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총론
1. 명칭 “시편”이라는 명칭은 70인역으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그것은 원래 현악기(하아프, 수금, 류우트 같은 악기)란 뜻이었는데 후에 그 악기들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란 의미로 변했다. 시편에 대한 전통적인 히브리 명칭은 시편의 많은 부분이 테힐롵(tephillot “기도”를 의미한)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테힐림(tehillim “찬양”을 의미함)이라고 불리워졌다. 예를들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수집물들 중 하나의 이름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들”이다.(72:20)
2. 수집과 구성연대 시편은 여러 개의 수집물들(collections)을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다. 시편은 수세기에 걸쳐서 수집된 책이다. 시편의 최종적인 형태를 포로 후 시대에 활동했던 성전의 인물들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아마 주전 3세기경에 완성했을 것이다. 시편은 기도서(기도, 찬양, 종교적인 교훈의 책)로서 두 번째 성전(스룹바벨과 헤롯의 성전)과 회당에서 사용되었다. 주후 1세기까지 시편은 ‘시서’(Book of Psalms, 눅 20:42; 행 1:20)로 불리워졌다. 그 당시에 또한 시편은 ‘저술들’로서 알려진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눅 24:44) 시편이 최종적 형태를 갖추기 전에 이미 많은 수집물들이 존재했었다. 사실 최초로 시편이 형성되고 수집되기 시작한 것은 솔로몬의 성전에서 성전의식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던 매우 이런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이미 “다윗의 기도들”일는 말이 있었다. 그 후에 여러 개의 수집물들이 더 첨가되었다. (1)‘고라 자손’의 노래 또는 시(시 42-49,84,87,88편) (2)‘아삽’의 시와 노래들(시 50,73-83편) (3)‘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시 120-134편) 몇 개의 수집물들이 더 첨가되었다는 다른 증거들도 있다. 시 1-41편(제 1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주’)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시 42-72편(제 2권)은 엘로힘(‘하나님’)을 자주 사용한다. 이들이 왜 각기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연대가 왕국시대로 소급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 93-100편은 전통적으로 하나의 수집물로 내려오고 있다(‘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93:1;96:10;97:1;99:1). 시 111-118편(‘애굽의 할렐’, Egyptian Hallel: 이것들은 출애굽과 관련된 시들이다), 시 138-145편(이것들은 명칭에 ‘다윗의’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시 146-150편(이 시들에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란 말이 자주 나온다) 등의 또다른 그룹을 이루는 수집물들도 있다. 한편 ‘위대한 찬양’(Great Hallel, 시 120-136편)이 독립된 하나의 수집물로서 이미 존재했었는지의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참고로 일곱 개의 ‘참회시’는 기독교 예배에서 사용됨으로 명칭을 얻은 것이지 유대인의 시편 전승에서 한 단위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시편은 최종적으로 150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비록 70인역과 히브리어 사본이 순서상 약간 다르긴 하지만 150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70인역은 시편 말미에 보조시 한편을 더 갖고 있다. 그러나 시 151편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70인역은 또한 시 9편과 10편을 하나로 묶고 있고 시 114,115편도 하나로 묶고 있다. 그리고 시 116편과 시 147편을 각각 두 개의 시편들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70인역과 히브리어 사본은 둘 다 원래는 하나였음이 분명한 시를 42편과 43편으로 나누어 놓고 있다. 시편은 모두 다섯 개의 책으로 나뉜다(시 1-41편; 42-72편; 73-89편; 90-106편; 107-150편). 그리고 각 권은 적절한 영광송으로 끝을 맺고 있다(41:13;72:18,19;89:52;106:48;150편 참조). 처음의 두 권은, 이미 살펴보았지만, 포로 전기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시들을 3권의 책으로 나눈 것은 의도적으로 5라는 수자를 의식하여 모세오경을 본뜨려고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세 권으로 분리시킬 때 시 106편과 시 107편 사이를 나눈 것은 다소 무리한 점이 있다고 본다. 다섯 권의 책으로 나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시편은 통일적인 사상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고 시편은 분명한 서론(시 1,2편)과 결론(146-150편)을 갖고 있다.
