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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인물편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 성종 때의 지리서이다.
성종 때 명(明)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1462년)가 수입되자 王이 노사신·양성지·강희맹 등에 그것을 참고하여 세조 때의 《신찬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지리서를 편찬케 하였다. 그들은 성종 12년(1481년)에 50권을 완성하였고, 성종 17년에 다시 증산(增刪)ㆍ수정하여 35권을 간행하였다.
그 후 연산군 5년에 개수(改修)를 거쳐 중종(中宗) 25년(1530년)에 이행(李荇) 등의 증보판이 나오니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전55권 55책.
경주부 인물편
【인물】 신라 온군해(溫君解) 진덕왕 6년 무열왕이 이찬(伊飡)으로 있을 때에 당 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나게 되었다. 무열왕을 수행하던 온군해가 높은 갓을 쓰고 큰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으니, 순라병들이 그를 무열왕으로 알고 살해하였다. 무열왕은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하였다. 진덕왕은 군해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증직하고, 자손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눌최(訥催) 대내마(大奈麻) 도수(都水)의 아들이다. 백제군이 쳐들어 와서 봉잠(烽岑)ㆍ기현(旗懸)ㆍ혈책(穴柵) 등 세 성(城)을 공격하였다. 눌최는 성을 굳게 지키고 구원병을 기다렸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자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외로운 성에 구원병이 없어 날로 더욱 위험하니, 지금이야말로 진실로 뜻 있는 무사가 충절을 다 바쳐야 하는 때이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성이 함락되자 눌최가 죽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고, 급찬(級飡)의 관등(官等)을 추증하였다. 설계두(薛罽頭) 무덕(武德) 4년에 바다 배를 따라 당 나라로 들어갔는데, 마침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으므로 계두가 스스로를 천거하여 좌무위 과의(左武衛果毅)가 되었다. 요동(遼東)에 이르러서 고구려인과 주필산(駐蹕山) 아래에서 전쟁하였는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당 나라 황제가 어의(御衣)를 벗어 그의 시신을 덮어 주고, 대장군(大將軍)의 관직을 주고 예로써 장사지냈다. 김흠운(金歆運) 내물왕[奈密王]의 8대손이다. 옥천군(沃川郡) 인물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필부(匹夫) 아찬(阿飡) 존대(尊臺)의 아들이다. 적성현(積城縣) 인물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검군(劍君)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었다. 그때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자기 자식을 팔아 끼니를 때우기까지 하였다.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창예창(唱翳倉)의 곡식을 훔쳐 나누어 가졌는데, 검군만이 받지 않았다. 사인들은 훔친 사실이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음식에 독을 타서 죽였다. 거칠부(居柒夫) 내물왕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사소한 일에는 거리끼지 않고 원대한 뜻을 품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염탐하기 위해서 고구려 경내로 들어가 혜량(惠亮) 법사를 만나니, 혜량이 손을 잡고 은밀히 말하기를, “그대는 제비 턱과 호랑이 눈을 가졌으니, 장차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이 고구려는 비록 작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대가 붙잡힐까 염려되니 빨리 돌아감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칠부가 고국으로 돌아갔다. 진흥왕(眞興王) 때에 임금이 칠부 등 여덟 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도록 하여 죽령(竹嶺) 밖의 열 개의 군(郡)을 빼앗았다. 혜량이 길에 나와서 칠부를 만나니, 수레에 함께 타고서 돌아왔다. 관직이 상대등(上大等)에 이르렀다. 이사부(異斯夫) 내물왕의 4대손이다. 강릉부(江陵府) 인물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김양(金陽) 태종왕(太宗王)의 9대손이다.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고 후사가 없었다. 왕의 4촌 동생 균정(均貞)과 4촌 동생의 아들 제륭(悌隆)이 왕위를 다투었다. 김양이 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 적판궁(積板宮)으로 들어가니, 제륭의 무리 김명(金明) 등이 그들을 포위하고 균정을 죽였다. 김양이 하늘에 대고 균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울 것을 맹세하였다. 김명이 제륭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자, 김양이 병사를 모집하여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서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을 만났다. 우징이 그와 함께 거사할 것을 도모하여 김명을 토벌하여 죽였다. 그리고서 우징을 맞아 즉위하게 하였으니, 이 사람이 신무왕(神武王)이다. 김양은 관직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서발한(舒發翰)의 관등을 추증하고, 부의(賻儀)와 장사(葬事)를 한결같이 김유신의 구례(舊例)에 따라 행하게 하고, 태종왕릉에 배장(陪葬)하였다. 사다함(斯多含) 내물왕의 7대손이다. 풍채가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곧고 발랐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花郞)으로 추대하였는데, 그의 낭도(郞徒)가 몇 천 명이나 되었다.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가야국(伽倻國)을 정벌하도록 명할 때에, 사다함이 종군하기를 청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왕이 그의 공을 책록(策錄)하고, 가야국 사람들을 노비로 하사하니 받고서 모두 풀어주었다. 또 전지를 하사하니 사양하였다. 왕이 강권하니 알천(閼川)의 불모지를 받기를 청하였다. 석우로(昔于老)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고, 흘해왕(訖解王)의 아버지이다. 조분왕(助賁王) 때에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하고, 그 땅을 군(郡)ㆍ현(縣)으로 만들었다. 첨해왕(沾解王) 때에 사량벌국(沙梁伐國)이 배반하고 백제에 투항하자, 우로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뒤에 왜국(倭國) 사신과 마주 앉아 모욕을 주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만들겠다.”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군대를 보내와서 우로를 잡아 불태워 죽였다. 미추왕(味鄒王) 때에 왜국 사신이 빙문(聘問)을 오니, 우로의 아내가 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으로 끌어내려 불태워 죽여 지난날 남편의 원한을 갚았다. 