까지 걸었는지 모른다. 급하다고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온몸을 꼰 채 느리게 걸을 수도 없었다. 내 몸뚱아리가 일순 폭발할 것만 같았다. 악에 바친 듯이 몸을 옥죄어 내 자존심을 지키느라 진땀이 목덜미에서 흉간을 타고 흘러 내렸다.
행길 옆의 주택가는 다닥다닥 엉겨붙은 가옥 사이로 좁은 골목이 이어졌다. 나는 그녀의 등을 떠다밀었다. 그녀는 내 민머리를 한번 쥐어박고 잰걸음으로 가버렸다. 골목 끝은 초승달빛도 들지 않았다. 바지를 내리고 쪼그려 앉기도 전에 발광하던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 뱃속에 그리 많은 것들이 숨어있을 줄 몰랐다. 눈을 질끈 감고 내장까지 죄 쏟아놓을 듯이 힘을 주었다. 언제 송곳으로 찌르고 언제 방광을 터뜨리려고 했느냐는 듯 고통이 가셨다. 눈을 뜨자 담벼락에 가위가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들켜서 귀싸대기를 얼얼하게 맞아도 좋을 것 같았다. 헤어질 때 그녀에게 주려고 했던 편지를 밑닦이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주 일요일 저녁, 할머니를 졸라 빵 값을 마련했다. 늘 땡전 한 푼 없다고 엄살떠는 할머니의 속셈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들을 맡겨두었으니 우리 부모가 알아서 할머니의 생활을 좀 넉넉하게 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화폐개혁을 하자 할머니는 벽장 속 깊이 감춰놓았던 지폐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신권과 교환하기 위해서는 머리 큰 외사촌 형보다 어리고 고분고분한 내가 적절했을 것이다. 그 심부름을 했기에 나는 갖은 떼를 써서 빵 값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지난 일요일의 치욕을 만회할 요량으로 나는 당당하게 오복당으로 들어섰다. 왼손 약지에 석돈짜리 금반지를 낀 채. 처음 손가락에 낄 때는 조금 헐렁거려서 무명실로 몇 번 감아두었지만 오늘은 실을 잘라내었다. 마치 고등학교 일 학년짜리가 금반지 석돈짜리를 끼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느냐며 으스대듯 반지를 끼고 나갔던 것이다. 작은 집의 사촌동생에게 빌려 입은 사복이 조금 큰 듯 했지만 그런대로 어울렸다. 오늘은 지난 일요일과 달리 신기한 일이 생길 것을 기대하며. 기적은 고난 끝에 이루어진다고 했으니까.
빵 값을 당당하게 내밀고 나서자 그녀가 방싯거리며 웃었다.
“성가대 학생회와 청년회가 축구시합 하고 있거든. 가서 응원도 하고 어울려줘야지.”
나는 잘됐다 싶었다. 축구라면 제법 야무지게 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가원이가 보는 앞에서 기세를 올려 볼 심산이었다. 지난주에 추락한 체면을 한껏 끌어올릴 수도 있지 싶었다. 우리가 국민학교 운동장에 도착했을 땐 거의 전반전이 끝날 무렵이었다.
나는 후반전에 학생회 선수로 뛰었다. 가원이를 감동시켜야 했기 때문에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모른다. 거기다 두 골이나 넣었으니 박수를 받을 만도 했다. 시합이 끝나고 우르르 수돗가로 달려가 세수하고 손발을 씻었다.
성당으로 돌아온 뒤에야 손가락이 허전한 걸 느꼈다. 나는 정신이 아득한 채 운동장으로 달렸다. 세수할 때 비누칠을 하고 거치적거려 받침대에 반지를 빼어둔 기억이 선명했다. 제발 그 자리에 있어다오, 제발 남의 손 타지 말고 그대로 있어다오, 하나님 제발 나 좀 도와주세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정신없이 뛰었다.
수돗가에는 사람도 없고 반지도 없었다. 혹시 물에 쓸렸나 싶어 수채도 뒤졌다. 되돌아 성당까지 내달렸다. 누군가 주웠을 것 같았다. 땀범벅이 되어 눈물을 글썽이며 반지 잃은 사정을 털어 놓았지만 누구 한 사람 보았거나 주운 사람이 없다고 했다.
