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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면서
잘 살았던 못살았던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 왔습니다.
남을 기만하거나 사기 치지도 않았고, 부러워하거나 헐뜯지도
않고, 내 나름대로 성실히 살아 온 삶이었습니다.
남이 잘 산다고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내가 좀더 잘 산다고
뽐내지도 않았으며 70 평생을 살아왔지요.
이제 휘황찬란한 불 빛 보다는 희미한 포장마차의 불빛 아래서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회포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껴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옛날에 재산도 있었고 높은 지위와 권세가 있었다 해도 이제는
아무 쓸모도 없고 알아줄 사람도 인정해줄 사람도 없지요?
늙어 갈수록 외로움만 쌓여 가고, 같이 즐거워 할 사람도 없네요.
과거의 추억 속에서 무료함을 달래며 삶에 지치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두서 없이 써 놓았던 글을 모아 봤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야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을 달래기 위한
글 입니다. 석양빛을 받고 있는 늙은이에게는 즐길 것이 있어야
하는데 취미도 즐길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두서 없고 읽을 가치도 없는 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걸어 온 길을 뒤돌아 보며
● 내 삶에 짐이 없었다면.
내 삶에 무거운 짐이 없었다면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와 뒤돌아보니 나의 짐은 나를 올바르게 살도록 이끌어 준
등대 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짊어진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삶의 진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가 무거우면 남도 무거워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를 통해
이해와 용서를 배웠으며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삶을 알았습니다.
내가 짊어진 짐의 무게가 내 삶의 중심이 되어 모든 일에 중심을
잡게 하였고 미숙하지 않게 살도록 하여 나를 성숙시킨 귀한
보물이었습니다.
내가 짊어진 그 짐의 무게가 늘 나를 낮추며 살도록 하였습니다.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알게 하여 파도가 센 바다를 지날 때는
그 무게가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하고 고개를 넘을 때는 그 짐의
무게가 내 몸을 앞으로 숙여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실어 주어 한 고개 한고개를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적극
도와 주었습니다.
아들로서 부모님께 해드려야 할 짐. 공직자로서 국가와 국민께 해야
할 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지켜야 할 짐.한 여인의 남편으로 책임
져야할 짐. 아직도 감당해야 할 그 짐이 남았기에
오늘도 나의 삶의 동력이 되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하고 있습니다.
● 눈물을 감추고 살아온 인생
지지리도 가난한 나라 시골 농부의 아들로 흙 수저를 물고 충남논산에서
태어 난지(1948년) 2년 만에 전쟁을 피해 (1950년) 전북 익산으로 피난을
가야 했고 꿀꿀이 죽으로 연명하며 초년시절을 살았다.
초등학교를 졸업 후 2년 동안 부모님 농사를 돕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를 졸업 후 가정형편상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1968년부터
공직생활을 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1972년도에 병역을 마쳤습니다.
1973년도에 나와 같은 시골 아가씨와 결혼하고 1녀 3남을 낳아 키웠습니다.
1988년 40여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서울의 잠실 땅 한 모퉁이에서
조용히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깡촌,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눈물을 감추고 70여년의 세월을 살았
으며 이제 자녀들도 다 성장하여 제 갈길을 가고 내세울 것 없는 어쩌면
초라한 노년의 삶이지만 그래도 서울의 잠실 땅에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쪼들
리지 않고 살고 있으니 어쩌면 축복받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공직생활을 했기에 아내는 공직생활 중에
방송통신대학이나 야간 대학에 다니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거부했고 부모님이 가르쳐 주신 고등학교 졸업만으로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 학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생활하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그때그때 관련서적을 읽어가며 살았습니다.
사무관 승진시험 때에도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나 혼자 관련 서적을 읽었지만
어렵다고 느끼보지도 않았고 단 한번에 그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그 후 서기관을 거쳐 3급 부이사관에 승진 했지만 내 학력이 부끄럽거나
부족하다고 느껴 보지는 않았습니다.
자녀들도 유치원이나 학원에 다니지 않고 대학(원)을 졸업했고 취직을 했습니다.
삶이란 학력이나 지식도 중요하겠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며 부족한
점은 그때그때 보충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1등은 참으로 고달픈 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1등을 좋아한다. 아마도 1등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일 꺼다.
하지만 1등은 매우 외롭고 고달픈 자리다.
1등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지 않으려면 더 많은 오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1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특별 장학생으로 고등학교를 입학한 나는
책과 시간과 싸움만 하며 학교를 다닌것 같다.
