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개 자잘한 못들을 마루에 총총 세우고 그 가운데 드라이버 하나를 우뚝 세운 게 청주서 젤 높은 두산 위브더제니스 찬란한 외국어 아파트다 어느 날 저녁 때 대교에서 만난 꼬부랑 할머니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손에 들고 아들네 집을 찾는데 그냥 “ 청주서 젤 높은 ” 이라 해서 그쪽으로 가시라고 한적 있다 높은 집에 사는 자식 오시는 날자 미리 알아서 진작 자가용으로 모시잖고 ... 나는 속으로 중얼 거리며 할머니 등 뒤쪽 한참 서서 바라보던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서 모르는 두산 위브더제니스다 내 집에서 200여 미터라 저놈이 우리 집 쪽으로 쓰러지기나 하면 우리 집은 작살 일 수도 있지 않으냐 고 겁낸 게 지금은 닳고 닳아서 쓰러지지도 않고 작살도 나지는 않고 있다 알고 보니 돈 좀 있는 연금 생활자 k 시인도 h시인도 거기 산다고 했다 그렇든 저렇든 나랑 아무 상관없는 저 아파트가 문만 열고 나가면 내 머리 꼭대기를 직신직신 건드리는지 알 수 없고 차타고 청주를 마 악 벗어나 수름재 고개나 고은 삼거리쯤에서 비로소 저놈과 사이가 훨훨 벗어났구나 하는 씨잘 때 기 없는 생각까지 해야 하는지 저거 서기전 그 자리에는 옮겨간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고 터미널 전에는 제헌국회의원 문헌이도영 씨가 운영하던 남한 제사공장이 넓은 뽕밭을 끼고 있었다 그럼 저 아파트 다음에는 언제 무엇이 올까 나보다는 저놈이 더 오래 살 걸 생각하니 그 또한 속이 이상해지는 건 무얼까 실상 툭 불거진 저놈은 아무 말도없이 마냥 서 있는데
--------------------- 금계국 /이인해
라이딩 하는 길가 금계국 줄지어 서있다 그저 히마리없이 노랗기만 한 한 송이 눈맞추는 순간 불현듯 80년 내 생애가 아슬해 진다
죽지 않고 그 많은 시간을 어찌 접고 폈을까 꽃잎을 떼내고 가지를 찢으며 깊은 냇물 높은 절벽 어찌 걸어 왔을까
힘없는 노오란 저 꽃잎들 그옆에 나를 내려다 보는
영 입을 닫고 있는 깊은 하늘
---------------------------------------------- 검은 머리 하피스트 /이인해
검은 머리 여자가 TV에 나오고 있다 유난하게 검어서 금발 백발 어떤 머리도 이길 듯 예쁘다 그 머리 흘러내린 한복 저고리 백설처럼 하얘서 더 검다 심하게 검은 머리는 거룩하다 심하게 하얀 저고리도 거룩하다 심하게 검은 머리와 심하게 하얀 저고리의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그 깊은 골짜기 물은 차겁다 뼈가 시리도록 차겁다 그 물소리는 맑다 저 하프 소리 처럼 맑다 하프의 줄은 모두 색갈이 다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많은 줄을 자유롭게 골라 연주하라는 뜻이다 검어도 하얘도 세상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긴 검은 머리 하피스트 그는 신화神話를 연주하고 있다 지금 누군가 잠시 그 골짜기에 살고 있을 것이다 ------------------------------------------
50년대 무심천
이인해
서문다리를 걸어서 건너면 " 못살겠다 갈아보자 " 민주당후보 해공 신익희선생의 큰 목소리가 들린다 긴 말뚝을 S 코스로 박아놓고 운전 면허시험을 보던 고수부지 그 자리 1956년 대선에 구름같이 몰려든 민주시민들의 환호소리가 들린다 병무청에서 건너는 송판 다리 남사교 우측으로는 우시장 , 좌측으로는 청주시나무전 소를 끌고 와서 열띤 흥정으로 팔고 사고 서문 해장국집에서 해장국 먹고, 막걸리를 마시고 그래도 웃으며 헤어진 그 가난하나 씩씩하던 바지저고리들 나무 한 짐으로 끼니를 이어가던 6.25 피난민 먼산나무 지게꾼들, 똥통 리어가에 똥을 퍼 날라 하천부지를 채소밭으로 가꿔 먹고살던 그 목숨 어디로 갔을까 머나먼 파노라마를 재잘거리며 무심천은 여전하게 말없이 흐른다
--------------------------
6월
이인해
어린모를 내는 이앙기소리에 써레질 한 논이 조금 설렌다 비가 그치는 듯하더니 다시 찔끔 거려 마을 앞 봇물은 황톳물 우쩍 커 오른 갈대밭을 휘저어 흐른다
하염없이 계절의 책장 넘기며 살았던 나를 여기 서서 돌아다본다
이제는 구석구석 아픈 곳도 있지만 많이 갔던 산모롱이를 돌아가 듯 피부 위로 오는 것들을 예감하며 아침 흔들어 주는 미풍 느끼는데 지금 , 저 녹색 바다가 슬픔도 기쁨도 아닌 건 무얼까
그래도 앞을 봐야지 일상의 통점을 잠시 잊는 순간 오래 험로를 걸어온 그로테스크 한 두 다리가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 새떼들 울음도 있다
더 부르고 싶었던 노래의 그루터기 어루만지면 지평 끝 일몰 같은 보드라운 저녁이 보인다
내가 누워서 무엇이 되든 저 생성하는 것들이 잠시 푸르게 덮어 주려는 걸까
차라리 이끼 꽃처럼 숨어서 살아도 좋은 나날인데 선한 이웃처럼 유월 밤이 오고 있다
--------------------------------------------
이주移住/ 이인해
하루 두갑넘게 피우던 오십년담배 끊고 몇 년 후까진 가끔 슬펐어 그토록 피우다 버렸다는 긴 역사의 강줄기가 내내 언짢더라구
쪼붓하게 쑤셔오는 생의 고통과 걷잡을 수없는 무위와 허무 독한 연기로 누르며 어루만지며 정말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라니
끈적한 담배 건조실의 더위 생각하면 근원부터가 극독인 걸 구름과자의 낭만에 빠져 피워 문 채 이슬지는 풀잎을 보곤 했어
그럴 때마다 모든 남자들은 여송연을 입에 문 황야의 무법자 크린트 이스트 우드 였지 그럴 때마다 어떤 여자들은 담배연기 날리는 옆얼굴의 잉그릿버그만 였어
일어선 페니스처럼 꼿꼿한 한 가피 담배 생의 한 가운데 훅훅 불붙이며 건강 따윈 제쳐버린 무모한 열정 였어
이젠 그 멋지던 연기의 하늘은 누전 차단된 적막의 그린 필드 바람이 불어 민들레 씨나레만 무리로 높이 높이 날아가는 거 봐
자기 신념 갉아 먹고 위안의 사슬로 이어온 시간들 잘라 낸지 6년 3월 그때 바라보며 난 웃는거야 리차드위드마크처럼 잔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