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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한국문인협회부천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박영봉
죽음의 푸가
한유주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우리는 허공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갇히지 않는다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 중에서
건물 외벽을 따라 회색 포도 속에 잠겨 있는 조명등의 가장자리를 밟고 지나가는 순간, 발밑에서 눈부신 입김이 훅,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완벽하게 타자화된 이름들이 덧창을 입고 건물의 벽 뒤에 숨어 있다. 언제나 견고한 유리를 덧입은 이들은, 그 이름들은 영원히 저 건너편에 있다. 저만치 깜박이고 있는 녹색 신호등이 눈에 들어오고, 걸음은 조금씩 빨라진다. 불 꺼진 건물의 감추어진 틈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미 해는 떨어졌고, 조금 전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검고 투명한 물안개. 사람들은 처마 밑에서 난처한 얼굴로 서성인다. 다 시들어버린 연꽃이 담긴 독 수십 개가 건물 외벽을 따라 놓여 있다. 도심 속의 연꽃 축제라는 얄궂은 간판 아래 고인 물의 수면 위로, 빗방울이 계속해서 제 몸을 포개고 있다. 구두는 비에 흠뻑 젖었다. 그 안에 담긴 두 개의 맨발은 자꾸만 미끄러진다. 불 꺼진 도로. 숨죽인 차량. 비에 갇힌 사람들.
뒤따라 오던 누군가가 저만치 앞으로 멀어진다. 어깨에 멘 가방을 팔꿈치로 누르면서, 다른 팔은 조금이나마 비를 막으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처마 밑에 있다. 웅성거리는 가운데 짧은 웃음이 높이 울리기도 한다. 잠시 후 그들은 저마다의 방향으로 흩어질 것이다. 건물의 유리문 틈으로 새어 나오던 마지막 불빛이 막 꺼진다. 순간의 정적, 그러나 곧 빗소리가 적막을 메운다.
*
도시의 크기는 침묵에 비례한다. 거리가 팽창할수록 침묵의 더께는 두터워져왔다. 길가에 심겨진 가로수들은 넓은 잎을 흔들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구원을, 그리고 없는 내세를 희구하였으나 자동차의 성난 불빛과 매연, 그리고 더러운 빗줄기로 인해 모든 것을 체념하고 말았고, 그들이 입을 다물자 도시의 적막은 더욱 깊어졌다. 간혹 높이 솟은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에서 시곗바늘이 발을 까딱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모두들 너무 오래 절망한 끝에 이제는 모든 종류의 절망에 대하여 무뎌졌다. 그러나 가끔 그 사실을 거스르려는 사건들이, 저질러진 며칠 후에 신문 지면에 등장했으나…… 사건·사고·이야기는 신문지의 거친 결로만 남아 손가락 끝에서 잊혀졌다. 모두 침묵했다. 간헐적으로 울리는 말들은 마디마디 끊어진 채 유령처럼 도시의 허공을 떠돌다가, 모두 어딘가로, 수챗구멍을 통해, 그리고 한없이 긴 관처럼 매장된 반투명 케이블을 따라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말들이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은 추억했다. 누가, 언제……, 그리고, 그러나, 대화는 지속되는 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추억의 흔적을 더듬으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었다. 플라스틱 쟁반에 담긴 음식, 차가운 음식, 진공 포장된 값싼 음식, 그런 음식들은 간혹 어느 학자들에 의해서 세밀하게 관찰되었고, 학자들은 제물대 위에서, 확대경 밑으로, 지방과 당분이 권태로운 모습으로 엉켜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소유해왔던 삶의 방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지루한 형상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너무나 오래 입을 닫고 있었으므로 어느 순간부터 어떤 단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들을 따라 문장이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말들의 의미가 조금씩 희미해졌다. 꿈결처럼, 그리고 저 건너편의 세계에서처럼 사물과 인간의 어깨 위에 그렇게 희미해진 말들이 걸터앉았다. 누가……, 언제……, 그리고……? 사람들은 멍하니 앉아 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무수히 쌓인 종이 더미와 포스트잇과 대용량 하드디스크의 세계로 자신도 모르게 걸어 들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일생을 살고 나면 누구에게나 죽음이 찾아왔다. 죽음의 창백한 얼굴 앞에서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의 뼈는 종종 가루가 되어 강물로 던져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지난한 삶이 흘러내렸고, 눈가에서는 눈물이, 남아 있는 생을 더듬으며 가만히 흘러내리기도 했으나…… 죽음은 어느 그늘마다 숨어 있다가,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목을 가차 없이 낚아챘고, 그다음에는 그림자를 앗아갔다. 공포, 절망, 평화…….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우연으로 위장하여 찾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에서 죽음은 단 하나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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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구백사십이 년의 어느 날, 징집 명령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영장이 집집마다 힘없이 날아들었다. 