다시 운동장으로 달렸다. 어둑해 질 때까지 수돗가를 가슴 조이며 샅샅이 흝었지만 금반지는 찾지 못했다. 어머니의 얼굴이 확대되어 내 뇌리를 스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계집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도 좋아했는데 참 재수 없는 계집애라는 생각이 나를 휘감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먹은 걸 토하고 변소에 들락거려야 했다.
동네는 조용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우물가에서 금반지를 잃은 여자가 분명 나타나 징징거려야 할 텐데 잠잠했다. 걸핏하면 동네 소문을 물고 오는 할머니였지만 금반지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우물가에서 주운 금반지가 가짜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서랍을 빼면 빈자리가 있다. 그 곳에 숨긴 반지를 꺼내 이빨로 지그시 깨물었다. 이빨자국이 나는 걸 보면 금반지가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내일은 학교 앞 금은방에 가서 진품 여부를 물어볼 작정을 했다.
사범대학에 다니는 외사촌 형이 술 한잔을 걸치고 기분 좋은 낯으로 들어왔다. 군대 제대하고 복학한 형도 고등학생 때부터 할머니네 사랑방에 기숙했기 때문에 내가 할머니한테 얹혀 지내는 걸 애처로워했다. 변덕 심한 할머니의 비위 맞추기에 서툰 나를 참 다사롭게 다독여주곤 했다. 옥천(沃川)의 벼랑같은 산마을에서 담배농사를 지어 자식을 사범대학까지 보내는 늙은 고모의 쭈그렁 얼굴에 비하면 형은 부잣집 맏아들처럼 푼더분했다.
내가 금반지 잃어버린 걸 알고 형은 집안에 도둑이 들어 훔쳐간 걸로 하자며 우리 어머니에게 그럴듯하게 둘러대 혼나지 않게 해주마고 위로했다.
막 잠들 무렵 윗마을 외딴 오두막에 사는 도벌꾼이 찾아왔다. 서른 살 넘도록 짝을 찾지 못한 노총각 박성룡은 마을에서 외톨이 신세였다.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동자,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그는 덩치에 비해 근육이 단단하고 장작 패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데, 그의 밥벌이는 도벌이었다. 징역살이도 했다는 소문이 있고 누차 순경들이 잡으러 다녔다고도 했다.
오늘도 그의 꾀죄죄한 옷에서 송진내와 써럭초 냄새가 진하게 배어나왔다. 신문지에 써럭초를 돌돌 말아 침으로 붙인 뒤에 뻑뻑 빨아대는 담배 냄새는 내 교복에도 배일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그냥 ‘박가’라고 불렀다. 박가를 ‘성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직 사촌 형 뿐이었다. 처음에는 형과 박가가 친하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박가에게 유일한 말벗은 형이었다. 내가 박가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 싫어하지 않게 된 건 순전히 사촌 형 때문이었다.
박가는 낮에는 산을 타며 재목이 될 만한 나무를 고르고 때가 되면 밤에 도끼와 톱을 들고 산에 올라 나무를 쓰러뜨려 은밀히 팔아먹는 도벌꾼이었다. 그런 탓에 박가에게서는 늘 송진내가 났다. 내가 그의 행적을 소상히 알게 된 건 밤 이슥토록 형과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을 잠든 척하고 들었기 때문이다.
박가는 하모니카를 꺼내 흐드러지게 불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구슬픈 곡조였다.
박가의 하모니카에서는 진한 써럭초 냄새가 났다. 그 하모니카를 형도 불고 나도 불었다. 박가는 형과 나에게 하모니카를 가르쳤다. 아무리 그래도 박가처럼 숨넘어가게 흐드러지거나 까무러치도록 애절하게 불 수는 없었다.
“내가 낭구두 쓰러뜨리지 못허고 이눔의 하모니카로 속을 달래지 못혔으면 진작에 자살혔을 기여.”