공직생활에서도 동기들 중에서 제일먼저 사무관, 서기관에 진급을 하고
부이사관 진급자는 나 혼자 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놀줄도 모르고 특별한 취미도 없다.
오직 채과 일과의 싸움으로 살아왔기 때문일 거다.
나는 자식들에게 1등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1등에게는 자기 생활이 없다.
그리고 기업에서는 빨리 승진하면 그만큼 빨리 퇴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등은 이래 저래 고달픔 뿐이며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닌것 같다.
그렇다고 축 쳐져서 딸아갈 순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할 수도,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참 살기 힘든 게 우리네 인생살이 인것 같다.
● 내 공직 생활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친구들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나는 공직생활을 하다가 군복무를 마쳤다.
그네들 보다 최소한 3-4년 빨리 사회에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무관 또는 7급으로 출발한 친구들한테 처음에는 뒤떨어
졌지만 나중에는 거의 다 따라 잡았고 퇴직할 때에는 3급 부이사관으로 퇴직한
사람은 나하고 행정고시로 출발한 친구와 둘 밖에 없기에 나는 내 공직생활을 실패
했다고 생각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차관급(청장)표창 3번, 장관표창2번, 총리표창(모법공무원)
1번, 대통령 포장 1번.홍조근정훈장(대통령)을 받았으니 후회없는 공직생활이었다.
●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2008.6.30일 정년퇴직을 할 때에 김대중 대통령으로 부터 받은 포장증,
이명박 대통령으로 부터 받은 홍조근정훈장을 부모님의 묘소에 올려놓고
큰절을 하면서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하여 이제 3급 부이사관으로 40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게 되었음을 고 하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고등
학교까지 가르쳐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감추어 두었던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장인어른께는 약속했던 대로 "따님을 사모님 소리 듣게 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였음"을 고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가시덤불, 험난한 고갯길을 넘으면서도 끝까지 감추어 두었던 눈물을
흘리고 마ㅏㄹ았습니다.
● 내 삶의 종자돈
73년도에 나와 집사람은 결혼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여,
상호 50만원 씩 총 1백만원을 가지고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전세방을 5만원에 얻었고 삶에 필요한 살림살이 물건을 사고 나니
85만원이 남았는데 이 돈이 내 삶에 종자돈이 되었다.
이돈이 평생을 단 한푼도 빚을지고 살지 않도록 해준 기반이 되었습니다.
결혼할 때 주고 받은 패물도 6개월 전에 모두 팔아 현금회 하였습니다.
그후 모든 것을 팔았다고 서운해 하는 아내에게 10여년이 넘은 후에야
목걸이등을 해 주었지만 아내는 잘 걸고 다니지를 않더군요.
땀 흘려 벌지 않고 절약하지 않고 모아진 돈은 축적되지 못합니다.
그 돈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빚지는 것을 수치로 알고 살았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돈에 쪼달리면 어쩌면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봉급생활자가 빚을 진다는 것은 잘못하면 그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푼의 빚을 지고 살아보지를 않았다.
월부로 물건을 산것도 한번밖에 없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의 범위 내에서 쓰고 없으면 쓰지 않고 살아왔다.
집을 살 때도 완벽하게 돈이 모아졌을 때 샀기 때문에 돈이 모아지는 그 기간 동안
집값은 더 올라갔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바보같이 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약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 온 것만은 틀림없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 나는 돈 쓸 줄을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연금과 기타 수입등으로 얼마만큼은 돈을 써가며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돈을 쓰지는 않는다.
쓸데없는 찬조금등은 나는 내 본 일이 없다. 찬조금을 낼 돈이 없어 못 낸다면
좀 안타깝겠지만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곳에 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수전노는 절대 아니다.
내 삶의 남은 길이 어떤 길일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껴두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내 자손들이 삐끗 잘못되어 돈 때문에 나처럼 학업에 문제가 생길 때는
할아버지가 지원을 해 주고 싶기도 하고,
혹시 나와 아내의의 건강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자식들이 치료비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고 시간나는대로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절약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첫 출근하는 날 아내는 넼타이를 매어 주며
절대로 검은 때묻은 돈에 눈을 돌리지 말라고 했다.
돈이 모자라면 자기가 벌겠다고 했지요.
아내는 내가 서기관 때까지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하다가
부이사관이 된 이후에 그만 두었다.
주위 사람들은 아내가 남편도 없이 4 자녀를 키우기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는 것으로 알았고 남편이 공무원인 줄 몰랐다가 내가 퇴직한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연인을 아내로 선택한 일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내가 정년퇴임하는 날에야 내 사무실에 처음으로 들어와 봤다.