사람들은 한 손으로 떨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 발각거리는 흰 종이를 펼쳐들었고, 견고한 활자로 인쇄되어 있는 낯선 이름 위로 잠들어 있는 죽음을 보았다. 사람들은 가만히 종이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발소리를 짓눌러가며 떠났다. 또 다른 명령들도 존재했다. 그런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흰 종이가 배달된 것은 아니었고, 그 대신 깊은 어둠의 시각과 섬뜩한 총부리와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구둣발 소리 한 다발이 안겨졌다. 그들도 모두 떠나갔다. 그러나 혹자는, 그들은 사라졌다, 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 입을 다물었다. 라디오를 켜면 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스스로 도취되다 못해 끝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남겨진 사람들은 묵묵히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전파는 언제나 일보의 전진, 승리의 명제만을 송신했다. 그러나 아무도 소음에 뒤섞여 들려오는 일방적 음성들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는 국가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세계는 이유도 모른 채 전쟁의 포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륙의 곳곳마다 불길이 타올랐으므로, 허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검은 피부 위로 붉은 꽃들이 한껏 피어난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라고 어떤 사람들은 훗날 회고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광경, 이라는 것을 결코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었고, 다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라져간 사람들은 음성의 뒷면에 숨겨져 있었다. 음성이 고른 치아를 거리낌 없이 내보이며 미소를 지어내면, 사람들은 치아의 매끄러운 표면에 시선을 빼앗겼고, 그러는 사이 어느 순간 넋을 잃었다. 국가가 희생을 강요했다. 희생은 언제나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누구나 알아보지 못하도록 암호화되어 바다 위를, 혹은 적지의 영공을 떠돌다가, 급기야는 신에게까지 다다르고는 했다. 신이 기밀 쪽지를 펼쳐보았는지, 혹은 펼쳐보았더라도 군사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국가는 더 많은 사기를, 더 많은 세금을, 그리고 불가능한 작전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곳곳마다 내걸었다. 그리하여 무수히 많은 신들이 지상에 내려왔다. 그러나 그들의 손길은 음성의 뒷면까지 미치지 못하였고, 오로지 전장만 굽어볼 뿐이었다. ……이것이 신의 은총인가?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때면 버릇처럼 절망했다. 누구나 혼자였으나 아무도 그 혼자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고, 신의 그늘 밑에서 스스로를, 그리고 신의 전사들을 위안했다. 모든 사람들이 공범이었다. 신들의 놀이터……, 신들의 주사위……, 사람들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입 막힌 스스로를 발견했고, 마른 입술을 축여 애써 달싹여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굳어진 표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비통한 표상이 되었다. 시곗바늘이 조용히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전쟁의 통증. 살아남았는가? 혹은, 살아남아야만 하는가?
그때, 사라져간 사람들은 저 건너편에 있었다. 조명탄처럼 작열하는 은총의 빛 아래 그들은 영원히 부재중이었고, 노동이 자유를 생산한다는 명료한 표어가 무지개처럼 그들의 머리 위에, 은총이 자리해야 할 곳에 떠올라 있었다. 견고한 철갑의 언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그들의 몸과 영혼은 부피가 줄어들었지만, 그렇게 오그라든 몸으로도 사나운 정맥처럼 불거진 가시철조망의 틈을 빠져나가는 것은 요원하기만 했고, 간혹 철조망을 타넘으려던 가련한 몸들에게는 고압 전류의 세례가 베풀어졌다. 어느 의사의 작동 기제 분류법에 따라, 사람들은 반발했고, 그다음에는 증오와 저주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념이 찾아왔다. 이러한 감정들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다. 거울 화장실의 벽 칫솔 밀가루 그리고 자음의 폭력,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어느 누군가는 단언했다. 그러나 이미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의식도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중에 그들을 위한 무덤이 건설되었다. 죽음이 그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앙상한 손을 늘어뜨리고 찾아왔다. 그리고 없는 그들 곁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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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긴 줄의 끝에 누군가가 세워졌다. 그는 앞선 사람의 등허리에서, 그리고 더 앞선 사람의 어깨 너머로, 병든 징후로 푸른 줄무늬가 새겨진 물고기떼 사이에서, 죽음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드는 모습을 보았다. 