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열왕기하1장13~18절
제목 : 생명의 주권자
아하시야가 두 번의 실패에도 굴복하지 않고 다시 군대를 보냅니다.
세 번째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생명을 구해 살게 되지만, 아하시아는 말씀대로 죽습니다.
1. 생명을 구한 오십부장(13~15절)
1)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냅니다(13절).
“[13]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사실은 앞의 두 오십부장(9,11절)과 다른 세 번 째 오십부장의 겸손한 태도입니다.
특히 이는 두 번 째 오십부장의 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두 번 째 오십부장은 전임자가 징벌을 받은 사실을 알면서도 산 아래에서 엘리야에게 내려오라고 큰 소리쳤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 째 오십부장은 두 전임자를 교훈삼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도로 엘리야에게 공손한 태도를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 여기서 '귀히 보소서'란 말은 히브리어 '티카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귀하게 여기다', '존중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카르'의 미완료 변형으로서 어떻게든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청원입니다.
그런데 세 번 째 오십 부장의 이러한 간구와 겸손함은 아하시야 왕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하시야는 두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9-12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또 다시 엘리야를 체포하러 세 번 째 군사들을 파송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 번 째 오십부장은 엘리야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고선 아하시야의 명령과 상관없이 엘리야의 발 앞에 무릎 꿇은 것입니다.
2) 오십부장은 다시 ‘생명을 귀히 보소서’라는 말로 마칩니다(14절)
“ [14]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
본절은 세번째 오십부장이 두 전임자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벌을 자신의 교훈으로 삼았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징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더욱 완악해져가는 아하시야 왕의 태도와 좋은 대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고 두려워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기 마련입니다(15절;시 149:4).
(1)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십니다(시149:4)
*시149: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2)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약4:6, 잠3:34).
(3)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시10:17, 빌2:13)
(4) 겸손자를 먹고 배부르게 하십니다(시22:26)
(5)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잠11:2)
(6) 겸손한 자에게 기쁨을 더해주시고(사29:19), 높이십니다(약4:10)
3) 오십부장의 간곡한 요청을 들은 여호와의 사자는 엘리야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네려 가라고 명령합니다(15절)
“[15]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 3절에서 언급되었던 '여호와의 사자'가 본절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바로 지금까지 엘리야를 보호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그의 권위를 지탱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 - 여기서 '그'가 가리키는 사람은 아하시야 왕입니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파나이우'로서 '그의 면전에'라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의 사자는 엘리야로 하여금 아하시야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권고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두 번의 징벌을 내리시고 난 후 지금에 와서야 엘리야를 아하시야 앞에 보내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제는 아하시야에게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외적인 장애물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백성들이나 신하들이 모두 분명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두 차례에 걸친 심판으로 인해(9-12절) 이제는 백성들이나 신하들 가운데 세 번 째 오십부장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을 행하심에 있어서 단지 징벌만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 심판 속에는 후대의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당대의 백성들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2. 말씀대로 죽은 아하시야 왕(16~18절)
1) 왕 앞에선 엘리야는 이전에 왕의 사자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합니다(16절).
“ [16]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의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안 계심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
본절은 3,4절의 반복일 뿐만 아니라 왕의 사자들에 의해 왕에게 전달된 동일한 말입니다(6절).
그러나 이제 아하시야 왕 앞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직접 선포한 것은 대단히 의미가 깊습니다.
즉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포악한 아하시야 왕을 향해서 그의 불신앙을 선포함으로써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변경함이 없이 담대히 외쳤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의 참된 용기와 담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고후 5:6).
*고후5: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2) 아하시야는 결국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처럼 죽습니다(17절).
