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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서면교회 50년사 - 1990년대
1990년대는 부산서면교회의 “대역사”를 이룩하는 시기였다. 원종록 목사의 1990년도 신년 목회 백서에서 밝힌 바대로 “대역사를 이루는 교회”가 되기 위해 모든 성도들이 시대적인 사명감을 가지고서 성령의 권능과 전적인 봉헌으로, 그리고 일심단합으로 예배당 건축과 국내외 복음운동에 모든 헌신을 다하였다.
90년대 부산서면교회는 이러한 목회의 비전을 따라 온 교회가 하나되어 예배당 건축을 시작함과 더불어 국내 전도에 총력을 기울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해외 선교의 도약을 기하였을 뿐 아니라 고신교단과 부산교계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중심적인 교회로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1. 현재의 예배당 건축과 완공
1) 대역사를 이루기 위한 기도운동
1980년 11월 부산진구 당감2동 95-1번지로 이전하여 당감동 시대에 접어든지 10년이 되는 1990년 12월에 당국으로부터 예배당 건축 허가를 받게 됨으로 건축기성회 조직 후 5년 동안 준비해 오던 예배당 건축이 시작되었다. 1991년 1월 8일 신년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이 “건축의 대역사를 이룩합시다”(대하 7:1-3)였고, 그 말씀대로 온 교회는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일심으로, 전적 봉사로써” 예배당 건축에 온전한 헌신을 다하기로 다짐하였다. 바로 그 주일 낮예배 직후에 열린 정기 제직회에서 “교회에서 기도의 불을 당기기 위해 남자 제직 3명을 1개조로 편성하여 매일 자정부터 새벽기도회 이전까지 기도 당번을 두기로 결정”하고 기도대원 모집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91년 2월부터 1992년 2월까지 1년 동안 밤 10시에서 새벽기도회 시간까지 각 대원들은 자신이 담당한 1시간 동안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릴레이식 철야기도회를 실시하였다. 이 기도의 불길은 1992년도의 “120명 다락방 기도대 기도회”와 1993년도의 “기관별 저녁기도회”로 계속 연결되어 온 교회가 3년 동안 정말 “믿음으로, 일심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였다. 실로 부산서면교회는 오직 기도로 90년대 대역사의 장을 모든 성도들이 함께 열어간 것이다.
2) 예배당 건축 방해와 완공
그러나 교회의 원수 사단은 예배당 건축을 저지하기 위해 밖으로부터 시험을 가해왔다. 건축을 시행하기 전에 교회는 동의 자문위원과 주민들과의 친교 모임을 통해 주민들의 이해를 구해왔지만, 일부 과격한 주민들이 건축을 방해하는 실력 행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계 기관에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당회(1991년 5월 26일)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6월 2째 주에 “전교인 산상기도회”를 실시하기로 하고, 동시에 합법적인 예배당 공사를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기로 하였다. 1991년 7월 7일 정기제직회에서 건축기성회장 강경숙 장로는 주민들이 교회의 건축공사를 방해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난 것과 계속 공사를 진행하여 8월 말 경에 지하를 완공할 예정이라는 상황 보고를 하였다. 그 후에 공사비 조달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성전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사단은 교회가 안으로부터도 타격을 입도록 하기 위해 교회의 중직자들 중에 2명을 개인의 가정문제 등으로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함으로 장립집사 제명(1990년 1월)과 장로 무기정직(1992년 8월)의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계속적인 간절한 기도 가운데 예배당 건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1992년 10월 4일 정기제직회에서 예배당 건축 면적이 처음보다 약 229평 정도가 추가되어 총 1748.16 평으로 증축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역사적인 신축 예배당 입당을 앞두고 입당준비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1992년 12월 7일-20일)를 실시하면서 새 예배당의 의자를 구입하기 위한 헌금을 작정하였고, 마침내 1993년 1월 1일 자정에 비로소 새 예배당에서 온 교회가 뜨거운 감격 속에 신년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후에 1993년 11월 28일에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예배당 완공 감사예배를 드리고 연이어 고신대 패로스 합창단의 축하공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3) 건축 부채상환을 위한 헌신
