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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과 문필과 서예로 심성의 꽃을 피워내는 삶
―한국예술인총연합회 서산지부장 송국범(宋國範)씨 <충남예술> 2007년
봄호에 대한 '편집회의(2월 3일)'에서 한국예총 서산지부장 송국범(서산 팔봉중학교 교장) 선생을 '표지인물'로 모시기로 결정한 순간 필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필자가 사는 태안의 이웃 동네로 거의 동향이나 다름없는 서산의 예술인을 만나는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장거리 출장을 하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요, 오래 전부터 이런저런 연유로 잘 알고 지내며 종종 대면해온 분을 만나게 되어서
더욱 다행이었다. 그동안 필자는 서산과 태안의 문화예술인들을 여러분 만나왔다. 1994년 태안 출신 연극인 윤문식(尹文植) 씨를 서울에서 만난
것을 시작으로, 1994년 태안의 국악인 문제원(文濟元) 님, 1994년 서산의 국악인 심화영(沈嬅英) 여사님, 1995년 태안의 태평소 기능
보유자 강대형(姜大亨) 님, 1997년 서산문화원장(충남문화원연합회장) 김현구(金顯龜) 님을 만났다. 그리고 2002년 태안의
'설위설경(設位說經)' 예능 보유자 장세일(張世壹) 님, 2004년 서산의 사진작가 최차열(崔次烈) 님, 2006년 서산의 문학인
김순일(金淳一) 님을 만났다. 그러니까 도합 일곱 분의 동향 문화예술인들을 만나온 것이다. (이 분들 중에서 태안의 국악인 문제원 님은 예전에
고인이 되셨지만, 서산의 국악인 심화영 여사님은 올해 94세의 고령에도 건강을 유지하시며 창을 하시고 악기를 다루시니 경이롭고도 감사한
일이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장장 13년 동안 도합 40명의 문화예술인들을 만난 중에 동향의 문화예술인들을 일곱 분이나 만났으니, 내가
고향 쪽에 너무 무지하거나 무심했던 것은 아니지 싶다.
물론 편집위원회의 심도 있는 논의와 결정으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필자는 고향 쪽 문화예술인들을 일곱 분이나 만난 것에서도 보람을 느낀다. 그런
보람을 되새기며 이번에 또다시 고향 쪽 예술인을 만나 <충남예술> 2007년 봄호에 모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고향 쪽
문화예술인으로는 여덟 번째이며, 도합으로는 41번째로 만나 뵙는 분이다. '40'이라는 '마디숫자' 다음에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이 작업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말이지만, 지난 2월 3일의 편집회의 때는 현 편집진의 '마지막 편집회의'일지도
모른다는 전제가 있었다.
충남예총 김영천 회장이 소임을 마치고 새 회장이 선출되는 시점이었다. 새 회장이 선출되면
<충남예술>의 편집진도 개편될 수 있는 일이고, 새로 구성되는 편집진의 의지에 따라야 하는 일이므로, 필자가 10년 넘게 해온 이
작업 역시 존폐 여부가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송국범 선생을 만나는 일을
했고, 또 이 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만남, 그 여백의 조화 전(2002.10.18~23)시회에서 작품 설명하는 송국범 작가-
6대째 이어져온 천주교 신자로서의 긍지 2월 8일(목요일) 오전 11시, 약간 비를 뿌리는 날씨 속에서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에 소재하는
팔봉중학교를 찾았다. '팔봉'이라는 이름은 인근의 팔봉산으로부터 연유한다. 여덟 개의 봉오리를 지녀서 팔봉산으로 이름 붙여진 그 산은 태안의
백화산과 이웃하여 서로 정기(精氣)를 나누고 돕는 아름다운 산이다.
처음에는 송국범 선생의 자택에서 대담을 하게 되기를 은근히
기대했으나(대다수 분들을 자택으로 찾아뵙고 인터뷰를 했다), 팔봉중학교를 향해 가며 팔봉산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고마워지는 마음이었다. 하루 낮
시간의 거의 모두를 팔봉산의 정기 속에서 생활하는 분을 팔봉산 근처로 찾아뵙고 그 정기 속에서 대담을 하는 것이 더욱 온당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즐거워지는 마음이었다.
교장실에서 송 선생과 마주 앉았다. 또 하루 학교를 찾으신 정계훈 재단이사장과
교무실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음을 알고, 필자는 정계훈 이사장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졌다. 필자는 송 선생과 그동안의 안부를 나누는 중에
자연스럽게 종교 관련 얘기를 입에 올렸다.
송 선생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 출신이라고 했다. 지방리 416번지에서 아버지
송영무(宋永武·80)님과 어머니 정정택(鄭丁澤·79)님 사이에서 2남 4여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0년 생이니 올해 57세가 된다. 필자는
송국범 선생이 금산 출신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진산면 지방리 출신이라는 것은 이 날 처음 알았다. '진산'이라는 지명과
'지방리'라는 지명도 필자에게는 귀에 익은 반가운 이름이었다.