실혜(實兮) 대사(大舍) 순덕(純德)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정도를 지키고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하사인(下舍人) 진제(珍提)가 여러 번 왕에게 참소하자, 그를 영림(泠林)의 관리로 좌천시켰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할아버지 때부터 충성으로 세상에 소문이 났는데, 지금 아첨하는 신하의 훼방으로 죽령 밖 먼 곳으로 좌천되는데도 어찌 직언(直言)으로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는가?” 하니, 실혜가 대답하기를, “옛날에 굴원(屈原)은 외롭고 곧았으나 배척되었으니 예로부터 이러한 것이다. 슬퍼할 것이 무엇 있겠느냐?” 하고, 드디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다. 최치원(崔致遠) 자는 고운(孤雲)이다. 풍채가 수려하고,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다. 당 나라로 들어가서 학문을 하는 데에 게을리하지 않아 한 번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이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이 되어 그를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다. 그리하여 표(表)ㆍ장(狀)ㆍ서계(書啓)ㆍ징병(徵兵)ㆍ고격(告檄) 등의 문장이 모두 그에게서 제작되었다. 고려 현종 때에 내사령 문창후(內史令文昌侯)를 추증하고, 공자의 묘정에 종사하였다. 《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실려 있고, 또 《최씨문집(崔氏文集)》 30권이 실려 있다. 치원이 나이 28세에 귀국할 뜻을 가지자, 당 나라 희종(僖宗)이 이것을 알고 조서를 주어 사신으로 왔는데, 신라의 왕이 그를 붙들어 두려고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치원이 중국으로 가서 당 나라에 벼슬하다가 고국에 돌아온 후부터 난세를 만나 불운하여 걸핏하면 재앙을 만나니,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스스로 상심하여 다시는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방랑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산림 아래와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심으며, 서적을 베개로 삼고 자연을 읊는 시를 지었으니, 이를테면 경주(慶州)의 남산(南山), 강주(剛州)의 빙산(氷産), 합천(陜川)의 청량사(淸涼寺) 및 지리산의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의 별장 등이 모두 그가 유람하던 곳이다. 뒤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숨어 살면서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과 정현(定玄) 법사와 함께 도우(道友)를 맺고 한가로이 지내다가 여생을 마쳤다. 해론(奚論) 모량부(牟梁部)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찬덕(讚德)은 용감한 뜻과 뛰어난 절개가 있어서 당시에 명망이 높았다. 진평대왕이 그를 가잠성령(椵岑城令)으로 선발하였다. 이듬해에 백제에서 대군을 출동시켜 가잠성을 공격하자, 찬덕이 한편으로는 용감히 싸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키기도 하였는데, 양식과 물이 다 떨어지자 적에게 패하여 죽었다. 이리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해론은 나이 20여 세 때에 아버지의 공으로 대내마가 되었다. 건복(建福) 35년에 왕이 해론에게 금산당주(金山幢主)로 임명하여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 변품(邊品)과 함께 군대를 출동하여 가잠성을 습격해서 빼앗게 하였다. 백제에서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곳으로 출동시켰다. 해론 등이 그들을 맞아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해론이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셨는데, 내가 지금 또한 이곳에서 백제인과 전쟁을 하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하고, 드디어 짧은 칼을 가지고 적진에 뛰어들어 몇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고, 당시 사람들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장가(長歌)를 지어 애도하였다. 김대문(金大問) 일찍이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으로 있었다. 일찍이 《고승전(高僧傳)》ㆍ《화랑세기(花郞世記)》ㆍ《악본(樂本)》ㆍ《한산기(漢山記)》 등 약간 권을 저술하였다. 설총(薛聰) 자는 총지(聰智)로 원효(元曉)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명민하더니, 장성해서는 박학(博學)하고 글을 잘 지으며 글씨도 잘 썼다.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의 뜻를 풀이하여 후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또 민간에서 쓰는 말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의 문서에 사용하게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일찍이 한가로이 있을 때에 설총을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오늘 오랜 비가 처음 개이고 훈풍(薰風)이 약간 서늘하니, 고상한 이야기와 좋은 해학(諧謔)으로 답답한 회포를 풀 만하다. 그대는 필시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터이니 나에게 들려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설총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화왕(花王 모란(牧丹))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 향원(香園)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더니, 삼춘(三春)이 되어 곱게 피었습니다. 온갖 꽃을 능가해서 홀로 빼어나니, 이에 온갖 곱고 아름다운 꽃들이 분주히 와서 뵙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홀연히 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니, 이름이 장미(薔薇)였습니다. 붉으레한 얼굴과 새하얀 이빨에 고운 단장과 고운 옷으로 사뿐사뿐 걸어와서 애교 있게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첩이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들었아오니, 향기로운 장막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합니다.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때 또 한 장부(丈夫)가 있었으니, 이름이 백두옹(白頭翁)이었습니다. 베옷과 가죽띠로 흰머리를 흩날리며 지팡이를 짚고서 늙고 병든 걸음걸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와서 아뢰기를, ‘저는 서울 밖 큰 길가에 살고 있아온데, 그윽히 생각하기를, 왕의 좌우(左右)에서 공급하는 고량진미(膏梁珍味)가 비록 풍족하더라도 상자 속에 저장하는 것에는 모름지기 좋은 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실과 삼이 있더라도 왕골과 기름사초도 버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모르겠지만, 왕께서도 뜻이 있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장부의 말에도 일리(一理)가 있다. 