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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1장 강해 이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1장8-디모데후서 1장 18
요절 디모데후서 1장 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성경에는 복음에 대해서 나옵니다. 복음은 쉽게 말하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죽어서도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하였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라가야 우리도 영생을 누립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여 바울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감옥에 갇힌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감옥 밖에서 자신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연약해진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순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교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교는 오 분이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마음으로 일생을 사는 것으로 더욱 어렵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감옥 밖에서도 순교자적으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스데판은 죽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바울은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돌로 침을 당하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난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서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고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을 주사 고난을 극복할 힘을 주십니다.
뿐만아니라 고난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고난은 디모데를 강하게 만들고 능력있게 만들 것입니다. 사람들은 편하게 사는 것을 인생의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편하게 살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믿는 사람들도 쉽게 믿고, 쉽게 천국에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예수님으로 인해 고난을 당할 때에 신앙 생활을 잘못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회의와 의심을 합니다. 심지어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피하여 안일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다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원주의 초등학교 오학년 학생이 미안하다. 사는 게 힘들다는 유서를 써놓고 아파트 11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벋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난도 받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난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찢기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 마음은 촛밀 같아서 그 속에서 녹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고난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인류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하시고 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고난을 가르쳤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4,35)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영광의 길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 고난을 사랑할 때 성령이 주시는 힘이 생깁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순수케 되고 강건케 됩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나의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이 고난 받는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고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런 고난을 적극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도 복음을 전하나 지하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매맞고 돌에 맞고 채찍질당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마음에는 항상 눌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난을 받자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난을 사랑하자 하나님은 바울에게 많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그를 통하여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쇠고랑이 벗겨지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여러 교회가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를 통하여 복음이 세계에 퍼져나가게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신약성경의 삼분의 이를 쓰게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며 고난이 그에게는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디모데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디모데에게도 고난을 가르칩니다. 디모데에게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위하여 감옥에 갇힌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운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디모데도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까지 할 각오를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자신과 양들과 후손들에게도 유익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듭니다.
저는 L.G 구자경회장이 쓴 "이 길밖에 없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구지경 회장을 말단 사원에서부터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아무도 몰래 5년 이상을 고난을 가르치고 그 후에 회장실로 발탁했습니다. 그는 밑에서부터 올라왔기 때문에 겸손, 근면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50-60년대 고생한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고난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고생을 했으니 자식을 고생을 시키지 않고자 했습니다. 고난을 배우지 못한 자녀들은 연약합니다. 군대에 가서 조금만 힘들면 탈영하고 총기 사고를 일으킵니다. 가난을 모르기 때문에 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과소비, 사치에 빠져 있습니다. 이들에게 고난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이들을 파멸케 하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고난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면 고난을 가르쳐야합니다.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해 25년의 고생하게 하셨고, 모세는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요셉과 엘리야를 고난 가운데 두셨습니다. 이들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있는 종들이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두려움을 극복하는 담대한 종이 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노모세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uic에서 조지아택으로 갔습니다. 그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센타 근처로 이사가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는 연구비를 따지 못하면 잘리는 상황에서 삼주에 한번씩 전하는 메시지를 매주 준비하여 전하였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 선교사는 믿음으로 두시간을 통근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섬겼을 때 250대 일의 경쟁을 뚫고 교수로 임용되게 하셨습니다. 노모세 선교사님이 삼년동안 열심히 일해도 하나의 프로젝트도 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먼저 고난을 받으며 마가복음 말씀을 섬겼을 때 한 번에 30억의 프로젝트를 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정년보장 교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은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시고 그가 전하는 복음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은 행위를 따라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복음은 율법적인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얻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믿음의 행위만을 원하십니다.
은혜는 우리가 밤새도록 일을 해도 우리에게 잡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면 조금 일해도 하나님이 많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르심을 받을 때 이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은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숨쉬는 것도 은혜입니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공부하는 것, 직장생활하는 것, 양들을 돕는 것 하루하루 먹는 것이 다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알아야 담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알아야 고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부르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절대적이고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뜻을 두시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은혜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것이 너무나 부족해도 풍성하게 주십니다. 특히 영생은 그렇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영생을 하나님은 선물로 주십니다. 이런 은혜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썩지 않는 것을 주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 비밀스럽게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하여 밝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십니다.