금산 땅은 원래 전라북도에 속한 곳이었지만 1963년 1월 충청남도로
편입된 고장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산군이 금산군에 병합되면서 진산군은 진산면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금산보다 진산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했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중에서도 옛날 한국교회 초창기 시절의 사연들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진산이라는 이름은 반가움과 함께 숙연함을
안겨주는 이름이다.
-한국 수필 등단(2008) 후 작가들과 기념촬영-
금산의 진산은 천주교의 고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박해로 기록되어 있는 1791년(정조 15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의 발단이 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난 곳이며, 최초의 순교자가 난 곳이기 때문이다. 진산사건은 1790년 말 북경교구장 구베아(Gouvea, 중국명 湯士選)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금지령을 내림으로써 시작되었다.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尹持忠)은 1791년 5월 모친상을 당하자 그해 8월 그믐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다. 윤지충의 외종사촌인 권상연(權尙然)도 죽은 고모의 신주를 불태워 윤지충과 보조를 같이 했다. 이 폐제분주(廢祭焚主)사건은 친척들과 동리 사람들의 격분을 샀다.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하여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자 두 사람은 일단 피신을 했다가 자수를 했고,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문초를 받았다. 두 사람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실을 고백하고. 그것이 천주교 교리에 따른 행동이었음을 밝혔고, 끝까지 배교를 거부함으로서 그해 12월 8일(음 11월 13일) 처형을 당했다. 이것이 유명한 '진산사건'의 내용이다.
진산사건은 윤지충 권상연 두 사람의 처형으로 일단락 되었으나, 이 사건의 여파로 이승훈(李承薰)과 권일신(權日身)이 체포되고 최필공(崔必恭) 등
10여 명의 천주교인이 투옥되는 신해박해가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충남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는 한국천주교회 최초 박해인 1791년 신해박해의
원인인 '진산사건'의 발화지로서 오늘도 그 이름이 한국천주교회사 안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로마 교황청의 훈령에 따라 북경
주교가 조선교회에 내린 제사 금지령은 이처럼 최초의 순교자들을 내면서 최초 박해를 부르는 사건으로 발전했는데, 그 후로도 이 제사 문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천주교 신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또 제사 문제는 천주교의 선교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거의 200년에 걸쳐 수많은 격론과
연구, 갖가지 과정을 거친 다음 로마 교황청은 1930년대에 이르러 동양 각국의 제사를 허용하게 된다. 제사를 우상 숭배와 미신 행위로
보기보다는 효(孝)의 정신을 키우고 유지시키는 토착문화와 미풍양속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 그 배경이었다.
그 후부터 천주교 신자들은 제사 문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성실한 신자 생활 가운데서도 자유롭게 제사를 지내거나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216년 전의 '진산사건'은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안겨주지만, 신앙적인 눈으로 보면 '피의 기반' 위에서 세워진 한국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이요 은총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한국천주교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에서 태어난 송국범 선생은 더욱이 천주교 신자라고 했다. 그는 세례명이
이레네오라고 했다. 가톨릭 교회에서 '이레네오'라는 이름은 가진 성인(聖人)은 여러 명이다. 그 중에서 어느 분이 송 선생의 수호 성인인지는
미처 묻지 못했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송 선생은 자신이 6대째 천주교 신자라고 했다. 먼 할아버지로부터 6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얘기였다. 그는 자신이 6대째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 긍지 속에서 변함 없이, 더욱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한다고
했다. 천주교 신앙이 송국범 선생 아래로도, 7대째 8대째로 내려가고 있을 터이니, 집안에서 성직자 수도자들도 많이 배출되었을 것 같다는 필자의
말에 송 선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당숙 중에도 사제가 되신 분이 계시지요." 그러며 그는 현재 대전교구 유구성당 주임 송갑의 신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가까운 혈족 중에서 성직자가 난 것에서도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제 어머니 쪽도 오래 전부터 몇 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집안이지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작고 사제인 정용택(鄭容澤) 신부의 누님이라고 했다. 정용택 신부는 태안 성당의 제3대 주임(1971∼1975)으로 계셨던 분이어서 필자에게도 반가운 이름이었다. 송 선생은 고향에 갈 적마다 조상들의 어려웠던 신앙 생활의 흔적들을 다시 느끼며 숙연한 마음을 갖는다고 했다. 현재 그의 고향 지방리에는 은퇴 사제들의 노후 안식처가 마련되어 있어서 얼마 전에 대전교구장에서 물러나신 경갑룡 주교도 그 곳에서 노후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지방리 공소에서는 사제가 상주하는 본당처럼 매일같이 미사가 거행된다. 고향에 갈 적마다 은퇴 주교님과 함께 미사를 지낼 수 있으니, 천주교 신자에게는 그것도 하느님의 크신 은총일 거라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삶의 전체적인 의미와 목적을 하늘나라에 두고, 거기에서부터 발원하는 성실한 자세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기에 6대째 이어져 내려온 천주교
신자로서의 긍지도 올곧게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 있는 말도 했다. 서산 사람이 되어 살게 된 사연 송국범 선생 집안이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에