예배당은 완공을 하였으나 상당한 작정 헌금이 미수되었고 또한 건축비용의 증대로 인하여 건축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94년 11월 27일 당회는 건축 부채상환을 위해서 “건축구좌 헌금”을 전 교회적으로 작정하기로 결정하고, 1995년부터 시작하여 98년까지 매년 1년 단위로 연초에 작정하여 연차적으로 부채를 갚아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부채도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당시에 교회는 최대한 교회의 예산과 물품을 절약해야 했기에 자연히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한 전도비와 교육비 등에 충분한 투자를 할 수 없게 되었고, 많은 경상비가 부채의 상당한 이자로써 지출되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전반적으로 피로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7년도 건축구좌헌금의 작정과 부흥회 개최를 앞두고 중직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안타까운 교회의 현실을 전해들은 당시 제 2청년회(회장 박상수 집사)가 교회부흥을 위한 새로운 도약을 위해 부채의 신속한 해결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고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곧 제 1청년회(회장 고주석 집사)와 함께 교회의 부채문제 해결을 위해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조속한 헌당을 위한 의욕적인 건의안을 당회에 제출하게 되었다. 이에 당회는 청년회의 건의안을 2월 16일 주일 오후 중직자 모임에서 논의하여 건축 부채 상환을 위한 전 교회적인 헌금을 부흥회를 마친 후 1997년 3월 9일에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동안 기도해 오던 청년회에서 먼저 자체적으로 헌금하여 거의 1억원에 가까운 헌금을 작정하였다. 물론 그동안 교회적으로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집을 팔아서 바치는 헌금과 작정한 헌금을 바치기 위해 집을 팔고 전셋집을 얻는 일과 힘을 다하여 바치는 헌금과 정성어린 헌물 등의 눈물겨운 헌신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 힘이 겨워 모두가 지쳐있을 때 이제는 청년들이 디시 한번 더 일어나 긴축가계 운영뿐 아니라 새 옷을 구입하지 않는 운동, 그리고 자기 집 마련의 계획을 수년 더 연기하기로 하는 등 희생적인 봉헌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지쳐있는 교회에 새로운 헌신의 활력을 공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청년들의 기도와 작은 헌신이 불씨가 되어 3월 9일 주일 날 다시 한번 교회가 전력을 다해 헌금을 하여 부채 해결을 앞당길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당회는 “헌당 추진운동 본부”를 결성하였고, 1998년 9월 20일에 교회는 공사비 잔액을 다 지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부의 부채가 남아있어 헌당식을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사실상 헌당을 할 수 있는 충분한 헌금 작정과 준비는 완료되었고 또다시 무리한 헌금시행으로 교회에 부담을 안기고 싶지 않은 목양의 뜻에 따라 헌당식은 자연스럽게 다음 기회로 넘겨지게 되었다.
한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1980년부터 힘겨운 본 교회의 예배당 건축의 과제를 계속 수행해오면서도 우리 교회는 고성 한내교회(1983년), 천안교회(1985년), 청주 신봉교회(1986년), 대전 에덴교회(1988년), 제천 삼일교회(1990년), 울산 세계로교회(1997년)를 개척하였고 도움을 요청하는 많은 미자립교회들을 지원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건축 부채로 많은 이자를 지불해야만 했던 1995년도에도 18개 미자립교회와 3개 전도기관을 도왔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본 교회 예배당의 헌당식은 거행하지 못하였으나 세계선교의 사명을 늦출 수 없어 중국 홍기교회(1995년)와 필리핀 라굼 제1교회(1997년)의 예배당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기쁨으로 헌당예배를 먼저 드렸다. 그리고 또다시 중국 하남촌교회의 대지(250평)를 구입하고 계속 지원을 하고 있다. 주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한 것이다.
