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M이란 말은 미국에서 들어왔다. 미국에서는 19세기부터 '가스펠송'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고, 복음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들을 '가스펠 음악'으로 통칭해왔다. 그런데 흑인들이 특유의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켜 가면서 보통 '가스펠'이라고 부르는 '블랙 가스펠'을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켰다. 흑인들의 가스펠은 그 창법이나 음악 스타일이 다른 장르와 확연하게 구분된다. 한편 백인들은 미국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컨츄리풍의 '서던 가스펠'을 오랫동안 발전시켜 왔는데, 이 음악도 다른 장르와 구분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 1950년대,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에도 블랙 가스펠이나 서던 가스펠의 맥과는 다른 음악이 등장했다. 이 음악은 외양으로는 일반 팝 음악과 구별되지 않았지만 내용은 기독교적인 것을 다루고 있었다.
2. CCM의 목적
CCM은 대중음악이다. 대중음악은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CCM도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컨템퍼러리한 음악이 생겨나기 이전의 기독교 음악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적 외에는 다른 목적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CCM이 오락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금방 수용되기 어려웠다. CCM이 등장하기 이전의 기독교 음악은 다소 획일적인 유형을 갖고 있었다.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불러왔던 찬송가나 성가가 기독교 음악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스타일의 음악 외에는 거의가 세속음악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기존 교회음악 스타일 이외의 음악은 곧 세속음악이며 이는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큰 목적 아래 제각기 다른 기능을 맡은 음악이 나타났다.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렇게 등장한 CCM은 기존의 기독교 음악이 갖고 있던 기능 외에도 선교와 오락의 기능을 추가하였다.
3. 가스펠 뮤직의 간단한 역사
1) 초창기 가스펠 음악(1870∼1910)
이 시기는 유명한 부흥사 무디와 그와 함께 다니던 음악인이자 출판인이었던 생키 그리고 시각장애인 작사가 크로스비가 이끈 시기였다.
내 용
영 역
내 용
가사내용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거나 구원의 기쁨을 간증하며, 천국에 대 한 소망을 개인적,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
음악적 스타일
·명랑하고 민요적인 요소를 담은 세속적인 스타일
ARTISTS
/
사역 범위
·생키 : 30년동안 무디와 함께 노래인도자로, 독창자로 활동했다. 그는 "가스펠 송의 아버지"로 불린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 전도사로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가스펠 음악을 널리 알리고 출판하는데 있어서도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출판한 「Sacred Songs and Solos」라는 노래집은 800만부 이상 팔렸다.
·블리스 : 생키와 함께 「Gospel Hymns and Sacred Songs,1875」, 「Gospel Hymns No2, 1876」「No3, 1878」...등을 출판하여 판매 수익금은 무디의 전도집회에 재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처음엔 이 새로운 세속음악 스타일에 대해 반발이 일어났다. 그 반발은 특히 영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집회가 계속되면서 이 음악은 점차 받들여지게 되었다.
·페니 크로스비 : 약을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생후 6주 후 실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8,000-9,000곡의 가스펠송을 작사하였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노랫말을 만들었다. 생키는 그녀의 가사로 그토록 유명한 가스펠송을 작곡했다.
대표적 곡
·이 몸의 소망 무엔가
·나 주를 멀리 떠났다
·내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나의 갈길 다가도록
2) 1910-20
내 용
영 역
내 용
음악적 스타일
·흑인 영가와 재즈의 요소를 혼합하여 더욱 생기있고 힘찬 곡으로 변함
→미국 북동부 흑인들 위주로 발전해 나가면서 리듬 앤 블루스, 소울 등의 요소를 가미하여 오늘날 좁은 뜻의 가스펠 음악이 됨(블랙 가스펠)
·백인들 사이에서는 영국의 발라드나 민요를 바탕으로 컨츄리풍의 가스펠 송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 음악은 남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므로 서던(Southern) 가스펠이라 불린다. 백인들의 전통 가스펠이 록 음악의 요소를 혼합하고 새로운 현대적인 다양한 음악요소를 받아 들여서 CCM으로 발전
ARTISTS /
사역 범위
부흥사 빌리 선데이와 함께 노래 인도자로 활약한 호머 로드히버
-기독교인들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생기있는 가스펠송
대표적 곡
Brighten the Corner Where You Are, etc
3) 1920-45
전국적인 부흥 인도자가 없었고 라디오 방송이 생겨났다.