뿌리를 내린 것은 증조부 때부터라고 한다. 그의 증조부는 청년 시절 천주교 박해가 거의 끝난 시기에 지방리로 옮겨와서 터를 잡았다. 송 선생은
지방초등학교를 거쳐 진산중학교로 진학했는데, 초등학교 동기 졸업생 40명 중에 겨우 10명이 중학교 진학을 했을 정도로, 당시 시골에서는 중학교
진학조차 매우 어려운 현실이었다. 집에서 중학교까지는 7Km나 되었다. 거의 20리나 되는 길을 그는 매일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그
길은 그에게 더욱 추억의 길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는 대전 보문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금산에서 대전으로 고교 진학을 했으니 완전히 유학인 셈이었다. 그가 쉽사리 금산을 벗어나서 대전으로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전에서 사는 외삼촌 덕이었다. 그는 외삼촌 집에서 생활하며 무난히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충남대 농학과로 진학했다. 당시는 우리 사회에서 농업의 비중이 제법 크던 시절이었다. 그는 농촌 출신으로서 농업의 가치를 많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촌 출신으로서 농업에 대한 가치 인식, 그리고 당시의 농업 비중 등을 고려하여 농학과를 택해 대학 진학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농촌에서 태어난 것에 대해 늘 감사하고, 농촌 출신으로서 지금도 농촌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부모님과 함께 전시장에서-
제 현재 직업은 농업이 아니지만, 저에게는 늘 농촌 정서를 그리워하는 속성과 농민의 체취 같은 것이 있지 싶습니다. 끝까지 그것을 지키고 유지하며 살려는 마음이지요." 순수와 순박성, 정직과 근면성을 잘 유지하며 살고자 한다는 뜻으로도 새길 수 있는 말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방위' 복무로 병역 의무를 마쳤다. 군대 경험은 제대로 갖지 못했지만 방위 복무로 병역 의무를 마친 것은 떳떳함과 행운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친구인 대전 목원대 신학과를 나온 '예비 목사' 의 권유로 교직을 택한다 . 그는 그 동료와 2년 동안 함께 근무하며 우정을 쌓았다. 그들은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로서 서로 종교는 달랐지만, 같은 하느님 안에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했다.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가 아무 거리감 없이 친밀하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체험하고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지요. 제게 그런 삶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 친구는 1년 먼저 멀찍이 서산으로 가서 사립학교인 팔봉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송 선생에게도 교단 진출을 권유했다. 농촌의 작은 중학교에서 함께 교사 생활을 해보자는 권유였다. 송 선생은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다. 서산은 고향 금산에서 먼 곳이었다. 충남의 남쪽 끝과 북쪽 끝이었다. 길이 좋아진 지금이야 반나절 거리지만 당시에는 한 나절도 더 걸리는 거리였다. 또 팔봉중학교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은 사립학교라고 했다. 그것도 농촌의 작은 교회로부터 설립이 시작된 학교였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부담감이 컸지만, 그런 부담들이 오히려 관심을 증폭시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팔봉중학교에 가서 교사 생활을 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봉사와 희생이 결부된다는 사실이 더욱 뜻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침내 의미 있는 고생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1977년 3월 팔봉중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드디어 서산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농업과 기술 과목을 가르쳤지요. 당시에는, 특히 농촌 학교들은 농업 과목이 비중 있는 과목이었어요.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온 사람이라 자연 학교와 학부모들의 나에 대한 기대가 컸지요." 그가 팔봉중학교 교사로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갈 때, 그를 팔봉중학교로 이끌었던 친구는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목원대 신학과 출신인 그 친구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 꿈인 까닭이었다. "그 친구는 학교를 떠나 서울로 가서 '크리스챤신문사'에 취직을 했지요.
한동안 '크리스챤 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목사 안수를 받고는 대전으로 가서 '빈들교회'에서 시무하다 현재는 '기독교서회' 사장으로 있지요."
이처럼 송 선생이 그 목사 친구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 친구가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전기를 가져다 준 친구이기 때문일
터였다.
바로 그 친구 '때문에' 송국범 선생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 친구가 학교를 떠나고 나니까 어딘지 모르게 아쉽고
섭섭하고 쓸쓸한 가운데서도,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내 몫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의 그 마음, 그 결의를
오늘까지 올곧게 이어온 거지요." 송국범 선생이 서산 땅에 와서 서산 사람이 되어 살게 된 그 배경과 사연도 이제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그리운 추억일 터였다. 송 선생은 '弘田'과 함께 '빈들'이라는 아호를 사용하는데, 그 목사 친구가 세운 교회의 이름도 '빈들'이다.
'빈들교회'라는 이름은 그 교회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빈들'이 '비움'을 추구하는 뜻임은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사항일 터였다. 교육자로서의 삶 송국범 선생이 젊은 시절에 몸담아 청춘을 바치고 오늘도 '평생 인연'을 아로새기고 있는 충남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의 팔봉중학교는 1966년에 설립되었다. 그러니까 송 선생은 팔봉중학교가 처음 설립된 때로부터 10년을 막 넘긴 시기에 팔봉중학교와 인연을 맺은 것이다.