레위기에는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그림자입니다. 이 모든 구약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구약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분명히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썩지 않는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과 같이 썩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썩지 않는 새하늘과 새땅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복음이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은 예수님이 받은 것으로 끝이 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바울은 복음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깨달은 복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외아들은 밥을 잘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식구가 많은 집은 서로 밥을 먹으려고 합니다. 어머니가 맛있게 먹어야 아이도 따라서 잘 먹는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면서 자식에게 먹지 말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은 경험입니다. 산 체험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복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선포자는 전파한다는 뜻입니다. 군사용어입니다. 군사가 쳐들어갈 때 먼저 전령을 보내서 항복을 받고자 합니다. 전령을 보내는 것은 왕이 온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라고 항복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포자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권세자입니다. 사도는 사도적인 권세를 말합니다. 바울을 영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사입니다. 선생입니다. 진리를 받은 자가 받지 않은 자에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 나이에 맞고 생활에 맞도록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온 세계에 선포하고, 예수님의 권위로 양들을 돕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이 의탁한 것을 지키실 줄 압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12절 말씀을 소중히 여깁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적극 사랑하였습니다.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원함으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가 고난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믿고 점점 알아가는 것입니다. 아는 것보다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믿고 알았다고 합니다. 결혼생활도 결혼해놓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였습니다. 내가 의탁했다는 것은 복음에 나의 운명과 명예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자신의 장래를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전인생을 투자하였습니다. 그는 부활의 예수님, 신실하신 예수님이 자신이 예수님께 맡긴 것을 능히 지키실 줄로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고난을 받을 때 백배의 복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축복은 내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믿는 그 분이 자신이 맡기신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지켜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가 받은 고난에 대해서 백배의 복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받으며 예수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예수님이 그것을 지키실 것을 확신합니다. 바울은 여기까지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세계입니다.
믿음으로 오병이어를 드릴 때 하나님은 오천 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돌을 옮길 때 하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아나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광야에 갔을 때 하나님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내리시고 만나를 주시고 바위에서 샘물 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의 세계로 가려면 믿음으로 사는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본받아 복음을 지켜야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은 기계론적이고 철학적이고 운명적인 것아 아닙니다. 인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이 부르심이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이제 디모데에게 명령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바울에게 들은 복음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받아 복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바울이 고난의 길을 가면서 고난을 따라가라고 합니다. 바울이 하면서 하라고 합니다.
요즘 학생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선생을 본받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선생은 본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누구에게 본이 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결정합니다. 어떤 왕이 학자에게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 물었습니다. 나쁜 짓하지 말고 착한 일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누가 모르느냐고 하였습니다. 학자는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멘토는 멘토라는 사람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오디세이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왕이 전쟁에 나가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왕은 텔레마우스쿠스라는 친구 멘토에게 부탁합니다. 친구 멘토는 아들을 잘 가르쳤습니다. 인격적인 책임교육을 하였습니다. 뒤에 훌륭한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 선생이 멘토입니다.
플라톤의 멘토는 소크라테스가 있습니다. 알렉산더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멘토가 있습니다. 헬렌캘러에게는 설리반이라는 스승이 있습니다. 그 배움을 받는 사람을 맨티라고 합니다. 맨토와 맨티에게는 인격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야 본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좋은 맨토이고 디모데는 좋은 맨티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멘토로서 훌륭하고 바울을 본받아 따라간 디모데도 훌륭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부탁한 십자가의 복음을 지켜야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바울은 디모데가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복음을 지키기 원합니다. 고난의 복음을 지키기 원합니다. 우리는 고난의 복음을 지켜야 합니다. 사단은 기복주의, 인본주의, 상대주의 신앙, 번영 신학, 기복신학을 통하여 고난의 복음을 파괴합니다. 예수님을 힘들게 믿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일주일에 교회 한 번 나가서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도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미국에 있는 신자들은 이러다가 태어날 때, 결혼할 때, 죽을 때 교회에 세 번 간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절에 가는 것과 유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십자가를 제거한 기독교입니다. 결국 모양만 남기고 기독교의 본질을 빼앗아 갑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도 은혜도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 없는 기독교에서 십자가 복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지키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합니다. 성령께서 십자가의 아름다운 복음을 지키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우리 UBF 조상들도 고난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드렸습니다. 헌금을 드리고자 헌혈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버스를 타지 않고 걷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정을 오픈하고 양들을 섬겼습니다. 선교사님들이 매일 저녁 모여 합심 기도를 하되 새벽 1-2시까지 기도했습니다. 이런 헌신을 통해서 지성인 복음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놀라운 세계선교가 이루어졌습니다. 생자와 같은 자들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종로이부는 여름수양회 백일전부터 기도를 하고 시십일 전부터 릴레이 기도를 하였습니다. 메신저는 두 달 동안 합숙을 하였습니다. 모든 메신저가 울면서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듣는 사람들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복음신앙을 철저히 계승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도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납니다.
