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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길 나그네 길
김 선 구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오래 만에 만날 부모와 형제들처럼 안부가 궁금하다. 비행기가 제주에 가까워지자 창 너머로 지상의 모습을 바라본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웅장한 한라산의 모습. 그 아래쪽으로 목장과 같은 푸른 지대가 넓게 펼쳐지고 이내 해변으로 이어진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지상의 모습들이 더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들판 에 널려있는 비닐하우스와 곳곳에 산재해 있는 건물들, 담벼락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과수원과 농경지들의 오밀조밀한 모습. 그리고 해변 가에 밀집된 마을들. 육지하고 비교 해 보면 제주의 자연환경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초등학교 시절에 많이 불렀던 동요가 떠올랐다. 그 시절 산골이란 말이 나에게는 별로 실감나지 않았다. 육지에는 산과 산 사이에 작은 마을들이 있어 산골의 이미지가 선명했다. 그러나 제주에는 주로 해변가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 산골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중 산간 지대 마을들이 있었지만 그 곳도 산골이라 부르기가 걸맞지 않았다. 너른 들판이 주위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해변마을사람들은 이 마을들을 “웃두리”라 불렀다. 산 쪽에 있는 들이란 뜻이 아닐까 한다. 어떤 정감을 내포하기보다 좀 비하하는 뜻이 담겨있었다. 삶의 환경이 해변보다 못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해변마을 사람들이 지닌 배타성이었는지 모른다.
“기차 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기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황도 모르면서 노래는 신나게 불렀다. 오두막집은 우리 마을에도 있었기에 친숙했다. 기차가 어떤 물건인지, 또 기차 길은? 호기심이 컸다. 고등학교를 졸업 하고서야 처음으로 기차를 타 보았다. 제주에서 목포로 가는 연락선을 타고, 다시 목포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말로만 듣던 칙칙폭폭 소리의 실상, 호박넝쿨이 우거진 초가지붕들, 산골짜기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마을들. 비로소 또 다른 세상 육지의 풍경을 구경했다.
이 후 제주와 육지를 오가다가 육지에 정착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대관령 그리고 경남 밀양을 거쳐 대구 경북에 이르렀다. 고향에서의 생활보다 육지에서 산 기간이 훨씬 길어졌다. 이제는 고향 가는 길이 나그네 길이 되었다. 그래서 고향에 갈 때마다 지난 날들을 회고하고 더 챙겨보고 싶어진다.
제주도의 전체 모습은 마치 밀짚모자를 태평양 위에 던져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짚모자의 머리 부분이 한라산이고 둘레 차양이 들판에 해당한다. 이 차양과 같은 너른 대지위에서 일찍이 몽고인들이 목장을 설치 운영했다. 몽골제국이 운영하는 다른 목장에 비견할 만큼 규모가 컸고 제주도는 말 생산 기지가 되었다.
제주에 말 목장이 개설되면서 다루가치라는 목축기술자와 함께 몽고인들이 들어와 민폐를 많이 끼쳤다. 세력을 키우고, 난을 일으켜 목사와 만호 등 관리들을 죽이고 조정의 지시를 무시했다. 이에 반원정책을 펼쳤던 공민왕은 최 영 장군에 명하여 탐라를 정벌함으로써 몽골의 탐라지배 100년의 역사가 마감되었다.
“야! 이 몽고 놈아!” “야! 이 몽고 년아!” 어렸을 때 많이 들어 본 욕설이다. 이 욕설은 몽고인들에 대한 반감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몽고인들이 주민들을 얼마나 못살게 굴었으면 이런 말로 감정을 표현 했을까. 몽골인 들이 물러 간지 수백 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들이 뿌린 씨앗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말을 낳으면 제주로,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 속에서는 이와 같은 아픈 기억을 더듬게 한다.