내 공직생활을 밝고 맑게 만들어 준 아내를 고맙게 생각하며 그동안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 미련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8급에서 7급 진급당시 인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다가 괘씸죄에 걸려
2년이 지체 되었고 4급 진급 때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을 나보다
먼저 진급시킨다는 이유로 6개월이 지연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시간적으로 2급(이사관)까지 진급 할 수도
있었을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무원 동기들 중에는 나만 3급(부이사관)으로 퇴직하였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공직생활에서 미련으로 남아는 있다.
● 이제 나가 놀라고 하데요.
40년의 공직 생활을 명예롭게 마친 것은 모두 아내의 덕분이다.
세련되지 못한 인사명령에 따라 강원도. 경상도등 전국을 전전하느라
아내와 함께 지낸 날이 40대 이후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자년들 교육문제로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는 학교를 바꾸게
함으로써 학업에 지장이 있을까봐 이사하는 것을 삼가했다.
자식들을 반듯하게 키워주고 빚지지 않고 살아 준 것은 모두가 다
아내 덕분 이었다.
아내는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모르지만 20년을 보상하라고 합니다.
아마도 주말부부로 살아온 기간등이 20여년인가 보다.
그래서 남은 세월은 아내와 함께 알콩달콩 살아보겠다고 다짐한다.
시장에서 아내의 쇼핑 가방을 들어주고 아내가 사고 싶은 것을 결정할
때까지 끝까지 기다려 주기도 하고 많은 시간을 아내와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
● 아내는 모든 통장을 나에게 주네요
퇴직후 아내는 모든 통장을 나에게 주면서 나보고 관리하라고 하네요.
저금통장에서 주식.펀드까지 빠짐없이 주면서 이제는 나더러 관리하라고 하네요.
남들은 있는 것도 다 빼앗으려 한 다는데 아내는 그게 아니다.
"내게도 여유로운 돈과 시간이 있구나." 하며 그때에는 마냥 즐거워했지만
그 의미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돈도 있고 시간도 있으니 그동안 직장생활로 고생했으니 혼자 놀고 또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가 넘겨준 통장에는 우리 노후 관리에 여유 있을 정도의 금액이 있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네 자녀를 키우면서 모아둔 돈 치고는 꽤 많은 돈이었다.
나는 퇴직일시금으로 나온 돈을 아내를 위해 연금보험에 가입해 주면서 내가
죽으면 연금이 70% 밖에 나오지 않으니 내가 죽더라도 자식들에게 금전적으로는
부담이 되지 않게 해 두었습니다.
● 내 인생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나는 이루지 못할 욕망을 마음에 담고 있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을 축복받은 삶이라고 자부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4남매 중 두 아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습니다.
못한것인지 않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도 나름대로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잘나가고는 있지만 아직 알 맞는 여인을
찾지 못했나 봅니다.
4남매 중 2아들이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지 못했기에 내가 완전한 마음의 평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마치 무슨 흠결이 있어서 결혼을 못한 것 같이 생각할까 봐 마음이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내 인생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 모두가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볼 수 있는 화려한 꽃만이 나에게 주는 축복은 아니었습니다.
삶에는 기쁨만 있는게 아니고 때로는 서글픔도 있는 것입니다.
지나고 보니 내가 겪은 고통도 모두가 내 삶에 준 축복이었습니다.
뼈저리게 가난했던 어린 날도 스무 살 무렵의 깜깜했던 절망도
지금 뒤돌아 생각해보니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기 위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때 그 고난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만들어 졌을까요?
내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두운 터널속을 헤매게 한 것도
지금 와 생각해보니 내 영혼을 키우기 위한 담금질이었습니다.
살아온 길이 다소 힘겨웠지만 어리석은 편견과 탐욕에서 벗어나
내가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게 한 축복이었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육신은 작고 왜소하더라도 병들어 아픈 곳 없으니
이 또한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축복이란 아름다운 것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장미꽃만 꽃이 아니고 호박꽃도 꽃은 꽃이며 꿀은 호박꽃에 더 많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시련 속에서도 축복받을 일은 많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도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이제 모든것을 이루었나이다."며
고통 속에서 맞이하는 죽음까지 담담하게 받아들인 분을 생각해 보자.
삶을 담대하고 온유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죽게 된다면 그 죽음 또한
축복받은 죽음이니 두렵고 무서워 할게 없지 않겠는가?