살아남았는가? 혹은, 살아남아야만 하는가? 일 초의 순간은 너무나 길었고, 무수히 많은 문장들이 그 일 초 사이, 그의 머릿속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곧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편에 서면 죽음이 그대를 축복하리라,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그는 채 일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움직였고, 그 간극이 삶과 죽음을 갈라놓았다. 그는 저 건너편으로……, 그리고 그를 대신한 누군가가 이편에서 목숨을 잃었다. 푸른 줄무늬 물고기들이 하나 둘씩 노란 별을 떼어냈다. 그러자 암흑이 찾아왔고, 비린 물내음이 어디선가 끊임없이 풍겨왔다. 확성기를 타고 둔탁한 자음의 명령들이 흘러나왔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시린 햇빛 아래 곳곳마다 숨어 있는 어둠, 아득한 어둠의 덩어리들……. 한낮에도 유령은 사라지지 않았고, 살아남은 그를 저주했다. 그러나 그의 목을 조르는 것은 유령이 아니었고, 그가 삶과 맞바꾼 시, 가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시들이었다. 아무리 문장을 토해내도 삶은 텅 비어가기만 했다. 그의 이름은 첫번째 글자가 모음에서 자음으로 바뀌었고, 그리하여 철자의 순서가 바뀌었고, 그러는 동안 가운데 글자들이 사라지고 말았으나, 이름이 그런 공정을 거치는 동안, 그의 죄는 무게를 더해가기만 했다. 우리는 허공에 무덤을 판다고, 그는 종종 중얼거렸다. 고통의 시간이 타박타박 흘러갔다. 그동안 아무도 그를 구원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몸은 몸 스스로에 의해 센 강에 던져졌다. 흐르는 물결 위로 허공의 무덤을 뒤덮으며 그의 시들이 재가 되어 떠돌았다.
천구백사십오 년의 어느 도시에서 시간이 영원의 속도로 정지했다. 그 놀라운 소식을, 다른 도시의 사람들은 긴급 타전된 무선 송신으로, 길거리에 흩뿌려진 신문의 앞면에서, 혹은 누군가로부터 묻어온 풍문으로부터 전해 들었고,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 광경을 목격,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가 들려오는 저 건너편에서, 버섯구름이 한껏, 상상이 틈입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환영을 보았다. 백만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그 순간, 냉혹한 명령을 내렸던 어느 누군가는 햇빛이 싸늘하게 흘러드는 창을 등지고 앉아 다른 누군가의 귀엣말을 듣고 있었다. 아이를 무사히 낳았습니다. 죽음이 무사히, 태어났다. 작전은 비밀스레 수행되었고, 그 결과는 은유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시는 범죄가 아니었고, 그러므로 아무도 벌할 대상을 찾지 못했고, 아무도 벌할 대상을 찾지 않았다.
겉장이 달아나고 없는 세계의 사진첩을 펼치면 온갖 질병과 음모와 저주가, 청동 검과 석상과 부서진 뼈들이, ……악의에 찬 대화와 노기 띤 음성과 검이 부딪히는 섬뜩한 소리가…… 핏빛 그림자를 드리운 채 당장이라도 이편으로 뛰쳐나올 순간을 노리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세계는 그 사진첩에 또 하나의 경이로운 사진을 간직했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그 사진을 꺼내보며 히로시마를 추억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과거는 언제나 저 건너편에 있었다.
처마 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걸음을 재게 놀려 지하철역 쪽으로 사라진다. 빗줄기는 가느다랗지만 줄기차다. 사람들의 어깨 위가 부옇다. 한 블록을 모두 차지한 거대한 건물이 어둠 속에 반쯤 몸을 감추었다. 언제부터 이 빗속을 걸어왔을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비는 점차 더 많이 내렸고, 거리는 모두 젖었다. 아스팔트 도로를 지치는 자동차의 고무바퀴가 빗물로 인해 고통스러운 마찰을 겪는 사이, 가로등 불빛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 비의 입자들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구두 속의 맨발은 자꾸만 미끄러진다. 저 멀리 교회의 지붕이 흘러가고 있다. 빗물에 어느새 발목까지 잠겨 있다. 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태곳적부터 사용되어온 방식으로, 지금쯤 강은 기둥과 창문과 계단들을 비밀리에 떠내려 보내고 있을 것이다. 예배당의 한쪽 벽에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는 중력이 끌어당기는 집요한 힘에 이끌리고 말았고, 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아래쪽으로 흘러 내려왔다. 유리창의 흘러내림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은밀히 이루어졌으나, 투명하고도 성스러운 종교화들은 세월에 의한 타락을 완벽히 감추기 위해 하나씩 그리고 하나씩 흐르는 물에 몸을 던졌다. 한때 오색으로 빛나던 유리 조각들은 어느 알려지지 않은 바다로 흘러가거나, 혹은 해초에 휘감겨 가만히 몸을 흔들거나, 혹은 지나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생채기를 남기다가, 강바닥에 깔린 자갈과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곱게 부서져 가루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계속해서 흘러가는 강물에 성경의 한 구절이 덧없이 새겨질 것이며, 익사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수장된 자들과 물속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위한 미사가 조용히 집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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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다른 현상들처럼 침묵에도 여러 방식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침묵을 부정했다. 