3. 저자와 제목(혹은 표제) 150편의 시편 중 34개의 시편은 어떤 종류의 표제도 갖고 있지 않다(70인역은 17개이다). 이것들은 소위 ‘고아’ 시편들로 불리우는데 주로 3권과 5권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서 그것들은 무리지어 몰려 있다: 시 91, 93-97,99,104-107,111-119,135-137,146-150편. (1권과 2권에는 오직 시 1,2,10,33,43,71편만이 표제가 없는데 시 10,43편 등은 그 앞의 시편들에 연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제어의 내용은 다양한 듯하지만 다음의 몇 가지 범주에 다 포함된다. (1)저자, (2)수집자의 이름, (3)시편의 형태, (4)음악 부호, (5)의식 부호, (6)저작시기를 알려주는 간결한 안내어. 시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들 표제어들의 고대성(古代性)과 신빙성에 관해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않는다. 표제어들 중 대부분이 포로 전기에 붙여졌다고 하는 것은 70인역의 번역자들이 그 표제어들의 뜻에 관해 별 언급이 없다는 점들을 보아 분명하다. 표제가 붙은 것은, 저자의 이름까지도 포함하여, 고대에 되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편 70인역과 히브리 사본을 비교해 보면 어떤 표제어들의 내용은 포로 후기에 잘 들어맞는 것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번과 (6)번에 대한 논의가 가장 많다. 기록연대와 관련하여 표제어들을 살펴볼 때,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간결한 표제어들 대부분은 사무엘상.하로부터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표제어들은 시편의 내용과 잘 어룰리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표제들은 그 시편을 실제 역사적 사건과 결부시키기 위해서 후에 첨가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일어나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경우 문제가 생긴다. 왜 그러한 표제어들이 몇몇에만 제한되어 있으며, 어떻게 그토록 명백한 오류들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의문을 남기게 된다.
4. 저자 저자에 관해서는 의견이 더욱 분분하다. 히브리어 어법이 복잡하기 때문에 부호 자체만으로서 저자가 누구인지 밝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누구에게 속한’이라는 말의 뜻은 또한 ‘무엇 무엇에 관하여’ 또는 ‘누구 누구에게 바쳐진’ ‘무엇 무엇에 사용된’ 등의 뜻도 있다. 표제에 나타난 이름은 그 시편을 수집한 어떤 사람의 이름(‘아삽의’, ‘고라 자손의’)일 수도 있다. 다윗의 저작권 문제에 관하여는 시편에 그 주목할 만한 성악가이며 음악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이 있다는 것과 한때에 ‘다윗의’ 시편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다윗의 시편은 다윗에 관한 많은 시들을 포함하고 있고, 다윗가의 여러 왕들에 관한 시도 상당수 들어 있다고 본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지었으나 그의 이름으로 붙여진 것도 상당수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다윗의’ 시편에 관한 전통은 다소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고, 또 어떤 ‘다윗의’ 시편들은 다윗보다 훨씬 후대의 상황들을 명백히 반영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예를 들면, 30편의 제목을 참조하라. ‘다윗’이란 이름은 그의 왕조의 열왕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용법이 시편 제목에 관해서도 적용될 경우가 많이 있다. 셀라라는 말은 39개의 시편들에서 발견되어지는데 그 중 2편(시 140,143편; 다윗의 시)만 제외하고는 책 1-3에서만 나온다. 셀라는 또한 시 형식을 이루고 있는 하박국 3장에서도 나타난다. 셀라의 의미에 관해서 의견들이 많이 있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가장 그럴 듯한 주장은 의식적인 부호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셀라는 짤막한 음악 휴식을 표시하는 것이거나, 또는 회중들이 짤막하게 의식적인 응답을 보이는 표시라고 본다(짤막한 음악 휴식의 부호라는 것은 70인역의 번역자들에 의해 지지된 것이다). 한편 현재의 히브리 사본에 표시되어 있는 셀라의 몇 가지 경우들은 그것이 위치하게 된 데에 대해 많은 의문을 일으키고 있다.