나는 박가가 살아있는 까닭을 알 것 같았고 살기 위해 도벌을 하고 하모니카를 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살기가 어려우니 도벌꾼은 도처에 생겨나고 목재상들은 셈속이 빨라 그들에게 나무를 헐값에 사들였다. 때문에 몸져누워 골골거리는 홀어머니 약값 대기도 벅찬 박가에게 하모니카는 분명 사치품이었다. 보통 하모니카보다 얼추 반 뼘이나 길었고 아래위로 금빛이 선명한 미국산이었다. 서울 도깨비 시장에서 아름드리 거목 서너개 값을 주고 샀다고 했다.
“성님, 뭔 술이오?”
박가가 들고 온 술 주전자를 보고 형이 물었다.
“헛헛해서 아우랑 한잔 헐라네.”
“뭔 일이 생긴 거여?”
형의 목소리가 금세 낮아졌다. 박가의 신변은 늘 위태위태했다. 남의 산에 있는 좋은 목재를 몰래 베어 팔아먹는 도벌꾼이니 언제 잡혀가 곡경을 치를지 모른다.
“내 팔자 그른 거야 진작에 알었지만 이러키 엇나갈 줄 누가 알었겄어, 휴우...”
박가의 한숨에서 막걸리 냄새가 나는 듯했다. 아랫마을 술도가에서 한잔 걸치고 한 됫박을 사왔으리라. 밤 이슥한 시각에 박가가 오면 나는 늘 자는 척을 해야만 했다. 형과 박가의 세상사는 얘기와 한탄 끝에는 여자에 대한 은밀한 얘기가 꼭 끼어 있기에 잠든 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구시렁거리는 박가의 팔자타령이었지만 오늘 따라 심상찮아 보였다.
“나거튼 인간이 살어서 뭘 허겄냐...”
말꼬리를 흐리는 박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성님이 그렸잖여,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고 죽는 것보다는 푸줏간에 거꾸로 매달린 고깃덩어리마냥이라두 살어있는 게 낫다구.”
귀에 익은 소리였다. 박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박가가 산목숨을 귀히 여기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좋은 목재를 고르기 위해 깊은 산골을 헤매고 다니다 보면 농약 먹고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이나 나뭇가지에 목 매달아 대롱대롱 흔들리는 사람을 더러 만난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박가는 급히 나뭇가지를 잘라 들것을 만들었다. 얼추 두길 쯤 되는 나뭇가지를 나란히 놓고 네, 다섯 뼘쯤 되는 나뭇가지 대여섯개를 가로질러 조여 묶으면 덩치 큰 사람도 어렵지 않게 끌 수 있는 들것이 된다. 들것 손잡이에 밧줄을 묶고 어깨에 걸면 잰걸음질을 할 수 있다. 박가는 들것을 끌고 그가 가장 싫어하는 지서나 경찰서로 달려간다. 병원으로 가지 않는 건 몇 차례 시도했지만 돈이 없으면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지서나 경찰서 앞에 들것을 놓고 소리쳐 살려달라 목청을 세운 뒤 정신없이 도망치곤 했다. 지서까지 가기 전에 싸늘하게 식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자칫하면 사람 죽인 자로 오해받아 곡경을 치를 수도 있지만 박가는 “사람은 죽어 시체가 되어도 귀한 겨”라고 했다.
“아우는 많이 배우고 선생 될 사람이니께 잘 알겄지. 딱 죽어버려야 속이 시원헐 때도 있는 벱 아니겄어.”
“편찮으신 엄니는 어찌 사시라고 그러는 기여?”
형이 물고 들어간 건 박가의 늙은 홀어머니였다. 어머니 봉양이 지극한 박가의 약점을 잡아채는 형의 말솜씨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박가가 죽으면 형도 나도 심심할 것만 같았다. 배우지 못했고 가진 게 없는 노총각이지만 그가 살아있어야 자살하는 사람도 살리고 하모니카 소리에 취하며 할머니네 집 장작도 쌓이고 재미있는 얘기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지옥이 증말 있는 거여?”
박가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형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있다마다!”
“사람 참 환장허겄네.”
예배당이나 성당 문턱에 얼씬거린 적 없는 박가가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기이했다.
“성님이 나헌티 말 못헐 게 뭐여? 의형제고 뭐고 집어치워야겄네.”