-아내 고귀숙 작품-
팔봉중학교는 설립자 정계훈 선생이 이끈 '웨슬레중등구락부'가 1966년 4월 1일 어송감리교회에서 '팔봉중학원'의 입학식을 거행한 날로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팔봉중학원 최초 입학식에 참여한 학생은 남학생 2명과 여학생 2명을 합하여 4명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인 4월 6일
'어송4H회관'으로 학교를 옮기자 학생은 놀랍게도 44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7년 교사(校舍) 1동을 마련하자 학생은 다시
72명으로 늘어났다. 1968년 2월 3일 팔봉고등공민학교 설립인가를 받았고, 초대 교장으로 설립자인 정계훈 선생이 취임했다. 1970년 7월
27일 학교법인 '계훈학원' 설립인가를 취득하면서 정계훈 선생이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71년 1월 25일 팔봉중학교 설립인가를 취득하고
3월 13일 팔봉중학교 개교식을 거행한다.
여기에서 팔봉중학교(학교법인 계훈학원) 설립자 정계훈 선생에 관한 얘기를 짧게나마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다. 정계훈 선생은 서산 지역사회에서 오랫동안 사회공동선을 위해 많은 일을 해오신 분이다. 다방면에 걸쳐 지역사회에 공헌한 그의 활동과 공적들을 소상히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많은 이들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지역사회의 대표적인 어른이기도 하다.
송국범 선생이 대표 집필을 맡아 1996년에 발간한 팔봉중학교의 <팔봉30년사>에는 설립자 정계훈 선생에 대한 얘기가 자세히
소개된다. 제2장 '창학 정신의 발현'과 제3장 '창학의 태동' 안에 여러 가지 재미있고도 감동적인 얘기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제2장의
1항 '설립자 정계훈의 삶'에서 (1) '탄생과 시련' 편을 소개해 본다. 설립자 정계훈은 1936년 1월 15일 충남 연기군 서면 봉암리
435번지에서 부친 정동준과 모친 윤정숙의 둘째 아들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3살 되던 해 소아마비 병에 걸려
크나큰 시련을 예고했다. 현대의학을 총동원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 결국 정계훈은 일어나지도 못하는 장애아로 부모와 가족들의 애를 태웠다. 6살
때까지 엎드려 일어서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가족들, 특히 외조모와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심코 던진 스님의 말 한마디로 스님이 가르쳐준 처방대로 약을 구하기 위해 온 가족이 총동원되고 외조모의 팔도강산을 다 헤매는 그 정성으로 정계훈은 불편하지만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걸을 수 있다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져 늘 우울하고 침울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걷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학교에 제일 일찍 등교하고, 모두다 하교한 후 제일 늦게 귀가하는 학창 시절을 보낸다. 그때의 상황을 정계훈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틈을 빠져나와 교실을 가려면, 교실 안에서 우글거리는 반 친구들의 틈을 헤치고 내 책상을 찾아가려면,
얼마나 부끄럽고 위축되는지 어린 마음에도 서럽고 또 서러워 책상에 엎드려 울라치면 착한 친구들이 와서 달래곤 한다. 이른 새벽, 큰길에 사람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 그 이른 새벽에 나는 학교엘 간다. 텅 빈 운동장 안에 서면 가슴이 확 트이는 듯싶어서 좋았고, 복도를 걸어 빈 교실을
지나고 또 지나 우리 교실 내 자리에 앉으면 줄줄이 늘어선 책상이랑 칠판이랑 꽃병들이 모두 정다운 나의 친구가 돼 주었고, 나만을 위해 있는
듯싶어서 좋았다.
" 이처럼 정계훈은 외로움과 고독한 가운데 중학 생활을 보낸다. 송국범 선생이 '평생의 인연'을 맺고 현재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팔봉중학교의 설립자에 관한 얘기인 데다가, 송국범 선생이 집필한 <팔봉30년사>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라서 이렇게
정계훈 선생 이야기를 한 대목 소개한 것이니,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가 있기를 빈다.