5. 시편의 형태 시에 붙어 있는 표제어들은 고대의 분류법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1)미즈모오르(시), (2)식가욘(시 7편 제목 참조), (3)믹담(시 16편 표제 참조), (4)쉬르(‘노래’), (5)마스길(시 32편 표제어 참조), (6)페휠라(기도), (7)테힐라(찬양), (8)레하즈키르(‘기억되기 위하여’- 즉 하나님 앞에 간구함), (9)레토다(‘찬양을 위해’ 또는 ‘감사를 드리기 위해’), (10)레하메드(교훈을 위해), (11)쉬르예딧도트(사랑의 노래, 즉 결혼 축가). 그런데 이 용어들의 의미는 대부분 명확하지가 않다. 뿐만 아니라 어떤 제목들은 이들 중 두 개를 포함하기도 한다(특별히 미즈모오르와 쉬르). 그럴 경우 그 시는 다양한 형태가 중복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내용을 분석해 보면 또 다른 분류법이 생기게 되는데 이 분류법을 사용하면 시편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 중요한 형태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개인의 기도들(3:7,8), (2)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개인의 찬양들(30,34편), (3)공동체의 기도(12,44,79편), (4)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공동체의 찬양(66,75편), (5)여호와를 신뢰하는 고백(11,16,52편), (6)하나님의 장엄함과 하나님의 덕을 찬양하는 찬송들(8,19,29,65편), (7)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기념하는 찬송들(47,93-99편), (8)하나님의 성 시온에 관한 노래들(46,48,76,84,122,126,129,137편), (9)왕들의 시 -즉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왕에 의해서 그리고 왕을 위해서 그리고 왕에 관해서 지어진 시들(2,18,20,45,72,89,110편), (10)순례자의 노래(120-134편), (11)의식적 찬양(15,24,68편), (12)교훈적 찬송들이다.(1,34,37,73,112,119,128,133편) 이 분류법도 또한 중복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들면 ‘개인의 기도’들은 왕의 기도와, 심지어는 한 공동체의 기도도 1인칭 단수로 언급되므로 개인의 기도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편 분류법은 시편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 한편 시 형태와 관련된 특별한 의식적 배경을 밝혀내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작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시편의 형태 중에서 기도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개인의 기도와 공동체의 기도)이 가장 복잡하다. 이 기도 형태를 지닌 시들은 대략적으로 다음 몇 가지로 분류괸다. (1)하나님께 호소하는 것: “오 여호와여”,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구속자여”, (2)호소로 시작하는 것: “일어나소서”, “나에게 응답하소서”, “도와주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3)재난에 대한 묘사: “많은 원수들이 나를 대적하여 일어났나이다”, “악인이 나를 공격하나이다”, “나는 절망 중에 있나이다”, (4)하나님께 불평하는 것: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언제까지 나에게서 얼굴을 가리우시렵니까”, (5)간구: “나로부터 멀리 계시지 마소서”, “나를 보호하소서”, (6)기도를 듣도록 하나님께 동기 유발을 하는 것: “왜냐하면 나는 당신 속에서만 안식처를 얻을 수 있나이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하소서”, (7)원수들을 고소하는 것: “그들의 입술에는 진실이 없나이다”, “악인이 나의 생명을 찾나이다”, (8)시정을 요청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소서”, “그의 악함을 질책하소서”, (9)무죄함을 주장하는 것: “나는 완전하게 행하였나이다”, “그들은 나를 까닭없이 미워하나이다”, (10)죄를 고백하는 것: “나는 당신에게 범죄하였나이다”, “나의 죄를 고백하나이다”, (11)신뢰를 선언하는 것: “당신은 나의 방패시니이다”, “당신은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2)구원 후에 찬양할 것을 서약하는 것: “내가 당신의 능력을 노래하리이다”, “내 입술로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13)찬양할 것을 요청하는 것: “나와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자”, “여호와께 찬송을 돌리세”, (14)찬양의 동기: “당신이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궁핍한 자를 돌아보셨나이다”. 이와 같은 모든 기도의 내용들이 일상적 기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이것들은 관례적인 기도들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 기도들은 법정의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그 시인(혹은 시인들)은 그의(혹은 그들의) 사건을 하늘의 왕이신 재판관 앞에 제시한다. 악한 원수가 그를 대적할 때 그 간구자는 자기의 상황을 묘사하고 자기 무죄(의)를 호소한다. 그리고 그의 대적을 고소하고 구원을 간청하며 재판장의 선고를 통해 시정될 것을 촉구한다. 