옳다구나 싶었다. 형마저 박가를 상대해 주지 않으면 그는 외딴 오두막에서 하모니카나 불고 써럭초나 피워대며 막걸리에 취해 널브러져 지내야 할지 모른다.
“그게 아니구말여. 엊그제 참 지맥힌 일이 생겼어. 그 샥시가 주고 간 금반지를 잃어버렸다니께.”
“뭔 일이래?”
“그러니 내가 안 죽고 싶겄냐구.”
“워디서 그런 기여?”
“우물가에서 씻다가 비누칠하니께 쑥 빠지데. 그려서 빼놓구 손을 씻었지. 깜빡 잊구 집에 갔다가 정신웂이 달려가 봤는디... 웂더라구.”
“왜 진작에 말허지 않은 기여? 소문을 내야 찾을 거 아녀.”
형의 목청에는 분기가 스며있었다. 나는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고동치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염통의 피가 펄펄 끓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지만 이불이 들썩일 듯 심장이 뛰었다.
그날 주운 금반지가 박가의 반지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박가의 새끼손가락에 끼어있던 반지를 얼핏 본 듯했다. 그러나 금반지일거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 형편에 금반지라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구리반지이거나 금도금한 반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금반지 잃어버렸다고 허믄 믿을 사람이 워디 있겄어. 사연을 몰르믄 아우인들 믿겄어? 입을 벌려봤자 나만 미친놈 될 거 아니겄냐구.”
“그려도 그렇지. 믿든 말든 말은 허구 봤어야지. 그거 주운 사람은 얼씨구나 땡이구나 헐틴디, 손바닥만헌 동네서 움치고 뛰지 못할 거 아니겄냐구. 내일 당장 내가 소문을 내야겄네.”
“사람덜이 믿을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니께 그러네!”
형의 목청이 되바라졌다. 평소의 성미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내 가슴에서 다듬이 방망이로 마구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지만 벌렁거리는 심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러다 심장이 터지지 않을까.
“정 그러믄 아우 맴대루 혀.”
한참 만에 박가가 기죽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땐 얼핏 듣다 말었는디, 증말 옥순인가 허는 샥시가 준 기여?”
“그렇다니께 그러네. 그날 아우가 술이 잔뜩 취해 가지구 건성으루 듣더라니.”
“한마디두 빼놓덜 말구 말혀봐유. 그게 진짜 금반지였는지... 그 샥시가 증말로 죽었는지...”
나는 모듬뛰기를 하고 있는 앞가슴을 두 손으로 찍어 누른 채 이불자락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무슨 기막힌 사연인지 알고 싶었다. 등잔불이 들까불고 있는 깊은 밤이었다.
“그러니께 말여, 그게... 그날두 쓸맨헌 낭구를 찾으러 산을 뒤지고 다니는디, 얼레... 참나무 가지에 밧줄 걸구 목매다는 여자가 있걸래 냅다 뛰어가서 무작정허고 잡어 내렸지 뭐. 반반허게 생겼더라구. 죽게 놔두기 아까울멘키로 반반헌디 승질머린 좀 사납더만. 얼릉 밧줄을 걷어내니께 왜 살려 놓느냐구, 당신이 뭔데 어따가 손 대느냐구 악다구니를 쓰며 발광을 하는디 지 정신이 아니더라니께. 젊은 샥시가 발광하는 걸 첨 봤는디, 막무가내로 워째 살렸냐구 달겨들어 꼬집고 할퀴고 펑펑 울어대는디 정신 못 채리겄드라구. 한참을 발광허고 나를 쥐어뜯다가 지쳤는지 멍허니 하늘을 쳐다보다가 쓰러져 목 놓아 울어대는 기여. 지랄발광 헐 때는 짐승같더니 흐느껴 울 때는 참 이쁘데.”
박가의 얘기 보따리는 그렇게 풀리기 시작했다. 벌렁거리던 가슴이 조금은 가라앉았지만 쉬이 멈출 것 같지는 않았다. 방바닥이 따스하지도 않은데 나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머리속이 헝클어지는 것 같았다. 뭔지 모르지만 갈피를 잡지 못해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이불자락에서 쉰내가 풍겼다. 내 몸에서 흐르는 땀 냄새 치곤 참 고약했다. 명치 끝에서 뜨거운 바람이 일어 자꾸 목울대를 건드려 재채기가 나올 듯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멈췄다. 어찌하든 자는 척을 해야만 했다.
