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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더1장1~22절
제목 : 왕의 잔치, 왕후의 폐위
에스더서는 주전 485~435년 사이에 기록된 책으로 기록한 장소와 누가 기록하였는지는 확실이 알 수 없습니다. 에스더서의 핵심어는 "아름다움"과 "섭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더의 역사적인 배경과 상황을 설명합니다.
인도부터 구스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가진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는 성대한 잔치를 통해 자신의 부와 위엄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이런 왕의 부름에 불복종하다가 결국 페위됩니다.
왕은 각 가정의 남편이 집의 주관자가 되라는 조서를 내리고, 새로운 왕후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합니다.
1. 시대적 배경(1~2절)
1) 이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1절)
“[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
(1) 아하수에로 왕.
B.C.485-464년까지 통치했던 페르시아 왕이었습니다(에스라4:6).
그는 다리오와 고레스의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 다리오가 왕이 된 후 낳은 아들 중에서는 맏이었습니다.
주전486년 36세의 나이로 페르시아(바사)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연결해서 보면, 이때는 바벨론에게 패망하여(주전586년) 유배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페르시아 초대 왕인 고레스가 내린 칙령(스1:1~3, 대하36:22~23)을 통해 유다 땅으로 귀환한(주전538년) 52년 후입니다.
그는 크세르크세스와 동일 인물이며, 단9:1의 아하수에로와는 별개의 인물입니다.
(2) 인도로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인도로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여기의 '인도'는 인더스 강 서쪽 지역, 즉 오늘의 파키스탄 지역을 가리키며, 이 지역은 아하수에로 왕의 부친 다리오에 의해서 정복되었으나 아하수에로 당대에도 그곳 거민들과의 전쟁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었습니다.
한편, '구스'는 오늘날의 '이디오피아' 지역 곧 나일 강 상류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은 캄비세스 왕에 의해서 정복되어 다리오와 아하수에로 시대에이르러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로 정식 편입되었습니다.
아무튼 '인도'는 페르시아 영토의 가장 동쪽, '구스'는 가장 서쪽이었습니다.
일백 이십 칠 도(道). 페르시아 제국은 기본적으로 2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소위 '왕의 대신'들에 의해 통치되었고(3:12), 보다 세부적으로는 127도로 구분되어 각 도의 '방백'들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물론 이렇게 127개 도로 세분화시킨 데에는 세금 징수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
한 목적도 포함될 것입니다(G. Archer).
2)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였습니다(2절)
“[2]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
수산 궁. - '수산'은 고대 엘람 지역에 위치했던 페르시아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페르시아 왕들은 이 '수산'에서는 봄과 가을에만 통치를 하였을 뿐이고, 겨을에는 바벨론에서 여름에는 메대의 악메다에서 정무(政務)를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산'은
(1) 왕이 일년 중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었으며,
(2) 행정부 대부분의 기관들이 위치했었으며,
(3) 왕의 보호를 목적으로 철저히 요새화 되었습니다(느헤미야 1장)
2. 왕의 잔치(3~9절)
1) 왕위에 있은 지 제 삼년에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베품니다(3절).
“[3] 왕위에 있은 지 제삼년에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 ”
(1) 위에 있은 지 삼 년. – 아하수에로 왕의즉위는 B.C. 458년 12월 23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 즉위 년도는 즉위 후 최초로 맞이한 정월이 속한 그 해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즉위 '삼년'은 B.C. 482년입니다(Paton).
그때는 애굽에서 반란이 일고 있었던 시점이기도 합니다.
(2)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아하수에로 왕은 그리이스 정복을 위해 즉위한 이후부터 2년 동안 철저한 계획에 따라 무력을 증강해갔다고 합니다.
본절의 잔치는 아마도 전쟁에 돌입하기 앞서 최후 점검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 열린 것입니다.
한편, 고대 사가인 크테시아스(Ctesias)에 따르면, 페르시아 왕들은 보통 15,000명 정도가 참석할 수 있는 정도의 잔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잔치'(미쉬테)는 다량의 술이 제공되는 큰 '연회'(宴會)를 가리킵니다.
(3)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 - '바사와 메대'라는 독특한 표현은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술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사'와 '메대'는 페르시아 제국을 구성하던 가장 중요한 두 민족 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메대'는 '바사'에 의해 정복되었었다. 하지만
첫째, 두 민족은 동일하게 인구어족(印歐語族)에 속하여 언어나 관습 및 종교 등이 서로 거의 같았으며
둘째, '바사'는 '제대'의 정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그 두 민족은 거의 하나라고 할 만했습니다.