또한 하나님에 의해 고통을 당할 때(하나님이 그의 대적자일 때) 그는 그의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한다. 독자들이 기도에 나타나는 다양한 어투를 주목하면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어투들이 재판정에서 표현될 때의 기능을 주목하면 역시 시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6. 문체 비록 시편에는 많은 기도들이 포함되어 있고 모든 구약의 기도들이 시가 아니고(왕상 8:23-53; 스 9:6-15; 느 9:5-37; 단 9:4-19 참조) 또 모든 찬양이 시는 아니지만(왕상 8:15-21 참조)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감동적이고 깔끔하고 또 구체적이다. 시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직유과 은유 또한 풍부하다. 시편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유음(類音), 두운(頭韻), 말의 유희(wordplays) 등이 굉장히 풍성하다. 반복법과 수많은 동의어와 보어들이 그 시를 마치 그림처럼 표현하는 것이 히브리 시의 특징이다. 때때로 핵심적인 단어들이 기도나 찬양 속에 밝게 빛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인클루시오(일종의 반복법으로 중요한 단어나 구를 처음 시작과 끝에 둠으로써 울타리를 치는 것)가 자주 한 시편 속에서 어떤 중요한 부분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주는 경우도 많다. 히브리 시는 운(韻)과 운율이 다소 미흡한 경향이 있다. 히브리 시의 가장 독특하고 보편적인 용법은 평행법이다. 대부분의 시행들은 2개(때로는 3개)의 잘 조화된 소절들로 구성된다(때로는 조화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첫 번째 소절보다는 두 번째 소절이 다소 짧을 때도 있다). 두 번째 단편은 첫 번째 소절을 반향하거나(동의적 평행법) 또는 대조시키거나(반의적 평행법), 또는 구문론적으로 완성한다(종합적 평행법). 이 세 가지 평행법은 일반화되어 있지만, 시인의 창조성은 이 세 가지 평행법을 뛰어넘어 얼마든지 다양한 표현을 창출해 낸다. 그리고 그것들이 독자들이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NIV 성경에서는 어떤 행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소절들은 첫 번째 소절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히브리 시행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끝나는가를 결정하는 일이 매우 난해할 때가 있다. 70인역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히브리 원문고 다르게 시행을 배열해 놓은 곳도 있다. 그러므로 현대 역본들이 서로서로 다르게 배열되어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과 관련된 문제로 극단적으로 간결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생략해 버리는 히브리 시인들의 저술 방식이 있다. 단어들 간의 구문론적인 관련성은 때때로 문맥에서 추론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 이상의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번역자는 당황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행에서 단편들이 끝나는 곳을 결정하기란 항상 쉽지 않은 일이다.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문제는 히브리 시의 연(聯) 구조이다. 경우에 따라서 반복되는 후렴이 연을 구분해 주는 것도 있다(42,43,57편). 시 110편에서는 두 개의 조화된 연들이 개론적인 신탁에 의해 나뉘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 119편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각각의 문자들이 각기 8행을 이루어 그것이 한 연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명확히 구분해 주는 근거가 없다. NIV 성경은 간격을 띄움으로써 연을 구분해 놓고 있다. 대부분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구분한 것이므로 독자들에게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문제의 소지가 여전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시편을 자세히 연구하면 시편 저자들이 종종 마음 속에 전반적인 계획을 가지고 시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알파벳식 아크로스틱스(the alphabetic acrostics)의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이 알파벳식 이합체(離合체)라는 것은 히브리 알파벳의 순서를 따라 시를 짓는 것인데 각 알파벳을 첫 글자로 시작하는 행을 때로는 반 행을(시 111,112편), 때로는 한 행을(시 25,34,145편), 또는 두 행을(시 37편), 심지어 8행을(시 119편) 그런 식으로 하기도 한다. 그밖에 시 33,38,103편의 경우에는 각기 22행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히브리 알파벳이 모두 22개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애가 문체 부분 참조). 