“[17]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엘리야의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 여기서 '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전치사 '케'로서 '...와 동일하게', '...처럼'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는 엘리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림없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열왕기서에 기술된 역사의 전반을 살펴볼 때 선지자가 선포한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의 권위를 보증해 주고 계신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왕상14:18; 22:13;왕하 2:22; 10:17; 24:2).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 - 70인역(LXX)과 수리아역(Peshitta)과 라틴어 역본(Vulgate)에는 '여호람'(Jehoram)이란 말 뒤에 '그의 형제'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 번역, Living Bible, RSV 등도 이것을 옳은 것으로 보고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맛소라 히브리 본문에는 이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맛소라 본문이 그렇게 한 것은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형제라는 사실을 당대에는 누구나 다 아는 일반적인 상식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70인역(LXX)등이 '그의 형제'라는 단어를 삽입해 주므로서 오늘날의 우리들에겐 많은 유익이 되고 있습니다.
즉, 이는 당시 아하시야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사실과 여호람이 그의 형제라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 주는 주석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왕...여호람의 제 이 년이었더라. - 본절과 달리 3:1에서는 유다 왕 여호사밧(Jehoshaphat)의 제 18년에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반면 8:16에는 유다 왕 여호람이 왕위에 오른 해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제 5년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한 곳에서는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유다 왕 여호람보다 약 4년 먼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약 1년 늦게 왕위에 올랐다고 서로 모순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엇갈리는 연대 기록은 성경 기자들의 기록상의 오류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 원인은 근복적으로 이스라엘의 섭정 제도(regency)에 있습니다.
즉 성경의 연대 기록은 어떤 왕의 섭정 개시 년도부터 계산되기도하고 또 어떤 때는 정식으로 등극한 해부터 계산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아하시야의 형제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연대를 계산함에 있어서도 본절에서는 유다 왕 여호람이 섭정을 시작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한 반면, 8:16에서는 유다 왕 여호람이 정식등극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됩니다.
3) 아하시야가 죽은 후에 그의 동생 여호람이 왕위를 계승합니다(18절).
“[18] 아하시야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모두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에는 아하시야의 사적이 엘리야와 관련해서 죄를 범했다는 본장의 기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건이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에 기록되었고 본서가 기록될 당시 사람들은 아하시야의 여타 사적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성경의 기록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심히 악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대하 20:35).
*대하20:35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였더라”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 - 이 책은 신구약 성경 66권 중의 한 권인 역대기(歷代記)가 아닙니다.
대신 이는 본서 저자가 활용한 자료들 중의 하나인 이스라엘 왕들의 국정 일지(國政日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말씀대로 아하시야의 생명을 취하십니다(15~17절).
아하시야의 죽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명증했습니다.
아하시야가 하나님께 묻고 자비를 구했다면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을 것입니다(6절).
하나님은 그를 고치심으로 자신의 자비를 드러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의 행위에는 심판의 불길로, 자비의 호소에는 구원의 손길로 응답하십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두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야는 끈질기게 군대를 보냅니다(13a절).
삶에 대한 애착과 집착 때문에 무모한 일일지라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력을 다한 일이 그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키우고 심판을 굳힐 뿐입니다.
고난의 늪을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지만 더 깊은 수렁에 빠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돈과 권력을 앞세워 벗어나보려고 애쓰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자기 힘을 빼고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2) 세 번째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명령하지 않고 호소합니다(13b,14절).
왕의 편에서 엘리야를 굴복시키지 않고, 엘리야 앞에서 굴복하고 자비를 구합니다.
생명의 주권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기에, 자신의 생명과 부하들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무릎을 꿇습니다.
자기를 위해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아하시야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아하시야에게 기대했던 모습이 바로 이런 겸손한 태도였을 것입니다.
3) 엘리야는 말씀대로 행합니다(15,16절).
내려가라면 내려가고, 말씀을 전하라면 전했습니다.
내려가지 않을 이유를 찾고, 전하지 못할 핑계를 찾지 않았습니다.
이런 ‘단순한 순종’은 하나님과 오래 동행하고 교제하면서 축적된 철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의심하고, 실천을 앞두고 우물쭈물 망설인다면, 아직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충분히 쌓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기도>
공동체-말씀을 순종하는 삶이 저와 공동체를 살리는 길임을 믿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