대개 짧은 침묵 다음에는 폭소가 이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침묵에 대한 글을 쓰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장들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고, 무수히 많은 밤이 지나갔지만, 사람들은 말줄임표 이상의 문장을 쓸 수 없었고, 그렇게 긴 침묵 속을 헤매며 걸어가다 보면 모든 일들이 부질없게 생각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내뱉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말의 뒷면에 음습한 습기가 고여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점점 고독한 일상을 즐기게 되었지만, 아무에게도 그러한 자신을 고백하지 않았다. 도시는 점차 공공연한 비밀 속으로 침잠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느 순간, 섬처럼 고립되고 말았지만, 아무도 부표처럼 떠다니는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부표를 걸어 맨 밧줄의 끝이 너무나 깊이 묻혀 있으므로, 누구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눈치챘다 하더라도 도리어 고마움을 느꼈다. 전락과 영락은 가장 커다란 공포였다. 시간이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지나갔고, 가난한 사람들의 시간이 멈추어 있거나, 거꾸로 역류하는 사이 부유한 사람들의 시간은 권태로운 리듬을 타고 흘러갔다. 질곡이 나날이 깊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했다: 권태는 죄악일까, 혹은 형벌일까. 어떤 사람들에게 절망은 권태였다. 그들은 사물에 질서와 위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이웃과의 인사, 애완동물, 격식을 차린 식사, 초대장, 크리스마스용 전구.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절망이란 세계 그 자체였다. 독촉장, 자릿수가 하나 더 늘어난 가격표, 곰팡이 핀 벽, 낡은 운동화, 먼지가 내려앉은 계단. 그들은 끊임없이 움직였고, 매일같이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았지만, 결코 제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고, 그러한 그들의 궤적은 대개 그들의 아들딸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기 일쑤였다. 수면은 언제나 저 멀리 있었다. 그들은 종종 호흡 곤란을 일으켰다.
산란기의 태양은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며 무수히 많은 알들을 낳는다. 어디서나 풍성하게 넘쳐흐르는 빛, 빛줄기들. 길가에 심겨진 가로수들은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마 위에서 부서지는 아련한 빛. 양달 안에 들어서면 눈이 부셔 사물의 윤곽이 온통 뭉그러진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태양은 대개 세계를 터무니없이 밝게 비추었지만, 밤이 되면 가차 없이 어둠이 내렸다. 사람들은 두 눈을 감고 잠들었지만 어둠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배분되었음에도 간혹, 잠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뜬눈으로 긴긴 밤을 지새우다가, 견딜 수 없어지면, 동공을 오므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별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먼 옛날, 불사의 몸을 얻은 인간들은 지하 묘지에 안장되는 대신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고 전해졌다. 그들을 위한 하늘의 곁방이 무수히 많은 신들의 이름으로 보장되었고……, 옛 영웅들은 검푸른 하늘을 일 년에 한차례씩 엄숙하게 순회하며 신에게 사역했다.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지속되어온 일이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망원경의 가시거리가 길어졌고, 그에 따라 발견되는 별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새로이 관측된 별들에게 고귀한 이름들이 하나씩, 그리고 하나씩 계속해서 붙여졌으므로, 하늘은 보다 더 조밀하고, 섬세한 구획을 필요로 했다. 신들의 이름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밤이 되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도시를 뒤덮은 소음과 매연은 날이 갈수록 짙어졌고, 그리하여 수천 년 시간의 흐름으로 인하여 지상에서 벗어나게 된 책들이 한 장씩, 그리고 한 장씩 천천히, 뜯겨나가는 동안, 이야기는 얼굴을 흐리면서, 저 멀리, 저 먼 곳으로, 저 건너편으로……, 하나씩 둘씩 사라져가고 말았다. 잠들지 않은 사람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끝내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오래전에 모두 매진되었다. 길가에 심겨진 가로수들은 체념한 듯 몸을 흔들었고, 그때마다 나뭇가지들은 천 개의 잎사귀들을 예고 없이 한길에 흘려보냈다. 