● 이제 낮은 끝자리에 앉으렵니다.
2008.6.30 부로 공직에서 은퇴하면서 모든 권위와 명예를 내려놓았습니다.
이루지 못한 욕망도 모두 비웠습니다.
낮은 끝자리에 앉는다 해도 부끄럽거나 창피하지 않습니다.
시골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학력으로 말단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해서 3급 부이사관으로 퇴직하였으니 미련은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낯선 곳 서울의 잠실 땅에 올라와 4남매를 잘 키워서 그들도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으니 나는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건강한 몸으로 낮은 끝자리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더 바랄 것도 없고, 더 갖고 싶은 욕망도 다 비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라.
천국은 여기저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있다는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담대하게 살렵니다.
● 과음하지 않으렵니다.
내가 술을 처음 마신 때는 68년 4월경 무원으로 임용되어 환영식 때다.
술이란 막걸리에 취하면 떠들게 되고, 소주에 취하면 흥청거리게 되며
양주에 취하면 거만하게 하나니 어떤 술을 마시더라도 취하면 지혜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
1975년의 일이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그 술 값을 내가 외상으로
계산한 적이 있다. 그 술값이 내 3개월분 월급보다도 더 많은 65,000원
이였다. 술에 취하면 만용이 생기는 것일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자리였는데 내가 술에 취해 만용을 부린 것이다.
아내는 3개월동안 손가락만 빨아먹자고 비꼬는 말을 하며 그 돈을 내 주었다.
나는 그 때 아내와 약속을 했다. 내가 돈 내는 술은 마시지 않겠다고---
그 이후 직장을 정년퇴임할 때까지 내가 술값을 계산해야하는 술자리를
만들거나 참석한 일이 없다.
이제 애경사 자리가 아니면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요즘 술을 사라는 친구들이 있다. 연금도 타고 하니 내 생활이 낫다며--
(그 연금이 몇 푼이나 된다고--?)
한 두잔의 술이라면 몰라도 70을 넘은 나이에 술 취해 비틀거리면
남들이 어떻게 바라볼까?
아무리 정숙한 사람이라도 술에 취하면 실수르 하게 된다.
구약 시대에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발가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그의 아들이 성추행을 하였고 이를 안 노아는 그 아들의 자손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기 실수를 자손에게 떠 넘겨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한두 잔은 혈액순환에 좋다지만 술에 취하면 술이 술을 청하게 되는데
한두 잔으로 족하겠는가?
술도 삶도 분수와 맞게 마시며 살아야 한다.
● 지금까지 살아보니까.
삶이란 사치도 허영도 아닌 사실입디다. 순수한 마음으로 출발한 것이 인생입디다.
살다보면 살 수 밖에 없는절실하고 애틋한 마음이 싹트며 그것이 물 흐르듯 흐릅디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도 생깁디다. "태어났기에 살기 위해서 산다"고 말입니다.
죽어야 할 이유가 따로 없어 살 수도 있지요.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활이 곧 인생이며 그 하루하루의 인생이 많은 것을 알게 했고
내게 살아 가는 존재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디다.
사는 동안 때로는 방황할 수도 있지만 그 방황의 끝이 삶의 끝이 될 수는 없기에
하루하루를 더 멋진 삶으로 장식하며 살았습디다.
오늘을 사는데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나요?
그 많은 고난의 날도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함도 기왕에 태어 났으니까 더 성숙한 삶을
살기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습디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 가야 할 삶의 이유가 논리적으로 필요한 건 아닙디다.
살아가면서 알게 된다고 누가 책망하지도 않았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을 잊어 버린다고 해도 누가 책망할 사람도 없습니다.
나도 한 때는 잘 나갔던 사람이라는 말은 안하는 것이 더 좋은 말 입디다.
지금은 별 볼일 없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니까.
오히려 지금도 이뤄야 할 꿈과 희망이 있다는 말이 훨씬 더 좋은 표현이며 지금 눈을 뜨고
있어도 내 인생에 간섭할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꿈을 안고 살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것이 새롭고 경이로와 질 수 있습디다.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세상이 다시 펼쳐 지게 하는 것에 무슨 엄청난
철학으로 무장할 필요는 없는 것입디다.
마지막 남은 내 인생의 저녁 노을을 찬란하게 색칠하려 수고할 필요도 없습디다.
자연스럽게 물 들도록 놔두는 것이 좋읍디다.
그러러니하며 열심히 살다보니 지금까지 무난하게 살아진 것이 인생 입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