그러나 가인(佳人)은 얻기 어려우니, 어찌하면 좋을꼬?’ 하였습니다. 장부가 아뢰기를, ‘모든 임금된 자가 노성(老成)한 사람을 친근히 하여 흥하고, 곱고 어여쁜 여색(女色)을 가까이하다가 망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쁘고 고운 이는 합치기가 쉽고, 노성한 이는 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희(夏姬)는 진(陳) 나라를 망쳤고,서시(西施)는 오(吳)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맹가(孟軻 맹자)는 훌륭한 임금을 만나지 못한 채로 일생을 마쳤으며, 풍당(馮唐)은 낭관(郎官)인 채로 머리가 희어졌습니다. 예전부터 이러하니 제가 어찌하리까?’ 하였습니다. 왕이 사과하기를, ‘내가 잘못했소.’ 하였다.” 하니, 이에 왕이 얼굴빛을 바르게 하며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풍자(諷刺)함이 깊고 간절하니, 이것을 써서 나의 경계로 삼도록 하겠다.” 하였다.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고려 현종 때에 홍유후(弘儒侯)에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김인문(金仁問) 자는 인수(仁壽)로,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유학(儒學)의 글을 많이 읽었으며, 《노자(老子)》ㆍ《장자(莊子)》와 불교의 경전까지도 섭렵하였다. 또 예서(隸書)도 잘 쓰고 말타기ㆍ활 쏘기도 잘하였다. 나이 23세에 당 나라로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다.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에 이르렀다. 측천왕후(則天皇后) 때에 당 나라에서 죽으니 대의서령(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 등에게 영구(靈柩)를 호송하도록 하였다. 효소대왕(孝昭大王)은 그에게 대각간(大角干)을 추증(追贈)하였다. 김후직(金侯稷) 진평왕 때 사람이다. 진평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후직이 간절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후직이 죽을 때에,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거든 모름지기 임금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으라.” 하였다. 그의 아들이 그대로 하였다. 훗날 임금이 사냥을 나가는데, 길 한가운데에 마치 “임금님, 가지 마소서.” 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임금이 돌아다보며 물으니, 시종(侍從)들이 아뢰기를, “김후직의 무덤입니다.” 하고, 드디어 후직이 죽으면서 한 말을 자세히 아뢰니, 임금이 줄줄 눈물을 흘렸다.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것을 묘간(墓諫)이라 하였다. 백결선생(百結先生)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이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해어진 옷을 기워 많은 매듭이 있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항상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모든 기쁜 일이나 성나는 일, 슬픈 일이나 즐거운 일을 반드시 거문고로 표현하였다. 세말(歲末)이 되어 이웃집들이 곡식을 찧으니, 그의 아내가 방아 찧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남들은 다 곡식을 찧는데 우리만은 찧을 곡식이 없으니 어떻게 해를 넘긴다 말인가?” 하였다. 선생이 듣고 탄식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린 것이고, 부와 귀는 하늘에 달린 것인데, 당신은 어찌 상심하는가?” 하고는 곧 거문고를 타서 방아 소리를 내어 위로하였다. 세상에서 전하여 대악(碓樂 방아 음악)이라 하였다. 물계자(勿稽子) 내해왕(奈解王) 때 사람이다. 골포(骨浦)ㆍ칠포(漆浦)ㆍ고포(古浦) 세 나라가 신라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해 오자,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때 물계자가 수십여 급(級)의 적의 머리를 베었는데, 논공(論功)할 때에는 물계자의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 드디어 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남의 신하된 도리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자기 몸을 잊어야 하는 것이다. 전일 포상(浦上)ㆍ갈화(竭火)의 전쟁은 위태롭고도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능히 목숨을 바치고 몸을 잊어서 남에게 알려질 만한 일을 하지 못했으니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미 충성스럽지 못한 몸으로 임금에게 벼슬하는 것은 누(累)가 선조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니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충효의 도리를 상실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조정에 서겠는가?” 하고, 드디어 거문고를 가지고 사체산(師彘山)으로 들어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박제상(朴堤上) 파사왕(婆娑王)의 5대손이다. 벼슬하여 삽량주간(歃良州干)이 되었다. 처음에 눌지왕(訥祗王)이 아우 미사흔(味斯欣)이 왜국(倭國)의 볼모가 되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임금이 제상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게 하였다. 제상이 배반한 자처럼 꾸미고서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들어가서 몰래 미사흔을 빼내어 환국(還國)시켰다. 왜왕이 성내어 힐책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왜왕이 온갖 참혹하고 혹독한 형벌로 협박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으니, 드디어 목도(木島) 안에서 불태워 죽였다. 눌지왕이 슬퍼하여 대아찬(大阿飡)을 추증하고, 미사흔을 제상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관창(官昌)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로 어려서 화랑(花郞)이 되어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태종왕(太宗王) 때에 군사를 출동시켜 당 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공격할 때, 관창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황산(黃山) 들녘에 이르자 품일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비록 어리나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야말로 공명(功名)을 세울 때이다.” 하였다. 관창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는, 즉시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곧장 적진에 돌격하여 몇 명을 죽이다가, 백제 사람에게 포로가 되어 산 채로 백제의 원수 계백(階伯)에 보내지니,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다. 