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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因 | ||||||
異熟因 | 遍行因 | 同類因 | 相應因 | 俱有因 | 能作因 | 能作因 |
同緣 | 所緣緣, 等無間緣, 增上緣 |
四緣
四緣 | 六因 | ||||||||||
離繫果 | 因緣 | 所緣緣 | 等無間緣 | 增上緣 |
離繫果 | 異熟因 | 遍行因 | 同類因 | 相應因 | 俱有因 | 能作因 |
異熟果 等流果 士用果 | 增上緣 | 異熟果 | 等流果 | 士用果 | 增上果 |
五果 五果
(3) 업감연기(業感緣起)
인도에서는 생명이 있는 것은 생사를 반복하며 윤회한다고 믿어져 왔다. 유부(有部)도 이 설을 받아들여윤회의 생존을 12연기로 해석한 것을 업감연기라고 한다. 그것을 도시(圖示)하면 별표와 같다.
無明 | 行 | 識 | 名色 | 六入 | 觸 | 受 | 愛 | 取 | 有 | 生 | 老死 |
過去世 二因 | 現在世 五果 | 現在 三因 | 未來 二果 | ||||||||
果 因 重 因 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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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明 | 行 | 取 | 行 | 有 | 識 | 名色 | 六入 | 觸 | 受 | 生 | 老死 |
惑 | 業 | 告 |
(4) 사종연기(四種緣起)
4종연기란 찰나연기(刹那)起)•연속연기(連續緣起)•연박연기(緣縛緣起)•분위연기(分位緣起)를 말한다. 찰나연기란 한찰나(약 75분의 1초)의 5온 속에 12연기가 모두 구비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연기의 논리적 의존 관계, 동시의 연기를 이른다. 연속연기는 때를 지난 법사이에 연기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연박연기는 12연기의 각지(各支)가 연속적으로 찰나 생멸해 가는 형태를 말한다. 분위연기란 앞서 말한 업감연기와 같은 것이다.
실천
유럽의 스콜라 철학이 나중에 ‘번쇄(煩瑣)한 철학’이라고 비판받았듯이 이 아비달마의 이론도 복잡하기 그지없다. 본래 스콜라 촐학은 신학의 지원을 받았듯이 아비달마 철학도 깨달음에의 길이 그 중심 주제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세밀한 이론은 전문가가 아니면 감당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아비달마 교학은 전문가의 독점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대로 그토록 치밀한 사변과 나름대로의 철학은 사상의 풍성한 뿌리이기도 했으며, 그 결과는 뒷날까지 오래 학습되고 전해졌다.
아비달마 시대 실천수행은 주로 마음의 제어를 지향하는 데 중점이 있었다. 다시 말해 흔들리기 쉬운 마음을 굳건히 누르고 계속 솟구치는 번뇌와 미혹을 가라앉혀 마음을 평정한 상태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좌선이 성행하고 그것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했다. 부파교단은 생활환경이 안정돼 잇었고 여러 조건도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출가자는 오직 실천에 노력하면 되었다.
스스로의 실천으로 개달음을 얻는 것은 남이 아니며 바로 자신이다. 이렇게 일체의 실천이 자기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고 있는 데서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의 배려가 부족해진다. 자리(自利)라는 말이 있는데 부파불교시대 실천은 자리가가 그 정점에 달해 있었다.
본래부터 어떠한 종교라도 그 중심이 되는 엘리트가 스스로 그 교의(敎義) 내지는 진리 그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고서는 그 교단을 지도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교단의 많은 구성원이 그 엘리를 본받아 스스로 그 본질인 진리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곳에 그 교단(종교)은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싱싱한 생명력이 유지된다.
그렇지만 종교는 단순히 일부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전문가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고통 받고 번민하는 모든 인간, 모든 생명 있는 것에게 널리 개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교단을 창설했을 때가 그랬다. 즉 자리 못지않게 이타(利他)가 계획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전문가가 될 수 없는 대다수의 세속 사람들을 잊고서는 교단 내의 결속이 제아무리 강고하다해도 그 교단은 사회로부터 유리되고 대중으로부터 떠나 잊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반성과 함께 부처님에로의 복귀를 지향하는 활동의 마침내 어디에선가 시작되고 그것이 앞으로 설명하게 될 대승불교의 흥륭(興隆)으로 이어져 나가게 된다.
