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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성결교의 분열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한국교회 3대교단으로 성장한 성결교는 일제에 의해 교단이 해체되는 가장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였습니다. 갈곳을 잃은 성직자들과 성도들은 장로교와 감리교회에서 수년간을 눈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해방의 날을 맞이하며 성결교는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결교 역시 WCC, 에큐메니칼과 반에큐메니칼의 대립으로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1946년 9월3일, 성결교회는 NCC에 가입하였습니다. 한국NCC는 회원상호간 경험과 사상을 교환하고 친선과 협조를 도모하며, 그리스도의 교훈안에서 전도사업과 봉사사업을 증진하며 전체적 기독교 연합운동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전체적 기독교운동과 한국교회와 세계기독교 운동에 협력하기로 하였습니다. 1953년, 성결교회 김창근 목사는 한국NCC회장에 피선되어 적극적인 교회협력을 추구하였습니다. 1945년 이후 성결교회는 제1차 재흥(1945~1953)과 제2차 재흥(1954~1960)을 통하여 교단을 정상화하고 동양선교회(OMS)의 지원으로 재건과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1954년, 서울로 귀환한 성결교 본부는 WRC(세계구호위원회), WCS(기독교세계봉사회), UN의 지원을 받아 130여개의 교회를 재건하였습니다.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100여개의 교회를 새롭게 건립하여 408개의 교회가 1957년까지 설립되었습니다. 이러한 재건운동으로 1957년, 성결교회는 서울신학대학과 지방신학교 3개교, 보통성경학교 4개교, 교역자 500명, 교회 450개, 고아원 42개소, 전쟁미망인요양소 5개소, 양로원 1개소, 불량소년수용소 2개소 등 전체교인 11만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48년, NAE에 한국인 51명이 가입한 후 1952년, 100여명의 교역자가 합류하고, 1955년 8월, 한국NAE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에 가입하여 정식회원이 되었습니다. 성결교회는 1955년, 제10회 총회에서 이명직 목사의 제안과 동의로 NAE에 가입하였습니다.
성결교는 WCC문제로 이명직, 김응조, 이성봉, 전영식 목사 등 신학을 강조하는 반대측과 박명원, 김중환, 한명우, 김창근, 김정호, 김재환 등 연합을 강조하는 찬성측이 상호 대립을 시작하였습니다. 성결교회는 WCC를 지지하는 NCC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의 공방은 이제 NAE와 NCC의 대립과 갈등으로 비화되었습니다. 1956년, 미국NCC에서 프린스톤신학교 존 맥케이 교장은 중국공산화 이후 중국파송 선교사들을 강제출국시키며 기독교를 탄압한 중국정부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성결교회는 노선이 전혀 다른 색채를 가진 NCC와 NAE 등 두 개의 단체에 동시 가입함으로서 이미 내분을 예고하였습니다. 동양성결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NAE파와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신학을 수용하려는 NCC파의 대립은 이용선의 NAE탈퇴안과 황경찬, 천순봉, 김용은의 NCC탈퇴안으로 총회에서 충돌하였습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복음을 성결교 정신으로 계승한 성결교회가 양측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1960년 4월, 15회 총회에서 NAE와 NCC 모두 탈퇴하기로 하였으나 4.19 군사 쿠데타의 발생으로 총회가 정회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후 회집된 총회에서는 탈퇴보류파가 득세하는 가운데 43대 40으로 탈퇴보류가 결정되었습니다. 서울신학대학 교수회는 NCC탈퇴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나 학감이며 NCC회장인 김창근 목사와 박상중 목사는 NCC지지 의사를 밝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NAE회장 황경찬 목사와 장창덕 목사가 NCC김창근 목사와 대립하는 양상이 당분간 지속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61년 4월11일, 16회 총회에서 경기지방회장 이우호 목사가 제안한 NCC, NAE동시탈퇴안이 부결되고 이에 조병두, 이성호, 박원준, 김동완, 이종규 목사 등 19명이 4월14일, “복음진리수호동지회”를 조직하고 NCC탈퇴를 종용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복음진리수호동지회는 WCC가 자유주의 신학계열의 학자와 목사들로 구성되어 있고, 헌장과 운동이 비성경적이라는 점에서 성결교단과 전혀 상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1961년 5월30일, WCC를 반대하는 지지자들은 독립문교회에서 “보수총회”를 조직함으로서 최후의 보루를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보수총회는 한발 더 나아가 1961년 12월9일, 부산 동광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고 기성과 별도로 ICCC에 정식 가입하였으며 1962년 4월, 제17회 총회에서 “예수교대한성결교회”교단을 설립하였습니다. 