그의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기특한 무사가 많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놓아주었다. 관창이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기(旗)를 꺾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 하고, 우물물을 움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돌격하니 계백이 사로잡아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머리를 말안장에 달아서 보내니, 품일이 소매로 피를 닦아주며, “우리 아이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능히 국사를 위해서 죽었도다.” 하였다. 삼군(三軍)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면서 나아가 백제 군사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임금이 급찬(級飡)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다. ○ 이첨(李詹)이 고증(考證)하기를, “을축년 겨울에 내가 계림(鷄林)에 손이 되었더니, 부윤 배공(裵公)이 향악(鄕樂)을 연주하여 나를 위로하는데, 탈을 쓰고 뜰에서 칼춤을 추는 동자가 있었다.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신라 때에 황창(黃昌)이라는 자가 있어서 나이 15ㆍ6세 때쯤 되어 칼춤을 잘 추었는데, 왕을 뵙고 아뢰기를, ’신이 임금을 위하여 백제 왕을 쳐서 임금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허락하자 곧 백제로 가서 시가(市街)에서 춤을 추니, 백제 사람들이 담처럼 빙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임금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게 하고 구경하였다. 황창이 임금을 그 자리에서 찔러 죽이고, 드디어 좌우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듣고 울부짖다가 드디어 눈이 멀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눈이 다시 밝아지게 하려고 꾀를 내어 사람을 시켜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 말하기를, ‘황창이 와서 춤춘다. 황창이 죽었다는 전일의 말은 거짓이다.’ 하니, 어머니가 기뻐 울며 즉시 눈이 다시 밝아졌다 한다. 황창이 어려서 나라 일에 죽었으므로 향악(鄕樂)에 실어서 전해 내려온다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삼국사(三國史)》를 보니, 모든 관직을 임명하거나 이웃 나라를 침벌(侵伐)한 것은 거의 모두 씌어져 있으며, 해와 별과 우레와 비의 이변(異變)과 초목ㆍ금수의 요괴(妖怪)까지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나라 임금이 적국의 아이에게 살해된 것과 어린 아이로서 적국의 임금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것은 모두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지 않으니, 진실로 의심스럽다. 다만 열전(列傳)에 관창의 일의 전말이 기재되어 있어서 그의 충의(忠毅)가 장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통하게 한다. 이 아이는 필시 관창일 것이다. 전해지는 것이 잘못된 것일 것이다. 모든 적국에 대하여 변란을 음모하는 자는 혹은 행상(行商)으로 가장하거나, 혹은 본국에 죄를 지은 것처럼 꾸미고서 감언이설(甘言利說)과 아첨하는 말로 속여도 더러는 정상이 드러나고 일이 탄로되어 성취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백제가 이미 신라와는 적국이 되었으니, 황창이 응당 공공연하게 무기를 가지고 백제의 번화한 시가의 큰길 가운데로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과연 그렇게 하였다면 백제 사람들이 황창을 잡아다가 형구를 갖추어 고문하였을 것이다. 어찌 내버려 두어 임금의 뜰에서 사투한 짓을 하게 하였겠는가? 이것은 인정(人情)으로나 사리(事理)로 볼 때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옛 사람으로 관창과 견주어 나란히 논할 만한 자를 찾아보니, 《춘추(春秋)》에, 애공(哀公) 11년에 노 나라의 소년 왕기(汪錡)가 공을 위하여 수레에 같이 탔다가 함께 국서(國書)의 난에 죽으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능히 창과 방패를 잡고서 사직(社稷)을 수호하였으니, 상(殤)으로 대우하지 않음이 옳다.’ 하였다. 의(義)에 죽고 인(仁)을 이루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인데, 동자로서 용감히 이런 일을 한 자를 유독 왕기와 관창에게서 볼 수 있다. 이야기가 잘못되어 있기에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황창의 춤을 보는 자를 위하여 고증하고, 또 따로 역사를 읽는 사람을 위하여 이상함을 고증한다.” 하였다. 녹진(祿眞) 길찬(吉飡) 수봉(秀奉)의 아들이다. 소성왕(昭聖王) 12년에 상대등(上大等) 충공(忠恭)이 정사당(政事堂)에 앉아 내외 관직(官職)을 주의(注擬)하는데, 청탁(請托)이 모여들어 충공이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서 병을 얻어 물러가자 의원을 불러 진찰하니, 의원이 말하기를, “병이 심장에 있으니 마땅히 용치탕(龍齒湯)을 복용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충공이 드디어 문을 닫고 손을 만나지 않았다. 집사시랑(執事侍郞) 녹진이 뵙기를 청하니, 문지기가 거절하였다. 녹진이 말하기를, “하관(下官)인 내가 상공(相公)께서 손을 사절하고 계시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마디 말을 올려서 상공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드리고자 하는 것이니, 뵙지 않고는 물러가지 않겠다.” 하였다. 문지기가 세 번 왔다 갔다 한 뒤에야 비로소 뵙게 되었다. 녹진이 말하기를, “듣자오니, 기체(氣體)가 편치 않으시다 하는데, 아침 일찍 업무를 시작하고 저녁 늦게 파하여 안개와 이슬을 무릎써서 혈기의 조화를 깨뜨려 사지(四肢)의 평안함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녹진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공의 병은 침이나 약을 쓸 필요도 없이 한마디 말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니, 충공이, “들려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녹진이, “저 목공이 집을 지을 때에, 재목의 큰 것은 들보와 기둥을 삼고, 작은 것은 서까래를 삼으며 굽은 것과 곧은 것을 각각 그 쓰일 곳에 배치한 뒤에야 큰 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재상이 정사를 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재능이 큰 자는 높은 지위에 두고, 작은 자는 낮은 벼슬을 주어서, 중앙에는 육관(六官)ㆍ백집사(百執事)와 지방에는 방백(方伯)ㆍ군수(郡守)가 있어서 조정에 결원(缺員)이 없이 모두 그 자리에 적합한 인재를 얻은 뒤에야 임금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사(私)를 따라 공(公)을 해치며,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재주가 없더라도 반드시 등용하고, 미워하는 자는 비록 유능한 인재일지라도 반드시 배척합니다. 