한편, '장수'와 '귀족' 그리고 '지방관'은 앞의 '방백'과 '신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층의 사람들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중 '장수'(헤일)는 2천 명의 창을 가진 병사, 2천의 기병(騎丙). 그리고 1만의 보병 등 총 1만 4천의 병력을 거느렸던 지휘관을 뜻합니다.
그리고 '귀족'(파르템)은 문자적으로는 '으뜸되는 사람'의 뜻을 갖는 페르시아어원(語源)의 단어입니다.
왕의 곁에서 왕에게 필요한 조언을 하는 모사(Baldwin) 등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방백'(사르)은 127개로 나눈 행정 구역을 다스렸던 행정관입니다.
2) 잔치가 백팔십 일 동안에 지속됩니다(4절).
“[4]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
(1) 일백 팔십 일 동안 잔치가 열립니다.
모든 '장수'나 '귀족' 그리고 '방백'이 이 기간 동안 줄곧 잔치에 참석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제국의 각처를 다스리던'방백'이나 '장수'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들의 임지(任地)를 떠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당시는 제국정부에 대한 피정복 민들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방백' 등이 번갈아 가면서 그잔치에 참여했었다고 봅니다.
(2)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냅니다.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 – 이와 같은 페르시아 제국의 경제적 강성은 여러 고대 저술가들에 의하여 언급된 바있습니다.
그중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 왕이 매년금 14,560달란트를 공물로 받아서 그것으로 커다란 금궤를 만들어 창고에 보관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아하수에로 왕은 금과 은으로 씌워진 장막, 금으로 된 긴 의자, 금으로 된 주발과 잔, 그리고 금주전자 등을 스파르타로부터 약탈하여 갖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스퀼루스(Aeschylus)도 페르시아 왕궁의 방들이 금으로 씌워졌다고 말하였습니다(Paton).
3) 백성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풉니다(5절).
“[5] 이 날이 지나매 왕이 또 도성 수산에 있는 귀천간의 백성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
(1) 이 날이 지나매.
왕이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베풀었던 180일간의 잔치(3,4절)가 끝난 것을 가리킵니다.
(2) 왕이 또 도성 수산에 있는 귀천간의 백성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이것은 180일간의 잔치와는 그 성격상 매우 다릅니다.
즉, 180일간의 잔치는 중요한 신료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 회의적 성격까지 내
포한 것이었으나, 여기의 이 잔치는 서민까지도 그 대상으로 삼았던 순수한 유흥적(遊興的)성격이었던 것입니다.
왕궁 후원뜰. – 페르시아 왕궁은 요새화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Paton).
그리고 '뜰'에 해당되는 공간의 넓이는 약6천 6백평방 미터 정도 였었습니다.
따라서 이 정도 넓이의 '후원 뜰'은 대단히 많은 시민들을 위한 잔치를 갖기
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4) 잔치 장소를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6절)
“[6]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잔치장소는 백색, 녹색, 청색의 휘장을 대리석 기둥의 은고리에 자색 끈으로 매어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또한 따가운 햇살을 막으려는 목적 때문에 설치되었을 것입니다.
180일간의 잔치(4절)가 초봄에 시작됐다고 가정할 경우, 시민들을 위한 7일간의 잔치가 열린 때는 늦여름으로서 여전히 햇살이 따가왔을 것입니다.
또한 화반석이나 백석등 귀한 돌을 바닥에 깔았고, 그 위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놓았습니다.
5) 금잔으로 마시게 하였습니다(7절).
“[7] 금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 잔 하나 하나가 개별적으로 디자인되어 만들어졌으며, 이에 따라 무늬나 모양 등에서 서로 달랐다는 뜻입니다(Baldwin).
아무튼 이것은 아하 수에로 왕의 재력(財力)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문구라 하겠습니다.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 문자적으로는 '왕의 손처럼 풍부한'의 뜻으로서 왕의 능력과 풍부를 과시하기에 합당한 만큼의 많은 양을 가리킵니다(Schultz,2:18).
왕은 왕실의 포도주를 아끼지 않고 제공했습니다.
어주(예인 말코트). 문자적으로는 '나라의 포도주'의 뜻입니다.
추측컨대 이는 왕 자신이 마시기 위해 저장해 놓은 칼리본(Chalybon)산(産)의
귀한 술이었을 것입니다(Schultz, Paton).
6)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게하였습니다(8절).