아픈 역사의 땅 제주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올래 길을 걷기 위하여서 오기도 하고, 단기간의 여행, 때로는 한 달 살이, 반 년 살이 등 장기간 묵으며 체험 해 보려는 관광객들도 있다. 회한과 영욕의 땅이지만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독특한 민속 문화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고향 제주를 찾았다. 고향마을에서 행해지는 각종 축제행사에도 참여 해 보고,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주변 섬과 해안가를 섭렵하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한라산에도 올라가 바다 쪽을 관망하며 지난 세월을 되씹어 보았다.
1. 고향소묘
내가 낳고 자란 곳은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10여km 떨어진 곳, 애월읍 하귀리 가문동이라는바닷가 마을이다. 허지만 가문코지라고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땅이 삐죽이 바다를 침범하고 있어서 파도가 치면 그 피해를 많이 받았다. 제주에 태풍이 몰아치면 제일 먼저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것이 우리 마을이었다. 이처럼 척박하고 가난했던 마을에 해안도로가 지나가면서 개발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은 고급빌딩과 위락시설들이 위세를 부리고 있어 지난 세월의 자취가 영욕으로 점철된다.
바닷가에 서면 동쪽으로 “군항동”이란 마을이 손에 닿을 듯 가깝고, 그 곳에서 남쪽으로 파군봉 오름이 보인다. 좀 더 한라산 쪽으로는 이동하면 고성이란 마을에 이른다. 여기가 항파두리, 항몽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고려 말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가 마지막까지 항몽의지를 불태웠던 흔적을 안고 있다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진도로 내려와 항전했던 삼별초가 오래 버티지 못하여 다시 제주로 내려왔다. 이들 삼별초군대가 제주에 상륙하여 적선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수 있는 곳 항파두리에 전략적 요충지를 구축했다.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해안에 제방을 쌓아 전함을 배치하는 등 저력을 키우던 삼별초 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여 파견 된 여몽연합군과 대치한다. 군항동포구와 파군봉에서 일차 격전을 벌렸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고, 한라산 깊숙이 후퇴하며 저항하다가 붉은오름에서 마지막 투지를 발휘하고 전멸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항몽의지는 전설이 되어 전해졌다. 김통정 장군이 활을 쏘았다는 장군바위에는 화살촉의 흔적을 남기고 있고, 항전 중에 토성에서 뛰어내리며 남겼다는 마지막 발자국이 아직도 고성마을에 남아있다. 장수발자국에는 항상 물이 흘러나와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귀중한 샘 역할을 하였다. 불멸의 사신으로 승화한 삼별초의 행적을 기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의 고향마을 뒷동산위에는 “원병대“라는 넓은 들판이 있다.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하여 파견됐던 원나라 병사들이 머물며 말을 조련했던 곳이다. 그 지명 또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한다. 몽고인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마을로 내려가면 원나라수문장이 마셨다는 물 ”수무리 물”이 있다. 내가 어렸던 시절에 마시던 유일한 음용수였다. 마을 아낙네들은 허벅으로 이 물을 져 나르며 살림을 했다. 상수도가 설치되면서 지금은 유물로 보존되고 있어 지난날의 생활상을 되새겨보게 한다. 제주도 산간지에는 물이 귀하였다. 산이나 목장에 갔다가 목이 마르면 냇가 웅덩이에 고인물로 목을 축였다. 중 산간 마을에는 샘물이 귀하여 마을가운데에 못을 파서 빗물이 고이면 그것을 생활용수로 사용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해변마을 사람들은 딸을 중산간 마을로 시집보내기를 꺼려했다. 멀리까지 가서야 마실 물을 찾아 긷고 와야 하는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반면 바닷가에는 샘물이 풍부하여 그 곳으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적으로 해변 가에 마을들이 형성 되었다.