이와 같은 시작법이 기억을 목표로 했다고 보는 견해는 지나친 것으로 지지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기억력이 뛰어났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보다는 알파벳의 기능이 중요한 구절들을 엮는 골격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시작법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알파벳은 최근에 고안된 단순한 상징적 체계이며 인간 언어의 복잡하고 풍부한 패턴을 글로써 표기하게 해 준다. 그런 점에서 알파벳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형태도 사용되었다. 시 44편은 지구라트(바빌로니아인들의 피라밋이다)의 모형을 의식하고 그 형태로 지은 기도시이다. 대칭법(Symmetry)도 넓게 사용되었다. 대칭법에 속하는 시 가운데는 각 연이 동일한 수자의 행을 가지고 있는 시들이 있다(시 12,41편). 그런가 하면 첫 연과 마지막 연이 서로 대칭을 이루는 시도 있다(시 38,83,94편). 어떤 것들은 첫 연과 마지막 사이에 있는 연들을 서로 대칭되게 한 시도 있다(시 33,86편). 특별히 흥미 있는 형태로는 그 시의 중심에 가장 핵심적인 주제행을 두는 것이 있다. 그 중심행을 가운데 놓고 그 시의 전체나 일부분이 대칭을 이룬다. 시편 기자들은 매우 섬세하게 시작(詩作) 기법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고대 예술 기법을 물려받은 사람들이었다(그들이 수백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시작 기법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엿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그 기법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므로 신중한 연구를 통해서만 그들의 작품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7. 신학 시편은 거의 대부분이 기도와 찬양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기도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또한 기도와 찬양 속에서 믿음과 신뢰를 고백하기도 한다. 비록 때때로 형태와 목적에 있어서 교훈적이기는 하지만(경건한 삶을 가르치려는 것), 시편은 요리 문답서가 아니다. 따라서 시편의 ‘신학’은 추상적이거나 조직적이 아니고, 고백적이고 송영가(頌詠歌)적이다. 그래서 그 ‘신학’을 간결하게 요약함으로써 그 신학을 객관화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칫 잘못하면 볼품 없이 만들 우려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신학을 간결화하면 심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시편은 여러 종류의 독립적인 단편들을 모아 놓은 방대한 수집물이다. 그 여러 단편들은 쓰여진 목적이 다르고 쓰여진 시대와 경로가 다르다. 시편의 ‘신학’을 간결히 요약하려면 시편을 분류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어느 정도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게 마련이다. 또한 각 시편이 어떤 신학을 미리 전제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시편 기자의 마음 속에는 전혀 신학적 긴장이나 진전이 없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히 그렇지 않다. 시편의 최종 편집자들은 시편 편집 과정에서 취사 선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여러 세대로부터 다양한 목소리들이 실려 있지만 그들이 판단할 때 단 한편도 율법과 선지서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각각의 시편이 전체 수집물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을 우리도 나눠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시편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들에 관하여 말하도록 하자. 시편 신학의 핵심에는 삶(올바른 인간 이해, 신뢰, 소망, 봉사, 도덕성, 찬양)의 구심점과 역사와 전체 피조물(하늘과 땅)의 구심점은 하나님(여호와)이라는 확신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가장 위대한 왕이시고 만물이 복종해야 할 대상이시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만물은 그가 입은 영광의 옷자락이다. 그가 그들을 명하셨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되고(혼란이 전혀 없다) 그가 그들을 유지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보존되고, 파멸과 혼란으로부터 보호받는다. 그만이 주권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만물은 그에 의해서 통치되고 하나님의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피조 세계는 코스모스(우주)를 이루고 있다(우주는 질서 정연한 세계이다). 자연과 역사의 주인은 여호와이시고 그의 통치 아래서 만물은 움직인다. 창조를 통해서 위대한 왕의 장엄한 영광이 전시되었다. 그는 선하시고(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신실하시고, 놀랍도록 관대하시고, 자비로우시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하시다. 그의 지식, 사상, 역사(役事)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다. 여기서 경외감이 우러나온다. 그의 선하심과 주권자적인 통치에 의해서 그는 거룩한 분으로 계시된다. 