4) 1945-60년 중반
내 용
영 역
내 용
음악적 스타일
·단순하고 흡인력이 강한 가스펠 합창곡
·영적이면서도 쉬운 합창 칸타타
ARTISTS /
사역 범위
·십대 선교회(Youth for christ) &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등에 인도된
단체
-청중을 동원하고 개인적 신앙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죤 피터슨, 랄프 카마이클
5) 1960년 중반 이후부터 현대까지
이 시기엔 가스펠 음악의 폭발적인 성장이 일어났다.
내 용
영 역
내 용
음악적 스타일
포크, 컨츄리, 웨스턴, 서던, 하드록, 소프트록, 메탈, 랩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이 가스펠 음악에 원용되면서 "지져스 뮤직""지져스 록""컨템퍼러리 크리스챤 뮤직"이란 말을 탄생
ARTISTS /
사역 범위
-컨츄리 음악의 본고장인 네쉬뷜에서는 1964년 가스펠 음악협회가 생겨났고, 인디애나 폴리스에서는 가장 큰 가스펠 집회가 열렸다.
-콜로라도 에스테스 파크에서는 연례 크리스챤 아티스트 뮤직 세미나가 열렸다. 이러한 모든 움직임은 가스펠 음악을 크게 발전시켰다. 1990년대에 들어서 드디어 가스펠 음악은 일반 음악계에까지 그 영역을 넓힘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4. 미국 CCM의 역사 개관
1964
레이 렙
·카톨릭 교회에 포크미사 "미국의 젊은이를 위한 미사"
-장엄하고 웅장한 미사곡만을 연상하던 사람들에게 포크미사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1965
랄프 카마이클
·빌리 그레이엄의 선교영화 "불안한 사람들(The Restless Ones)"에 음악을 붙이면서 싱커페이션(당김음)이 가미된 음악을 씀
빌리 레이 헌
·미국 남부 침례교회 '복음'이라는 이름의 청소년 수련회를 시작했는데, CCM의 기반이 싹틈 - 후에 3대 크리스챤 레코드사인 스패로우를 설립
1967
시대적 배경>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반대하여 반문화 운동이 일어났다. '자유연애''평화의 상장''마약''로큰롤'을 성스러운 것으로 삼았는데, 이 운동은 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절정에 달했다. 한편 그러한 운동에 반대하는 대항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반문화 운동이 내세운 자유스런 사랑에의 약속과 진정한 자아실현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환멸에 빠졌던 이들은 상당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평안을 발견했다. 이 젊은이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음악이 언제나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해 왔듯이 아티스트들은 새로운 문화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래는 예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60년대 최신 음악의 감각을 띄었다.
1969
래리 노먼 (Upon this Rock)
·크리스챤 록의 선구적인 신호탄.
·젊은 크리스챤들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었고 새로운 크리스쳔 세대를 대변하는 음악
갈보리 선교회
·그리스도 신앙이 음악의 소리나 겉모습보다는 그 마음의 조건과 더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고 갈보리 교회의 척 스미스 목사는 주변의 음악인(태평양 연안의 히피)들을 북돋아 음악 스타일에 상관없이 주님을 위한 음악을 만들도록 했다. 당시 교회 음악과는 판이했던 그 음악은 룬은 크리스쳔들의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 물결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196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예수 운동"과 중첩되어 일반 매체인 <타임>지를 비롯한 수많은 매체가 이 운동을 다룰 만큼 확산되었다.
1969-73년까지 기독교적 성향을 띤 노래가 25곡이나 <빌보드>의 전국 챠트에 오르기도 했다.
