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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룻기1장1~14절
제목 : 은혜의 소식이 들려올 때
룻기는 남편이 죽은 뒤, 과부인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이주한 모압 여인 룻의 이름을 따서 붙인 명칭입니다.
룻은 다윗 왕(4:18~22)과 예수님(마1:5)의 조상이었으므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누가 기록했는지 알 수 없으며, 유대 전승에 의하면 사무엘이 사무엘상·하, 사사기, 룻기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를 알 수 있은 확실한 근거 자료는 없고, 저작 연대 또한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B.C.1011~931년 사이에 기록됐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1:1)를 배경으로 합니다.
떡집(베들레헴)에 떡이 떨어지자 한 가족이 고향을 떠나 이방 땅으로 갑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이방 며누리 룻과 함께 ‘텅 빈’모습으로 귀향합니다.
나오미를 따르는 룻의 결단은 자기 동족과 신을 포기하고 낯선 땅에서 가난한 과부로 살아야 하는 고통스런 결별이자, 시모의 동족이 되고 시모의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의연한 결단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는 새 출발을 다짐하는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자비를 보여주는 서곡입니다.
1.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1~5절)
1)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습니다(1절).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1) 어느때 :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여호수아서 저자가 그 책의 기록 배경을 밝히기 위해 책의 서두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수 1:1)라는 구절을 기록하여 역사 서술을 했던 것처럼,
그리고 사사기 저자 역시 책의 서두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삿 1:1)라고 기록함으로써 그 역사적 배경을 밝혔던 것처럼,
본서의 저자도 이와 같은 역사 서술의 전형적인 형태를 좇아 본 구절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을 삽입시켰습니다.
이처럼 룻기의 저자가 본 구절을 서두에 기록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역사적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① 저자는 본서가 확실한 역사적 사실성을 지니고 있음을 명백히 했습니다.
② 저자는 본서의 역사적 기록 배경을 제공했습니다.
이로써 본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교훈만을 주기 위한 허구의 소설(fiction)이 아니라, 엄연히 역사적 사실(fact)위에 근거하고 있는 구속사적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사사(私事)들의 치리하던 때' 곧 '사사 시대'란 일반적으로 여호수아 사후(死後), 첫 사사(私事) 옷니엘이 등장할 때(삿3:9, B.C. 1367년)로부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왕이 등장할 때(삼상10:1,B.C.1025년)까지 대략 342년 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룻기의 배경이 되던 때는 미디안 족속의 압제를 받던 12세기 후반 경의 사사 기드온의 시대로 추정됩니다(Keil).
이러한 연대 추정은 B.C.1010년에 헤브론에서 통치를 시작한 다윗이 바로 룻의 증손(曾孫)이라는 사실(4:17)에 근거합니다..
한편, 본 구절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란 의미가 됩니다.
당시 '사사'(쇼페트)들의 직무란 문자 그대로 주로 백성들의 소송을 '재판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울러 사사들은 전시에는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는데,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기도 했습니다(삿 2:16,18).
(2)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특히 고대의 농사는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흉년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흉년은 대부분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기만 한다면 풍성한 소출이 약속된 반면(레 26:3-5, 10;신 28:1-14),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타락하여 우상을 섬긴다면 온갖 재앙과 아울러 기근과 흉년이 또한임할 것이라고경고되어 있기때문입니다(레26:19,20;신28:23,24).
이런 맥락에서 여기의 흉년도 사사 시대의 타락상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수 있는데, 특히 이때의 흉년은 당시 이스라엘의 소산물을 약탈해 갔을 뿐 아니라 토지를 황폐화시켰던 미디안 족속의 침략(삿 6:2-4)과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듯합니다.
(3)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모압지방은 요단 동편에 위치하며,
사사 시대에는 아르논 강을 경계로 르우벤 지파와 인접해 있었습니다.
유다 지파의베들레헴에서 이 지방까지는 그렇게 멀리 않았으므로,
엘리멜렉 가족들이 흉년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가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특히 '모압 지방'(세데 모압)이란 단어는 문자적으로 '모압 들판'(field of Moab)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 들판은 바로 아르논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들판이며 초지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모압 땅에 우거하기는 했으나 자기 동족들인 르우벤 지파가 살고 있는 곳에 인접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의 땅을 떠난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기 때문입니다(민36:6-9).