창조자의 권리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진 위대한 왕으로서 하나님은, 그를 반대하거나 부인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어떤 세상 권세에게도 궁극적으로 관용을 베풀지 않으신다. 그는 결국 모든 나라를 통치하실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예견이 의심할 것도 없이 미래를 내다보는 시편 기자의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관점이다. 여호와는 모든 도전을 물리칠 수 있는 위대한 왕이시기 때문에 그의 의로우며 평화로운 나라는 모든 적대 세력들을 압도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궁극적인 결말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왕으로서 그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교만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또는 그들이 의지하는 신들의 능력)에 의지하여서 자기들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세상의 부와 법과 담보물들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무자비하게 휘두르면서 연약한 자들을 착취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시편에서 이런 종류의 ‘교만’이 모든 악의 근본으로 나타난다. 그런 교만을 소유한 사람들은 비록 잠시 동안은 번영하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겸손한 사람’과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 -이들은 매사에 여호와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들이다- 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즉 여호와를 겸손하게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 은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시 111:10). 궁극적으로 겸손한 사람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죽음조차도 그들의 시야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가릴 수가 없다. 시편 기자의 미래에 대한 소망 -하나님과 그의 왕국의 미래와 경건한 사람들의 미래- 은 견고하다. 시편 기자들은 모두 현재의 악한 시대가 지나가고 의로우며 평화로운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그와 같은 견해는 -신.구약 중간시대 문학에 많이 등장한다- 다니엘(단 12:2,3), 이사야(사 65:17-25;66:22-24 참조)에 의해서 예견된 견해이다. 그런데 그것은 후에 보다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계시는 시편 기자가 가졌던 소망이 보다 충만히 발전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위대한 왕이시기 때문에 사람들 가운데서 궁극적인 공의의 실행자로서 역사하신다(그는 ‘교만한 자’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억눌린 자들이 호소하는 법정이다. 특별히 땅 위에 있는 법정이 재판할 수 없을 때(국제 간의 갈등과 같은 문제) 더욱더 그렇다. 그는 방어 능력이 없이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강력하고 신실한 옹호자이시다. 그는 모든 행위와 마음의 비밀도 아신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거짓 증언도 그의 판단을 굽게 하지 못한다. 그는 그에게 울부짖는 탄원을 들으신다. 선하고 신실한 재판관으로서 그는 억압받고 부당하게 공격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며, 잘못된 일을 시정하신다. 이것은 그 시편 기자들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서 그에게 울부짖을 때, “왜 나를 구원하지 않으시나이까”라고 탄원할 때, “어느 때까지 잠잠하시겠나이까”라고 호소할 때에도 견고하게 붙잡았던 믿음인 것이다.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신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그의 종 된 백성, 모든 민족 가운데서 그의 ‘기업’으로 선택하셨다. 그는 강한 역사로 그들을 세상 권세들로부터 구속하셨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땅(다른 민족들로부터 빼앗아 그 자신의 기업으로 삼은 영토)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맺음으로써 그들과 연합하셨는데, 이것이 그의 구속 왕국을 최초로 구체화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 양자 간의 운명과 명예는 그런 관계 속에서 함께 묶여졌다. 