·록 오페라 "예수 그리스도 수퍼스타" 브로드웨이에서 빅히트
·뮤지컬 "가스펠" 히트
·초창기 ccm이라 할 수 있는 앨범이 열악하게나마 나오기 시작
- 음악적 수준이나 기술적 수준도 낮은 데다가 제작 비용도 형편없어서 초창기 크리스챤 앨범은 초보단계에 머물렀다. 그러나 크리스cus 음악인들은 신앙으로 이를 상쇄해 나갔다. 비록 음악적 수준은 낮았지만 그 순수성만큼은 그 어느때보다 더 돋보인 시기였다. 그들은 전혀 상업적인 면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1
·캘리포니아 갈보리 교회 "마라나타 뮤직"이라는 음악선교단체를 설립해 앨범 제작
·예수 음악, 지저스 록 이라 불리워짐
·프레이즈 송으로도 보급 : 톰 스타이프, 캐런 래퍼티.. 등은 시편이나 복음서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생동감 있고 단순하면서도 선율이 풍부한 노래를 썼다. 처음엔 코스타 메사의 갈보리 교회에서 불리던 이 노래들은 곧 다른 공동체와 교회에 퍼졌다.
"Seek Ye First(먼저 그 나라와)""Father I Adore You""I love you lord"..
1972
·엑스플로'72(미식축구대회)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8만명 앞에서 매일같이 새로운 ccm이 선보이고 그 결과 ccm음악을 접하게 됨
·워드 레코드사는 "예수음악"전문 레이블 설립
·ccm은 기성교회의 강한 거부감과 라디오에서 거의 방송되지 않는 악조건 속에서 성장했다. 1974년 사도행전 2장이 낸 앨범 와 마이클 오마티안이 낸 앨범는 ccm계의 제작수준을 한단계 높이고, 이에 힘입어 점차 ccm은 음악적 수준이 향상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라디오 방송에서도 점차 ccm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1976
·크로스 오버 가수 등장(밥 딜런, 배리 맥과이어 등)
-수많은 유명 팝 아티스트들이 크리스천이 되거나 크리스천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크리스천 음악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1978
·ccm 전문잡지 (CCM) 창간
-일반인에게까지 보급, ccm 차트 집계, ccm 용어 정착
-크리스쳔 뮤직 시장 형성→아티스트들은 초기의 순수한 열정을 다듬어 산 업으로서의 전망을 갖게 됨으로 확고한 음악의 하나로 정착하는 계기
·에이미 그란트 등장
-크리스챤 뮤직계에 수퍼스타로 일반 팝계가 크리스쳔 뮤직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느 계기를 마련할 만큼 큰 의미를 지닌 아티스트
다양한 음악적인 시도>
·레즈 - 첫 크리스챤 메탈 그룹
·캔들 - 어린이 음악
·낸시 허니츄리 - 보사노바 비트의 노래
·도니 맥가이어 - 8분짜리 연주곡
·제임스 빈센트, 시윈드 - 폭발적인 재즈 사운드
·쉴라 윌스 - 영국 뉴 웨이브 사운드 실험
·77s - 소란스러운 기타와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
이에 대한 의견>
·척 리차드 - 조용한 사운드가 더 좋다. 로큰롤보다는 영적인 방식의 부드러운 곡조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다
·돈 프란시스코 - 주님이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존 마이클 탈보트 - 록큰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포크 곡조의 부드러움도 알아야 하고 헨델의 메시아의 장엄함도 알아야 한다. 그레고리안 찬트도 알아야 한다.
1979
·밥 딜런의
-밥 딜런은 공연때에 거듭난 내용을 주로 하는 노래만을 불러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을 확인
·밥 라슨
그는 세속 록 음악에서 보았던 위험성이 크리스천 록에도 존재할 위험이 있다고 해서 크리스천 록을 반대했으나, ccm을 자세히 접하고 그 아티스트들의 믿음과 삶을 체험하면서부터 크리스찬 록에 대한 관점을 바꾸고 옹호하는 입장이 되었다.