사람들은 그런 풍경에서, 도시의 서툰 낭만화 수법을 읽어냈고, 그들 중 몇몇은 그 황량함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서는, 어느 순간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슬픔은 날이 갈수록 아름답고 정교하게 포장되었고, 도시의 스펙터클은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고 장엄해졌으나, 사람들은 무엇에도 감동하지 않았고, 기대와 전율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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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뒤, 천구백사십이 년의 어느 날 사라졌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귀환을 기적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기적이란 신의 분실물에 불과했고, 우연히 그들이 주웠던 것뿐이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옛날의 집은 마치 거짓말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들은 눈가가 젖어드는 것을 느끼면서, 떨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문 앞에 다가가 섰다. 그들이 타고 온 기차는 밤을 새워 덜컹거렸고,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바퀴의 덜컹거림에 묻혀 가늘게 들려왔었다……. 그들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고, 다시 내쉬었다. 두 눈을 깜박였다. 햇빛이 사나웠다. 마침내 그들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이 미동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문을, 처음에는 약하게, 그러나 점차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굳게 닫힌 나무문은 두들김에도 아랑곳하지 않다가, 두근거림과 증오와 슬픔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뒤섞인 주먹질이 계속되자 마치, ……거짓말처럼, 부서져 내리고 말았다. 그들은 깜짝 놀라서, 뒤로 한 발짝 주춤거렸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문이 있던 자리에, 어둠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고, 사람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창문은 모조리 닫혀 있었고, 커튼까지 덧씌워져 있었기 때문에, 집 안은 잃어버린 기억처럼 고요하고 어두웠다. 그들은 싸늘하게 식어 있는 난롯가로 다가갔다. 선반 위에 가족사진들이 담긴 액자가, 기억 속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이 액자를 비추었다. 그들은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액자를 집어들었으나, 테두리 안에는 가족의 누구도, 아니, 누구의 가족도 들어 있지 않았고, 텅 빈 구멍만이 깊숙히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젖어오는 눈가를 비비다가, 액자의 유리에 입김을 불어 소매 끝으로 닦아보다가, 그래도 아무런 형상이 떠오르지 않자 급기야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액자는 그들의 손아귀 안에서 맥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들은 두 주먹과 두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고함을 질러댔고, 그 소리에 놀라 어둠이 잠에서 깨었으므로, 사위에는 더욱더 어둠이 짙어졌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저앉았다. 그들의 고함 소리는 벽과 기둥과 그리고 지붕에까지 스며들었고, 그리하여 곧 사방의 벽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어서 기둥이 하나 둘씩 허물어졌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붕이 마치, ……거짓말처럼…… 내려앉기 시작했으나, 그들은 몸을 피하지 않았다. 그들의 집이 그대로 무덤이 될 것이었다.
도시의 호흡법은 언제나 크레셴도, 혹은 데크레셴도였다. 도시의 어둠이 공급이 넘치는 전력과 네온사인으로 인해 옅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불면에 시달렸다. 그들은 종종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들은 생각했다: 어째서 우리를 평등하게 하는 것은 어둠뿐인가. 그들은 날이 밝아올 때까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도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방 안의 어둠은 여전히 검고 고요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상상했다: 초고층 빌딩, 바빌로니아를 현대의 감각으로 모사한 공중 정원, 야외 피로연, 휴가철의 나른한 거리, 햇빛, 그리고 햇빛. 찬란한 햇빛……. 그러나 부유한 자들의 도시가 한없이 맑고 투명한 판유리를 통해 일조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는 동안, 가난한 자들의 도시가 가진 유리창들은 모두 오래전에 금이 가거나 깨어졌고, 안개만이 시종 두꺼운 장막처럼 그들 위에 군림할 뿐이었다.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전해지는 커다란 채광창은 하나의 꿈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위로만 뻗어가는 도시의 고층 빌딩들의 밑바닥에서 그들은 종종 길을 잃었고, 그들의 그림자는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누군가가 아무렇게나 헝클어놓은 미로처럼 서로 엉켜들기만 했다. 어떤 이야기들은 항상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사람들은 잠들기 전에 생각하고는 했다: 이 잠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그러나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그들은 눈을 뜨고 또다시 절망해야 했다. 꿈 없는 잠, 잠 없는 꿈, 낮이 되면, 그들은 결코 끝나지 않는 이야기들을 남몰래 꿈꾸었다.