뿐만 아니라 이들이 모압 평지에 10년 동안 우거했던 것으로 보아(4절),
흉년으로 인해 모압으로 간 것은 단순히 일시적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불신앙적 행위로 말미암아 이들 가족은 그곳 모압 땅에서 큰 고초를 겪게 됩니다(3-5,20절).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2절).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엘리멜렉(*어떤 분이십니까?) - '하나님은 왕이시라'란 의미로서, 곧 이 이름은 그의 부모의 신앙을 반영하는 이름입니다.
한편 엘리멜렉의 처(妻)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귀환했을 때 온 성읍의 화제가 되었던 일(19절)이나, 그의 친척 보아스의 지위(2:1;4:1)등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엘리멜렉은 성내의 유력인사였던 것 같습니다.
나오미(Naomi). - '감미로운 자', '은혜스런 자', '사랑스러운 자'등의 의미인데, 이 이름은 특히 자부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말년에 또한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습니다.
말론과 기룐. - 각각 '병약한(연약한)자'와 '사모(열망)하는 자'란 뜻으로 순수한 히브리식 이름입니다(Keil).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입니다. - '에브랏'또는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이름(창48:7)으로, 족장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은 곳이기도 합니다(창 35:16-19:48:7).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후일 미가 선지자의 입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된 곳으로서(미 5:2),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아마 본서의 저자도 이러한 구속사적 통찰에 의해 이곳의 지명을 이처럼 자세하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즉 본절은 엘리멜렉 가족의 고향(故鄕)이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스불론지파의 베들레헴(수 19:15;삿 12:8)과 분명히 구별했고, 또한'에브랏 사람들'(Ephrathites)이라고 밝혀줌으로써, 그들이 베들레헴 본토인들이란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P.Cassel).
3)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습니다(3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엘리멜렉은 가족을 이끌고 모압 땅으로 들어와 그 곳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때는 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장가들기 전이었습니다.
아마도 나오미는 장성한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남편이 사후(死後)에도 계속 모압 땅에 머문 것 같습니다.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4절).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모세 율법은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만을 금지했지(신 7:3),
모압여인과의 결혼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결혼 자체를 정죄시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Keil, Hervey).
물론 이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압 족속에 대한 신명기의 규례(신 23:3-6)를 자세히 살펴볼 때
그들의 결혼을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들의 결혼이 율법을 문자적으로 범한 것은 아니지만,
율법의 정신을 범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율법에서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을 금지시키신 것은 그곳의 우상 숭배(왕상 11:1,2)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압 여인과의 결혼도 결국은 우상 숭배의 위험성이 내재해 있으므로,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범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모압과 암몬 족속의 우상 그모스와 몰렉은 다른 여타 우상들보다 더욱 가증스러웠습니다.
따라서 나오미의 두 아들의 결혼은 잘못된 것인데, 이는 무엇보다도 결혼 후 가정에 임한 환난을 두고 나오미가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13절)라고 고백한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추정할 수 있습니다(Atkinson).
이처럼 언약의 백성은 실패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그러한
실패를 통해서도 당신의 오묘하신 구속사를 이끌어 나가셨으니, 곧 이때 결혼한 모압 여인 룻을 통해 다윗의 가계를 형성하신 점입니다(4:17).
'오르바'는 '암사슴'을, '룻'은 '붉은 꽃'(장미)를 각각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5절)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혹자는 엘리멜렉에 이어 그의 두 아들까지 일찍 죽은 것은
① 언약의 땅 가나안을 떠난 죄와
②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죄 때문이라고 보기도 합니다(G.Gerleman).
물론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향후 전개되는 구속사적 위치상 나오미 가정이 점하는 비중을 놓고 볼 때 결코 우연의 일만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는 이방의 신실한 여인 룻(Ruth)을 '여호와의 날개 아래'(2:12)로
불러들이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의 결과로 봄이 타당합니다.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나오미는 낯선 이국 땅에서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애써 키운 두 아들마저 잃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깊이 좌절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즉 나오미는 언약의 땅을 쉽게 떠나온 것을 깊이 뉘우치고,
오직 위로자요 구원자되시는 여호와만을 더욱 의지 하고자 한 듯합니다(6절).
이러한 나오미의 신앙이 마침내는 기쁨의 결실을 보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4:14-17).
2.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6~14절)
1)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였습니다(6절).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에는 반드시 그 백성을 돌보기 위해 찾아가셨습니다.