·키스 그린
1980년 자신의 새 앨범을 자유 가격제로 판매하겠다고 발표해서 크리스챤 음악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구매자가 원하는 가격대로 앨범을 우편판매함
1981
·ccm이 양적으로 성장하자 일반 레코드사에서 크리스챤 음악을 보급
1982
·백워드 매스킹 논쟁
-다른 좋은 음악이 있느데 굳이 전혀 들을 가능성도 없는 음악들을 그것도 친절하게 거꾸로 돌려 들려 주어도 판독이 어려운 백워드 매스킹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닌는 의견
-크리스천 앨범에도 사탄의 메시지가 발견되었다고 주장
-어느 앨범이든 거꾸로 돌리면 그런 지적을 할 수 있을거라는 주장 제기
-대중 음악계에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또 ccm이 긍정적인 대안으로 자꾸 등장하면서 점차 수그러들었음.
1984
·크리스챤 락그룹 "스트라이퍼" 등장
-"Loud'n'clear"와 "You Know What To Do" 명확한 복음의 메시지 노래
-그들의 무대 모습(체인, 가죽, 장식단추)은 엔티 크리스천 록커들에게 좋은 비판거리를 제공
-댄과 스티브 피터스는 대담한 증거를 옹호
·도브상 시상식 텔레비젼 중계(가스펠 음악협회)
1985
·A&M사와 에이미 그랜트 계약하여 일반 시장에 보급
-크리스챤 음악가수가 일반 팝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바람직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남
-"Find a way" 빌보드 톱 40에 진입해서 크리스천 레이블 소속가수로는 처음으로 일반 차트에 등장하는 기록
- 세상과 타협했다는 비판,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영적인 내용을 의도적으로 줄였다는 비판
-에이미 그랜트야말로 오랫동안 크리스천 아티스트들이 꿈꾸어 왔던 일, 즉 일반 팝 시장에 크리스챤 음악을 전파함으로써 진정으로 메시지가 필요한 이들에게 복음을 들려 주었다고 의미 강조
1986
·에이미 그랜트
-"Unguarded" 백만장 이상 팔린 음반을 지칭하는 플래티넘 앨범을 기록
-투나잇 쇼 등장, 레이건 대통령 부처와 함께한 워싱턴의 크리스마스 등으로 전국적 명성
·샌디 패티
·크리스챤 록에 대한 공격
-데이빗 윌커슨(Set the Trumpet to The Muth), 제이콥 아란자(More Rock, Country and Backward Masking Unmasked) 등의 책 출간
1987
·크리스챤 음악계 주춤
-샌디 패티, 에이미 그랜트 앨범 제작 중지
-크리스챤 음악 상업화 된다는 이미지가 커져서 일반 소비자들도 주춤
-비평가들도 크리스챤 음악에서 영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평가
-탤레비젼 전도사 지미 스왜카트의 스캔들로 사람들의 실망
1980 중반
·ccm은 일반 팝의 흐름과 거의 대등한 흐름을 이어나감
- 스티븐 테일러:뉴웨이브 스타일의 크리스챤 음악
- 크리스챤 랩 등장, 연주음악 등 종류의 다양성
·cd 제작 - 음질을 비롯한 기술 면에서도 일반 팝계와 대등한 입장
·ccm 뮤직 비디오 등장 ·크리스챤 mtv 등장
·가스펠 뮤직 네트워크는 크리스챤 음악 비디오만을 방송하기 시작
-하루 6시간 방송으로 200만 이상의 시청자를 확보
·1993년 24시간 ccm으로만 채우는 뮤직비디오 채널 'z music' 등장
1988
·대학 정식학과로 등장
-세인트 루이스 근처의 그리빈 칼리지는 ccm을 정규학과로 세워서 그 커리큘럼에 ccm의 여러분야(스튜디오 레코딩 테크닉, 팝 이론과 작곡코스, 실기코스, 무대효과, 프로그래밍, 프로모션, 업계활동 등)를 포함
·마라나타 뮤직이 성장시켜온 호산나 인태그리티 뮤직의 프레이즈 앤 워십 시리즈로 더욱 그 영역을 넓힘
·비니어드 워십송도 컨템퍼러리 프레이즈 앤 워십 분야를 살찌웠다.