그 취하고 버리는 것이 마음을 괴롭히고 옳고 그른 것이 뜻을 현란하게 하니, 나랏일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정사를 하는 자도 병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여 일을 맡아 삼가고 공손하여 뇌물의 문호를 닫고 청탁의 길을 끊어버린다면 올리고 내치는 것은 반드시 밝은 자와 어두운 자에 따라서 하고, 주고 뺏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하지 않아 저울과 같아서 가볍고 무거움을 굽힐 수 없으며, 먹줄과 같아서 굽고 바른 것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형벌과 정치가 정당하여 국가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비록 날마다 공손홍(公孫弘)처럼 손을 맞아들이고,조참처럼 술을 내어 벗들과 담소(談笑)하며 스스로 즐기더라도 가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복약(服藥)과 식이(食餌)에 구구하게 마음을 쓰면서 한갓 시일을 허비하고 사무를 폐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충공이 기뻐하여 의원을 사절하고 임금께 알현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이 날짜를 정하여 복약(服藥)한다고 들었는데, 어찌 갑자기 조정에 나왔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신이 녹진의 말을 들으니 약과 같았습니다. 어찌 용치탕을 먹는 효과뿐이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왕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임금이, “과인(寡人)이 임금이고 경이 정승이면서 이런 훌륭한 인재를 태자에게 모르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태자가 들어와 축하하기를, “신은 들으니, 임금이 밝으면 신하도 곧다 하였으니, 이 또한 국가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였다. 고려 배현경(裵玄慶) 처음의 이름은 백옥(白玉)이다. 담력(膽力)이 남보다 뛰어났다. 고려 태조가 사방을 정벌할 때에 현경의 공이 많았다.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병이 위독할 때에 태조가 그의 집에 거둥하여 손을 잡고 문병하고 문 밖에 나오자, 그가 죽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최언위(崔彦撝) 신라 말기 사람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글을 잘 지었다. 18세에 당 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42세에 본국으로 돌아오니,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그를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임명하여 문장에 관계되는 일을 맡겼다. 당시의 귀인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벼슬이 대상(大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동경노인(東京老人) 역사에 그의 이름이 빠졌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숨어 살면서 고려로 따라가지 않더니, 성종이 동경에 거둥하여 유사(有司)에게 명령을 내려 초야에 숨어 사는 어진 이를 찾게 하고, 또 충신ㆍ효자의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니, 노인이 시 두 편을 지어 내상(內相) 왕융(王融)에게 바쳤다. “구천(九天)에 빛이 움직여 별들이 구르는데, 일패(日旆)ㆍ용기(龍旗)가 모두 바다를 따라 순행(巡行)하네. 계림(鷄林)의 누런 잎은 일찍부터 쓸쓸하기도 하더니, 흐릿한 꽃은 이제 다시 상원(上園)의 봄이로다.” 하고, 또, “충신ㆍ효자의 정문(旌門)으로 거리는 광채가 나고, 언덕과 구렁에는 숨은 선비 찾는다고 떠들썩하네. 내 비록 전날 주 나라 늙은이를 따라가지는 못했으나, 지금 다행이 중국의 위의(威儀)가 새로움을 친히 보노라.” 하였다. 최승로(崔承老)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나이 열두 살 때에 태조가 불러 보고, 매우 가상히 여겨 원봉성(元鳳省) 학생(學生)에 소속시키고 안장 얹은 말을 하사하였으며, 정례(定例)로 녹봉 20석을 주었다. 이로부터 문병(文柄)을 맡겼다. 성종 때에 정광(正匡)이 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 되었으며,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량(崔亮)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글을 잘 지었다. 성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불러 사우(師友)로 삼았더니, 왕위에 오르자 드디어 발탁하여 썼더니, 매우 사람들의 여망(輿望)에 맞았다. 벼슬이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광빈(匡彬)이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항(崔沆) 언위의 손자이다. 장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목종이 그를 중히 여겨 정사의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반드시 그와 의논하였다. 김치양(金致陽)이 반역을 꾀하자 채충순(蔡忠順) 등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현종(顯宗)을 맞이하여 세웠다. 정당문학 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를 거쳐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호를 내리고, 청하현개국자(淸河縣開國子)로서 식읍(食邑) 5백 호를 봉하였으며, 또 수정공신(守正功臣)의 호를 더 주었다. 시호는 절의(節義)이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이주좌(李周佐) 목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상서 판어사대사(刑曹尙書判御史臺事)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40여 년 동안 벼슬하였는데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최제안(崔齊顔) 승로의 손자이다. 현종ㆍ덕종ㆍ정종ㆍ문종 등 4대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에 이르렀다. 시호는 순공(順恭)이다. 문종의 묘에 배향하였다. 김부일(金富佾) 그의 조상은 신라의 종성(宗姓)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인종 때에 벼슬이 검교 태보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예부사 상주국(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禮部事上柱國)에 이르렀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지 않았으며, 문장이 화려하고 풍부하였다. 모든 외교 문서에는 반드시 그에게 윤색(潤色)하도록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의 아우 부의(富儀)ㆍ부식(富軾)과 함께 모두 문한시종(文翰侍從)이 되었으므로 그의 어머니를 태부인(太夫人)에 봉하고, 해마다 관에서 곡식을 내려주었다. 김부의(金富儀) 숙종 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체직되어 직한림원이 되었고, 인종 때에 수사공 상서좌복야 정당문학 판상서예부사 감수국사 주국(守司空尙書左僕射政堂文學判尙書禮部事監修國史柱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김부식(金富軾) 숙종 때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이 되었으며 우사간(右司諫)을 지냈다.