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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처음 앙코르와트로 가는 길은 태국에서 버스를 타고 흙먼지를 날리며 간, 기나긴 긴 버스여행길이었습니다. 지금은 도로 포장이 잘되어 있다고 하지만 60년대의 우리나라를 연상케 하는 주민들의 생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맑은 아이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어찌 하다보니 총 3회를 방문하였음에도 갈 때마다 감탄을 금치못했습니다.
처음 갔었을 때에는 가이드의 제안에 따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5시부터 앙코르와트 건물의 처마에 앉아서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건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뿐...
서서히 동이틀 때까지 앙코르와트 처마에 앉아 느껴본 명상의 시간은 신세계였습니다. 속세를 떠난 듯한 기분이랄까... 그 후 2차례 더 방문했었으나 사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이 점점 더 강화되어 사원 출입에 대한 제한이 많아졌습니다.
‘완 달러’를 외치며 물건을 팔기 위해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톤래샵 호수에서 고무통을 타고 유람선까지 와서 구걸하는 아이....
태국과 캄보디아 여행길에서 이런저런 모습들을 보았지만, 앙코르와트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과 충격은 아직도 머리에 맴돕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의 한계는?....
찍어놓은 사진도 신통치 않고 상세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 인터넷에 소개한 자료를 올려봅니다.
<앙코르와트 소개 자료>
1860년 초 프랑스 박물학자 알베르 앙리 무오(Albert Henry Mouhot)는 진기한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 현지 안내인 네 명과 함께 캄보디아의 밀림 속을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 도착하자 안내인들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더 들어가면 몇 백 년 동안 텅 빈 도시가 나오는데 그곳에는 주술에 걸린 수많은 유령들이 들끓고 있다고 했다.
무오는 텅 빈 도시가 있다는 말에 흥미를 느끼곤 직접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안내인들을 설득해 밀림 속으로 계속 들어가던 무오는 갑자기 펼쳐진 장관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일기에서 그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의 청색, 정글의 초록색, 건축물의 장엄함과 우아한 곡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리스와 로마가 남긴 그 어떤 유적보다도 위대하다. 세계에서 가장 외진 곳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무오가 발견한 곳은 400년 전에 멸망한 옛 도시 앙코르의 폐허로 현재 캄보디아의 북서부 시엠레아프의 톤레사프호수 북쪽 일대(일명 앙코르 지방)에 있는 돌과 벽돌로 지어진 앙코르와트 유적군이다. 앙코르와트는 ‘도시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그 일대 수많은 앙코르 건축물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유적지인데 때로는 일대 유적군 전체를 ‘앙코르와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오가 앙코르와트를 발견할 당시 그곳에는 10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하고 있었다.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시엠레아프는 캄보디아 3대 도시 중 하나로 한국의 경주 같은 고대 도읍지이다. 앙코르와트에는 폭이 넓은 도로가 동서로 질서정연하게 뻗어 있고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정교하게 건축한 사원 600여 개가 세워져 있다. 그중 10여 개는 크기가 이집트의 룩소르대신전이나 중세 유럽의 대성당과 비교할 만하다.
12~13세기에 앙코르왕국은 두 왕의 강력한 통치로 번성했다. 태양의 수호자로 일컬어진 수리아바르만 2세는 지금의 타이 영토 정도로까지 세력을 떨쳤고 ‘도시의 사원’ 앙코르와트를 건설했다.
앙코르와트는 동서 1500미터, 남북 1300미터의 웅장한 사원으로, 약 2만 500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37년 동안 건설했다. 몇 겹의 성곽이 앙코르와트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마지막 성곽 바깥은 다시 폭 190미터의 거대한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앙코르 유적 중에서는 드물게 서쪽에 정문 입구를 두었으며 큰 탑문이 있다. 탑문에서부터 사당까지는 너비 9.5미터, 길이 475미터인, 돌이 깔린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이 유적은 수리아바르만 2세가 힌두교 비슈누에게 바친 것으로, 그가 죽은 다음에는 묘로 쓰인 것 같다.
사원을 제대로 보려면 3생(전생 · 현생 · 내생)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1층은 미물계, 2층은 인간계, 3층은 천상계를 상징한다. 건물은 세 겹으로 된 회랑과, 이 세 겹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앙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겹의 회랑은 중앙 사당 쪽으로 들어갈수록 한 단씩 높아져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를 이룬다.