울다울다 지친 여자가 멍한 눈빛으로 박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박가의 얼굴에 난 피맺힌 상처를 보고는 눈을 감았다. 나무에 기댄 채 기신 못하는 여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박가가 외투를 벗었다. 가을이 익어터질 무렵이어서 숲 속은 한기가 서렸다. 어렵사리 얻어 입은 구호물자 외투를 바닥에 깔고 기진한 여자를 번쩍 안아 옮겼다. 저항하거나 뻗대지 않았다. 지칠대로 지쳤으리라.
“샥시헌티두 지맥힌 사정이야 있겄지만, 산 사람이 자살허믄 지옥에 간대유.”
색시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죽었다가 살어난 사람이 보구 왔다는디, 증말 지옥이 있답디다. 죽었다가 살어난 사람이 설마 그짓말을 허겄어유?”
박가는 내친김에 이렇게 말하고는 아차 싶었다. 지금 그런 말을 할 계제는 정녕 아니었다. 그래도 색시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박가는 무릎걸음으로 색시에게 다가가 귓속말처럼 지껄였다.
“삽시다. 나겉은 놈두... 아무짝에두 쓸모 웂구 곡식이나 축내는 놈두 죽들 못혀 사는디 샥시마냥 곱고 멀쩡헌 사람이 죽기는 왜 죽는대유. 죽을 작정헌 걸로 따지믄 나는 백번두 더 죽었어유. 살어서 낙이라곤 쥐뿔맨치도 웂는 놈이...”
박가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제 서러움에 울음이 북받쳐 올랐다. 말을 이으면 울음이 솟구칠 것 같았다. 가진 게 있나 배운 게 있나 친척이 있어도 거들떠보길 하나. 장가 못간 자식놈 때문에 애가 타는 늙은 어머니는 몸져 누워서도 며느리 타령을 하지 않는가. 목구멍에 풀칠하려고 도벌하다 붙잡혀 옥살이하는 바람에 호적에 붉은 줄 쳐졌지, 서른을 훌쩍 넘은 데다 홀어머니와 단칸방에서 사는 사내를 어느 처자가 쳐다보겠는가. 가진 거라곤 탱자보다도 작은 불알 두 쪽 뿐이니 고쟁이 벗는데 이골 난 화냥년인들 쳐다보기라도 하겠는가.
색시의 들숨과 날숨이 아직도 고르지 않았다. 흐느낌이 잦아들었지만 서러움은 꼬리를 잇는 듯했다. 박가는 마른 낙엽을 긁고 삭정이를 모아 성냥을 그었다. 한기를 막아주어야만 했다. 기진한 색시가 잔뜩 웅크린 채 몸을 떨었다. 어둡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만 했다.
“인공난리 때 우리 아부지가 동네 사람덜헌티 맞어 죽어었유. 빨갱이였으니께유. 내 위로 성이 둘이나 있었는디 빨갱이 새끼라고 맞어 죽었대유. 큰아부지두 그때 읃어맞어 병신 돼 얼마 못살구 죽었대유. 따라 죽겄다고 버티다 혼절한 울 엄니를 업구 정신없이 도망친 건 참말 하늘이 도운 거지유... 울 엄니가 홧병으로 쓰러져 금방 목숨 줄 놓을 거 같더니... 사람 목숨 참 질기데유. 산 사람은 살기 마련이유. 그렇게 산들 무신 낙이 있겄어유. 조선 팔도 어디 간들 빨갱이 집안이란 게 철사줄마냥 질기게 우리를 휘감구 있는디... 언젠가는 그눔의 철사줄을 짤러뻔질라고 엄니랑 양잿물을 나눠 마셨는디, 목구멍이 타고 속이 뒤집어져 더는 못 참고 냇가로 가서 토하고 물 들이키고 토하고 또 들이키다가 널브러졌어유. 빨갱이 집안이라구 거들떠보지도 않던 마을사람덜이 침쟁이 불러다 약도 쓰구 침도 놓구 혀서 살긴 살었는디... 샥시, 우리 엄니는 죽을 힘이 웂어서 살었구... 나는 죽어서 우리 아부지 만나는 게 겁나서 못 죽었구먼유.”