원병대는 우리 마을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식량을 조달하던 삶의 보고였다. 겨울작물로 보리를, 여름작물로는 조를 주로 심었다. 나는 학생시절 방학을 맘껏 즐겨보지 못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조 밭 김매기와 겹쳤다. 뙤약볕 밑에서 하루 종일 김매기하다 보면 몸이 고달픔은 물론 팔과 다리에 물집이 생겼다가 찬바람이 불면 뱀 껍질처럼 피부가 벗겨져 나갔다. 가을이 되어 조를 수확하고 나면 보리를 갈고 이듬해 보리밭 김매기가 시작되기 전 까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의 생명 줄이었던 터전이 지금은 택지로 변하여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농사짓던 시절의 흔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다행히 마을주민들이 민속보존회를 구성하여 옛 시절 농사짓던 일과 바다에서 고기 잡던 일들을 재현하고 보존하고 있었다.
제주의 시골농가에서는 마당 한쪽에 화장실을 겸하여 돼지를 키웠다. 농사용 거름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소거름이나 보릿짚 배추잎 같은 농산부산물들을 수시로 돼지우리에 넣어주면 돼지는 그 위에 배설하고 잘 밟아서 거름을 만들었다. 이것이 돗거름이다. 가을철이 되면 돼지우리에서 거름을 퍼내어 길가 한편에 펼쳐놓고 그 위에 겉보리 씨앗을 뿌리고 밟았다. 거름과 씨앗이 서로 잘 엉키도록 소를 이용하여 함께 밟았다. 소와함께 느릿느릿 걷다보면 자연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흥얼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고 훗날 농요로 정착하였다. 거름 밟기 작업이 끝나면 거름을 조금씩 망태기에 나누어 담아 소등에 싣고 밭으로 옮겼다. 보리씨앗이 섞인 거름을 밭 전면에 골고루 흩어 뿌린 후 밭은 갈아줌으로써 보리파종이 끝났다. 이듬해 봄이 되면 김매기를 하고 초여름이 되면 베어서 타작함으로써 보리농사가 끝을 맺었다.
마을의 민속보존회에서는 보리농사를 지으면 부르던 농요소리를 복원하고, 전국단위 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대상을 받았다. 총 3개 마당으로 구성된 작품 “겉보리농사일소리“에는 “소를 모는 소리, 돗 거름 밟는 소리, 소가 짐 싣고 가는 소리, 보리밭 김매기 소리, 보리타작 질 소리로 구성 되었다. 마을주민들이 농부차림으로 소를 앞세워 함께 부르는 농요소리에 깊은 향토애와 애향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제주도무형문화제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 ”가문동 원담역시“란 작품도 있었다. 원 담이란 해변 가 바다를 반원형태로 쌓은 돌담을 말한다. 밀물일 때면 물에 잠겼다가 썰물이면 물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밀물일 때 해변 가로 밀려왔던 고기들이 썰물이 되면 원 담 속애 갇혀 빠져 나가지 못한다. 바닷가 사람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 발휘한 지혜의 일면이었다. 어느 겨울 날 이 원 담 안에 부시리 떼가 갇혀 있는 것을 작살로 잡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원 담을 쌓기 위하여서는 마을 사람들이 총 동원 되어 일했다. 이 작업을 “역시“라 했다. 무거운 돌들을 바다 속으로 운반하여 담쌓는 일은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었다. 자연적으로 일꾼들의 입에서 구령이 흘러 나왔고 통일된 리듬으로 정착했다. 지역 주민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전문가 도움을 받아 완성된 이 작품 또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대상을 받았다. 공연관람객들 중 서울에 나와 살고 있던 동향인들이 자발적으로 공연에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는 바람에 심사위원들을 크게 감동시켰다는 후문이 있다.
고향은 언제나 포근한 엄마의 품이다. 세월이 가고 산천이 바뀌어도 땅의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선조들이 흘렸던 땀의 냄새와 삶의 자취들. 그것을 잊지 않고 지탱하려고 애쓰는 후대들의 노력. 그 속에 조상들의 얼이 살아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곳. 그것이 고향이다.
