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이 스며들지 않는 들판에 난 알루미늄 오이를 심고 있어. 현자 세 사람은 내게 이렇게 계속 중얼거리지. ‘쇳덩이는 열매를 맺지 않는 법, 애를 써봐도 얻는 게 없다오. 결과는 모두 헛수고일 뿐이라오.’ 어째서 내가 알루미늄 오이를 심는지 그 비밀을 풀 욕심에 물이 스며들지 않는 들판에 난 알루미늄 오이를 심고 있어.” ─ 배우 유태오가 연기한 전설, 빅토르 최의 노래 ‘알루미늄 오이’ 中
지난여름, 미항을 배경으로 진행된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 포토콜에 글렌 체크 수트 차림의 한국 배우가 등장했다. 이름은 유태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레토>(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에서 빅토르 최를 연기한 배우다. 러시아어로 여름이란 뜻의 레토(лето)는 한국의 겨울에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빅토르 최에 관심이 많아 이번 인터뷰를 제안했다. <레토>에서 유태오는 빅토르 최와 정말 닮았고(머리를 자른 지금은 다른 이미지지만), 소비에트 연방 시절 러시아에서 분투하는 젊은이의 재림을 보여줬다. 유태오는 영화의 마지막에 빅토르 최가 살았던 ‘1962-1990’년이 화면에 등장하자 “나의 죽음을 보는 듯 기묘했다”라고 회상했다.
빅토르 최. 1990년 모스크바 올림픽 경기장에 그의 그룹 ‘키노’의 마지막 공연을 보러 10만 명이 운집한, 소비에트 체제에 억눌린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28세에 요절한 아티스트. 빅토르 최의 전기인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의 저자 이대우는 이렇게 기록한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빅토르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고 신앙처럼 고백하고, ‘빅토르는 살아 있다’고 낙서한 아르바트 거리에서 오늘도 노래한다. 러시아 문학사에는 그의 공연 사진과 창작 세계가 소개되며, 대학은 그에 관한 학술 논문을 연이어 발표한다. 현대 러시아 대중문화에서 나타나는 가장 신비롭고 특이한 현상이다.” 유태오는 그런 인물을 연기하기에 잠을 거의 못 잤다. “제가 아는 러시아인 모두가 빅토르 최에 대해 한마디씩 했죠.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빅토르 최가 있었던 거예요.”
<레토>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촬영 5회 차를 남기고 체포됐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구금 중이다. 칸 영화제의 초청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유태오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얘기했다. “정치, 문화, 가정, 성 정체성 등 어디에나 억압은 있죠. 하지만 저는 어떤 억압이라도 창작을 통해 소통할 수 있다고 믿어요. 연기 선생님께서 이런 얘기를 하신 적 있죠. ‘피 한 방울은 한방울뿐이지만 100% 피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록은 영미보다 더한 저항 정신이 요구됐다. 러시아는 이 흐름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기에 용인하는 척 억압하는 정책을 썼다. <레토>에서도 관객이 록 공연을 볼 순 있지만, 몸을 움직이거나 박자를 타면 보안요원이 제지하는 장면이 있다. 뮤지션들은 전자 기타 한 대 마련하기 힘들었고, 지하 인맥으로 음반을 유통했다. 빅토르 최는 보일러공을 비롯한 다른 직업을 병행했다. (그는 이틀 건너 하루만 일하는 보일러공이 직업이라 투어를 다닐 수 있다며 좋아했고, ‘나는 보일러공이 되고 싶어’란 노래도 만들었다.) 그 시절 원하는 바를 억눌린 젊은이들처럼 유태오는 오랜 기간 연기에 대한 갈증을 풀지 못했다. 독일에서 나고 자라, 런던과 뉴욕에서 연기 공부를 했고 2009년 <여배우들>에서 고현정의 남자 친구 역할로 데뷔했지만 2018년 <레토>의 빅토르 최로 가장 주목을 받았다. 그는 오랜 무명을 ‘한’이라 표현했다. “외국인 친구들이 한의 뜻을 물어보면 이렇게 얘기해요. 환경을 자기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억울함. 저뿐 아니라 역사, 성 정체성, 가정교육 어디든 한이 있습니다.”
유태오가 배우이면서 아티스트에 가깝다고 느낀 이유는, 표현하고 소통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연기 말고도(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다양한 창작 활동을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유태오는 <레토>의 1차 오디션에 기타로 자작곡을 연주하는 영상을 보냈다. “시에 음악을 입히면 곡이 되죠.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서 셰익스피어 시 구조를 공부하면서 재미를 느꼈어요. 그 뒤로 시를 썼고, 동화책 <양말 괴물 테오>를 내기도 했어요. 외로움과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느 나라나 이해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풀고 싶어서 ‘양말 한 짝만 없어지는 것’을 생각해냈죠. 찾아보니 그런 내용은 아무도 쓰지 않았더라고요. 양말을 먹는 작지만 외로운 괴물 테오가 등장하죠. 동화책은 저의 정체성, 기획적인 객관성, 매체의 형태, 이렇게 세 가지를 결합시킨 작업이에요.”