필자는 과거 서산/태안의 지역잡지 <갯마을>의 편집주간으로 일할 때(1991∼1994) 정계훈 선생을 꼭 한번 '방문 대담' 자리에 모시고 싶었다. 계획까지 잡아놓았었다. 그러나 <갯마을>이 그만 문을 닫는 바람에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것을 지금도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안견미술대전 우수상 수상 후, 지도해 주신 장강 선생님과-
송국범 선생은 자신이 서산에 와서 팔봉중학교와 '평생 인연'을 맺으면서 동시에 정계훈 선생과도 평생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이 더없이 기쁘다고
했다. 30년 동안 그 인연을 이어오면서 정계훈 선생으로부터 느끼고 배운 것들이 많다고 했다. "제가 서산사람으로, 또 '팔봉인'으로 잘
정착해서 올곧게 살아올 수 있었던 그 배경에는 정계훈 선생님이 계시지요.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로 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같은 하느님 안에서
정 선생님과 정을 나누고 애환을 함께 하며 살아온 것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 송국범 선생이 팔봉중학교에 처음 부임해온 1977년 당시에는 전체 학생 수가 75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점차 이농현상의 심화에 따른 농촌 인구의 감소로 말미암아 현재는 80명이라고 했다. "2005년부터 '학교 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지요. 그 결과 올해는 서산 시내에서 11명이 유입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학생 수의 감소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지만, 그래도 이 지역에서는 꼭 필요한 학교로 팔봉중학교는 계속 역사를 이어갈 겁니다.
-작가 부모님-
" 팔봉중학교에서 펼치고 있는 '학교 살리기 운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면서 그것에 걸맞은 성과들을 거두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학생수 확대로 나타나지만, 그 속내들을 보면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팔봉중학교의 그런 교육 실적들은 그동안
여러 매스컴에서 <주목받는 '팔봉 비전 2010 프로젝트'>, <농촌학교의 화려한 부활 '팔봉중학교'>, <서산
팔봉중 농촌학교의 희망>, <서산 팔봉중 차별화교육 성공>, <'떠나는 학교'에서 '다니고 싶은 학교'로>,
<공주사범대학 학생 80여명, 팔봉중 공개수업 참관> 등의 제목으로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학생과 학부모들뿐만 아니라 지역사회가
한가지로 현 송국범 교장에게 신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학생들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출판 기념회-
그러나 그는 어언 41년의 연륜을 쌓아가고 있는 팔봉중학교의 오늘의 모든 교육 성과들을 14명 교직원들의 공으로 돌린다. 그는 교감
직무대리(1988∼1990)와 교감(1990∼1998)을 거쳐 1998년 3월 1일 제5대 교장에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봉중학교에
처음 부임한 때로부터 11년 만에 교감이 되었고 또 21년 만에 교장이 되었으니 승진은 꽤 빠른 편이지만, 그것은 그의 교육자로서의 열정과
성실성이 가져온 결과임을 주변의 모든 일들이 인정하고 있다.
송국범 선생은 서예가와 수필가를 겸하고 있는 예술인이다. 그렇기에 현재
한국예총 서산지부장을 맡아 지역 예술인들을 고무하고 지원하는 일도 병행하고 있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서예 쪽으로 소질을 보였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 말씀을 지금도 명확히 기억한다. "서예를 가르치시던 담임 선생님이 하루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너는 소질을 타고난 것 같다. 열심히 노력하면 장차 훌륭한 서예가가 될 거다.' 초등학생 시절 담임 선생님의 이 한마디 말 때문에
내가 오늘도 서예를 하고 있지 싶습니다.
때로는 선생님의 그 말에 내가 속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선생님의 그 말씀을 떠올리면 절로 고마워지는 마음이지요." 그는 지금도 먹을 갈고 붓을 들 때마다 초등학교 5·6년 시절의 담임이셨던 신수철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신수철 선생님을 떠올리면 선생님의 고향인 이리(지금의 익산시)도 정답게 느껴지고…. 그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틈틈이 서예 공부를 했고, 고교 시절에는 교내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고교 때 처음으로 내 서예작품을 전시해 봤어요. 학교에서 종합미술작품전시회를 했는데, 서예는 제외가 되었어요. 학교의 미술 과목에 서예는 아예 있지도 않았고, 그 당시에는 서예에 관심을 갖는 학생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내 서예 작품을 보신 선생님이 종합미술작품 전시회에 내 서예 작품을 하나 넣어주시더군요. 수많은 미술작품들 가운데 유일하게 내 서예작품도 전시가 된 거지요.