2. 모슬포 해안 답사
모슬포를 “못살포”라 불렀다. 기후가 험한 것을 빗대어 장난삼아 부르는 소리였다. 모슬포 앞바다는 물살이 거세고 들판에는 바람살이 거세다. 험악한 기후와 맞서 삶을 헤쳐 나가려니 주민들 생활이 얼마나 고단했겠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또 “대정 몽생이”란 말도 있었다. 대정이란 모슬포가 속한 마을의 옛 지명 대정현을 이르고, 몽생이란 길들이지 않은 망아지를 말한다. 망아지는 다루기가 힘들다. 거친 환경을 헤쳐 나가는 지역민들의 성향을 나타낸 말이었다.
제주도는 한라산을 기점으로 서북쪽지역과 동남쪽지역의 기후가 판연히 다르다. 서귀포에서 성산포에 이르는 동남쪽 지역을 정의현이라 불렀다. 한라산이 바람막이가 되어주기 때문에 겨울철에도 기후가 온화하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성향이나 생활습성도 판이하여 이곳 사람들을 일컬어 “정의 느릉괭이“라 불렀다. 성품이 느긋하고 동작이 느리다는 뜻이다. 반면 북쪽지역은 기온이 차다. 특히 모슬포 지역에는 서북풍이 바로 몰아치기 때문에 기후가 더욱 험난한 지역이다.
모슬포 앞바다에 있는 가파도에 가기 위해서 대정읍 운전항에 이르렀다. 허나 험한 날씨 때문 에 출항금지조치가 내려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라산 쪽으로 모슬봉, 단산, 삼방산이 늘어서 있고, 바다 쪽으로 송악산이 가까웠다. 바다건너로 가파도와 마라도도 보였다. 너울거리는 바닷물 너머로 눈길을 보내며 다음 행선지를 궁리하다가 송악산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그 지역은 한 번도 와 본적이 없는 곳이어서 호기심이 생겼다.
운전항에서 송악산까지 거리는 4km남짓.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걷는 동안 인적이라곤 거의 없었다. 가끔 자전거 여행자만 지나갈 뿐 길가 주변은 인가가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 곳이 알뜨르비행장 터였다. 일제강점기 때 중일전쟁의 전초기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일본인들이 만들었다. 현 제주공항인 정뜨르비행장도 그 때 만들었다. 지역주민들을 강제로 징용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사용했던 비행기격납고 20개 중 19개가 아직도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곳은 6.25 때 제1훈련소로도 이용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구에 있던 훈련소를 모슬포로 이전하여 장정들에게 기초훈련을 시키고 전선으로 내 보냈다. 한 달 정도 교육시키고 전장에 투입했다. 그들 중에는 10대의 중학생, 30대 후반의 직장인 그리고 일자무식한 농부들까지 50만 명 정도가 그 곳에서 훈련 받았다한다.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동안 얘기로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는데 그 자취나마 더듬어 보게 되어 다행이었다.
송악산 탐방로 입구에 들어서자 올래길과 연결되었다. 올래길10코스가 알뜨르 비행장 들판을 가로 질러와서 송악산 둘래길과 만나도록 되어 있었다. 송악산(松岳山)은 말 그대로 소나무가 많은 바위산이라는 뜻이다. 일명 절물이 오름이라고도 했다. 파도가 송악산 절벽에 부딪치면서 소리가 크게 울리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이름만 들어도 자연이 펼치는 거센 파노라마가 연상되었다.
해안을 따라 송악산 둘래길을 걸었다. 바다가 주는 시원함과 함께 바다 가운데 사이좋게 서있는 두 개의 바위로 된 형제섬과 사계마을해안을 따라 산방산까지 이어지는 풍광이 일품이었다. 산위에 오르니 분화구가 깊게 형성되어 있어 화산폭발의 흔적을 내보였다. 오름이 아니고 산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산위에서 내려다보니 바로 눈앞에 가파도가 나타났고, 멀리 마라도까지 선명하였다. 송악산 해안은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지만 해안 곳곳에는 20여개의 진지동굴이 있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인들이 무기를 감추기 위하여 만들었다. 여기에도 지역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었으니 일제 강점기 때 약소민족이 겪은 고통을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역사의 교육장으로 아픈 상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어서 사계리 용머리 해안으로 이동했다. 산방산 자락에서 해안가로 뻗어나간 암석이 용머리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치 용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려는 형상이다. 오래 동안 사암층 암벽이 파도에 깎여서 묘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조 때가 되어서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서 해안을 둘러볼 수 없었다.