유태오는 1980년대 모국 체험 캠프에 참여한 해외 동포들의 실화 영화 <서울 서칭>에서 주연을 맡긴 했지만, 영화 <레토>에서야말로 해소의 기쁨을 찾지 않았을까 싶었다. 시와 작곡, 동화로 풀었던 표현 욕구 말이다. “항상 아쉬워요. 감독님은 지휘자고 배우는 악기죠. 감독님의 감수성을 이해해서 최대한 잘 연주해야죠. 열악한 환경을 탓하면 안 되지만 <레토>는 러시아어란 벽이 있어서 표현하기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국이나 독일, 미국 배우는 그런 벽이 없을까, 그건 아니잖아요. 깊이 들어가면 연기자의 고민으로 이어지죠. 과연 문화, 언어, 가정교육의 트라우마라는 벽을 부수고 야성적으로 표현하는 연기가 화면에서 좋게 보일까, 한 방울의 감정으로 벽을 뚫고 나오는 연기가 맞을까? <스카페이스>의 알 파치노의 연기와 <해피엔드>의 최민식 선배님의 연기를 말할 수 있죠. 이처럼 요즘엔 좋은 연기의 개념을 연구합니다. 이러나저러나 괴로우니 완전한 해소가 있을 수 없죠.”
유태오는 연기를 말할 때 굉장히 진지하며, 확실히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일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빅토르 최를 이해하고 존중하지만, 다른 노선을 걷고자 한다. “빅토르 최는 시행착오를 견디며 자신의 재능을 업그레이드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최고의 뮤지션입니다. 영화에서 빅토르 최는 개인관계와 일에 대한 열정 사이에 갈등하죠. 그러니까 오늘 <보그> 인터뷰와 친구 생일이 겹쳐버린 거죠. 어떤 직업이든 겪을 문제입니다. 빅토르는 사람보다 음악을 선택했고, 자기중심적인 그에게 배울 점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인간관계를 택했을 거예요. 어느 최고의 연기자는 이혼을 서너 번 했죠. 그의 연기를 너무나 좋아하기에 혼란스러워요. 인간성이 먼저인가, 예술이 먼저인가. 하지만 아직까지 저는 ‘사람’이 더 중요하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유태오의 차기작은 전계수 감독의 <버티고>다. 고층 건물의 사무실에서 추락의 공포를 느끼는 여성(천우희)과 비밀스러운 연애를 하는 인물이다. 유태오는 전계수 감독의 전작 <러브픽션>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있다. “감독님이 <버티고>에 맞는 배우들을 몇몇 생각하셨는데, 그중 제가 있었대요. 저는 작품 선택할 때 일단 시나리오가 읽기 편해야 해요. 독일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가 모국어이자 모국어가 아니라서 리딩할 때 눈이 좀 느리거든요. 집중하면서 천천히 오랫동안 읽어야 해요. 그럼에도 잘 읽히면 좋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해요. 메시지와 소통이 분명하다는 거거든요.”
10여 년 전만 해도 초등학생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했다. 어린이 동화를 읽고, 영화와 TV를 보고 아나운서 학원에 다니며 공부했다. “아나운서 학원에선 한국어보다 시험에 붙는 방법을 가르쳐서 당황했어요. 덕분에 학원 문화를 알았죠.” 그는 현재 독일어, 영어, 한국어에 능통하며 “식당에서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러시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한다. 현재는 한국어가 가장 편하다. 다국어를 하는 배우는 어떤 이점이 있을까. “맛의 표현만 해도 우리나라는 심심하다, 짭조름하다, 얼큰하다, 국물이 시원하다 등 여러 표현이 있잖아요. 이전에는 ‘Salty’ ‘Litte Salt’ 정도의 감수성을 가졌다면 그보다 다양해졌죠. 때론 감정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요. 내가 다른 문화로 들어갔을 때, 그 사회와 저의 이해도가 다르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외로움이 있죠. 하지만 이런 과정이 연기에 깊이를 주리라 믿어요. 화가도 다섯 색깔로 그리기보단 팔레트가 넓어질수록 더 섬세한 그림을 완성할 확률이 높죠. 물론 제 주관적인 해석입니다만, 다양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 저를 더 나은 연기자로 만들 거라는 철학이 있어요.”