2. 총력 전도와 교회 성장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한 헌금 작정과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전도를 통한 교회성장에도 총력을 다하기 위해 1989년 12월 4일 당회는 총동원 전도주일을 년 1회 실시하고, 새신자들을 중심한 계속적인 신앙생활을 격려하기 위해 전교인 출석주일을 년 4회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1991년 2월에 전도특강을 실시하고 3월에는 전도대원을 모집하여 매주 정기적으로 모여 지속적인 전도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1) 총동원 전도주일
체계적인 전도의 부흥을 위해 먼저 1992년 1월부터 시작된 120명 다락방 기도대의 전도부흥을 위한 기도 지원가운데 2월 21일에 전도학교를 개강하기로 하고 3월 3째 주일에는 전교인 전도세미나를 실시한 후에 전도대와 전도 후원자를 새롭게 모집하였다. 1992년 4월 5일 정기제직회의 전도부 보고에 의하면 당시에 50명의 전도대원, 83명의 전도를 위한 기도 후원자, 80명의 전도를 위한 헌금 작정자와 14명의 직간접 헌신지원자를 확보함으로써 보다 체계적인 전도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92년 5월 31일에는 가족총동원 전도주일로 지켜 가족 중에 믿지 않는 분들을 인도하기 위한 총력전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체계적인 전도운동과 계속적인 총력전도의 놀라운 결실을 이듬해 1993년 6월 20일 “부산시민 초청 큰잔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6월 7일부터 2주간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이는 가운데 모든 성도들이 총력을 기우려 전도한 결과 7천명이 참석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것은 교회적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전도 대부흥의 가능성을 실제로 확인하고 계속 분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을 뿐 아니라 전교인들의 실제적인 전도훈련과 헌신을 새롭게 고취하는 큰 의미를 지니는 행사였다. 그 이후 1994년도의 총력전도주일은 “태신자 초청 주일”로, 1995년도는 “아홉 찾기 운동”으로, 1996년도에는 “전교인 한 생명 전도주일”로 새로운 형식으로 계속되었다.
2) 전도요원 훈련과 양육전도를 위한 노력
그러나 총동원 전도주일을 통한 전도의 온전한 결실을 위해 전도한 사람들의 계속적인 신앙지도와 추적육성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94년 4월에 “이슬비 전도학교”를 개설하고 각 구역에서 2명 이상의 요원들을 훈련하여 문서를 통한 육성에 중점을 두는 전도를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4년 7월 31일 당회에서 양육을 포함한 전도운동을 새롭게 전개할 수 있는 전도요원 양성을 위해 “전도폭발훈련”을 도입하기로 결정을 하고,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먼저 서울에서 직접 훈련을 받은 후에 9월 6일부터 12월 27일까지 총 16주간의 제1차 전도훈련학교를 운영하여 전도폭발요원과 기도후원자들의 훈련과 전도실습에 주력을 다하였다. 그리고 1994년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는 “94‘ 부산복음화대회”를 우리 교회가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진행하여 부산 복음화에 앞장 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3) 노숙자 전도와 사랑실천운동
1997년 11월 21일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요청한 이후에 나라가 국가적 경제파산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수많은 기업의 도산으로 인한 대량 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로 인한 수많은 실업자들이 가정을 떠나 거리와 역전 등지에서 노숙하며 음식을 구걸하는 안타까운 사실을 접한 신주복 장로와 김진호 장로는 함께 부산역 등지에 있는 노숙자들에게 헌신적인 구제와 더불어 복음을 전하였고, 또한 그들을 주일날 교회로 인도하기 시작하여 그 숫자가 2~3백 여명으로 늘어났다. 교회는 자연스럽게 그 노숙자들을 위한 사랑의 구제와 전도에 함께 힘을 모으는 것이 시대적인 하나님의 뜻인 줄로 생각하고 1998년 4월 5일 당회는 노숙자들에 대한 “사랑실천운동”을 실시하기 위해 “사랑실천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전 교인들이 한 달간 아침금식운동을 통해 사랑의 성미와 빵을 수집하여 주일과 수요일에 제공하고 깨끗한 헌옷을 수집하여 전달하기로 하기로 하였다. 점점 늘어나는 노숙자들을 주일날 예배와 교회의 식사에 초청하기 위해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부산역에 나가 빵을 나누며 전도하기도 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식사와 교통비를 제공하고 샤워실에 전기 온수기를 시설하여 몸을 씻게 한 후에 원하는 사람들은 수집한 옷을 입고 주일 낮 예배에 참석토록 하였다. 교회 안에서 식사를 제공하고 안내하는 모든 일들을 주로 청년들이 기쁨으로 감당하였다. 이처럼 사랑으로 구제하면서 베푸는 전도운동은 현재까지 지속적인 사랑실천을 통한 전도운동으로 계속되어 오고 있다.