여호와는 또한 그들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 그 말씀은 그를 증거하고 그의 약속과 뜻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살며 천상의 왕께 충성을 다 바쳐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그의 보호를 철저히 믿어야 했고, 약속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의 뜻에 일치한 삶을 살아야만 했고 그에게만 오직 예배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전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했고 그것이 모든 민족들을 복음화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위대한 왕이시며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다윗을 지상의 대리 통치자로 선택하셨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종 -위대한 왕의 행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자신의 충성된 아들로 입양하셨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서 그들 백성을 보호하셨고, 그들을 위협하는 모든 권세들을 물리치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다윗 왕조를 보존하시겠다는 언약을 맺으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왕국은, 다윗 왕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그 언약에 의존하게 된다. 그 언약의 지속성 여부에 이스라엘의 소망과 안녕이 달려 있는 것이다. 다윗 왕조의 왕들은 하나님의 지상 대리 통치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은 것이고(시 110:1) 그들의 통치 영역은 전세계가 된다(시 2편). 그런데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왕은 보통 왕과는 다르다. 그는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의(義)를 가지고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에 의해 세움받은 존재이다. 그리고 그는 억압받는 자를 구원해야 하며 보호 능력이 없는 자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악한 사람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 나라가 축복을 받아 내적인 평안과 번영을 누리게 된다. 그는 또한 하나님과 그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이다. 즉 성전(하나님의 지상 왕국이며 그 민족의 기도하는 집)의 건축자이며 유지자이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예배하도록 선창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무 때문에 단지 왕으로 불리는 것뿐만 아니라 제사장이라고도 불리우는 것이다(시 110편 참조). 위대한 왕이시며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그는 다윗과 그의 왕조를 그의 지상 대리 통치자로 선택한 분이다)는 또한 예루살렘(다윗 성)을 그의 왕도, 즉 지상의 보좌로 선택하신다. 따라서 예루살렘(시온)은 하나님 나라의 지상 수도(상징)가 되었다. 그는 왕궁(성저녜에 계심으로 해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좌정하신 것이다. 거기서 그의 백성들은 그를 만나 그에게 기도하며 찬양드린다. 그리고 그의 능력과 영광을 본다. 거기로부터 그는 구원을 베푸시고 축복을 나누어 주시며 열방을 심판하신다. 그 도시의 강력한 옹호자 하나님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왕도가 되며, 하나님 백성들에게 소망과 기쁨이 된다. 그의 백성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과 신실하심은 위대한 ‘왕의 도시’(시 48:2)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성전에 좌정하심으로써 상징적으로 가장 잘 표현된다. 그러나 그의 관대함은 그에게 겸손히 고백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순수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그에게 충성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데서 보다 더 잘 나타난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죄성에 눌려 있을 때에 시편 기자들은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의 오래된 증거를 기억하셨다: “나는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출 34:6,7). 이와 같은 일은 그들이 그의 백성으로서 그를 ‘경외’하며 그에게 기꺼이 복종하는 때에 이루어진다.(시 130:3,4) 의심할 여지 없이 여호와의 초월적인 왕권(그의 뛰어난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통해 보여진)은 시편에 나타난 가장 기본적인 온유이며 가장 널리 분포된 신학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의 보편적인 신학 개념이다. 그 개념은 인간에게 그 자신과 모든 피조물, 자연과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전 피조 세계는 그의 왕국이다. 세상에서 피조물이라는 것은 그의 왕국의 일부이며 그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것은 그를 의지하며 그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교만하게 부인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이다.(악은 지금 세상에 편만하게 퍼져 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과 계속된 다윗꽈 시온의 선택은, 그가 주신 말씀과 더불어 이 악한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가 새롭게 들어섰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의로운 나라와 악한 나라를 구분하며 좀더 깊은 차원에서 의인과 악인을 갈라 놓는다. 