제5장. 대승불교의 흥기
흥기(興起)의 배경
부파불교가 난해한 교리를 확립하고 어려운 실천에 전념하고 있는 사이에 일반 대중과 그 지도자(그 실체는 잘 모른다)에 의해 일종의 새로운 불교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대승불교(大乘佛敎 : Māhāyana)다. 마하(Mahā)는 ‘크다’, 야나(Yāna)는 ‘탈것(乘物)’ 또는 ‘가르침’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같은 대승불교에 비교해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부파불교는 小乘佛敎(소승불교 : Hinayāna)라고 불렀다. 히나(Hina)란 ‘비소(卑小)’란 뜻으로 이는 대승 불교측에서 낮춰 부른 폄칭(貶稱)이다. 부파불교 스스로는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일이 없었다. 뿐만아니라 아비달마 문헌에는 ‘대승불교’라는 언급이 없다. 이로 보면 부파불교는 대승불교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종래의 부파불교의 대중부계통에서 대승불교가 발생했다는 학설은 인정되지 않는다. 현재 학계의 학문적 성과에 따르면 대승불교는 보살(菩薩)로 불리우는 일단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전통적으로 부파불교는 국왕(國王)•제후(諸侯)•장자(長子) 등으로부터 정치적•경제적 원조를 받아왔다. 부파교단은 이들의 후원으로 광대한 장원(莊園)을 소유했고, 이런 안정된 사회적 기반 위에 존립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장대한 승원에 거주하면서 조용히 명상하고 좌선하며 번쇄한 교리연구에 몰두했다. 그것은 자리(自利)에 집중하는 것이었으며 특정의 권위를 고집하는 틀에 박힌 독선적, 고답적인 자세였다. 이런 집단이 은연중 또는 의식적으로 일반 대중과 유리(遊離)되는 것은 당연하다. 일반 대중도 그들을 피하게 된다. 일반 대중이 바라는 것은 그 같은 어려운 교리가 아니며 지나치게 엄격한 실천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에 매달리다 보면 일상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대승불교는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제기됐다. 대승불교는 자리 즉 이기적 독선적 불교를 널리 대중에게 개방하고 보다 자유롭고 활달한 사상을 전개시켰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일반 대중의 구제 즉 이타행(利他行)의 강조였다. 대승불교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자미도선도타(自未度先度他)’라는 말에서도 이같은 정신은 잘 나타난다. 자신의 구제보다 타인의 구제를 먼저 생각하는 대승불교의 사상은 자비정신에 다름아니다. 이같은 이타행을 실천하는 자를 모두 보살(菩薩 : Bodhisattva)이라고 부른다. 보살이란 말은 원래 부처님(覺者)이 되기 이전의 수행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종래의 보살이란 고타마 싯달타가 35세에 성도(成道)하여 부처님이 되기 이전까지를 말하는 데서도 그 용례(用例)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의 확대와 함께 보살이란 개념도 확대되어 출가이든 재가이든 이타행을 실천하는 사람을 대승불교에서는 모두 보살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살이 중심이 된 대승불교는 절대로 일시에 한 곳에서 급속히 흥기한 것은 아니다. 긴세월 여기저기서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고 그런 것들이 뒤섞여서 차차 대승불교로 결정(結晶)되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불교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도 여기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파불교 시대에는 잊혀져 있던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적 입장과 정신이 되살아난 것도 적지 않았다.
과거불(過去佛) 사상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인도의 역사관은 희귀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매우 근질기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한다고 생각하며 이 사상은 ‘윤회(輪廻)’라고 불린다. 윤회사상은 불교에도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수천백 명의 사람들 눈앞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실로 나타났다. 그들이 부처님을 실제로 만나 뵙고 그의 가르침을 듣고 진심으로 귀의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입멸했다.
부처님의 출현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당연히 무대를 과거로 옮겨 과거의 세계에서도 부처님이 출현했을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부처님은 그 재래(再來)에 다름아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불의 신앙은 인도의 상당히 오랜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원시경전의 하나인 《장아함경》 제1경 《대본경(大本經)》 전체는 명백히 과거불을 말하는 것으로써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이고 있다.
“이때 부처님이 송(頌)으로 말했다. 과거 91겁에 비바시불(毘婆尸佛)이 있었다. 다음 31겁에도 부처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시기(尸棄)였다. 이 겁중에서 비사여래(毘舍如來)가 나왔다. 지금의 현겁(現劫)중에는 무수(나유장無數那維藏)에 4대 선인(仙人)이 있다. 이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나왔다. 이는 구루손(拘樓槂)•구나함(拘那含)•가섭(迦葉)•석가문(釋迦文)이다. 비바시불 때 사람의 수명은 8만4천 세였다. 시시불 때는 7만 세였고, 비사바불 때는 6만 세, 구류손불 때는 4만 세, 구나함불 때는 2만 세였다. 지금 현재 사람의 수명은 1백세를 넘지 못한다...”