“[8]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령하여 각 사람이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
잔치석상에 참여한 사람들은 많이 마시도록 강요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
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뜻입니다(Huey).
한편, 당시 페르시아 사람들은 대단히 큰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운 뒤 단숨에 들이키는 음주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술손님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술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으며, 그 손님은 술잔에 술을 다시 가득 채운 뒤, 다시 단숨에 마시는 시도를 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7) 왕후 와스디고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9절).
“[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왕후 와스디. – 아하수에로 왕의 여러아내 중 세속사에서 밝혀진 사람은 일곱 모사중의 한 사람이었던 오타네스(Otanes)의 딸 아메스트리스(Amestris)입니다. 대개의 성경학자들은 여기의 이 '와스디'가 바로 그 '아메스트리스'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추측건대 이 '와스디'라는 호칭은 본명이 아니라 다만 그녀의 성품을 나타내주기 위해 사용했던 별칭이었을 것입니다.
분명치는 않지만, '와스디'는 '달콤하다' 혹은 '사랑을 받는' 이란 뜻입니다.
아하수에로 왕궁. – 수산 궁의 남쪽에 있던 왕후의 처소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 에스더가 왕 및 하만 등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다는 점은 이 사실을 넉넉히 증명해줄 만합니다(5 : 2-8 ;7:1-4).
와스디가 이처럼 남자들과 별도로 잔치를 배설한 까닭은
(1) 남자들의 잔치 분위기는 여성들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며,
(2) 남자들의 잔치장소인 '후원 뜰'(5절)은 여자들까지 참석하기엔 장소가 협소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Baldwin, Paton).
3. 왕후의 거절(10~12절)
1)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 왕후를 불렀습니다(10~11절)
“[10]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 [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1) 제 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났습니다(10절)
“제 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 '제칠 일'은 백성들을 위해 베푼 잔치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5절).
한편, '주흥이 일어나서'는 문자적으로 '술로 인해 기분이 좋았다'는 뜻입니다. 곧 이것은 술을 지나치게 마셔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상실한 상태, 혹은 황홀한 상태에 돌입했었음을 시사합니다(삿16:25;삼상25:36;왕상8:66;잠15:15).
어전 내시. - '내시'(사리스)는 반드시 '거세된 환관'만을 의미치 않습니다.
때로는 이 단어가 정부의 고위 관리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입니다(창37:36).
그러나 여기서의 '내시'는 왕후의 처소에도 출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때, '거세된 환관'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고레스 왕 시절 이래 결코 적잖은 영향력을 소유했었습니다.
일곱 사람. – 이처럼 아하수에로 왕이 '일곱 사람'을 와스디 왕비에게 보낸 것은, '일곱'이라는 숫자가 중근동 세계에서 '완전한 수' 혹은 '신성한 수'로 인식되었다는 점에 근거하여, 자신의 와스디에 대한 명령(11절)이 반드시 이행되어야한다는 단호한 취지를 '와스디'에게 암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2)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라고 하십니다(11a절).
왕후의 면류관. – 큼직한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끝이 뾰족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나오라고 한 것은 그녀가 왕후의 신분임을 확실히 나타내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3)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11b절)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모든 이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탁월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명령은 백성들에게 훌륭한 도덕적 귀감이 되어야만 했던 왕의 신분에는 걸맞지 않았습니다.
왕후의 용모가 좋으므로 왕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백성과 관료에게 보여 자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왕후의 미모를 다른 이들에게 과시하려는 것은 제국을 다스려는 군주로서 결코 현명하거나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 와스디는 내시의 손을 통해 전해진 왕의 명을 듣지 않고 왕 앞에 나가기를 거절했습니다(12절).
“[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1)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했습니다(12a절)
“[12a]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와스디'의 이 같은 반응은 와스디가 술 취한손님들 앞에서 왕후로서의 위엄을 손상당할까 염려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였습니다(12b절)
“[12b]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왕이 진노하여. – 이러한 반응은 많은 신하와 백성들 앞에서 자신이 직접 하달한 명령이 먹혀들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던 때문이었다.
중심이 불붙는 듯하더라. – 이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속에서 불이탔다'의 뜻으로서, 그의 '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설명적 문구입니다.
왕은 왕후의 불복종에 진노했습니다.
왕명에 대한 아내의 거절로 인해 왕은 신하들 앞에서 심한 모욕과 수치감을 느꼈습니다.
4. 현자의 조언(13~22절)
1)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습니다(13~14절).