교단명칭은 1921년에 사용하던 명칭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변경하고 이같은 방향에서 제17회 총회를 “제41회 총회”로 수정하였습니다. 성결교단의 본류이며 중립을 지키던 OMS(동양선교회)는 1961년 11월6일, 기성의 16회 부산총회를 합법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OMS로부터 정당성을 회복한 기성측이 보수측에 ICCC탈퇴와 함께 기성총회 복귀를 촉구하였으나 협상은 초반부터 결렬되었습니다. 결국 성결교단은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었고 예성은 “성결교신학교”를 별도 설립하고 초대교장에 김응조 목사를 선임하였습니다. 이로서 기독교대한성결교는 474교회, 목사272명, 전도사234명, 전도인93명, 세례교인 18,907명 등 총 96,405명의 교세로 성장하였고, 예수교대한성결교는 257교회, 목사128명, 전도사121명, 전도인47명, 세례교인 10,557명 등 총 50,130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52. 침례교회의 분열과 통합
성결교단과 마찬가지로 1944년 5월10일,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던 침례교회(동아기독교)는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교단재건을 위해 미국 남침례교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가장 혹독한 시련의 경계를 넘었던 침례교회는 김용해, 노재천, 장석천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재건운동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1946년 2월9일, 충남 부여군 칠산교회에서 교회재건회의를 개최하고 교역자는 청빈제로 하되 생활비는 해당교회에서 부담하기로 하였습니다. 총부의 사무실은 강경교회에 설치하고 총부유지비는 자원거출금으로 충당하며 남한의 각구역 기성임원들과 목회자는 솔선적으로 산재한 교회재건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하였습니다. 교단연합을 위해 노재천, 김용해, 김주언 대표에게 심사를 위임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노재천 목사를 임시대리 감목으로 추대하고 침례교회의 재건에 모든 교회가 힘을 합하기로 하였습니다. 1930년대 250개에 달하던 교회는 해방후 40개교회 350명 교인으로 축소된 상황에서 시작하는 재건운동은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6년 9월, 강경교회에서 개최된 제36차 대화회에서 총회장 이종덕 목사, 부총회장 노재천 목사, 서기 김용해 목사가 각각 선출되었습니다. 또한 교단명을 동아기독교로 환원하고 대화회를 총회로 회의명을 변경하고 감목을 총회장으로, 안사를 목사로, 감로를 장로로, 통장을 권사로, 총장과 반장을 집사로 호칭을 각각 변경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파송제의 담임목사 제도를 청빈제로 변경하고 사례비를 개교회에서 자부담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선교중심의 순회선교 단체에서 개교회 중심의 교단조직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착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아기독교 내부에는 펜윅의 대한기독교로 회귀하려는 집단과 새로운 침례교 선교단체로 전환하려는 동아기독교의 대립이 고개를 들고 일어 났습니다.
경북 예천구역 원로감로들과 장진규, 김성기, 노성하, 이종배, 박성래, 윤종두, 윤종성, 임윤창, 김재덕, 박맹춘 등 10개교회 대표들은 1947년 9월14일, 예천구역 헌평교회에서 “대한기독교”를 분립하였습니다. 1948년, 동아기독교회가 남침례교회와 연합을 결정한후 1949년, 서동교회에서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대한기독교회의 교규 전장 15장 45조의 교회규약을 통과하였습니다. 1950년 5월14일, 서동교회의 대화회를 제32차 대화회로 하고 대한기독교회의 전통을 계승하기로 하였습니다. 박성래 감로를 원사로, 10명의 노인회를 대한기독교회 원로회로 추대하며 본격적인 교단화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동아기독교회는 교단분열문제 해결보다 경제적인 문제가 더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1944년, 교단해체로 재산이 일제 국방헌납금으로 강제 징발되어 교단재정은 제로(0원)에 가까웠습니다. 1948년 총회가 1949년 3월부터 성경학원운영을 결정하였지만 전혀 무대책이었습니다. 그래서 1천5백만명의 교세를 가진 세계최대교단 미국 남침례교와의 연합교류를 추진하였습니다. 남침례교신학교를 졸업한 우태호 목사가 미국이 남침례교회 외국선교부 동양총무 코든 박사와의 미팅에 성공하고 구호위원회 구호사업위임까지 받은 후 귀국하였습니다. 1949년 9월, 남침례교 해외선교부 조사위원들이 내한하고, 1949년, 충남 강경교회에서 개최된 39차 총회를 기점으로 동아기독교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하였습니다. 미국 남침례교단에서는 해외선교부 동양총무 코든과 일본선교사 도지어(Edwin B.Dozier)가 참석하였고, 1950년 2월7일, 중국선교사 존 애버나티(John Arch Abernathy)를 한국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침례신학파 우태호를 경쟁상대로만 생각한 안대벽은 자신의 개인적 영달을 위해 선교회 교류채널을 고의적으로 독식하였습니다. 결국 우태호에 동정적인 세력과 안대벽 세력간에 충돌이 발생하였습니다. 