" 대학 시절과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붓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한동안 문방사우(文房四友)와 거리를 두고 살다가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얻은 때부터 다시 붓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명 서예가들과 교류하며 지도를 받기도 했다. 서산의 심응섭 선생에게서 조언을 많이
얻었고, 2000년에는 홍성의 장강 변수길 선생 작업실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그는 특히 장강 선생에게 큰 고마움을 갖는다. 자신을 '바른
서예의 길로 인도해 주신 분'으로 그를 기억한다. "붓을 잡을 때마다 유명한 원로 서예가이신 황욱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곤 합니다. 황욱
선생님이 연세 구순을 넘기시고 마지막 전시회를 준비하시면서 하신 말씀이지요. '이제야 글씨가 뭔지를 좀 알고 쓸 것 같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아
안타깝다'고 하신 말씀…. 그 기사를 보면서 예술의 길은 끝이 없고, 늘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해도해도 부족함을 느끼는 것,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예술의 길이라는 생각을 하면, 내 부족함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싶고, 또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 그는 '충청남도미술대전'에서 네 번 입선을 했고, '안견미술대전'에서 특선 3회, 우수상 1회를 기록하면서
안견미술대전 초대작가가 되었다. "평범하고도 소박한 생각이지만, 서예는 타고난 소질로, 즉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붓글씨는 마음으로
쓰는 것이고, 자신의 마음을 그려내는 일입니다. 또 붓글씨를 쓰는 일은 자신의 마음을 키우고 닦는 일입니다. 좋은 붓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넓고
깊고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야 늘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서예를 일러 '끊임없는 자기
수양의 과정'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讀書養性情 硏墨修心理 運筆懷中鋒 紙張眞善美(먹을 갈고 글씨를 쓰는
것은 마음을 닦는 길이요 인격을 키우는 길이며 진선미를 찾아가는 길이다)>라는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철학과 독특한 작품세계를 가지고 왕성한 활동력으로 출품 경력을 다채롭게 쌓아가고 있다. 그는 1990년
<서산문학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서산문학회에 참여한 것은 교단 선배인 류상동(柳相東)
선생(전 서산교육장/서산문학회 초대 회장)의 권유 덕이기도 했다. 그는 <서산문학>을 비롯한 이런저런 지면에 꾸준히 수필 작품들과
교육 단상들을 발표해오다가 그 글들을 모아 1996년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도서출판 한뫼)라는 산문집을 펴내었고,
2000년에는 <학생들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도서출판 가야)를 펴내었다.
두 번째 작품집 <학생들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를 펴낼 때는 고교 시절 은사이신 송하섭(宋夏燮) 교수(당시 단국대 천안캠퍼스 부총장·문학평론가)가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를 받아 읽고 보내주신 육필 서신 전문을 복사하여 책머리에 올림으로써 은사에 대한 감사지정과 존경심을 각별히 표현하기도 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일은 1996년에 팔봉중학교의 <팔봉삼십년사>를 집필하여 펴낸 일일 것 같습니다. 벌써 10여 년 전 일이 되었습니다만, 그때 '산고(産苦)의 기쁨'을 확실하게 경험해보았지 싶습니다.
-작품 설명하는 부인 고귀숙 선생-
" <팔봉삼십년사>는 4·6배판 크기에 250쪽에 이르는 책이다. 팔봉중학교는 <팔봉삼십년사>를 발간하고 나서 학부모들과
많은 지역 인사들을 초청하여 교내에서 성대한 기념 행사를 가졌는데, 송 선생은 <팔봉삼십년사> 발간을 가장 보람된 일의 하나로
꼽는다고 했다.
그는 2000년 두 번째 산문집 출간 이후에도 꾸준히 문필 활동을 계속하면서 2002년 계간문예지 <문학과 세상>의 추천으로 공식 등단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충남문협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 범위를 넓혔다. 한국예총 서산지부장은 2006년부터 맡게 된 일이다. 심응섭 서예가와 최차열 사진작가에 이어 세 번째로 맡은 소임이다. 지역에 선배 예술인들이 많음에도 자신이 제3대 서산예총회장을 맡은 것이 송구스러운 만큼 지역 예술인들의 '인화'를 최우선의 가치로 꼽는다고 했다. 예술단체의 운영을 책임 맡은 사람에게는 동료 예술인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 같다는 의미 있는 말도 했다.
-전시회장에서 다과회에 참석한 정계훈 팔봉중 이사장, 조규선 시장, 윤찬구 시의회 의장, 이종기 경찰서장과 함께-
서예와 한국화가 함께 한 지역 최초의 '부부전(夫婦展)' 송국범 선생의 부인 고귀숙(高貴淑·52)씨 또한 교육자이며 예술가다. 서산시 운산면의
대철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현직 교사이며, 한국화를 그리는 실력 있는 미술작가다. 그들은 팔봉중학교 교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송국범 선생이
교육자로서의 품성을 키워가며 틈틈이 서예 공부를 할 때 고귀숙 선생도 함께 서예 공부를 했다. 고귀숙 선생은 중학생 시절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들은 것 때문에 국문과를 택한 사람이었다. 대전 호수돈여고를 거쳐 숭전대(현 한남대) 국문과를 나오고 교단에 나섰지만,
글을 쓰는 일은 너무 어려워 아픈 머리를 식히기 위해 취미로 서예를 시작한 처지였다. 그들은 한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며, 또 함께 서예 공부를
하는 사이로 지내다보니 서로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송 선생이 먼저 붓글씨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고, 고 선생 역시 붓글씨로
화답을 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자 그들은 주변의 눈들을 의식해야 했다. 두 연인이 한 학교에서 함께 근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송 선생은 당숙인 송갑의 신부님께 사정을 말했다. 송 신부님이 천주교 학교인 논산의 대건중·고등학교와 서산(운산)의 대철중학교 교목을
겸하시기 까닭이었다. 다행히 논산 대건중학교에 국어교사 자리가 비어 있어서 고귀숙 선생은 쉽게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서산과 논산,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지내는 동안 그들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많은 음신(音信)들이 오고간 끝에 그들은 드디어 1981년 11월
14일 결혼을 한다.