그는 배우로서나 관객으로서 잔잔한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 그가 처음 연기에 매력을 느낀 것도 열다섯 살에 본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다. “독일 교포 촌놈이어서 아시아를 모르던 제가, <중경삼림>을 보는 순간 뭔가 와닿았어요. 본래 제 안에 있던 감정인지, 그 영화가 불러일으킨 건지 모르겠어요. 그 이후에 <8월의 크리스마스> <접속> <편지> 등의 한국 영화를 좋아했죠. 요즘엔 그런 영화가 드물죠. 자극적인 영화, 로맨틱 코미디가 잘 팔리니까요. 그래서 <버티고>가 귀한 작품이에요.” <버티고>는 전계수 감독이 ‘입봉’ 전부터 기획하고, <러브픽션>(2012년) 이후 7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유태오는 이 사실이 많은 의미를 담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멜랑콜리 감수성을 세 연대로 나눴다. 사춘기는 왕가위 감독, 성장기는 90년대 한국 멜로 영화, 현재는 차이밍량을 비롯한 예술 영화다. 특히 유태오는 차이밍량을 좋아해서 <레토> 홍보를 위해 대만 영화제를 방문했을 때, 폐막작의 감독 자격으로 방문한 그를 만나 연락하는 사이가 됐다. “대만 뉴웨이브 2세대라 할 수 있는 차이밍량의 엄청난 팬이라고 말하고 다닌 덕분이죠. 그분의 설치 작품을 보러 대만 시골까지 찾아갔어요. 단편 <행자(Walker)> 시리즈를 다시 편집해 <서유(Journey to the West)>라는 영화로 만들고, 이를 다시 편집해 설치미술화한 작품이죠.” 그는 차이밍량 감독의 작품 중에 <그것은 꿈(It’s a Dream)>을 가장 좋아했다. 칸 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해, 황금종려상 수상 감독 35명이 참여한 <그들 각자의 영화관(Chacun Son Cinema, To Each His Own Cinema)>에서 접한 작품이다. 그는 휴대전화에 담아둔 영화를 보여줬다. “와, 이거다 싶어서 머리를 쳤어요. 어머니와 아들이 앉아 있고, 차이밍량의 페르소나인 이강생의 목소리로 꿈에 나타난 아버지의 이야기를 읊는 첫 장면부터 노스탤지어가 확 일어났죠.” 그는 이강생의 독백 대사를 따라 읊었다. “영화는 밤새 얘기할 수 있어요. 지금 제 삶은 모두 연기를 향하기에, 그것을 공부하고 조사하며 보냅니다.”
유태오는 드라마 <배가본드>와 <아스달 연대기>에도 캐스팅돼 사전 촬영 중이다. 그는 아직 “작품을 선택 할 수 있는 ‘럭셔리’한 처지는 아니지만, 작품마다 어떻게 해석할지 생각하면 즐겁다”고 했다. “아직은 공개할 수 없는 영화의 조연에도 캐스팅됐어요. 캐릭터에 대한 해석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드러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너무 궁금해요.” 그는 비밀을 말하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즐거워했다. 유태오는 수확을 보장받지 못한 알루미늄 오이를 오랫동안 심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빅토르 최의 노래 ‘알루미늄 오이’는 이렇게 끝이 난다. “압핀, 클립, 널빤지, 바람구멍, 흰 빵, 포크. 나의 트랙터가 이곳을 지나가면 저금통 속으로 들어오겠지. 물이 스며들지않는 들판에 내가 알루미늄 오이를 심는 그곳으로 들어오겠지.”
출처 : VOGUE KOREA 홈페이지 ( http://www.vogue.co.kr/?p=173773 )
첫댓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아나운서 학원을 갔다가 한국의 학원 문화를 느끼고 오신 부분 너무 재밌어욬ㅋㅋㅋㅋㅋㅋㅋㅋ그리고 다른 문화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의 과정이 연기의 깊이를 줄거라는 부분에사 머리를 탁!...
와 이때 인터뷰는 처음 읽는데, 되게 깊이 있네요. (인터뷰 자체가)
새삼 제 은사님 이름 보여서 빵터졌는데ㅋㅋㅋ....
하여튼, 원래도 배우님 대답은 깊은 고민을 해오던 사람 같은 느낌이 강렬했는데ㅡ 그때도 지금도 한결 같은 사람이구나 싶어서 너무 멋져요.
인터뷰에서 하시는 말씀 볼 때마다 진중하시고 섬세 하셔서 팬 되길 잘했다 느끼게 되는 분이에요😊🙏🏽 글 감사합니다~
인터뷰 너머로 슬쩍슬쩍씩 보이는 배우님의 생각들이 너무 멋있어서 더 팬이 되네요!
빅토르최를 만나기위해 긴 여정을 하셨군요ㅜ 멋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