즉 이방의 침략하에 고통하며 당신을 향해 부르짖을 때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돌아보사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절에 언급된 나오미 시대의 이 흉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지만(1절의 주석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을 기억하사,
그 백성을 찾아가심으로써 그 기근은 해결되었습니다(6절).
이와 같은 역사는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원리에 입각해서 끊임없이 적용되었습니다.
(2)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기근이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지난날을 뉘우침과 동시에 이방족속의 땅, 곧 우상 그모스의 땅을 떠날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조차도 다 잃어버리고 비참한 상태에 빠진 나오미가 이전에는 유지 가문으로 지냈던(2절 주석 참조)고향으로 다시금 돌아가려고 결정한 것은 매우 용기있는 결단이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깊이 회개하며 뉘우친 신앙의 결단이기도 했습니다.
2)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떠났습니다(7절).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두 자부(子婦)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모(시母)를 단순히 배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모와 함께 시모의 고향으로 갈 결심으로 같이 동행했습니다.
이로 보아 평소 나오미와 두 자부 사이의 관계는 퍽 애정이 깊었던 것같습니다.
특별히 나오미의 신앙 인격이 두 자부에게 깊이 영향을 끼친 듯합니다.
아마도 길을 행하는 도중 나오미는 한 두번 돌아갈 것을 권면했겠지만,
두 자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따라온 것 같고, 마침내는 모압에서부터 낯익은 유다의 고향 땅으로 통하는 대로(大路)에 이르자, 시모 나오미는 젊은 두 자부의 장래를 위해서 그들 역시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낼 결심을 굳힌 것 같습니다.
3)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합니다(8절).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나오미가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말은 결코 쉽게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며느리조차 떠나버리면 나오미는 그야말로 의지 할곳 없는 홀홀 단신 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노년에 의지할 데가 전혀 없는 과부처럼 비참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자기들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나오미 자신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으니,
고향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가정을 가지고 평안히 살아가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9-12절).
뿐만 아니라 향후 닥칠 모든 고통을 나오미 자신이 혼자 짊어지겠다는 자부(子婦)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 '선대'(善待)('헤세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언약적인 사랑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출 15:13;20:6).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비록 자기 곁을 떠나 그들의 고향 땅에 갈지라도 모압의 국가 신인 '그모스'를 섬기지 않고, 여호와만 섬기며 그분의 축복 가운데 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간절했던것 같습니다.
즉 나오미는 이별의 순간에 여호와만이 축복의 근원이시며 참되시고 유일한 신이심을 주지(主旨)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나오미가 언약의 땅은 떠났지만 언약의 하나님은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는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의 모든 국가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4)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남편의 집에서 위로 받기를 권면했습니다(9절).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남편의 집에서. - 전통적으로 과부(寡婦)는 고아와 나그네와 함께 가장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보호받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그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 22:22,23).
과부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학대와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습니다(사 1:23; 겔22:7; 말 3:5).
나오미는 이러한 당시 사회 형편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며느리들이 자기와 함께 가는 것을 극구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대신 두 자부가 아직 젊기 때문에, 재혼(再婚)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가지라고 권유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과부가 사회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높여 울며. - 즉 '목 놓아 엉엉 울었다'란 의미인데, 어려운 처지에서 10년동안 동고 동락했던 시모 나오미가 강력히 이별을 권하자,
두 자부가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일시에 터뜨리는 장면입니다.
진정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의 장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외로움을 떨치고 극구 보내려 하고, 며느리들은 며느리대로 홀로 남게 될 시모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극구 함께 가겠다고 하면서, 서로 껴 앉고 목 놓아 우는 이 장면은 물론 처량하기도 하거니와 반면 아름다운 고부(姑婦)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5) 두 며누리는 시어머니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합니다(10절).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오르바와 룻은 모압 출신이며 모압에서 자라 그곳에서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겠다'(go)는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가겠다'(return)고 고집했습니다.
이것은 나오미와 자신들이 비록 출신은 다르나 같이 와서 함께 돌아간다는 공동체적 입장에서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나오미와 함께 모압 땅에 왔던 것처럼 표현하여,
그와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갈 당위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6) 나오미는 간절이 돌아가라고 권면합니다(11절).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 본절은 나오미가 신25:5,6에 나타난 바 '계대 결혼'(繼代結婚, Levirate Marriage)의 규례를 고려하여 한 말입니다.
즉 남편이 죽고 자식은 없을 때 그 미망인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남편의 대(代)를 이을 수 있다는 율법의 계대 결혼법(繼代結婚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신 25:5-10부분 주석 참조).