제1회랑은 동서 215미터, 남북 187미터이고 총 800여 미터인데 회랑벽면에는 크메르제국의 신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벽화가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역사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캄보디아에서는 역사교과서와 같다. 박물관 유물을 훑어보듯 돌아보아도 족히 1시간은 걸리는 이 엄청난 ‘4단 병풍식’ 부조에는 힌두교의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와 〈라마야나(Ramayana)〉에 나오는 카우라바(Kaurava)족과 판다바(Pandava)족 간에 벌어진 쿠루크세트라(Kurukshetra) 전투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수리아바르만 2세가 코끼리를 타고 병사들 사이를 지나가는 장면도 있고 힌두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을 표현한 장면도 있다. 88명의 아수라와 92명의 신이 장생불로약을 추출하려고 ‘넓은 우유의 바다를 휘저어’ 버터를 만드는 신화 속의 한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800여 미터에 이르는 부조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신의 영역인 높이 65미터의 중앙탑은 70도가 넘는 가파른 성벽 그 자체로 담력이 없는 사람은 오르기를 포기할 정도다. 능숙한 등산가라 할지라도 두 손 두 발을 써서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를 신에 다다르기 위한 예의라고 한다. 모서리에 네 개의 탑이 서 있는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탑은 앙코르와트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궁궐처럼 화려한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앙코르와트는 신의 세계를 지상에 구현한 사당인데 중앙탑은 힌두교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받드는 수미산(須彌山)을 나타내고 참배 길은 세계의 기축(基軸) 도로를 모방하며 둘레를 에워싼 벽은 히말라야산맥을, 해자는 세계의 끝인 깊은 바다를 상징한다. 사원 안의 곳곳에는 비슈누에 관한 신화가 조각되어 있고 국왕들의 모습을 비롯하여 코브라 · 무희의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수리아바르만 2세의 후계자인 자야바르만 7세는 30년을 통치하면서 세력을 최대로 확장시켜 현재의 캄보디아 · 라오스 · 타이 · 베트남 남부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고 도읍인 앙코르톰을 재건하고 병원 · 숙박시설 · 도로를 건설했다. 그가 건설한 건물에 이런 글귀가 남아 있다.
“임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이다.”
앙코르왕국이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 앙코르는 동서 29킬로미터, 남북 10킬로미터에 100만 명이나 거주하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당시의 상황은 1296년 중국의 사신으로 와 앙코르에 1년을 머물렀던 주달관이 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잘 나와 있다. 그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왕은 밤마다 황금 탑에서 잠을 자고 황금 창문이 있는 방에서 국사를 본다. 이곳에는 엄청난 보물이 있다고 들었다. 왕궁 곳곳에 경비가 삼엄하다. 왕은 황금 관을 머리에 썼으며 재스민 나뭇잎으로 머리를 두를 때도 있다. 또 목에는 1.3킬로그램쯤 되는 진주 목걸이를 팔에는 금팔찌, 발에는 호랑이 눈으로 장식한 황금 고리를 찼다. 왕은 황금으로 만든 검을 들고 외출을 했다. 왕은 백성을 보호하는 마법을 전해 받은 존재로 간주되었다. 왕은 왕국의 평화를 위해 여자로 변신한 머리 아홉 달린 뱀과 매일 밤 섹스를 했다. 왕궁 밖을 행차할 때는 황금 칼을 차고 코끼리를 탔으며 수많은 수행원이 뒤를 따랐다. 왕궁에는 다섯 왕비들이 있는데 왕비들은 다른 여자들처럼 맨발에 머리를 틀어 올리고 우유처럼 하얀 유방을 드러내고 다녔다. 대다수 사람들은 살색이 아주 까맣지만 이들 왕비들은 햇빛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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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왕성’이란 의미의 앙코르톰 역시 신의 세계를 모방해 건설했는데 높이 8미터, 한 변이 3킬로미터인 정방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폭 100미터의 해자가 주위를 두르고 있다. 규모만 보면 앙코르와트보다 더 크다.
해자를 지나는 다리 난간은 ‘유해교반(乳海攪拌, 우유바다 휘젖기)’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한쪽에는 54명의 신이, 다른 한쪽에는 54명의 악마가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의 몸통을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유해교반이란 남녀교합을 우주창조의 모습으로 표현한 힌두교의 창조신화이다.
앙코르톰 중앙부에는 높이 54미터의 바이욘사원(납골당이 있는 불교 사원)이 있다. 바이욘사원에는 54기의 사면탑(四面塔)이 있는데 사면이 부처 얼굴인 사면불안(四面佛顔) 관세음보살을 탑의 당상부에 안치한,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사면불안은 사방팔방을 자비로써 비춘다고 하는데 자야바르만 7세는 스스로를 관세음보살과 동일시하면서 사면불안을 만들었던 것이다. 사면불안은 사방정토를 상징하며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바이욘사원은 세계의 중심과, 왕의 지배가 전 세계에 미친다는 것을 상징한다.
바이욘사원을 지나면 벽에 새겨진 코끼리 조각에서 이름을 딴 코끼리 테라스가 있다. 코끼리 테라스는 병사들을 사열할 때 이용했던 긴 회랑으로, 중앙의 국왕 전용 테라스에는 반은 새(독수리)고 반은 사람인 가루다 조각상이 있다. 그 앞으로 동쪽 승리의 문을 향해 행군용 도로가 곧게 뻗어 있다. 나병왕(Leprous King)의 테라스는 7미터 높이의 기단에 부조가 뛰어난 다섯 개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크메르 왕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일부 크메르 왕이 나병을 앓은 것으로 추정한다.