(고난 받는 바울을 버린 자가 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여기서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말합니다.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안에 있는 아시아를 말합니다.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렸습니다.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중동지방을 말합니다. 거기서 바다를 건너면 유럽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시기하여 핍박하였습니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바울 편에 붙으면 많은 손해를 받으니 바울을 버렸습니다. 고난 당한 자를 사랑하려면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바울과 함께 하면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바울을 버린 자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떠났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해타산이 밝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안 만났으면 좋은 사람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으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속이 터집니다. 이런 사람은 질소 같은 사람이나 이산화탄소 같은 사람입니다.
(오네시보로 집에 긍휼을 베푸소서)
16절을 보십시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러나 오네시브로는 바울을 버리지 않고 남은 자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브로 집에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오네시브로의 집은 바울을 격려하였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유쾌하게 하였다고 나옵니다. 더울 때 얼음냉수를 먹고 시원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잠언 25장 13절에는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5장 25절에는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좋은 기별은 뼈가 유쾌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뼈가 꽉찬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도 좋고 만나도 좋은 사람입니다. 답답하다도 그분을 만나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그 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아이들이 어머니 무릎에 앉는 것과 같습니다. 오네시브로는 산소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합니다.
가난한 집에 홀로 사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힘들게 아들을 공부시켜 보냈습니다. 어느날 아들을 보고 싶어 찾아갔습니다. 아들이 간 학교 교문에 서 있었습니다. 아들이 여자친구와 함께 나오다가 보았습니다. 여자 친구가 저 할머니 누구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우리 집 식모라고 하였습니다. 내 어머니가 못생기고 못입고 공부 못했다고 부끄러워합니다. 이런 자가 불효자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겨야합니다.
오네시브로는 사도바울이 감옥에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리마데 요셉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죄인의 친구 세리의 친구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세리와 창녀와 함께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는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자 예수님의 시체를 모셔다가 장례를 지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당당히 여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할 때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만듭니다. 예수님도 반역자로 취급하고 사도를 소요자로 만듭니다. 북한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반동분자로 여겨서 죽입니다. 다른 문제를 씌워서 죽입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오네시브로는 바울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바울을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의와 거룩함을 인정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감사합니다. 옥중에서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의의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 받는 것은 백프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 받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기쁩니다. 그때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유대인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누명을 썼을 때 다른 사람이 다 뭐라고 해도 나의 중심을 알아주는 사람이 고맙습니다.
(오네시브로는 바울을 방문하였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오네시브로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방문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양과 같은 착한 자들입니다. 감옥에 있는 죄인을 방문하는 것은 깊이 동조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브로는 바울을 여러 번 찾아왔습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 미치 앨봄은 대학을 나왔습니다. 대학 다니때 존경하는 모리교수가 뤼게릭 병이라는 것에 걸립니다. 이 병은 근육이 풀어집니다. 점점 약해져서 죽는 병입니다. 덜 심할 때 텔레비전에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대학 졸업한지 16년이 지난 후에 그를 보았습니다. 그를 찾아가보니 혼자 있고 아무도 없습니다. 그도 바쁘지만 매 화요일마다 모리 교수를 찾아갑니다. 가서 인생의 의미를 갖고 이야기 합니다. 옛날 학생은 그곳에서 교수의 말을 듣습니다. 그것을 적고 노트하고 녹음합니다. 자네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네 라고 합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라고 합니다. 그리고 헤어졌는데 죽었습니다. 그 바쁜 시간에 방문하여 소중히 듣고 쓴 책입니다. 환자나 외로운 자를 방문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는 나를 유쾌하게 했다고 합니다.
(오네시브로는 에베소에서 많은 봉사를 하였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바울은 다시 한번 오네시브로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에 많이 봉사를 하였습니다. 바울의 부족한 점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부족한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 시원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은 만날 때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휴머니즘이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도 인간이므로 자신을 유쾌하게 한 오네시브로에게 복을 베푸소서 하면서 기도합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서 정신 나간 선행을 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뒤의 여섯 사람의 통행료를 내어줍니다. 이것이 정신 나간 선행입니다. 차를 받았는데 앞 사람이 그냥 괜찮다고 하며 갑니다. 나는 정신 나갔는데 다른 사람은 기분이 좋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내립니다. 우리의 주위의 사람들을 유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서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 은혜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디모데후서 1장 강해 이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1장8-디모데후서 1장 18
요절 디모데후서 1장 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1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찬송 621장
찬송 62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