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李資謙)은 국구(國舅 인종의 외조부)이므로 그에 대한 예수(禮數)는 다른 신하들과는 같게 할 수 없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거기에 따랐으나, 부식만이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예를 바르게 해야 하며, 사사로이 대할 때에는 아비와 자식의 친함을 온전히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묘청(妙淸)이 조광(趙匡)ㆍ유참(柳旵) 등과 함께 서경(西京)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부식이 원수(元帥)가 되어 서도(西都)를 평정하여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검교 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上柱國)에 임명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여 낙랑군 개국후(樂浪郡開國侯)를 봉하고 식읍 1천 호를 주었다. 77세에 죽었다.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사람됨이 체격이 아주 장대하며 낯은 검고 눈은 불거졌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송 나라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부식이 그의 관반(館伴)이 되었더니, 그 부사(副使) 서긍(徐兢)이 부식이 글 잘 짓고 고금의 일에 통달함을 보고, 그 사람됨을 좋아하여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지으면서 부식의 가계(家系)를 실었으며, 또 그의 초상화를 그려 가지고 가서 황제에게 아뢰니, 마침내 사국(司局)에 명하여 판(板)에 새겨서 그것을 널리 전파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뒤에 사신으로 송 나라에 갔을 때에는 가는 곳마다 예로 대우하였다. 세 번 예부(禮部)의 일을 맡았는데, 선비를 잘 뽑았다고 칭찬하였다. 문집 20권이 있다. 김한충(金漢忠) 신라 대보(大輔) 알지(閼智)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뛰어나며 학문에 힘써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예종 때 윤관(尹瓘)에게 여진(女眞)을 치도록 명했을 때에, 한충이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가 되어 힘껏 싸워서 전공(戰功)이 있었다.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이르렀다. 김인위(金因渭) 김부(金溥)의 후손이다.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김경용(金景庸) 용모가 걸출하면서도 잘생겨 고귀하고 깨끗한 풍채가 있었다. 각문지후(閣門祗侯)로 광주 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갔는데 정사하는 것이 까다롭지 않았다. 숙종ㆍ예종 두 대에 벼슬하여 병부ㆍ호부ㆍ공부의 상서(尙書)와 문하평장사를 역임하고, 문하시중 상주국에 승진하였으며, 협모위사치리공신 판상서이형부사 낙랑군 개국백(協謀衛社致理功臣判尙書吏刑部事樂浪郡開國伯)에 가자(加資)되고, 식읍 수백 호를 받았다. 김인규(金仁揆) 과거에 급제하여 좌승선(左承宣)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고, 예종조에 지주사(知奏事)로 승진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수태위 평장사(守太尉平章事)에 이르렀다. 노영순(盧永淳) 기계(杞溪) 사람으로, 의종조에 춘주도(春州道)에 왜구가 횡행하니, 임금이 영순을 보내어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의정(懿貞)이다. 김군수(金君綏) 부식의 손자이다. 명종조에 장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고, 좌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조충(趙冲) 대신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는데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역적 한순(韓恂)과 다지(多智)를 베어 그들의 머리를 함에 넣어서 서울로 보냈다. 병마사 김취려(金就礪)가 자기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여 드디어 군수(君綏)를 한남(漢南)으로 귀양보내니, 당시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김인경(金仁鏡) 처음 이름은 양경(良鏡)이었다. 재주와 식견이 정밀하고 명민하여 예서(隸書)를 잘 썼다. 명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충을 따라 글안(契丹) 군사를 강동성(江東城)에서 토벌하여 공이 있었다.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인경은 문(文)ㆍ무(武) 재주가 모두 넉넉하였으며, 천품이 맑고 아름다워서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낭서(郞署)에서부터 상부(相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중요한 문장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왕공이나 부녀로부터 소 치는 아이와 말 모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최여해(崔汝諧) 천성이 너그럽고 후덕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울주 통판(蔚州通判)에 보임되었다. 처음 명종이 익양공(翼陽公)으로 있을 때에, 여해가 그 부(府)의 전첨(典籤)으로 있었다. 하루는 꿈에 태조가 명종에게 홀(笏)을 주니 명종이 그것을 받고 어좌(御座)에 앉으니, 여해가 여러 동료들과 함께 하례하였다. 잠이 깬 뒤에 기이하게 여겨 명종에게 고하였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여해가 축하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서울에 이르러 환관(宦官)을 통하여 아뢰니, 임금이 비로소 놀라며, “최전첨이 왔구나.” 하고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곧 좌정언(左正言)에 임명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승진하여 추밀원사 산기상시(樞密院使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사직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추밀원에 자리가 찼으니 진실로 오늘의 은혜와 영광을 알겠으며, 북궐(北闕)에서 임금께 알현하였으니 비로소 당년(當年)의 꿈의 맞음을 믿습니다.” 하고, 인하여 사직하고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은 그에게 특별히 정당문학을 제수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연성(金鍊成) 인경의 아들이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벼슬이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다. 김승무(金承茂) 연성의 아들이다. 재주와 식견이 있었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官)과 한림(翰林)을 거쳐 여러 번 승진하여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다. 김경손(金慶孫) 고종 때 사람이다. 성품이 장중(莊重)하고 온화하며 너그럽고 지혜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며 담략(膽略)이 있었다.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다.