종국에 이 신적인 계획은 승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겸비케 되며 모든 부정들은 척결될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온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이며 의인과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는 충만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학적 주제들은 물론 심오한 종교적, 도덕적 암시를 수반한다. 시편 기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제기되는 질문은 시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대답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방식은 다양하며 선지자들이 하는 것과는 다르다. 시편은 선지자적인 책이 아니며 따라서 선지서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시편에서 다윗 보좌에 앉은 그 왕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왕관을 쓰고(시 2, 72,110편), 또는 그 당시에 통치하는(시 45편) 왕을 말하는 것이다. 그 시들은 그 왕을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로 선언하고 하나님께서 그와 그 왕조를 통하여 완성하실 일을 말한다. 따라서 그 시들은 또한 미래에 올 다윗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포로 시기와 포로 후의 시기, 즉 통치하는 왕이 없을 때도, 그 시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다윗과의 언약 속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다윗의 그 위대한 후손이 곧 오리라고 이스라엘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이 시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인용하되 그들의 독특한 방식으로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시들의 예언은 성취된 것이다. 시편에서 의로운 고난자 -그들은 무죄하고 그들의 대적자들에게 과오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겸손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들이다- 들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을 때(시 22, 69편) 그 울부짖음은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들의 고통을 담은 시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울부짖음은 하나님의 억압받는 ‘성도들’의 기도가 되고 이스라엘의 기도집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을 때 그는 그 자신을 하나님의 ‘겸손한’ 백성들과 동일시하였다. 그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의의 종이 되었고 그들의 고난을 함께 나누었다. 따라서 이 기도들은 또한 그의 기도도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기도들이 언급하고 있는 고난과 구원은 성취된다.(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계속 기도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하나님의 도시 그리고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성전에 대하여 말할 때 시편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시편은 단지 제 2성전의 기도집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속적인 기도집이다. 그러므로 이제 시편은 메시야의 초림으로 시작되고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구속의 새로운 시대의 견지에서 사용되어야만 한다.
8. 시편 개요
시편은 5권의 책으로 나누어지며 각각은 송영가(頌榮歌)로 끝난다.(제 150편은 시편 전체의 송영가이다)
제 1권: 1-41편
제 2권: 42-72편
제 3권: 73-89편
제 4권: 90-106편
제 5권: 107-150편
내용의 개요는 각 시의 주에서 보충된다.
책 |
1권 |
2권 |
3권 |
4권 |
5권 |
|
(1-41편) |
(42-72편) |
(73-89편) |
(90-106편) |
(107-150편) |
주요저자 |
다윗 |
다윗과 고라 |
아삽 |
무명인 |
다윗과무명인 |
시편의 수 |
41 |
31 |
17 |
17 |
44 |
주요내용 |
예배송 |
민족적인찬양시 |
찬 송 |
모세오경과의 비교 |
인간과 천지창조 |
출애굽기: 해방과 구속 |
레위기:광야에서의 방황 |
민수기:광야에서의방황 |
신명기:성경과찬양 |
권말의 송영 |
14:13 |
72:18,19 |
89:52 |
106:48 |
150:1-6 |
편집자(추정) |
다윗 |
히스기야 혹은 요시아 |
에스라 혹은 느헤미야 |
편집시기 |
주전1020-970년경 |
주전 970-610년경 |
주전 430년경까지 |
저작시기 |
약 1000년 (주전 1410-430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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