박가의 하소연이 길게 이어지자 색시의 퉁퉁 부은 눈가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오슬오슬 떨던 색시가 모닥불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색시의 몸은 차가웠다. 박가가 색시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집에 데려다 줄테니께 어여 가유. 이런디서 죽으면 산짐승이 죄다 파먹어유.”
박가는 모닥불을 이리저리 밟아 끄고는 색시를 덥석 업었다. 기진한 색시는 축 늘어진 채 흐느끼기만 했다.
“그날 산 속에서 첫날밤을 치렀다구 했잖여?”
형이 박가의 늘어지는 말머리를 채어 잡았다. 나는 귀를 더 쫑긋 세우고 박가의 이어질 사연을 기다렸다.
“그랬다니께 그러네. 업구 내려오믄서 살살 달랬지. 샥시 무게가 있으니께 내려오다 쉬고 내려오다 쉬고...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는디 샥시가 또 흐느껴 울길래 나두 모르게 그냥 끌어안었어. 참 좋데. 텍도 웂는 소린 줄 알믄서 내가 미친소리를 허게 되드만. 이대로 데려다주면 또 자살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죽을 작정이ams 나겉은 놈 좀 살려달라고 한겨. 그랬더니 또한번 소리내 울더니만 사연을 털어놓더라니께.”
“증말 서로 좋아했던 마을 총각 눔이 장가를 간 겨?”
형은 박가의 기이한 사연을 조금은 알고 있는 듯했다.
“장래꺼정 약속허고... 맴도 주고 몸도 주다가 임신까지 혔으니 워째 죽구싶덜 않었겄어. 그려서 옳지 잘됐다 싶어서 뱃속에 든 애를 낳아서 같이 기르자고, 가진 건 웂지만 굶기진 않으마고, 흙벽돌로 신혼 방 한 칸 후딱 지으마고, 산골이 싫으면 도회지 나가서 막노동이라도 혀서 보란 듯이 살자구 통사정을 혔지. 그렸더니 한참만에 샥시가 고개를 끄떡이데. 그려서 후미진 디다 낙엽을 끌어 모으고 그 우에 오바를 벗어 깔어놓구 샥시를 눕혔어. 옷을 벳기는디 가만 있걸래 인저 살었다 싶데.”
“성님, 한디서 춥덜 않었어?”
“아랫도리만 벗었는디두 첨엔 춥드만. 근디 참말로 무지허게 좋데. 천당이 어디 따로 있을라구. 천사가 있긴 있는 거 같드만. 우리 아부지가 보내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거기까지 털어놓더니 박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색시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일어나더니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어 박가에게 주었다. 사흘 뒤 정오 무렵에 마을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서 재회한 뒤 그 길로 박가네 집으로 가서 함께 살기로 맹약하는 징표였다. 색시의 약지에서 뺀 반지는 박가의 새끼손가락에 꽉 끼었다. 박가는 그녀에게 줄 게 없었다. 가진 거라곤 잘 벼린 낫 한자루와 밧줄, 성냥과 써럭초, 구호물자로 얻어입은 외투와 꾀죄죄한 입성, 산에 갈 때만 신는 낡은 군화 뿐이었다.
색시를 마을 입구까지 데려다 주고 잰걸음으로 돌아온 박가는 어머니에게 금반지를 내보이며 사흘 뒤에 장래를 약속한 색시가 봇짐만 싸들고 올테니 내일 새벽부터 급히 방 한 칸을 짓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전후 사정도 묻지 않은 채 박가의 손을 꼬옥 쥐고 눈물을 철철 흘렸다. 전후 사정을 안들 무엇하랴. 며느리가 들어온다고 해도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걸.