“[13]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왕이 규례와 법률을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가 있는데[14] 그 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 곧 가르스나와 세달과 아드마다와 다시스와 메레스와 마르스나와 므무간이라)”
본절의 내용은 일단 잔치가 끝난 뒤의 상황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의 (11절,12절)로 진노를한 것은 그 잔치의 마지막 날의 일이었습니다(10절).
그는 잔치가 끝난 다음 날 온전한 정신 가운데서 자신의 명령에 불복한 와스디의 징계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1)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습니다(13절)
“[13a]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 '현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던 일은 아하수에로 왕의 습관 이기도 했지만, 그는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이 와스디에게 단순히 감정적 차원에서 보복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한편, '사례를아는'(요드예이 하이팀)은 문자적으로는 '시대를 아는'의 뜻이며 구체적로는 '규례와 법률을 아는'이라는 말로 연이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묻는 전례가 있는데. – 모사로부터 자문을 얻는 것이 반드시 아하수에로 왕만의 습관은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즉, 페르시아의 모든 왕들은 모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과정을 거쳐서 자신들의 정책을 현실 정치로 펼쳐나갔던 것입니다.
(2) 그들은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는 자들입니다(14절)
“[14] 그 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 곧 가르스나와 세달과 아드마다와 다시스와 메레스와 마르스나와 므무간이라)”
왕에게 가까이 하여. - 이것은 왕이 측근에 의하여 암살당하는 일이 빈번했던 고대국가들의 모습을 감안해 본다면,
① 왕으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은 것,
② 왕으로부터 특별한 지위나 권한을 부여받은 것 등을 의미합니다.
이같은 점을 입증이나 해주듯이 왕으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은 자는 왕궁 출입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침실 출입까지도 허용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왕의 기색을 살피며. - '기색을 살피며'는 문자적으로 '얼굴을 보며'의 뜻으로서 앞의 '가까이 하여'처럼 모사들이 왕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삼하 14: 24; 마 18:10) 문구입니다(Schultz).
나라 첫 자리에 앉은. – 이것은 모사 곧 박사의 신분적 위치가 페르시아의 신하들 중 최고였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이는 세 사람씩은 왕의 양편에, 그리고 한 사람은 왕의 앞에 서는 등 실제로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Paton).
바사와 메대의 일곱방백. - '방백'(사르)은 높은 직위의 소유자들에게 두루 적용될 수있는 꽤 일반적 의미의 단어(3,11절) 이어서 그문맥에 맞게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단어를 '장관'의 의미로 이해하면 보다 적절할 것입니다(대상 27 : 3 ; 대하 26 : 11 ; 렘 51 : 57).
2) 왕후 와스디가 왕의 명령를 따르지 아니하나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하 것인가를 묻습니다(15절).
“[15] 왕후 와스디가 내시가 전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니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까 ”
본절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이처럼 자신을 1인칭이 아닌3인칭으로 지칭함으로써, 와스디에 대한 법적용을이 보다 엄격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꼬. - 문자적으로는 '규례대로라면...에게 무슨일이 있을꼬'의 뜻(Rawlinson)입니다.
3) 므무간이 와스디가 왕과 백성에게도 잘 못했다고 합니다(16절)
“[16] 므무간이 왕과 지방관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
므무간이 왕과 지방관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 왕이 와스디 처리와 관련한 자문을 구하자, 일곱 모사들은 서로 협의를 한 후 그 대변인격인 '므무간'이 그 협의 사항을 왕에게 품의(稟議)하고 있는 것입니다(Keil).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할 뿐 아니라. - '와스디'의 왕에 대한 '잘못'은 왕의 엄명을 거역함으로써 왕의 위신을 여지없이 실추시켰다는 데 있었습니다(12절).
4) 왕명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이제 곧 온 나라 여인들에게 전파될 것이고 이후로 그 여인들도 자기 소견으로 남편을 멸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17,18절)
“[17] 아하수에로 왕이 명령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여인들에게 전파되면 그들도 그들의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18] 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지방관들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
와스디의 왕명 거역이 어떻게해서 방백들이나 일반 백성에게도 그 여파를 미치는지를 말하는고 있습니다.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 '멸시할 것'(레하브조트)은 '업신여기다' 혹은 '비웃다'란 뜻의 동사 '바자'의 사역형 부정사(不定詞)로서, 반드시 따라야 할명령을 거역하는 것(민 15 : 31 ; 삼하 12: 9) 등을 가리킵니다.