가까운 곳에 하멜의 동상과 기념비가 있었다. 과거에는 네덜란드상선 스페로호크호를 제작하여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철거해 버리고 동상과 기념비로 대신하고 있었다. 조선 효종 때 네덜란드 무역선이 일본으로 가던 중 난파되어 선원들 36명이 이곳에 표류하였다. 그들 중 하멜 외 8명이 억류 13년 만에 탈출하여 본국에 돌아가서 하멜표류기를 썼다. 조선의 지리와 풍속 등 체류 중에 보고 들은 각종정보를 적고 있어서 당시 조선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평가된다. 바다를 등지고 홀로 벤치에 앉아있는 하멜의 모습은 친숙한 아저씨로 보였다. 이따금 찾아드는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방산은 제주 10경에 들 만큼 수려한 경관을 하고 있었다. 원래 한라산 정상에 있던 것이 뽑혀 나와 산방산이 되고, 그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산방(山房)이란 산속의 동굴을 의미한다. 산방산 중턱에 꽤 넓은 굴이 있고 그곳에 부처를 모시고 있어 산방굴사라 불리었다. 암벽의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여신 상방덕이의 눈물이라 하여 받아 마시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다. 중학생 때 수학여행 차 들려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으려고 노심초사 했던 일이 떠올랐다. 굴 밖에 나서면 노송 사이로 형제섬과 가파도 마라도 그리고 용머리 언덕이 한데 어우러져 경관을 이룬다. 수도장소로 최고라 한다. 고려시대 혜일스님이 여기에서 수도했고, 유배 중이던 추사선생이 즐겨 찾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산방산 앞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가까이에 화순항이 눈에 들어왔다. 한 때 제주 해군기지 후보지로 부각 되었다가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반대로 무산된 곳이다. 평화의 섬 제주에 군사시설이 웬 말인가?가 반대 이유였다. 전쟁을 피해간다고 평화가 유지되는 것일까?
내가 잠시 머물렀던 독일북부지방의 항구도시 킬이 떠올랐다.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의 주도이며 독일 해군기지사령부가 있었다. 발트 해 해군함대가 집결하는 곳이었다. 전쟁의 우려보다 평화수호의 상징으로 보였다. 마침 우리나라 해군함이 해군사관생도들을 싣고 입항 하여 그 늠늠한 모습에 감격하고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역역했다. 평화란 스스로 지켜가는 것이란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초여름의 화순항 앞바다는 물결이 맑고 더 푸르렀다. 항구로서 이상적인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 해군기지로 선정되지 못한 것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부질없는 생각과는 달리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배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제주해군기지는 서귀포 쪽 위미리 강정마을에 세워졌다.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전투함 20척과 크루즈선 2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규모라 한다. 우리나라의 평화를 지키고 지역발전에도 기여 할 것으로 기대한다. 제주 민들의 마음에 자부심으로 정착되기를 기대하며 모슬포 일대의 해안 답사를 마쳤다.
3. 가파도와 마라도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남쪽 바다 속에 종대로 나란히 솟아있는 두 개의 섬. 하나는 가파도 또 하나는 마라도. 섬 이름이 특이했다. “은혜를 갚아도 되고 마라도 되고, 원수도 갚아도 되고 마라도 되고.“ 어렸을 때 이 섬들 이름을 빗대어 지껄이던 말이다. 육지에서 빚쟁이가 도망쳐서 여기까지 오면 그 빚은 갚아도 좋고 마라도 좋다는 농 섞인 얘기를 품고 있었다. 그만큼 낙후하고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곳을 빗댄 소리가 아니었을까.
