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와 본관(토성)의 역사>
인류사회에서 혈연을 중심으로 종족을 구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성씨(姓氏)이다.
중국은 출신 군현(郡縣)에 따라 본관(本貫)과 성씨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여
우리나라 상고사(上古史)에는 성씨를 찾아볼 수가 없고
어디에 사는 누구라고 이름만 기록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박(朴), 석(昔), 김(金) 삼성(三姓)이 왕의 전설이 있고,
경주 6부촌장의 위패를 모신 양산재(楊山齋) 기록에는
신라 3대 유리왕이 이, 최, 정, 손, 설, 배씨 여섯 성씨를 내려주었다고 하며,
금관가야국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 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왕과 귀족만이 신화(神話)에 의한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시조 주몽(朱蒙)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하고,
백제(百濟)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울 부여씨(夫餘氏)라 하였다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후대까지 계승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에도 왕이나 귀족계급 외에는 일반 백성은 어느 지역 출신의 누구라고
이름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반 백성은 성씨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성하던 통일 신라가 쇠락한 원인은 지배계급이었던 귀족문벌이 권력다툼과
지방호족들의 발호(跋扈)로 말미암아
중앙집권의 통치가 무너지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호족이 군웅할거하여
지방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절대왕권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패권을 잡은 고려태조 왕건(王建)은 현명한 임금이었다.
패권을 다투던 적대국 신라의 경순왕(敬順王)과 후백제의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우대하였으며 패망한 신라의 백성들을 억압하지 않고 총명한 인재를 등용하여
삼국을 아우르는 통합의 정치를 하였다.
새로운 왕국의 관료계층이 급격히 변동함에 따라
관료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신분제도의 재편성이 필요하였다.
중국의 성씨제도를 도입하여 성이 없는 백성들에게
출신지의 군현(郡縣)을 본관(本貫)이라 하고
성씨(姓氏)를 분정(分定)하여 토성(土姓 본관+성씨)을 갖게 하였다.
농경사회에서 전 국민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농민의 지위를 향상 시키려는 필요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성씨를 주어 인격을 존중한 것이다.
특히 개국공신에게는 사성(賜姓)을 내리어 임금이 내려주는 토성(土姓)을
갖제 함으로서 신분지위를 높혀주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골품제에 의한 귀족정치와 토착세력인 지방호족 정치에서 벗어나
지배세력을 개혁함으로써 중앙집권정치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면서 과거시험을 통하여 토성(土姓)으로 분정(分定)하였으니
통일신라시대의 거대한 문벌귀족들이
시조(始祖)를 달리하여 분할되었으니 그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통일신라시대 무안에 살던 신라박씨는 고려조에서 토성분정 정책에 따라
본관(本貫)을 무안(務安)으로 정하고 성씨는 박(朴)씨라 하여 무안박씨가 된 것이다.
고려초 성종왕조에서 국자감(國子監)의 좨주(祭酒) 벼슬을 하신
박진승(朴進昇)공이 무안박씨의 시조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