3. 세계선교를 위한 헌신
예배당 건축기공예배를 드린 그 다음 주일(1991년 4월 28일)에 당회는 세계선교를 위한 계획을 전도위원회가 맡아 연구하여 수립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예배당 건축이 미래의 세계선교를 위한 중심교회가 되기 위한 헌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면한 예배당 건축으로 인하여 해외선교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1992년 3월 29일 당회는 전도위원회가 제출한 선교 계획안을 심의하여 선교사업을 전담하기 위한 특별기구로서 선교위원회를 신설하기로 결정하였고, 3월 마지막 주일에는 “선교 세미나”를 개최하여 교회적인 선교의 관심을 새롭게 하였다. 이러한 연구와 협의 과정을 거쳐 5월 31일 주일에 당회장이 교회의 장기적인 선교 비전을 교회 앞에 발표하였다.
1994년 1월에 전 교회적으로 선교를 위한 구좌헌금을 작정하였다. 선교지 선정을 위해 논의한 결과 가장 가까운 중국을 제1차 선교지로 결정하고서 김영수 선교사의 안내로 4월에 원종록 목사와 강경숙 장로(선교위원장)가 중국 선교 현지를 답사한 후에 5월 8일 당회에서 중국 흑룡강성에 위치한 홍기교회의 교회당 건축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교회당 건축을 지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1995년 7월 24일부터 10일 동안 흑룡강성의 하얼빈과 길림성의 서란에서 비밀리에 개최되었던 중국교회 지도자(목회자)들을 위한 신학강좌에 이환봉 협동목사(고신대 교수)를 파송하여 개혁주의 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당시의 신생 중국교회 설교자들을 위한 바른 신학교육은 시급한 과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신학교육을 정식으로 받을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중국 각처에서 30여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뜨거운 열기 속에서 기독론과 구원론을 중심한 총 50시간의 강의와 8번의 설교를 통하여 매일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는 강행군식의 신학수업을 시행하였다. 중국 홍기교회의 예배당 건축(건평 150평)은 계속 순조롭게 진행되어 1995년 12월 13일에 뜻깊은 헌당식을 거행하게 되었고 원종록 목사와 김영용 부목사가 참석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축하하였다. 그리고 1999년 5월 30일 당회는 제3차 선교지로 중국 하남촌 교회를 건축(대지 250평)하기로 하고 7월 26일부터 1주일 동안 당회원 중에 지원을 받아 현지답사 겸 선교여행을 하도록 하였다.
1996년 5월 26일 당회는 제2차 선교지로서 김자선 선교사와 강정인 선교사가 섬기고 있는 필리핀 라굼 제1교회 예배당을 건축(건평 100평)하기로 결정하여, 1997년 3월 예배당 헌당식에 10여명의 지원자들이 선교 현지를 방문하였다. 그 후에 계속 김 선교사의 귀국 시에 교회 앞에서 선교현지에 대한 보고와 기도회가 있었고, 1999년 12월에는 김 선교사가 섬기는 또 다른 선교지 필리핀 뚜게가라오 교회의 헌당식에 참여하는 길에 단기선교훈련을 위한 지원자들을 모집하여 00명이 참석하였고, 그 여행으로 말미암아 선교지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사명감을 새롭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00년부터는 역시 김자선 선교사가 봉사하는 필리핀 라굼 제3교회를 여전도회에서 계속 기도와 헌금으로 지원하고 있다.
1994년 12월부터 금요심야기도회의 헌금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헌금으로 당시의 여러 선교사들을 후원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사는 이경건, 박은옥 선교사(필리핀), 김진호 선교사(파라과이), 윤장욱 선교사(시에라리온), 박민순, 전미숙 선교사(인도), 박현수 선교사(방글라데시), 김평화, 김한중, 신정만 선교사(중국), 이재찬 선교사(나이지리아), 김재수 선교사(중국)이다.
4. 부산 교계와 고신 교단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상
1992년 12월 새 예배당에 입당을 한 그 이듬해 1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단 총회와 노회, 그리고 부산교계와 선교단체들의 수많은 집회와 수련회 및 각종 대회 등을 위하여 예배당을 때마다 제공할 수 있는 봉사하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지켜왔다. 부산의 서면이라는 지역적 중심 위치와 비교적 넓은 주차장을 소유한 큰 예배당을 가진 교회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들을 위한 봉사에 기쁨으로 수종들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993년 9월 20일부터 24일 까지 본 교회에서 회집하였던 제43회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정기총회를 위해서는 은혜로운 총회가 되도록 9월 6일부터 2주간을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는 가운데 준비하여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섬겨 잘 감당할 수 있었고, 1998년 11월 24일 제29회 전국장로회(고신) 정기총회를 위해서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다.