가파도는 섬모양이 가오리처럼 덮개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송악산에서 내려다보면 가오리가 헤엄치는 모습으로 물에 잠길 듯 떠 있다. 최고 높은 곳이 해발 20m에 불과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섬으로 평가된다. 섬 주변이 거센 기류와 조수가 부딪치는 수역으로 어선들 파선이 잦았고, 외항선들의 표류도 많았다. 하멜이 탄 배가 표류됐으리라 짐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면적이 0.87㎢인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영조 때 제주목사가 소의 방목을 허가 하면서부터이다. 지금은 300여명의 주민들이 어업에 종사하며 부업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와 고구마. 그래서 4ㆍ5월에 행해지는 청 보리 축제가 유명하다고 한다. 4ㆍ5월이면 종달새가 높이 떠 지저귀는 시절이다. 때맞춰 물결치듯 흔들이는 보리밭 풍경이 나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있어 청 보리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운전항에서 배를 타고 10여분 항해 후에 가파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보리는 이미 수확이 끝났고, 밭 가운데 보리등걸만 즐비하여 아쉬움을 자극했다. 섬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니 담벼락을 조약돌이나 소라껍질로 장식하여 관광객의 눈을 끌었다. 좁은 돌담길을 따라 좀 더 나아가니 “소망전망대”라는 망루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소망을 비는 곳이다. 풍어와 뱃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망을 보고 경계를 했던 곳이다.
가파도에서는 위급한 환자가 생기거나 생활물자가 떨어지면 봉화로 신호를 했다한다. 봉화를 보고 모슬포에서 배와 물자를 보내어 어려움을 도왔다. 여기에서 봉화도 올리지 않았을까하는 의아심을 가졌지만 어디에도 그러한 언급이 없었다. 지금은 가파도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제주 본섬과 한라산, 마라도와 푸른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어서 가파초등학교를 지나자 벽화마을이 나타났다. 길가 집들의 벽을 백색으로 칠하고 여기에 가파도에 대한 관심거리를 소개 해 놓았다. 이를테면 가파도의 샘물, 가파도의 암초, 가파리 고인돌, 해녀의 숨비소리, 하멜등대 등 등. 제목과 함께 간단한 설명을 해 놓아 관광 해설사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섬 가운데를 관통하는 길을 빠져 나가니 남쪽에 또 하나의 포구가 있고 마을이 있었다. 가파도에는 상동과 하동 두 마을이 있었다. 이전에는 남쪽 하동마을이 번성했으나 정기선이 출항하고 올래길과 청보리관광이 부각되면서 주민들이 상동 포구근처에 더 많이 거주한다고 했다.
가파도의 해안선은 4.2Km 해안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이색적인 체험이었다. 그러나 해변 풍경은 제주본섬이나 주변 섬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후됐던 지난 시절의 제주 해변 모습을 연상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파도의 지도상에는 일출전망대, 일몰전망대, 저녁이 아름다운 길, 마라도가 잘 보이는 길 등 여행객의 마음을 유인하는 표시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체류 할 수 있는 시간제약으로 제주 본섬이 잘 보이는 길을 택하여 섬을 반 바퀴만 돌고 돌아왔다. 나머지는 청보리 축제 때 다시 와서 볼 것을 기약하며 귀선 길에 올랐다.
마라도는 가파도의 남쪽에 위치한다. 모슬포에서 11km, 가파도에서 5.5km 떨어져 있다. 면적은 0.3㎢로 가파도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최남단의 섬이다. 남서쪽 149km지점에 이어도가 있지만 아직은 암초바위일 뿐이다. 마라도 남쪽에는 국토의 최남단을 알리는 비가 서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까지 거리가 1146km. 서울에서 도쿄 간 거리에 맞먹는다.