1990
·빌보드는 가스펠과 ccm 차트를 시작
·일반 시장과 미디어들도 크리스천 아티스트들을 다루기 시작
·미국의 ccm 유럽, 구소련 등으로 넘어감
·1989 에스토니아 89 2000명 이상의 결신자를 낳음
- 소련 공산화 이래 ccm 공연은 처음
1991
·유럽 각국의 크리스쳔 아티스트들은 스위스에 모여 유럽 각국의 ccm을 모은 앨범<첫 발자국>을 냄
-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유럽 교회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유럽 특유의 크리스천 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에서의 ccm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결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도 ccm이 성장하기 시작
·에이미 그랜트 "baby baby"로 빌보트 싱글차트 정상 차지
·마이클 w 스미스 "place in this world"로 팝 차트 상위에 진출
·테이크 식스 그래미 상에서 여러 부문의 상을 수상
- 크리스챤 음악은 일반 시장에서도 강세를 보이기 시작
1995
·빌보드 ccm도 일반 팝과 함께 집계해서 차트를 내기 시작
·jars of clay"200만장 이상 판매해서 크리스챤 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데뷔앨범 기록
·에이미 그랜트, 마이클 w 스미스, 자스 오브 클레이의 앨범은 차트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이로 인해 ccm은 명실상부하게 대중 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잡게 됨
90년 중반
·일반 레코드사들이 크리스천 레이블 소유
-dfl반 라디오와 소매상에 공급
·프레이즈 뮤직의 르네상스
-돈모엔, 론 캐놀리 등의 앨범은 웬만한 스타의 앨범보다 더 많은 호응을 얻음
·ccm은 일반 주류 음악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엄청난 성장을 했다. 그러나 ccm의 목적, 가사내용, 아티스트의 명성, 세속성 등에 대한 이슈들은 70년대와 마찬가지로 제기되됨
ccm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21세기의 새로운 문화로서 또는 복음의 도구로서 영역을 확장할 것인가?교회에서 새로운 교회 음악으로 편입되어 새로운 교회문화의 밑바탕으로 될 것인가? 아니면 일반 문화의 하나로 스며들어 건전하고 좋은 문화 정도로 엷어질 것인가? 또는 음악 산업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상업 물결로 쓰여질 것인가? 21세기의 기독교 문화와 대중 음악계가 그 평가를 줄 것이다.
"음악은 오늘의 음악, 그러나 그 메시지는 영원한 것으로."
5. 한국 ccm의 역사
1982
·찬미가 -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편찬
1905
·찬숑가 - 감리교, 장로교 모여 통일찬송가를 만듦(155-미국 장로교 찬송가, 84-부흥회용 노래)
1950
·6.25 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며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가스펠 송 전파
-내게 강 같은 평화, 주 예수 사랑기쁨 내마음속에.. 등
1963
·원주 청년관 음악사절단 (미국 선교사)
-여러가지 스타일의 가스펠 음악을 잘 보여줌 →우리나라 가수들에게 영향을 줌
1969
·서울의 경동 교회 "조영남, 최영희, 트윈 폴리오" 음악 모임
-교회에서 대중가요 가수가 기타를 치며 찬송을 부른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고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런 시도는 우리나라에 컨템퍼러리의 물결이 시작되는 신호탄과 같았다. 경건과 은혜의 모습으로만 여겨지던 교회 음악이 젊은이들의 취향과 어울려 그들의 언어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1
·조영남 성가앨범 발표 시작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때 연인원 30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이 참여한 이 대회에서 조영남은 기타반주로 찬송을 불렀다. 당시로서는 '저게 무슨 찬송가야...'할 정도로 파격적인 창법으로 노래했다. 그의 노래를 두고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찬반 양론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대중적인 스타일로 기독교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정서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960-70
·기독교적 내용들의 팝송들은 사람들에게 컨템퍼러리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었다.