우리 교회는 교단의 발전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자연히 교단의 개혁과 성숙을 위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왔다. 교단 총회를 앞두고 특별기도회를 가졌고 교단의 개혁을 위해 수고하는 담임 목사와 장로들을 위해 기도하며 적극 지원하였다. 특히 어려운 시기에 원종록 목사가 학교법인 교려학원(고신대학교)의 이사장으로 재임하였을 때에 기도를 쉬지 않았으며, 그 일의 여파로 1996년 제46회 총회를 앞두고 8월 25일 당회는 총회 현안문제 해결과 정화를 위한 관심과 지원을 결정하였으며, 부당한 교권의 횡포에 의하여 제46회 총회가 원목사의 상회권을 박탈한 잘못된 결정에 대해 본 교회가 소속한 동부산 노회의 교회들과 함께 그 시정과 교단의 개혁을 위해 당회원들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앞장서 기도와 선한 싸움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1998년 제48총회는 제46총회의 잘못된 결정을 백지화되었고, 원종록 목사는 그 이듬해 1999년 제49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영예롭게 선출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교단과 교회에 함께 하시는 사실로 인하여 온 교회가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였다. 마침내 원목사는 2000년 제50회 정기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의 기도 가운데 그 직무를 다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교단을 위한 각종 신앙운동과 기도운동에 적극 동참하였고, 총회회관 건축과 고신대학교 도서관과 생활관 건축, 그리고 신학대학원 건축과 운동장 확보 등을 위한 헌금에도 최선을 다하여 참여하였다.
1990년대의 교회의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은 1989년부터 제1청년회에서 시행해 오던 불우 이웃돕기 바자회를 매년마다 계속하였고, 제2청년회에서는 생필품 등을 준비하여 고아원을 방문하였으며, 제3청년회에서도 다사랑회 주관으로 불우 이웃돕기를 위한 바자회를 가졌다. 교회적으로는 전 성도들이 참여하는 사랑의 헌혈운동을 매년마다 시행하였고, 1992년 10월에는 한달 동안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성탄때마다 카드판매 등으로 장애인과 사회복지 시설에 연료비를 전달하거나 “사랑의 열매달기 운동”으로 불우 이웃을 위한 성금을 전달하였다. 1996년에는 5월과 12월에는 교회주변의 영새민을 돕기위한 사랑나눔을 위한 모금을 하기도 하였다. 때 따라 교회주변 동내에 대청소를 실시하였고, 2000년 3월에는 오명자 집사의 수고로 화요일 하루 종일 교회 주변 영세민들을 위한 이발봉사를 시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본 예배당에서 모였던 19993년 맹인을 돕는 모임이 주최한 안과무료진료를 제1청년회에서 협력하였고, 1999년과 2000년에 2회에 걸쳐 밀알선교회에서 주최한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랑의 음악회를 도왔다. 무엇보다 앞서 서술한대로 IMF 이후 사랑실천위원회에서 노숙자들을 돕기 위한 식사제공, 교통비 지급, 샤위실 제공, 헌 옷 전달 등의 사랑실천운동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시행해오고 있다.
5. 국제도덕협회 사당 건립 반대운동
1998년 7월경에 예배당 사무실 바로 옆에 국제도덕협회(일관도)로 알려진 사이비 종파에서 몰래 땅을 매입하고 미륵불 사당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관도의 교주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일간신문에서 사이비 종파로 널리 알려진 바 있고, 기독교의 예배당에 바로 안접해 있는 위치에 타종교의 사당 걸립을 허락한 당국의 처사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교회는 사당 건립을 저지하기로 하고 건립반대 운동에 교우들의 기도와 참여를 요청하였다. 건축을 허가한 진구청에 건축허가 취소를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따라서 8월 24일(월) 진구청 앞에서 오전 10시에 모여 전교인 항의 집회를 가지고 대표자 면담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에 그들의 공사 강행을 저지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교인들이 자원하여 교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예배당 바로 옆에서 분향 냄새와 불경을 외우는 소리 등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를 침해받을 수 없었다. 결국 온 교회의 간절한 기도와 노력으로 12월에 그 부지를 교회에서 매입하여 빌라를 건축하였고 교인들을 중심으로 분양하여 은혜 중에 사당 건립 반대운동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6. 직분 임직과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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