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소박한 꿈을 향해 송병주 목사(선한청지기교회)
23세부터 전도사 생활 시작해서 43세가 되어 담임목사가 되기까지 20년동안 부교역자 생활은 오직 “위대한 비전”의 구호아래 교회성장론의 젊은 피여야 했습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던 젊은 부교역자들은 성장 신화의 첨병이어야 했습니다.
이제 담임목사가 되어 “이건 아니다”하고 선언하고 돌아서 보지만, 보고 배우고 들은 것이 그것 밖에 없는
참으로 어정쩡한 모습입니다.
성장신화로 들어가자니 그럴 수 없고, 돌아서자니 어찌해야 하나 걱정되는…
요즘 말로 40대 목사의 “멘붕”이라 할까요.
이와 같은 때에,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순서는 먼저 그들이 차려준 밥을 얻어먹고, 가족들 중에 아픈자가 없는지 물어 본 후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소박한 이 순서가 참 좋습니다.
“밥상 공동체”를 먼저 이루고, “고통 분담체”가 된 후, “비전 공동체”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비전은 소박한 꿈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같이 밥 먹고, 아파하고,
그리고 비전을 이루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위대한 것 하느라 이 소박함을 잃어버렸습니다.
메시야를 통해 위대한 이스라엘을 꿈꾸던 이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위대한 예수를 기대하던 제자들이 예수를 팔았습니다.
위대한 예수 덕에 한 자리 할 줄 알았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습니다.
영광스런 예수님의 보좌 좌편과 우편에 앉으려고 서로 싸우던 제자들도 십자가 좌편과 우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강도들만 달리게 했습니다.
초대교회 때도 위대함 좋아하던 분들이 문제였습니다.
지금 한국에는 세계 10대 교회중 7개가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그 세계적인 교회들이 세계적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가장 세속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은 한 영혼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은 낭비입니다.
하지만, 한 영혼 속에 우주의 가치가 보이는 사람에게는 그 낭비가 의미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노벨상을 받겠다는 위대한 꿈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위대한 치유의 능력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죽어가는 영혼이 사람답게 죽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백성들을 예수님 대하듯 했습니다.
세상은 그녀의 위대한 능력과 비전에 감동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꿈에 감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사들에게 얼마나 "위대한 사역"을 했는지 묻지 않으시고,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무엇을 했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은 "한 영혼"을 품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국민목사 하지 말고, 동네 목사 합시다.
캔 커피 사들고 슬리퍼 신고 만날 수 있는 목회합시다.
이제는 우리가 다시 예수님의 소박한 순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제일 불쌍한 목사는 하나님 주신 사명 못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미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같이 못 먹어 본 사람입니다.
바쁘게 뛰는 목사에게 “너, 나랑 밥은 같이 먹었냐?”고 주님 물으십니다.
_한국일보 2012년 10월 24일자에서 옮겨실음.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