그리하여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도시에 흘러넘쳤다. 이야기들이 서로를 질투하고, 베껴대고, 급기야는 한 몸이 되는 동안, 사람들은 여전히 버릇처럼 침묵했고, 버릇처럼 절망했다. TV를 켜면 언제나 수상한 이야기들이, 우편물을 뜯으면 언제나 사무적인 이야기들이, 옆집과 맞닿은 벽에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은밀한 이야기들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애써 무심한 척하거나, 아니면 더 가까이, 그리고 더 분명하게 듣기 위해 소리 쪽으로 다가가다가, 다른 이들에게 그 부끄러운 몸짓을 들키기도 했다. ……누구를? ……무엇을? ……그리고? 엿듣고 싶다는 욕망은 말하고 싶은 욕구보다 항상 먼저였다. 태아가 자궁벽에 귀를 갖다 대고 자궁 밖을 엿듣는 것처럼, 사람들은 언제나 낮게 들려오는 소리와 목소리들 쪽으로 귀를 열었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귀로부터 스스로의 혀를 보호하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천구백칠십팔 년의 어느 날 누군가의 연인이 죽었다. 부활은 이천 년 전 이후 한 번도 되풀이된 적이 없었으므로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시간의 부스러기들을 떨치면서 그는 격하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연인은 대답하지 않았고, 메아리만이 비틀거리며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는 흔히 초인이라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여느 인공의 탈것보다 빠르게 달렸고, 하늘을 날았고, 짐승처럼 민첩하고 예민했으므로,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우상이었다. 모두가 그를 위해 환호성을 질렀고, 아이들은 그를 숭배했다. 가련한 육신들의 꿈, 그는 연인을 잃었다는 사실이 마냥 수치스러웠다. 발돋움을 한 사람들은 그의 어깨너머로 눈물이 늪처럼 고이는 것을 훔쳐보았다.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수군거렸다. 그는 눈을 깜박일 때마다 여린 고통을 느꼈다. 살아남았는가? 살아남아야만 하는가?
그래서일까. 그는 이윽고 눈물을 거둔 채 저 하늘로, 대기권 밖으로, 지구의 중력이 미치는 곳 너머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지구는 줄어들었다. 그는 우주의 고요함 속에서 지구를 잠시, 굽어보다가, 곧 지구가 자전하는 반대 방향으로, 빛의 속도로, 아니, 빛보다 빠르고 난폭한, 속도로, 지구를 돌기 시작했다. 회전 한 바퀴에 일 년어치의 시간이, 일 초, 일 초, 일 초씩, 되돌아갔다. 그러자 그의 눈물이 거꾸로,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의 공포가 경악으로 변하는 사이, 비극의 흔적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던 그 순간, 연인이 드디어, 다시, 살아난다! 연인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슬픈 기억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듯이. 화면 밖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탄성을 올렸다. 되돌려진 시간 속에서 그들은 다시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화면 밖에서 시간은 여전히, 지나갔고, 화면 속의 그들이 지구의 자전을 멈추면 시간이 멈춰 서고, 지구의 자전을 되돌리면 시간이 되돌려진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시간을 거스르는 유일한 방법은 유아기를 가장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 은연중에 깨닫게 되었으나, 아무도 그러한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고, 감히 그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화면 속의 그들은 하나의 슬픈, 꿈이었다. 그런 꿈들을 위해 사회가 금고를 열면, 산업은 금고를 덜어냈고, 사람들이 다시 금고를 채워 넣었다. 그런 일들이 수없이 되풀이되었고, 그에 따라, 날이 갈수록 백일몽은 현대에 걸맞은 규모로 부풀어 올랐다. 사람들이 그것을 진화라고 불렀다.
그래서일까. 천구백사십오 년 이후, 세계는 빠른 속도로 진화했다. 속도는 사람들을 매혹시켰고, 더 빨리, 더 빠르게…… 모든 일들이 생겨나고, 벌어질수록, 추억은 조금씩 낡아갔다. 기억은 날이 갈수록 두께가 얄팍해졌으므로, 그렇게 투명해진 기억을 들여다보면 저 건너편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멍하니 있는 일이 잦아졌다. 기억이 어느새 조금씩 유기되기 시작했고, 손아귀 사이로 흘러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록하려는 욕망을 드러냈다. 백 시간 지속되는 배터리, 실물보다 선명한 오백만 화소의 화면, 케이블을 타고 전송되는 0과 1의 이미지, 사람들은 사진을 찍었다. 한낮에도 플래시 불빛이 곳곳에서 번득였다.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대개 그 자리에서 쉽게 지워졌고, 보다 밝은 조명과, 보다 완전한 구도 아래 새로운 사진이 찍히고 나면, 어떠한 어둠이나 혹은, 빛의 손길도 거치지 않은 채, 무수히 복제되어 전자 바다를 떠돌았다. 오늘 점심에 먹었던 샌드위치, 그 샌드위치를 팔던 거리에서 나눠 주는 풍선, 그 풍선이 비껴 지나치던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오후의 풍경, 그 풍경 속을 지나가는 옛 연인, 그 연인이 선물했던 인형, 그 인형 곁에서 하품하는 고양이, 그리고 그 고양이가 발을 담가보던 빗물 고인 웅덩이, ……그런, 소소한 일상의 이미지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하나의 섬이 되기도 했다. 오랜 표류 끝에 지친 몸들이 그 어느 섬에 다다르면, 일상은 밋밋한 얼굴을 감추고서 신화라는 옷에 팔을 꿰었고, 사람들은 서로가 가진 일상의 추억들을 거리낌 없이 소비했다…….