교단내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던 안대벽은 1950년 4월, 점촌교회에서 개최된 제40차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별도의 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위원장직에 취임하였습니다. 급기야 남침례교회에서 한국침례교회로 지원하는 선교비를 직접 관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단내 모든 실권을 장악한 안대벽의 전횡속에서 침례교단은 위험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강경교회 담임목사이며 침례교회 총회장 이종덕 목사는 6.25사변중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1951년 3월, 부산 충무로에 침례교회를 개척한 나요한 선교사는 구호선교사업을 착수하였습니다. 김용해, 장일수, 안대벽, 신혁균, 최성업, 김주언과 함께 구호위원회를 결성한 나요한 선교사는 구호금, 각 교회교역자 생활보조금, 교회당수리와 신축보조, 교역자 자녀학자금 지원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1951년 이후 1년간 남침례교 구호위원회는 10만달러 상당의 식량, 의류, 구호금을 한국교회에 전달하였으며 각종 구호품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였습니다. 전후 1955년 6월까지 미국 남침례교회 해외선교부는 한국구호금으로 223,156달러와 의류 120톤을 지원하였습니다. 1951년 12월, 의료선교사 브라이언은 남포동지역에서 천막진료소를 개설하고 진료사역을 시작하였는데 그후 부산침례병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953년, 간호선교사 브레넘, 휘트, 라이트선교사와 요컴선교사가 내한하여 하루 평균 600~700명의 환자를 진료하였으며 1953년, 부산 충무로 2층 적산가옥을 매입하여 의료진료소로 사용한 후, 미국 남침례교 해외선교부 재정지원으로 “왈레스기념침례병원”을 1955년 11월15일, 완공하였습니다. 1951년 5월, 충남 부여 원당교회에서 개최된 제41차 총회는 “침례교세계연맹”(BWA)가입을 결정하였습니다. 1952년 1월11일, 동양총무 코든 선교사는 한국선교회 조직을 구성하고 회장에 레이 선교사, 재무와 총무에 나요한 선교사를 선출하고 1954년 7월13일, “한국선교회 총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회장 레이 선교사, 재무총무 러비 휘트 선교사가 각각 취임하였고 선교회 산하에 의료위원회, 신학교위원회, 언어위원회, 구호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부산 충무로교회와 범일동교회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전도활동을 전개하고, 1954년, 최형근, 조규암, 김광훈, 이보배를 미국 남침례교신학교, 뉴오를레앙스신학교, 골든게이트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1952년, 제42차 칠산총회에서 미국 남침례교회 교약에 기준하여 교단총회를 개교회 연맹으로 구성하는 새로운 총회규약을 채택하였습니다. 또한, 동아기독교회의 원산 번역 신약전서와 복음찬미 사용을 마감하고 대한성서공회의 성경과 UN찬송가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국침례교회는 펜윅의 독립적이고 근본주의적인 동아기독교를 탈착하고 침례교회의 신학과 전통을 계승하며 침례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남침례교회의 세계적인 부흥강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의 방한과 대전집회는 한국침례교단의 위상을 한층 더 높여 주었습니다. 미국 남침례신학교 학장 맥콜 박사의 방한으로 침례신학교의 가치도 높은 수준으로 향상되었습니다. 1953년 6월, 대전 중동 일본음식점을 구입하여 “성경학원”을 개설하고 나요한 선교사를 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954년 4월8일, 예과3년, 본과3년, 총6년 정규과정과 3년과정의 별과와 특수과 과정의 신학교를 개설하고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1954년 7월7일, “침례회신학교”는 문교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취득하여 나요한 선교사가 교장에 취임하였습니다. 침례교신학교의 학제와 행정의 기초를 다진 것은 미국유학파 조웅철 목사의 지적능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대벽의 독주에 우태호와 조웅철은 걸림돌에 불과하였습니다. 미국 남침례교와의 교류증진을 가장 잘 할수 있는 우태호와 조웅철을 백분 활용하기 보다는 경쟁자로만 여기는 안대벽의 잘못된 성향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파벌조성으로 위기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1957년 7월, 홍콩에서 개최되는 아시아침례회선교대회에 선교회실행위원회가 증경총회장 장일수 목사를 한국대표로 선정했을 때 총회장 안대벽은 연차총회에서 자신을 대표로 선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회 실행위원회는 총회장 안대벽의 교권주의를 비난하며 선교회 결정대로 장일수 목사를 대표로 선정하고 박성규를 통역사로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1957년 8월8일, 안대벽은 동양총무 클로리 박사에게 한국선교정책의 한미협동사업조정을 요청하였고, 제48차 총회에서 선교회로부터 교단으로 유입되는 자금을 총괄하는 전도부장에 안대벽이 선출되었습니다. 