바이욘사원의 북쪽에 있는 바푸온사원은 힌두사원인데 앙코르톰보다 앞선 시기에 건설되었다. 원래는 바이욘사원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바푸온사원 북쪽에 접해 있는 왕궁 터에 피미아나카스사원이 있는데 이 사원도 앙코르톰 이전에 건설된, 피라미드 형태의 힌두사원이다. 상당 부분이 붕괴되었지만 계단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앙코르톰 동쪽에 거대한 나무뿌리로 유명한 타프롬(Ta Prohm)사원이 있다.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톰을 건설하기 전에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불교사원이다. 이 사원의 방 한 곳에는 벽면과 천장을 각종 보석으로 장식해 크메르왕조의 영화를 한껏 뽐냈는데 현재는 모두 도굴되어 보석이 박혀 있던 구멍만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타프롬사원은 전성기 때 3000여 마을을 통치했고 8만 명이 사원을 관리했다고 한다. 이 사원은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툼레이더〉의 촬영무대로도 유명하다.
크메르인들은 석재를 쉽게 구할 수 없는 밀림에다 어떻게 앙코르와트 유적의 건축물들을 세웠을까? 앙코르와트 유적군에 사용된 건축 재료는 연와(벽돌) · 라테라이트 · 사암이다. 벽돌(12인치×6인치×4인치)은 서로 마주대고 비벼서 모서리를 매끈하게 한 후 조심스럽게 쌓고 라임 · 야자 · 설탕 · 덩굴식물의 수액으로 접합했다. 벽돌을 쌓은 후 벽 표면을 문지르거나 석회와 모래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조각한 후 치장했다. 대부분의 벽돌은 직경 2.5센티미터, 깊이 3센티미터의 구멍을 뚫고 철제로 보강했는데 이것은 벽돌이 지정된 위치에 견고하게 설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매우 두꺼운 벽인 경우 내부를 벽돌 조각과 흙으로 채웠다. 회반죽 사용은 9~12세기에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 쇠퇴했다.
후기에는 주로 라테라이트와 사암을 사용하여 건설했다. 라테라이트는 크메르 지역의 특수한 재료로, 공기와 만나면 단단해지고 절단하기 쉬운 철분을 함유한 점토이다. 주로 건물의 토대나 평평한 단, 계단이나 담을 쌓을 때 사용한다. 대체로 두께 16인치, 폭 12~20인치, 길이 23~32인치로 제작했는데 때로는 보다 커다란 형태로도 만들었다. 사암은 바위를 가열하여 약 4톤의 덩어리로 잘라 사용했다. 사암으로 건축할 경우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매끈하게 표면을 갈아 밀착시켰다. 문틀 · 창문 · 문턱 · 조각의 하단부는 편암과 현무암을 사용했다.
앙코르와트 유적군의 건축은 아치를 사용하지 않고 돔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돔 형태를 내어쌓기법을 사용하여 해결했는데 돔은 올라갈수록 두께가 얇아진다. 결론적으로 앙코르와트의 유적군의 대형 건축물은 빈틈없는 설계와 유효적절한 재료 사용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탄생할 수 있었다.
앙코르와트 유적군은 파괴의 흔적이 완연하다. 과거 도굴꾼들이 무차별적으로 유물들을 도굴해 엄청난 가격으로 팔았는데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도 자신이 도굴에 참여했다고 시인했을 정도이다. 앙코르와트 자체의 면적이 워낙 넓어 철저한 경비가 어렵기 때문에 현재도 많은 예술품이 도난되고 있다. 그래서 무려 7000여 점이 넘는 문화재를 박물관에 보관하면서 현장은 복제품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잦은 내전으로 인해 문화재를 제대로 보관할 여력도 없는 상태이다. 현재 앙코르와트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위기에 처한 유적 목록에도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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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벽에 처마에 앉아서 명상이라..상상만 해도 환상적일 것 같고,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ㅋㅋ
저는 안가본 곳이 너~~무 많아서 가야할 곳도 참 많네요.^^
주변이 숲이라 그야말로 '자연의 소리'를 들어서 마치 원시시대에 가본 느낌이었죠.
제가 가보고싶은곳 중의 한곳 입니다
tv속의 화면으로 많이 접해 보긴 했지만 또 이렇게 직접 보시고 오셔서 경험담을 읽게 되니 느낌이
더욱 와닿은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 ^^
사원 전체에 새겨진 그림(?)을 보시면 더욱 감탄하실 겁니다.
엄청난 경사의 계단은 신에게 겸손하라는 의미라네요. 기어가듯 올라가서 내려올 때는 어질어질 합니다. 꼭 한번 가보시기를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앉아서 세계의 아름 다운 곳곳을 감상 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감사해요.
가까이 있는 분의 경험 담을 보니 더 실감 나는 듯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