*
별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드문드문 살아남아 잘 닦인 총알처럼 반짝이던, 그렇게 도시를 위협하던 별들은 모두 빗줄기 사이로 사라졌다. 사람들에게 별은 더 이상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별이 행성이라는 여분의 이름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은 수소와 질소가 끊임없이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신경증적 장면들을 상상했다. 그리하여 어느 악사의 하프가, 옛 영웅의 커다란 칼이, 반인반수의 등줄기가, ……그런 식으로, 전설을 잃고 말았고, 그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서 신이 부과한 노동의 의무를 이행할 뿐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별들의 움직임을 더 이상 읽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이야기들도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다.
물은 이제 정강이까지 차올라 있다. 다리를 부여잡는 물의 저항이 점차 완강하게 느껴진다. 쉼 없이 늪처럼 고이는 빗물은, 눈부신 입김을 내뿜던 포석들로 제단을 쌓고, 더러운 독 안에서 시들어가던 연꽃들로 제단을 장식하고,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누군가의 숨결을 낚아채어 제단을 밝히려고, 계속해서 새로이 떨어지는 빗물을 제 몸 위로 받아들인다. 높은 건물들은 아직 질식의 위협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흘러가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모두 잠기리라.
저 멀리 자동차 몇 대가 물속에 던져진 관처럼 떠내려가고 있다. 전조등이 두어 번 깜박이다가 곧 숨을 멈춘다. 안개가 퍼뜨려진 빛을 부드럽게 문지른다. 안개는 사람들을 가두듯이 빛을, 겨울날 차갑게 얼어붙은 입김처럼 제 몸 안에 가둔다. 안개에 스며든 빛의 멍울들은 물 위로 하나씩 하나씩, 오롯이 띄워진다. 죽은 자들의 영혼은 모두 그 빛을 따라 떠나간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가련한 몸은 중력의 속박을 떨쳐내지 못하고 물속 어두운 밑바닥에 남겨질 것이며, 시든 연꽃잎들이 그 몸들을 천천히 내리덮고, 세찬 물살에도 흘러가지 않고 남았다가, 처음에는 그 몸들의 남루한 옷이 되어줄 것이며, 날이 가고 달이 차서 마침내 모든 기억들이 떠나가고 나면 천천히, 그 몸들 위로 스며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먼 곳에서 그 몸들을 바라보면, 죽은 물고기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비늘 더미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며, 바람이라도 불면 잘각잘각 옴작거리는 소리가, 덧없는 소문처럼 스산하게, 들려올지도 모른다.
지구는 하나의 푸른 공이었다. 무료한 시간이면 신들은 지구를 굴리면서 공놀이를 했다. 신들은 언제나 무수히 많은 희생양들을 요구했다. 공이 던져질 때마다 죽음의 자비로운 시선이 집요하게, 공의 궤적을 좇았고, 등 뒤로 감춘 천 개의 손을 침착하게 달각이고는 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기억 속에서 잊혀진 수많은 이름들을 떠올렸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 저승의 입구에는 머리 셋 달린 문지기가 있으며, 그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지니고 온 밀떡을 주어야 한다는, 그리하여 문지기가 강을 건너는 배를 내어주고, 그 강을 건너는 동안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기억이 사라지므로 죄가 씻겨지고, 죄가 사해지므로 고통이 사라진다는, ……그러므로, 누구나 밀떡을 하나씩 준비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굳게 믿었고, 죽음은 대개 돌연히 찾아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내뱉지 못하는 말들처럼, 입 안에 밀떡을 품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부유한 자들이 밀떡을 입 안에 두 개, 세 개, 그리고 두 손에까지 가득 품고 저승으로 유유히 입장하는 사이, 밀떡 하나의 여유가 없었던 가난한 자들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을 뿐이었고, 그런 그들을 기다리던 머리 셋 달린 문지기에게 목덜미와 가슴팍을 물어뜯기고, 등허리를 꺾이면서 발버둥치다가, ……지친 육신이, 밀떡 대신의 제물이 되고 말았고, 어서 빨리 저 강에 던져지기를, 이 고통들이 모두 사라지기를 간절히 소망했으나, 그들에게 던져진 것은 한 줌의 강물이 아니라, 머리 셋 달린 문지기의 걸신들린 입아귀였고, 문지기는 지상의 날숨에 늘 주려 있었으므로, 세 개의 거대한 입을 한껏 벌려 저승에 들어서려는 밀떡 없는 자들을 맞아들이고는 했다. 비명 소리가 어디선가 쉼 없이 새어나왔다. 간혹 사람들은 생각했다: 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걷다, 뛰다, 그리고 추락하다, 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죽다,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저 앞에 줄지어 늘어선 저 사람들은 지금쯤이면……. 