그때는 고귀숙 선생이 아직 영세를 하지 않은 때라서 대전 대흥동 성당에서 '관면혼배'로 결혼식을 했는데, 비록 관면혼배지만, 송 선생의
외삼촌(정용택) 신부님과 당숙(송갑의) 신부님이 함께 미사 집전을 할 정도로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그 후 고 선생이 세례를 받음으로써(세레명
베네딕따) 그들은 '성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결혼 전에 고 선생이 운산의 대철중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그들은 서산에다 신혼의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었다. 때마침 두 학교(대철중/대건중)의 국어교사들이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와준 덕이었다.
"처음엔 나와 함께 서예 공부를 했던 사람이 결혼 후에는 서예를 그만두고 문인화를 공부하더군요. 그러더니 또 문인화를 그만두고 한국화를 공부하대요. 그렇게 '변덕'을 부린 결과 지금은 한국화의 경지를 넓혀가고 있는 것 같아요." 송 선생은 아내의 미술 실력과 예술세계를 존중하는 모습이었다. 교사와 아내와 어머니로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최선을 다해 예술의 경지를 넓혀 가는 아내에 대해 그는 고마움과 함께 존경심을 갖는다고 했다.
-인사말 하는 송국범 교장-
그들은 2002년 '송국범·고귀숙 부부작품전'을 열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부부가 서예와 한국화, 두 분야의 작품들을 모아 '부부전'을 연 것은
서산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국적으로도 흔치 않은 일일 터였다. 서산시문화회관의 '초대전' 형식으로 열린 그 부부전은 2002년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 5일 동안 열려 예술인들은 물론이고 지역사회의 높은 관심과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그 뜻 깊은 부부전에 송국범 선생은 17점의 서예작품을 선보였고, 고귀숙 선생은 16점의 한국화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5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도 지역의 예술인들이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 부부전은 지역의 예술인과 미술 애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송 선생은 2002년의 그 부부전을 일생 중 가장 보람되고 소중한 일들 중의 하나로 꼽는다. 그것은 부인 고귀숙 선생에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들은 그들의 지고지순한 '부부애'를 그렇게 부부전으로 표현한 셈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 부부전은 부부애의 완벽한 표현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늘 하늘에 감사하는 부부애 그러나 그들 부부에게 마냥 평안한 생활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축하 말씀과 축배 제의를 하는 친구 이종기 서산 경찰서장-
부인 고귀숙 선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병상 생활을 해야 하는 고통도 그들에게는 있었다. 2004년 9월 4일의 일이었다. 고귀숙 선생이
학교 근무를 마치고 승용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올 때 일어난 사고였다. 서산 시내 양대동 사거리에서 신호체계가 바뀐 것을 모르고(신호등이 바뀐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앞차를 따라 무심코 직진을 하다가 옆에서 달려오는 차와 충돌을 하고 말았다. 사고 직후 고 선생은 심하게 찌그러진
차체에 끼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송 선생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가서 보니 찌그러진 차체 속에서 운전자의
몸을 빼내지도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 정도로 차가 부서졌는데도 고 선생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이 사고로 고귀숙 선생은 하반신을 크게 다쳤다. 천안 단국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고, 부서진 다리뼈를 수습하는 수술을 해야 했다. 병상 생활도 무척 길었다. 꼬박 3개월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퇴원을 하고서도, 병가와 연가와 1년 휴직을 합쳐 1년 6개월이나 학교를 쉬어야 했다. 2004년 9월에 사고가 났는데, 올해 1월 22일 다리뼈에 박은 핀들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고 선생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송 선생은 주말마다 천안을 갔다. 아내의 병상 곁을 지켜주다가 월요일 새벽에 학교로 달려오곤 했다. 평일에도 퇴근을 하자마자 곧바로 천안으로 달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내의 입원실에 함께 머물면서,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 되어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위해 지성으로 간병을 하면서 기도도 많이 했지요." 그는 아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지금까지의 신앙 생활을 통틀어 가장 많은 기도를 했노라고 했다. 노상 묵주를 손에 쥐고 살았고, 기도를 할 때마다 아내를 살려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먼저 드리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의 병상 곁에서 아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 자신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없이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그때 아내에 대한 사랑을 스스로 다시 확인할 수 있었지요. 아내는 내게 얼마나 귀중한 사람이고, 또 남편인 나는 아내에게
얼마나 귀중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절절하게 느끼게 되더군요." 부부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그 속에서 부부 일심동체의
의미와 실체를 확연히 깨달으며 체감할 수 있었기에 그 시간은 축복의 시간이기도 했다는 말을 하며 그는 밝은 웃음을 지었다.
퇴원을 하고서도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아내를 대신하여 그는 가사 노동에도 최선을 다했다. 아내의 수발과 가사 노동과 학교 근무를 병행하는 바쁜 일과 속에서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새벽 4시에는 어김없이 기상을 하곤 했다. 새벽 4시 기상은 오랜 생활 습관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하루도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새벽 4시에 일어나면 기도를 한 다음 운동을 한다. 걷기 운동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한다. 그가 50대 후반의 세월을 살면서도 잔병치레 한번 한 적 없이,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은 하루도 쉬지 않는 새벽 운동과 기도 덕분이다.