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민간이나 조정에서 그를 의지하였는데, 갑자기 최항(崔沆)에게 살해되자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김혼(金琿) 경손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에 대장군 중찬(大將軍中贊)이 되었다. 임금이 원 나라로 간 뒤에는 임시로 행성사(行省事)를 서리(署理)하였다. 뒤에 낙랑군(樂浪郡)으로 봉하고,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내리고,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이전(李瑱) 널리 제자백가에 통달하였으며, 시를 잘 짓는다고 명성이 났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검교(檢校)와 정승(政丞)을 지냈으며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이제현(李齊賢) 진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선왕이 연저(燕邸)에 있을 때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말하기를, “중국 서울에 있는 문학하는 선비들은 모두 천하의 일류(一流)들이다. 나의 부중(府中)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니 이는 나의 수치이다.” 하고, 제현을 불러들여 북경으로 오게 하였다. 그때는,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충선왕과 교류하였는데, 요수 등이 제현을 칭찬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가는 곳마다 읊은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충선왕이 강남에 강향사(降香使)로 갔을 때에 제현도 따라갔다. 왕이 누대(樓臺)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흥(興)을 붙이고 회포를 풀 때마다, “이런 곳에 이생(李生)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연경(燕京)과 강남에 시종(侍從)한 공으로 왕이 황제께 아뢰어 고려 왕부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제수하였다. 뒤에 다시 원 나라에 갔을 때에, 원 나라가 우리나라를 한 성(省)으로 만들려 하였다. 제현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자, 그 논의가 드디어 중지되었다. 충선왕이 토번(吐藩)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에 제현이 원 나라 낭중(郞中)과 승상(丞相)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렸더니, 얼마 뒤에 황제가 타사마(朶思麻) 지방으로 양이(量移)하게 하였으니, 이는 배주의 주청(奏請)에 따른 것이다. 제현이 환국(還國)한 뒤에 뭇소인들이 더욱 어지럽게 선동하고 있으므로 제현이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고,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지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나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현을 섭정승(攝政丞)으로 명하여 정동성(征東省)의 일을 권단(權斷)하게 하였다. 그때 임금이 아직 원 나라에 있어서 나라가 비었는데도 제현의 일처리가 타당하여 사람들이 안정될 수 있었다. 벼슬이 문하시중 계림부원군(門下侍中鷄林府院君)에 이르렀다. 국사(國史)를 자기 집에서 찬수(撰修)하였는데, 사관(史官)과 삼관(三館)이 모두 모였다. 젊을 때부터 동료들이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益齋)라는 그의 호로 불렀다. 뒤에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윤신걸(尹莘傑) 기계(杞溪) 사람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의평리 기성군(僉議評理杞城君)에 이르렀다. 이인기(李仁琪)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풍채가 아름답고, 예법(禮法)에 익숙했으며, 무용(武勇)으로 이름이 났다. 호군(護軍)이 되어서 중방(重房)의 여러 장군들이 권세를 믿고 기를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그들에게 대항하고 질책하여 충선왕에게 호소하였다. 충선왕은 비록 인기가 곧다고 생각하였으나 여러 장군들은 모두 중국의 부인(婦人)과 환관(宦官)의 당(黨)이므로 마지못하여 인기의 벼슬을 삭탈하였다. 얼마 안 되어 순서를 뛰어 넘어 지언부사(知讞部事)를 제수하였으며, 곧 판문하사(判門下事)로 승진시켰다. 최해(崔瀣) 치원(致遠)의 후손이다.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충숙왕 8년에 원 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임명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에 예문관(藝文館)ㆍ성균관(成均館)ㆍ전교시(典校寺)의 삼관(三館)이 영빈관(迎賓館)에 나가서 그를 영접하였다. 벼슬이 검교(檢校)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최해는 재주가 기이하고 뜻이 고상하여 이단(異端)에 미혹되지 않고 습속에 빠지지 않고 옛 사람과 합치되기를 힘썼다. 원 나라 연우(延祐) 연간에 처음 과거가 시행되자 조서를 듣고 말하기를, “배운 것을 시험해볼 만하다.” 하더니, 이윽고 과연 제과에 합격하였다. 같은 해에 장원 급제한 송본(宋本)이 그의 재주를 칭찬하여 여러 번 시(詩)에 썼다. 최해가 일찍이 동래현(東萊縣)을 지나다가 해운대(海雲臺)에 올라서 합포 만호(合浦萬戶) 장선(張瑄)이 소나무에 시를 써 놓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아, 이 나무가 무슨 액운이 있어서 이런 졸렬한 시를 만났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그 부분을 파내어 버리고 흙을 발랐다. 안동(安東)에 이르렀을 때에, 장선이 듣고 성내어 맹장(猛將) 3ㆍ4명에게 뒤쫓아가서 잡으라고 하였다. 하인 한 사람을 잡아 가지고 돌아가서 문 밖에 큰 칼을 씌워 세워 놓았다. 최해는 몰래 죽령(竹嶺)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래서 크게 유림(儒林)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뒤에 성남(城南)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더니, 늦게 사자갑사(獅子岬寺) 중에게서 밭을 빌려 경작하여 농장을 열어서 자급자족하고, 스스로 호(號)를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 하였다. 《좌우명(座右銘)》과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의 저술이 있다. 이달충(李達衷) 충숙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다. 공민왕 원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고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전임하였으며,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승진되었다. 15년에 명유(名儒)로 뽑히어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굽히지 않았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鑑識)이 있었다. 일찍이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있다가, 돌아올 때에 우리 환조(桓祖)가 들에서 그를 전별하였는데, 우리 태조가 환조 뒤에 서 있었다. 환조가 술을 권하니 달충이 서서 마시고, 태조가 권하니 꿇어앉아서 마셨다. 