오늘이라도 – 이것은
(1) 와스디의 왕명 거역 사실이 신속히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2) 따라서 와스디에 대한 징계가 신속히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등을 아울러 시사합니다(Paton).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 문자적으로는 '멸시와 분노가 꿀이지 않을 것입니다'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멸시'는 방백의 명령에 대한 귀부인들의 반응 곧 불복종을, '분노'는 귀부인들의 불복종에 대한 방백의 반응을 '가리킵니다.
5) 와스디를 왕 앞에 오지 못하게,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라고 말합니다(19절).
“[19]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 신하들이 왕에게 어떤 공식적인 제안을 하기에 앞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술어입니다(3:9;5:4,8;7:3;8:5;느2:5).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 왕후의 위(位)를 폐하여 일개 서민(庶民)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특히 여기서 모사들의 협의 사항(16절)을 왕에게 고하면서 '와스디' 앞에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였던 '왕후'라는 직위명(職位名)을 고의로 빠뜨림으로써, 그녀에 대한 폐서인(廢庶人)조치가 필연적임을 암시합니다.
조서를 내리되. – 문자적으로는 '왕국의 명령'의 뜻입니다.
이것은 왕 자신의 사사로운 명령과 대조됩니다.
이처럼 왕이 일반 명령이 아닌 문서화된 공식적 명령을 내려야 된다고 한 까닭은 공개석상에서 왕명을 거역한 와스디를 공개적으로 징계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부녀자들로 하여금 남편에 대한 불복종을 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Rawlinson).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 페르시아 제국의 전통(傳統) 중 하나는 일단 왕의 도장이 찍혀 법률화(法律化)된 사항은 절대 그 효력이 취소되지 않았던 것입니다(단6 : 8,9).
이처럼 왕실 내부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결코 '변개'될 수 없는 법률을 만들기까지 한 것은, 와스디로 하여금 아하수에로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을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가 권세를 회복하여 자신을 폐서인시킨 데 일조(一助)를 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일이 없도록하기 위함이었습니다(Keil).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 '나은'(토바)은 '더 아름다은' 혹은 '더 덕스러운'이란 뜻이며. '사람'(레우타)은 원래 '동료' 혹은 '친구'의 의미로서 거의 비슷한 범주에 속하는 어떤 사람을 광의적으로 가리키는 단어입니다(Paton, 삼상 15 : 28).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대궐 안에 이미 살고 있는 어떤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6) 온 나라에 조서가 반포되면 모든 여인들은 그들의 남편에게 존경을 표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20절).
“[20] 왕의 조서가 이 광대한 전국에 반포되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들이 그들의 남편을 존경하리이다 하니라 ”
이 광대한 전국. – 여기서 '전국'앞에 '광대한'이라는 형용사를 삽입시킨 까닭은,
(1) 왕의 허영심을 부추겨서 그의 비위릍 맞추려는것(Keil),
(2) 단순한 구두(口頭)명령이 아닌 반드시 널리 고지(告知)되어져야 하는 문서화된 조서가 회람되어야 될 필요성을 강력히 시사하려는 것(Rawlinson) 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기강을 잡으려는 목적에 따라 반포되는 왕의 명령은 제국민 누구에게나 고지되어야 하지만, 그 명령이 조서의 성격을 띠지 않으면 듣지 못할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 뻔하다는 점에서,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 타당성이있습니다.
귀천을 무론하고. – 문자적으로 '큰 자로부터 작은 자까지'의 뜻으로 5절의 '대소인민'과 동일한 문구입니다.
7) 왕이 므무간의 말대로 행합니다(21절)
“[21] 왕과 지방관들이 그 말을 옳게 여긴지라 왕이 므무간의 말대로 행하여”
왕과 지방관들이 그 말을 옳게 여긴지라.
왕과 대신들은 므무간의 예측과 제안을 흡족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므무간의 제안으로부터 왕과 온 나라의 남편에게 끼칠 이로운 결과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16~20절의 므무간의 발언은 오직 왕과 남성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편협하고 편향된 제안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방관'은 '므무간'의 그 같은 제안의 입안(立案)과정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들입니다.
8) 왕은 공식적인 조서를 작성하여 온 나라에 반포하였습니다(22절).
“[22] 각 지방 각 백성의 문자와 언어로 모든 지방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남편이 자기의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마침내 왕은 무무간의 말대로 공식적인 조서를 작성하여 온 나라에 반포하였습니다.
왕은 페르시아 전 지역에 “각 민족의 문자와 언어로 각 남편이 각 가정의 주관자가 되라”는 의미의 조서를 전달하였습니다.
