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 동일성과 자기 정체성 =
철학을 하다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어떤 철학자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그리고 어떤 철학자는 ‘자기 동일성’을 묻는 질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철학원서의 ‘Self-Identity(불어로는 identité de soi)’를 어떤 책에서는 ‘자기 동일성’이라고 번역하고 어떤 책에서는 ‘자기 정체성’으로 번역을 한다. 어느 하나가 옳고 어느 하나가 틀린 것이 아니라, 사실 ‘아이덴트티’는 ‘동일성’과 ‘정체성’ 둘 다를 의미한다. ‘영어의 아이덴트티’는 문맥에 따라서 동일성이나 정체성 모두를 의미하는데, 한글에서는 - 한글의 명사는 한문용어(뜻글자) 이므로 -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정체성’과 ‘자기-동일성’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아마 가장 일반적인 구분이 ‘범주로서의 구분’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자기-정체성이란 어떤 하나의 범주 안에서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가령 ‘당신은 야당을 지지하는가, 여당을 지지하는가?’하는 문제는 나의 정체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유신론자인가 무신론자인가, 나는 자본주의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 혹은 자유주의자인가 법치주의자인가? 등 등 모든 개별적인 영역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자기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 정체성은 많은 경우 대립하는 어떤 다른 정체성을 가정하고 있으며, 또한 분명하게 기술 가능한 경우가 많다. ‘자아’에 비유하면 ‘자기 정체성’은 주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자아’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나는 민족주의자이다. 나는 여성운동자다. 나는 불교신자다. 나는 기독교 신자다. 나는 진화론자다는 등의 모든 진술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자아 즉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 진술들이다.
반면 ‘자기 동일성’이란 ‘나인 것’ ‘단적으로 나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남자이고, 교사이고, 민주주의자이고, 대한민국 국민이고,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철학을 가르치고, 봉사를 종종 하는 사람이고, 생태를 걱정하는 사람이고 등 등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하나로서 고려할 때, 이것이 곧 나의 동일성인 것이다.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서는 나의 모든 정체성을 다 합해 놓은 것, 이것이 나의 ‘동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나의 ‘동일성’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은 ‘실제로 나의 정체성이 아닌데 마치 나의 정체성인 것처럼 가지고 살 거나, 혹은 이와 반대로 실제로 나의 정체성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나의 정체성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을 때, 스스로 분명한 자신의 것을 구분하고 오직 진정한 나의 정체성만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이다. 나는 서로 반대되거나 대립되는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가 있다. 가령 교회에서는 신앙인으로 그리고 학교에서는 무신론자로 살 수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민족주의자로 또 어떤 곳에서는 세계시민주의자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두 가지의 정체성이 단순히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가진 확신들이고 또 그렇게 진지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기에 나의 동일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가지기 위해서는 정체성의 정립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고민을 많이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의 정체성 중에는 서로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것 같은 것이 나의 동일성 안에서 함께 공존할 수도 있지만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톨릭신자인 것’을 그 자체로는 어렵지 않게 긍정될 수 있고, 내가 진화론자인 것도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인정한다는 것, 그것도 이 둘이 하나의 자아를 형성하도록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분명 신도 존재하는 것 같고, 또한 고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인류의 진화도 거짓은 아닌 것이기에 이 둘이 상충될 때 나의 동일성을 가진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정체성이 분명해도 자기 동일서은 모호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동일성의 정립은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며, 어떻게 보면 철학적 인간학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이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모든 삶에서의 나의 역사가 그리고 현재 내가 믿고 있는 모든 진리의 단편들이 하나로 어울려져서 ‘내가 누구인 것’ ‘나는 이러한 사람이요’라고 말할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럼에도 이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자아’ ‘사회적 자아’ ‘역사적 자아’ ‘문화적 자아’ ‘종교적 자아’ 등은 모두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유일한 자아의 한 단편들이며, 만일 이러한 자아가 서로 충돌하고 대립하고 있다면, 그럼에도 내가 전혀 고민하지 않고 문제를 회피하면서 살고 있다면, - 의학적으로가 아니라 - 철학적으로 ‘자아분열증’에 걸려 사는 사람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우리들의 다양한 자아들은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나의 동일성으로서의 자아’에 대해서 학문적 요청에 의해서 잠정적으로 추상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재는 ‘유일하고 하나인 나의 자아’ - 철학자들은 이를 총체적 자아, 혹은 절대적 자아라고 부른다 - 뿐이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이러한 자아(총체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것은 ‘자기 이고자 하는 근원적인 인간의 욕구’에 의해서라고 볼 수도 있고, 혹은 건강한 시민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사회적 요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자기동일성’을 ‘보다 참되게 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불교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거나, 니힐리즘적인 회의론자들의 입장에서보자면 이러한 자기동일성의 추구는 결국 실패로 끝날 것이며, 이러한 ‘절대적 자아’ 혹은 ‘총체적 자아’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허상’을 쫏는 것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을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즉 자아의 추구라는 길에서 ‘가다가 그만 가면 안 간만 못한 것’이 아니라, ‘가다가 그만가도 간만큼은 이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