환조가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분은 진실로 범인(凡人)과 다른 사람이니, 공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공의 가업(家業)을 이분이 필시 크게 일으킬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자기 자손을 부탁하였다. 그의 저서(著書)로 《제정집(霽亭集)》이 세상에 전한다. 그의 시문(詩文)은 이제현이 크게 칭찬하였다. 신돈(辛旽)이 한창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 달충이 일찍이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신돈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상공(相公)이 주색(酒色)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하니, 신돈이 좋아하지 않았다. 신돈이 처형되자 달충이 시를 지었는데, “범의 위엄을 빌리니 곰들도 두려워하고, 사내로서 미혹하니 계집들 따랐네. 누런 개와 푸른 매 더욱 미우니, 새들과 백마(白馬) 무슨 죄런고?” 라는 글귀가 있었다. 이보림(李寶林) 제현의 손자이다. 사람됨이 엄하고 굳세며 방정(方正)하고 정사의 재주가 있었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이성서(李成瑞) 충정왕(忠定王) 때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고, 공민왕이 즉위해서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승진시켰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파천(播遷)하면서 성서를 양광도 도순문 겸 병마사(楊廣道都巡問兼兵馬使)에 임명하였더니, 군사를 징집하는 데에 공이 있었다. 덕흥군(德興君)의 변란 때에는 최영(崔瑩)을 따라서 역적을 치는 데에 또한 공이 있어서 모두 공 1등에 책정되었다. 원 나라에 가서 새 해를 축하하고, 태위감대경(太尉監大卿)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慷慨)하여 뜻과 절조가 있었다. 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수원서기(水原書記)에 임명되고, 선발되어 사한(史翰)에 보직(補職)되었다. 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ㆍ김구용(金九容)ㆍ김제안(金齊顔) 등과 서로 잘 지냈으며, 강론(講論)을 쉬는 날이 없었다.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고, 15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신돈이 정권을 잡아 참람하고 불법(不法)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존오가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요망한 물건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소(疏)를 올려 극언(極言)하였다. 그때 신돈이 임금과 걸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존오가 신돈을 지목하여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같이 무례한가?” 하니 신돈이 두렵고 놀라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걸상에서 내려 앉았다. 임금이 더욱 성내어 장사감무(長沙監務)로 폄직(貶職)시켰다. 국인들이 그를 칭찬하기를, “이존오는 참 정언(正言)이다.” 하였다. 뒤에 공주(公州) 석탄(石灘)에 살면서 근심과 분함으로 병에 걸렸다. 위독해졌을 때에, 사람을 시켜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이 아직도 기세가 성한가?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겠다.” 하더니, 자리에 다시 눕기도 전에 죽으니, 나이 31세였다. 죽은 지 석 달만에 신돈이 처형되었다. 임금이 그의 충성을 사모하여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증직하였다. 김진양(金震陽)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10년이 못 되어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고,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조준(趙浚) 등의 죄를 논핵(論覈)하였더니 대간(臺諫)들이 번갈아 소를 올려, “진양의 무리가 일을 만들어 내어 화란(禍亂)에 이르게 합니다.” 하여, 곤장 맞고 먼 지방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호(號)를 초옥자(草屋子)라 하였으며, 이숭인(李崇仁)이 전(傳)을 지었다. 김자수(金子粹) 자는 순중(純仲)이다. 공민왕 말년에 장원 급제하였다. 신우(辛禑) 초년에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일을 논하다가, 전라도 돌산수(突山戍)로 좌천되었다. 공양왕 때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뒤에 본조에 벼슬하였다. 본조 설장수(偰長壽) 원 나라 숭문감승(崇文監丞) 설손(偰遜)의 아들이다. 설손이 원 나라 말기 공민왕 때에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로 왔다. 장수는 벼슬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뒤에 본조에 벼슬하였다. 관향(貫鄕)을 정해 주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계림으로 관향을 삼도록 하였다. 김균(金稛) 인위(因渭)의 후손이다. 태조조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이래(李來) 존오(存吾)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였고, 좌명 공신(佐命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여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설순(楔循) 손의 손자이다. 학식이 풍부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두 번이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김맹성(金孟誠) 균의 아들이다.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희경(僖敬)이다. 김신민(金新民)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아들 승경(升卿)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문형(李文炯)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풍채가 옥같이 아름다우며 문아(文雅)하기로 유명하였다. 이윤인(李尹仁) 제현(齊賢)의 후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평안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정효상(鄭孝常) 갑술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익대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여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손소(孫昭) 과거에 급제하였다. 적개 공신(敵愾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여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졌다. 김영유(金永濡)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신증』 김천령(金千齡) 병진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났다. 최숙생(崔淑生) 과거에 급제하였다. 시문(詩文)을 잘 하였는데, 더욱 사륙체(四六體)에 능하였다. 호는 충재(盅齋)이다. 손중돈(孫仲暾) 소(昭)의 아들이다. 천성이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