-amazing grace(주디 콜린스) 빌보드 1위, "주기도문(자넷 미드)" 우리나라 가수들의 애창곡이 됨
·합창단과 모임을 통한 가스펠 보급
- 예수 전도단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에게 향하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YMCA
·활발한 복음성가집 활동들
- 부산 양정교회 산하 한국 복음 선교회 「복음성가집」
- 정신여고 노래 선교단 「노래할 이유있네」 매년 복음성가집 출간
- 「새노래」 예수 전도단
- 「우리들의 노래」 생명의 말씀사
- 「영감의 제창」 CCC →후에 찬미로 발전
- 「만남의 성가」 영락교회
- 「복음 성가」 순복음 교회
1975
·윤용섭(색소폰 성가 연주)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 갈릴리 중창단 결성
1976
·부산 늘노래 선교단 창단
-악기와 편곡에서 록 스타일을 시작한 거의 최초의 밴드
1979
·노문환"잊으라시네"를 시작으로 창작곡들을 발표
·국내 최초 록 오라토리오 "삼십 삼십 은 삼십" 발표
1978
·빛소리라는 이름으로 보컬 그룹 앨범 제작
-전국 순회 공연
·대구 굳라이프 선교단 창단(CCC)
-대학가요제 입상한 최미와 성악을 전공하던 최명자가 합류한 굿라이프 선교단은 기존의 가스펠송들을 가지고 전국대학을 돌며 공연활동
1980
·기독교 방송(CBS) '새롭게 하소서' 간증 프로그램 시작
-복음성가 방송
-당시 방송할 음원인 가스펠 음악 테이프가 없어서 방송사 스튜디오에 가서 가수들의 노래를 직업 녹음하여 음악 자료를 만듦
(남궁옥분, 어니언스, 김세환, 이연실 등)
1981
·최성욱, 최안순 "사랑"
-새롭게 하소서의 청취자들의 폭팔적인 반응으로 텔레비젼 드라마에도 등장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당시 가요계에서드 드물던 10만 단위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가요 차트에도 오르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최초의 순수 복음성가.
80년대 초반엔 한국 복음성가가 일반 레코드 업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외적인 성장을 거둠
1980
일반 대중 음악인들의 복음성가 활동 활발>
- 윤형주, 현미, 봉봉 4중창단, 이용복, 방주연 등
80년대 초에 부흥한 복음성가는 "은혜와 간증", "회계와 구원"에 밀접하게 연관된 곡이 많음
이 때는 대중문화 자체가 정식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 때였다. 대중음악, 나아가 대중적인 기독교 음악은 목회자나 신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복음성가에 대한 바람직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신학적, 문화적 바탕 위에 선 복음성가 문화가 체계적으로 형성될 수 없었다. 그저 "이러 이러한 악기는 안된다, 된다... 이런 음악 스타일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은 말도 안된다...'라는 단순한 얘기들이 제기된 논의라면 노의였다. 복음성가를 천박한 가요 스타일이라고 여기는 일이 많았고, 유명한 가수들이 회심하여 복음성가를 부르는 모습을 대견해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70-80년대는 체계적인 바탕이 없이 나름대로 제각각 뿌리를 내렸고, 음악성을 내세운 음반활동 위주가 아닌 현장 간증을 동반한 집회 활동 위주의 환경 때문에 음악 문화로서의 정체성을 세우기가 힘들었다.
간증과 연결된 노래와 가수들이 주류를 이룬 90년대 초반의 복음성가 문화는 교회 안팎으로 꽃을 피웠지만 음악을 위주로 하는 음반 판매는 갈수록 저조해졌다. 결국 복음성가 문화는 교회 집회를 중심으로 영역이 줄어들게 되었다. 자연히 일반 레코드사는 가스펠 앨범 출판을 중단했고 80년대 후반까지 일반 레코드점을 대상으로 한 LP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1981
창작복음성가의 시작>
·주숙일 "주님 곁으로"
·김민식 "저 어둠 속이면 어때",
·김석균 "사랑의 종소리""예수 믿으세요""주를 처음 만난 날"
·전용대 "주여 이 죄인이" 80년대 초중반 은혜와 간증이라는 집회 중심의 복음성가 문화에서
전용대의 노래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테이프는 백만 단위의 판매고를 기록
·최용덕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가서 제자 삼으리라""나의 등 뒤에서"
이들의 노래는 창작곡이 많지 않던 시기에 곧바로 널리 알려졌고, 한국인의 정서에 맞닿아 80년대 이후 교회를 중심으로 대표적인 복음성가로 자리잡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