각 백성의 문자와 방언. - 여기서 '문자'와 '방언'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 내에는 수많은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인들은 주로 고페르시아어(Old Persian)나 아람어를 사용했고,
바빌로니아 지역에서는 아람어와 앗시리아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산스크리트어를 위시한 여러 동족어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및 팔레스틴 등지에서는 주로 아람어가 통용되었습니다.
이로써 왕명을 거절한 와스디 왕후의 일은 거칠게 일단락되었습니다.
남편으로 그 집을 주관하게하고. – 이것이 '조서'의 주요한 내용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조서'의 목적 혹은 그 결과에 해당될 것입니다.
즉, 백성들은 왕명을 거역한 왕비를 폐서인(廢庶人)시켰다는 조서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한 가정 내에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명령 불복종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되고, 또한 그 결과로 한 가정 내에서 남편의 위치는 더욱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민족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두 번째 왕명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하나는 단순히 어명을 각 민족의 언어로 반포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왕명으로 해석하면 ‘남편이 자기 집을 주관하게하고’와 연계할 때에,
이는 한 가정 내에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시켜 주기 위한 명령입니다.
즉,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남녀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을 경우, 아내를 포함하여 그 가정 전체는 남편의 언어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명령입니다. 이렇게 할 경우, 그 가정 내에서의 남편의 위치는 보다 확고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페르시아는 수많은 민족들로 구성되었고, 또한 민족 간의 교류도 활발하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언어가 달랐던 경우도 결코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느 13 : 23, 24).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 가정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백성들에게는 억지로 술을 먹도록 강요하지 않던 왕(8절)이,
왕후를 철저히 무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127개 도를 가스린다고 뽐내던 왕이 가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나는 사랑하고 섬기라고 주신 지체나 가족이나 자녀를 전시품이나 내 자랑거리로 삼지는 않는지 생각하여야 합니다.
또 하나는 왕이 가정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였음을 봅니다.
왕이 가정 문제 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여 박사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무능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박사들도 이리개 가정 문제를 나라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는 등 논리 비약과 과장과 근거 없는 추측(17절)으로 왕의 마음을 흔들었으며, 그것도 왕의 기색을 살핀 후(1:14) 왕의 입맛에 맞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에 대한 남편들의 권위를 왕의 조서를 통해서 강제로 얻어내려는 해결책 역시 신하들도 자기 가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밖에서 힘자랑하는 무능한 사람에 불과함을 코믹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대한 잔치와 넓은 땅이 있었지만, 실제 바사 제국은 분별력도 없고, 결정 내릴 능력도 없는 왕과 음모와 술수로 조언하는 신하만 가득한 무능한 나라였습니다.
부를 과시하고, 외모를 자랑하고, 힘으로 장악하려는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분입니까?
1) 에스더서는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리던 때 페르시아라는 유배지에서 일어난 “유대인들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름까지 바꾸며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감추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습니다.
고국 땅에서는 당연했던 성전과 예배가 없는 낯선 곳에서 신앙의 위기를 맞고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하지만 에스더서는 포로 신세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가”라는 오랜 의문에 답을 줍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이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소망의 시작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아하수로 왕은 성대한 잔치를 통해 왕국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습니다(1~9절).
하지만 잔치의 여흥이 끝나기도 전에, 왕의 위세는 허세로 드러나고, 기쁨은 분노(12절)로 바뀝니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이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누리고 있는지 간에, 그곳은 우리가 동경할 곳이 아닙니다.
2) 술에 취한 왕은 잔치 도중 갑자기 왕후를 단장하여 데려오게 합니다(10~12절).
그에게 왕후는 존중해야 할 인격체가 아니라 언제든 불어들일 수 있는 자기 과시를 위한 소유물이자 전시품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의 끝없는 자기 과시는 필연 ‘허영’으로 흘러갑니다.
현란한 외양으로 공허함과 절망감을 감추려는 세상 문화 속에서, 나는 얼마나 허영의 의혹을 떨치고 참된 나를 대면하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있습니까? 혹 섬기라고 주신 내 지위와 권력이 누군가를 통제하고 상처 주는 데 이용되고 있진 않습니까?
3) 왕후 와스디의 거절에 자존심이 상한 왕은 자신의 문제를 국가적 문제로 전환합니다(13~22절).
신하들은 고작 왕후 한 사람의 일을 모든 아내의 문제로 만들어 왕후를 폐위하고, 모든 여성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조언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권력을 이용하여 지위를 지키려는 초라하고 비겁한 자기 안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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