-아내와 두 아들의 단란한 한 때-
또 그렇게 건강한 몸으로 부지런히 살기에 아내 수발과 가사 노동과 학교 근무를 병행하는 바쁜 일과 속에서도 틈틈이 붓을 잡을 수 있었고, 글을 쓸 수 있었다. "2005년 3월 3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3월 3일은 '아내의 날'인데, 제가 2005년 3월 3일, 아내의 날을 멋지게 장식했거든요." 3월 3일이 아내의 날인 것은, 아는 이들보다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을 것 같다. 그것은 국가에서 정한 것이 아니고 '삼성생명'이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높은 이혼율, 경제 불황, 가치관의 변화 등 심각한 사회문제들과 관련하여 '건강한 결혼'과 '행복한 가족'에 관한 사회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2003년부터 여러 가지 가정 관련 이벤트를 마련해왔던 삼성생명이 2004년에는 3월 3일을 '아내의 날'로 삼아 아내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모든 남편들로 하여금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 달 동안 캠페인을 전개한다는 홍보에서 비롯된 일이다.
삼성생명의 이 캠페인에 롯데백화점이 함께 하여 그야말로 '상술의 발로'라는 평가도 있고, '한국가정사연구소'가 2002년 매주 화요일을 아내의
날로 정하고 아내에게 꿀물 한 잔을 서비스하자고 제안한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긴다는 뜻에서 긍정적인
시각들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숫자 3은 '父', '母', '子'를 뜻하는 수로서 '모든 것', 즉 '완결'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3이라는
숫자가 겹쳐서 쌍을 이루는 3월 3일은 '男'과 '女'의 만남과 결합, 즉 '가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는 그 가정 안의
해(안해)이므로, 3월 3일을 아내의 날로 정해 기념하자는 것이다.
"2004년 말인가, 2005년 초인가, 그 무렵에 삼성생명의 가정설계사 한 분이 제게 '아내의 날'에 대한 취지 설명을 하면서 글을 하나 써보기를 권하더군요. 3월 3일 아내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남편들의 글을 모집한다는 거예요." 생활설계사가 송 선생의 가정 생활의 속내를 잘 알고 있기에 그런 권유를 했을 터였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이 주제라면 송 선생은 이미 특별한 경험 속에서 얻게 된 글감들이 많은 처지였다. 그는 아내에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10매의 글을 썼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글을 겨우 원고지 10매로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었지만, 그러나 압축의 묘미를 살려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글을 쓸 수 있었다.
-송국범 선생 가족-
전국에서 수 천 편 중에서 통과된 500편 중에서 최종 심사결과 그의 글은 장원 다음의 차상을 차지했다. 차상 당선 통지를 받았을 때의 감격과
흥분, 그 기쁨은 연애 시절에 누렸던 감미로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차상으로 뽑혔다는 것도 큰 기쁨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고통을 겪고 있는 아내에게 좋은 선물을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더군요. 부상으로 받은 제주도 여행권을 가지고,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아내와 함께 며칠 동안 제주도 관광을 했는데, 완전히 연애 시절과 신혼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더군요." 그러며 그는 청년 같은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부인 고귀숙 선생이 건강을 되찾은 지금에는 매사에 더욱 왕성한 의욕을 느낀다고 했다. 지금까지 100점 이상의 서예작품과
200편 이상의 산문들을 생산하고 있는데, 나이와 함께 좀더 겸허해지는 마음과 과욕을 경계하는 자세를 잘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열정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을 딛고 다시 정상 생활을 하게 된 부인 고귀숙 선생도 요즘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며, 그 사실이 더없이 기쁘다고 했다. 고귀숙 선생 역시 지금까지 100점 이상의 작품을 생산하고 있다는 말도 했고….
그들
부부는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군 제대 후 강원대 경제학과에 복학을 했고, 서울의 계원디자인대학에 재학 중인 차남은 금년 3월에 입대를
한다며, 이미 오래 전부터 부부만 생활하는 가운데서 세월의 덧없음도 느낀다고 했다. "종교를 가진 사람답게, 또 예술인답게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
무상 속에서 늘 '겸허'를 추구합니다만, 평소 낙천적인 성격을 지니고 정체 상태를 싫어하는 자세로 살기도 합니다. 다분히 개혁적인 성향이지요.
이런 내 성격과 종교적인 성찰을 잘 조화시키면서, '무욕(無慾)'의 경지를 추구하며 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는 정계훈 이사장을 비롯한
팔봉중학교의 모든 관계자들, 팔봉중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모든 선생님들과 현재 애환을 함께 하고 있는 14명 교직원들, 서산예총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지역 예술인들, 하느님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는 아내와 가족 모두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는 말로 대담을 마무리했다.
-2007년 충남예술, 지요하 소설가 대담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