안대벽은 선교정책자금으로 자신의 정치세력 구축에 일부를 유용하였고 선교회의 불신과 대립의 골은 깊어만 갔습니다. 1959년, 총회는 안대벽을 중심으로 하는 교권주의 주류파와 장일수를 중심으로 하는 비주류파로 분열되었습니다. 3월18일, 대전에서 개최된 선교회 실행위원회 한미합동 전도부 연석회의에 선교부 총무 구두원선교사를 파송하여 안대벽과 안대벽 부인의 불신임에 관한 결정을 통보하였습니다. 선교회 실행위원회는 안대벽과 안대벽 부인에 대한 개인적인 불신임일뿐 총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하였지만 교권주의 주류파는 총회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보고 양측의 대립은 전국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9년, 제49차 총회는 주류와 비주류측의 대립으로 정상적인 회무마져 불가능하였습니다. 주류측 신혁균 총회장은 총회무기연기 공문을 전국교회에 발송하고, 이에 대응한 비주류측은 총회연기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한기독교침례회 총회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1959년 4월2일, 장일수, 조효훈, 한태경 등 지역대표 22인은 “총회수습대책준비위원회” 명의로 안대벽 개인문제를 총회문제로 확대하는 총회실행위원회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총회수습대책준비위원회는 4월8일, 대전에서 한미합동전도부실행위원회를 개최하고, 4월28일, 대전 대흥동침례교회에서 총회수습대책위원 총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4월15일 발송공문에는 총회수습대책위원들의 요청이 있으면 수습대책총회가 제49차 연차 총회로 속개될 수 있다고 명시함으로서 주류측과 비주류측의 대립은 돌아올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응한 주류측 신혁균 총회장은 4월19일, 제49회 총회를 5월25일, 포항침례교회에서 개최한다고 하였습니다. 4월27일, 위원 22인이 참석한 제49회 총회수습대책준비위원회가 대전 대흥동침례교회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수습대책준비위는 총회실행위원 김용해, 안대벽, 노재천, 이원균, 한기춘, 김주언 등 6명에 대한 불신임건과 제49차 총회소집 청원건, 클로리 메시지작성 기초위원이 선정되었습니다. 4월28일, 107명이 참석한 총회수습대책위원 총회가 개최되었고, 주류측 목회자가 단상에 올라가 총회를 방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나 비추류 총회는 총회실행위원들을 불신임하는 선언서를 공식 채택하였습니다. 4월29일, 전국 196개교회 228명 대의원 가운데 140개 교회 198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제49차 연차총회가 대전 대흥동침례교회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남침례교 한국선교회장 말러 회장은 본 총회가 전국교회의 다수파를 대표하는 것으로 선교회는 인정하고 본 총회에서 선출되는 임원과 사업을 함께 진행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49차 총회는 강성주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5월7일, 동양총무 클로리와 한국선교회장 말러는 대전총회를 합법적 총회로 인정한다는 성명서를 공식 발표하였습니다.
비주류측에 주도권을 빼앗긴 주류측은 포항총회를 강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포항침례교회 김창복 목사가 대전총회를 지지하며 포항총회 장소를 불허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당황한 주류측 총회실행위원회는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며 교단내 반선교회세력을 통합하여 1959년 5월26일, 포항침례교회 총회를 성공적으로 견인하였습니다. 167명 등록에 267명의 대의원이 출석하여 와병중인 신혁균 총회장을 대리하여 김용해 부총회장의 사회로 제49회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총회장에 김용해 목사를 선출하고 대전총회를 불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또한 애버나티(John A.Abernathy,나요한), 굿윈(J.G.Goodwin,구두원), 윌콕스(Max R.Willcokes,우락수) 말러(Pakers Marler) 등 4명의 선교사 불신임을 결의하고 본국 소환을 요청하였습니다. 포항총회는 안대벽을 중심으로 하는 펜윅의 동아기독교회 주류 보수파로 이들은 결국 새로운 비주류파와 함께 해외선교자금을 놓고 벌인 치졸한 교권쟁탈전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1959년, 침례교회는 기독교한국침례회와 한국기독교침례회로 분열되었습니다. 1968년, 반선교사운동과 교단주권회복운동으로 “한국침례회연맹”으로 다시 재통합되었으며,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다시 명칭을 복원하였습니다. 지금 한국에는 1954년, 미국성서침례회에서 선교한 “한국성서침례회”와 1971년, 미국선교침례회에서 선교한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 등 소수의 교단이 있으나 기독교한국침례회가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등 침례교단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2013년 현재, 2,833개 교회, 5,533명의 교역자, 80만명의 침례교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