이 경은 이 밖에도 여러 부처님들의 출생과 성, 수행과 깨달음, 제자, 그리고 교훈과 설법 등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팔리어 장부경전 제 14경인《Mahāpadāna Suttanta》와도 일치한다. 이 밖에도 《칠불경(七佛經)》 《비바시경(毘婆尸經)》 《칠불부모성자경(七佛父母姓字經)》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48•4등 많은 경전에서 명칭과 내용이 일치되고 있다. 과거에는 부처님이 있었다는 신앙을 과거불 신앙이라고 하거니와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이름은 칠불(七佛)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래서 이를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 한다.과거7불의 명칭을 한역과 팔리어로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비바시불(毘婆尸佛 : Vipassi)
②시기불(尸棄佛 : sikhi)
③비사부불(毘舍浮佛 : Vessavhu)
④구류손불(拘留孫佛 : Kakusandha)
⑤구나함불(拘那含佛 : Konagomana)
⑥가섭불(迦葉佛 : Kassapa)
⑦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Sakyamuni)
이 가운데 제5불인 코나고마나는 불멸 후 100~200년 사이에 세워진 아쇼카왕의 비문에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불의 생각은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뽑히는 《법구경》 183구에도 나온다.
“모든 악을 짓지 말라(諸惡莫作)
많은 선을 실천하라(衆善奉行)
자신의 마음을 맑게 하라(自淨其意)
이것이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是諸佛敎).”
불교의 가르침을 가장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이 시는 분명히 ‘부처님들(諸佛)’이라는 복수를 쓰고 있다. 이 구절은 다른 경전에도 나타나고 있으며 과거의 7불고 모두가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대승불교에서도 그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그러한 사정 때문에 이 시는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라고 불리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과거불 신앙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불교 내부에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과불에 대한 생각은 과거7불이 가장 전형적이지만 과거24불, 즉 앞의 과거7불 앞에 17불이 더 있었다는 신앙도 있다. 24불을 내세우는 것은 자이나교의 교조가 24조라는 생각과 상통되는 일면이다. 이 밖에도 45불53불 등 여러 가지 과거불 사상이 있다.
미래불(未來佛) 사상
역사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당연히 미래에도 재래(再來)할 것이다. 역사가 반복한다는 인도인의 생각으로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과거7불의 마지막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절대로 재생(再生)하지 않는다고 경전은 확인해 주고 있다. 경전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도 “이것은 나의 최후의 신(身=生)이다”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팔리어 장부(長部)경전 제 26경 《Cakkavatti-Sihanāda》 그리고 한역의 《장아함경》 제 6경 《전륜성왕 수행경》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먼 미래에 메테야(범어로는 마이트레야 : 彌勒)라는 부처님이 나타나 현재 나보다 백 배나 더 많은 제자가 있는 교단을 이끌 것이며, 천 배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것이다”라고 예언하는 구절이 나타난다. 일본의 와다나베(渡邊照宏) 박사는 이 메테야를 가장 오래된 불교경전인 《수타니파타(經集)》 제5장 ‘피안에 이르는 길’에 등장하는 티사 메테야로 추정하고 있다.
범어의 마이트레야(Maitreya)는 본시 미트라(Mitra)란 말에서 유래한다. 미트라란 인도의 옛날 신명(信明)이었다. 미트라신에 대한 신앙은 인도뿐 아니라, 그리스와 이집트에까지 있었다. 또한 보통명사로서의 미트라는 친구(親舊)•선우(善友)를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에서 파생한 명사 미트라는 우정•친절등을 의미한다. 마이트레아는 이런 유어(類語)이므로 중국에서는 ‘자(慈)’라고 번역했으며 미래불은 ‘자씨(慈氏)’로 해석되었다.
★ 미륵의 어원인 ‘마이트레야(Maitreya)’라는 말은 본래 ‘미트라(Mitra)’라는 신의 이름으로부터 유래되었는데, 미트라는 인도·페르시아 등지에서 섬기던 고대의 태양신이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롭고 충격적인 사실은, 기독교에서 구세주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메시아(Messiah)’라는 말도 바로 이 미트라(Mitra)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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