따라서 본절은 죽은 아들들을 대신하여 대(代)를 이어줄 자식이 이제는 없다는 뜻입니다.
근본적인 의미는 자기가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과부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데 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의미는 이하 언급되는 12,13절에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강조한 사실에서 충분히 입증됩니다<1:6-18강해,계대 결혼의성경적 의미>.
7) 나오미의 절망적인 상태를 강조합니다(12,13절).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나오미는 자부들이 만일 자신과 함께 가면 끝내 과부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점증적인 표현으로서 설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설득시키기 위해마지막으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실 그녀가 며느리들을 설득시키는 마당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치신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색해 보입니다.
그러나 오르바가 돌아간 후 나오미가 룻을 설득할 때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15절)라는 표현을 썼던 것으로 보아, 분명코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여호와 신앙을 확실히 확인하고자 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풍습과 언어가 다른 먼나라로 간다는 것은, 더군다나 어릴 적부터 섬기던 신을 떠나 여호와의 신앙 공동체인 이스라엘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애정이나 의지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나오미는 자신이 당한 고난과 슬픔의 원인을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였습니다.
만일 나오미가 자기의 가정에 닥친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자연적인 일로 생각했다면, 비록 유다 땅에 흉년이 그쳤다는 소문을 들었을지라도(6절)돌아갈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9가지 재앙을 당한 후에도 그 재앙의 원인을 바로 깨닫지 못했던 애굽 왕 바로와는 좋은 대조가 됩니다.
8)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4절)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 고대 근동의 관습상 입맞춤의 포옹은
기쁜 상봉의 순간(창 33:4;45:15;출 18:7)이나,
아쉬운 이별의 순간(창 31:55;행 20:37)에 주로 행하던 풍습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는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를 그 아쉬움 때문에 입맞춤한 것입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 여기서 '붙좇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크'는 '굳게 결합하다'(cleave). 또는 '붙들고 늘어지다'(cling)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주로 사용된 '다바크' 동사의 용례를 살펴보면,
남녀의 결혼 관계에서(창2:24),
그리고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시 63:8).
뿐만 아니라 이 동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구속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의 언약 백성들에게 충성을 요구하실 때 역시 사용되었습니다
*신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이를 통해 볼 때 '다바크'란 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에 사용되었으며, 은총에 대한 충성을 다짐할 때도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룻이 그의 시어머니를 좇아간 것은 북받치는 애정과 충실한 마음으로 결코 이별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에 의해서였습니다.
아울러 나오미로 부터 주로 영향 받았을 여호와 신앙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 의해서였습니다(Driver,Briggs).
우리도 나오미와 롯의 신앙을 본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1~6절).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의 인생을 돌아보시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잘못된 선택과 실패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뒤집지 못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흉년과 죽음’이지만, 이야기의 끝은 ‘추수와 탄생’일 것입니다.
절망의 소식들 속에서도 희망의 복음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실수와 잘못으로 얼룩진 과거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도 흉년은 듭니다(1절).
이제 젖과 꿀이 중요한지, ‘약속’이 중요한지 답할 시간입니다.
‘떡 없는’약속의 땅과 ‘떡 있는’이방 땅 사이에서 결단할 시점입니다.
엘리멜렉은 그 시대 사람들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삿21:25).
떨어진 것은 양식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는 자에게도 고난이 찾아오고 사명자에게도 시련이 찾아옵니다.
내게 부복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여 되새기고 되찾을 기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련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할 이유입니다(약1:2).
2) 은혜의 소식을 들으면 돌아와야 합니다(6,7절).
베들레헴에 양식 주셨다는 소식은 모압에서 나오라는 부르심입니다.
사람들의 비웃음을 떠올릴 겨를이 없습니다.
집 떠난 탕자처럼 아버지께 양식이 풍부함을 깨달았다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돌이켜야 마땅합니다(눅15:20).
듣기만 하는 신앙은 언제나 제자리입니다.
일어나 ‘있던 곳에서’ 나오지 않으면 주님의 양식을 맛볼 수 없습니다.
3)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 하고 두 며누리는 따라가려 합니다(8~14절)
‘따라오면 고난뿐이니 돌아가라’는 말에 오르바는 되돌아가고 룻은 계속 따라갑니다.
룻이 돌아간들 아무도 비난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끝까지 따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는 말씀에 돌아가야 할 수백 가지 이유가 있어도 한 분 예수님을 이유 삼아 붙좇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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