길쭉한 고구마를 길게 눕혀 놓은 것 같은 모습의 섬을 한 바퀴를 쉽게 둘러볼 수 있었다. 해안이 오래 동안 해풍에 깎인 영향으로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어 경관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뭍은 운동장처럼 휑하니 잔디밭이었다. 원래는 울창한 원시림으로 덮여 있는 무인도였으나, 개간 허가를 얻어 화전을 하면서 탁 트인 섬이 되고 말았다. 뱀이 많아서 불을 질러 개척했기 때문에 삼림지대가 전부 불타 버렸다고 한다.
섬의 남서쪽지역에 주민들이 모여 살며 주로 어업에 종사하였고, 최근에는 숙박 등 관광업에도 종사한다고 했다. 가게 중에는 짜장면 가게가 많았다. 어느 통신회사에서 마라도에서도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다는 광고를 하면서 짜장면 이미지를 이 섬에 부각시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무한도전 인생극장”을 촬영하고서 짜장면 거리도 생겼다. 짜장면을 시켜보니 톨 무침 한 숟갈 얹혀 놓은 것을 제외하면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게에서 짜장면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짜장면시식은 이 섬을 방문했다는 기념이 될 듯 했다. 국토최남단에 와서 증명사진 찍고 짜장면 한 그릇 먹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라도에서는 한라산을 포함 제주본섬 쪽을 관망해보는 의미가 더 커 보였다. 마라도에서 산방산 쪽으로 보면 가파도와 형제섬을 포함하여 대정읍에서 안덕면에 이르기까지 해안 일대가 빼어난 절경을 아우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일대를 “마라해양도립공원”으로 지정관리하고 있었다. 전체 49.7만㎢면적의 해상공원은 청정바다와 진귀한 해양생태계를 자랑한다고 했다. 맑은 날에는 송악산의 풍광과 함께 서귀포 앞바다의 범섬과 문섬까지 육안으로 감상할 수 있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고도 했다. 제주 해군기지와 함께 평화의 섬의 한 축이 되기를 기원했다.
마라도의 동쪽지대는 해발 39m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여기에 마라도 등대가 서 있었다. 전 세계의 해도에 기제 될 만큼 중요한 등대로 국제선박과 어선들의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등대 앞 광장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한 등대모형들이 세워져있고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라는 간판과 육당 최남선의 글도 새겨져 있었다. ”누가 한국을 구할 것이냐. 그것은 바다를 지키는 일“이란 취지의 글이었다.
등대 앞에 펼쳐지는 한없이 넓은 바다에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가 노을을 드리웠다. 그 밑으로 어선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고기가 많이 잡히는 어장인 모양이었다. 이 어장을 수호하고, 국토의 남단을 지키고 있는 등대의 모습이 거룩한 성자처럼 여겨졌다.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즐겨 불렀다는 노래 등대지기가 떠올랐다. 한 겨울에도 거친 파도를 벗하여 외롭게 서 있을 등대를 다시 찾을 날을 다짐해 보았다. 그리고 이어도까지도 우리국토로 품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발길을 옮겼다. (2023. 06. 30)
첫댓글 고향이 제주도 이지만 이번에 꼼꼼히 방문 하셨군요. 제주도는 육지 사람들에게는 그리운 여행지입니다. 여러 차례 가도 볼거리가 많은 곳입니다. 제주도의 여러 곳을 자세히 소개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어렸을 때 얘기로만 들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확인 해보는 일도 보람인 것 같고, 외국만 아니고 국내여행을 다녀와서 정리 해 보는 것도 좋은일인 것 같습니다.
신혼여행 때 가파도 마라도 얘기를 들었습니다.
언젠가 제주도 한 달 살이를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여건이 되면 ...
고향 방문기 글 잘 읽었습니다.~~
정선생님 반갑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수학여행으로 제주도 일주를 해 본 일 밖에 없어서 낯선 곳이 많습니다. 요새는 관광지가 많이 개발되어 가 볼 곳이 많습니다.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