이튿날 새벽부터 박가는 나무를 져 날라 기둥을 세우고 짚을 얻어다 황토에 섞어 벽을 바르고 얼기설기 서까래를 얹었다. 살면서 차차 흙벽돌을 찍어 그럴듯한 방을 꾸밀 작정이었다. 사흘 안에 흙벽돌로 방을 꾸밀 재간이 없었다. 톱질하고 도끼로 패고 자귀로 다듬고 망치로 여미고 흙손으로 바르고 해서 신방을 겨우 만들었다. 엉성하게 고래질러 방구들을 놓고 그 위에 황토를 두텁게 바르고 사정없이 장작을 지펴 바닥을 말렸다. 쩍쩍 갈라지는 방에 흙 덧칠까지 했다. 그리고 삿자리를 깔아놓으니 시늉으로는 방 같았다. 몸져누웠던 늙은 어머니는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때 절은 이불을 빨아 널었다.
사흘 뒤 정오 무렵부터 박가는 고갯마루에서 눈알이 빠지게 색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어둑어둑 할 때까지도 기척이 없었다. 늦가을 해는 일찍 서산마루를 넘었고 허기와 추위에 지친 박가는 어둠을 비집고 색시네 마을로 들어섰다. 박가는 마을사람에게서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금학산이 무너지고 금강이 쩍 갈라지는 소리였다.
색시는 박가와 헤어지던 날 깊은 밤에 바깥채 들보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고 했다.
“아이구 그런 사연이 있는 그 귀헌 걸 어쩌자고 끼구 다녔댜?”
형이 책망하듯 되바라지게 물었다.
“옥순이랑 날마다 같이 있을라구...”
목 메인 박가의 그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내 가슴을 때렸다. 겨우 가라앉았던 가슴이 또 방망이질을 해댔다. 금세 방광이 가득 차오르는 걸 느꼈다. 뜨거운 게 목울대까지 올라왔다.
“어여 둔너 자, 낼 핵교 가야잖여.”
박가는 이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형이 따라나서며 이리저리 소문을 낼 테니 너무 근심 말라고 박가를 달랬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나를 물고 들어갔다.
“쟤두 메칠 전에 즈이 엄니가 준 금반지를 잃어버리드만... 참 이상한 일이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라고, 되찾았다고 소리치고만 싶었다. 빚쟁이한테 시달리는 어머니 얼굴이 볼록렌즈로 비춘 듯 확대되었다. 가슴 속에 불덩어리가 들어앉은 듯 화끈거렸다. 그 밤 내내 잠들지 못했다.
아침에 형이 세수하러 나간 사이 나는 서랍을 열고 감춰두었던 금반지를 꺼냈다. 두 손이 달그락거리며 떠는 것 같았다. 얼른 형의 저고리 겉주머니에 반지를 넣었다. 형이 반지를 발견하게 되겠지. 박가의 딱한 사연을 너무 잘 아는 형이 그럴듯하게 얘깃거리를 만들어 돌려주겠지. 형은 내 소행이라는 걸 알고 뭐라고 생각할까. 어머니의 애처로운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이 갈팡질팡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학교에 가서도 종일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밥알도 껄끄럽기만 했다. 어머니의 눈물과 박가의 애절한 낯빛이 종일 내 가슴을 괴롭혔다. 저녁때는 일부러 친구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늦게 집에 들어갔다.
형은 그날도 막걸리 냄새가 진동 할 만큼 얼큰히 취해 들어왔다. 내게 무슨 말인가 하려니 했는데,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눈치를 보았지만 형은 끝내 아무 말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형은 금세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형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금반지가 들어있지 않았다. 참으로 궁금했다. 형이 박가에게 전달했을까. 아니면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놓았다가 잃어버리지나 않았을까. 설마하니 형처럼 착해빠진 사람이 슬쩍 닦아넣지는 않았겠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그 밤도 잠을 설쳤다.
이튿날 학교에 가서 책가방을 여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책가방 속에는 낯익은 하모니카, 박가가 그리도 아끼던 하모니카가 들어있었다. 나는 슬며시 꺼내보았다. 가슴이 또 벌렁벌렁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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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66학번
.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 장편소설집 『해방영장』 『인간시장』 『초한지 (전7권)』『대발해(전10권)』외
창작집 『무죄증명』 외, 수필집 『하나님과 쬐그만 악마』
꽁트집 『도둑놈과 도둑님』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