먼 옛날, 날개옷을 잃어 하늘로 돌아갈 수 없던 어느 누군가의 기나긴 탄식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무거운 몸을 받아들여야만 했으나, 그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달에서라면 이곳에서보다 반의 반 그리고 또 반만큼이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서 바다와 드넓은 땅과 기나긴 길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어느 언덕 위에는 얼음처럼 희게 빛나는 육각 건물이 늘어서 있다. 그 안에 들어서는 자는 누구나 무균실로 인도되어 두 뺨과 겨드랑이 밑과 발가락 사이가 구석구석 씻겨지고 먼지 하나 없이 소독되어 지상의 오염을 모두 떨군 다음에야, 인류가 생각해낸 가장 장엄하고, 가장 공허한 꿈과 마주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그곳에는 언제나 둥근 달이 떠오르고, 유리를 얹은 지붕들은 밤에도 달빛을 받아 미미한 열기를 발밑에 간직한다. 토끼의 앞발 알라우네 늑대인간 발푸르기스의 밤―사람들은 마법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입을 다문다. 달의 표면을 더듬는 인간의 손길, 경이로운 순간, 금방이라도 까끌까끌한 모래알들이 만져질 듯한 사진들을 무선 송출하는 위성의 길고 뾰족한 안테나, 저 안테나는 신의 더듬이일까, 라고, 몇몇 사람들은 종종 궁금해한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달 기지로 가려면 끝없이 길게 뻗은 이차선 도로를 한참이나 달려가야 한다. 마주 오는 차도 없이 지평선은 영원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 소리도 없이 이동하는 새떼들, 일 년 내내 명상에 잠긴 몇 그루의 선인장, 그리고 독백처럼 간직해둔 아스팔트 도로를 연신 풀어놓는 자갈투성이의 사막, 사막, 다시 목이 말라온다. 사람들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트렁크에 실어놓은 물병을 꺼내기 위해 차를 세운다.
그렇게 몇 모금의 물이 혀를 지그시 누르다가 목을 타고 넘어가면, 그 순간 사람들은 어떤, 깊숙이 갇혀 있던 기억 하나가, 지평선 위로 활짝 펼쳐지는, ……또 다른 순간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잠시 핸들 위에 고개를 묻고 눈물을 떨구면서, 방금 전에 언뜻 나타났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왜 갑자기 이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생각했으나, 눈물은 마침내 생의 하류에 도달한 것처럼 조용히, 끊이지 않고 흘러내리기만 할 뿐이었고, 사람들은 한순간 스러져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지나온 시간들을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는 없었고, 다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벌어진 손가락 틈으로 늘어진 하늘을 무연히 응시할 뿐이었다.
아이가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고 나면 달이 차고 기울듯이 자연스레 다시 아이가 되었다. 아이는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 어른이 되었고, 그 후에는 기억을 한 장씩 꺼내 남몰래 그 귀퉁이를 갉아먹으면서 살아갔다. 그렇게 한 철을 살고 나면 누구에게나 죽음이 찾아왔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죽고 나면 남겨진 사람들은 죽은 자가 대체 누구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다만 그의 머리맡에, 이제 모든 것을 두고 가노라, 라고, 틀에 박힌 비문을 새길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유산은 보잘것없이 빛바랜 사진 몇 장이 전부였고, 그러므로 사람들은 대개 백짓장처럼 깨끗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희디흰 살결 위로, 무엇인가가 거친 솜씨로 지워진 자국이 서투르게 남아 있기도 했으니……, 그것은 신에게 도둑맞은 그들의 텅 빈 일생을 증언하는 단 하나의 흔적이었다.
적막이 도시를 집어삼켰다. 사람들은 좀처럼 웃지 않았다. 항상 켜져 있는 텔레비전은 종종 부주의한 농담을 내뱉었고, 제가 던진 말이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혼자 킬킬대며 웃고는 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난처해하며 하찮은 농담 하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남몰래 비관했고, 꺼진 화면의 새까맣고 매끄러운 표면에 아물아물 비치는 표정들을 애써 시야에서 거두기도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수히 많은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세계가 진화할수록 비밀의 수요도 늘어났으므로, 멀리 떨어져서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비밀을 조금씩 나누어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면 가끔 정규 방송이 중단되며 속보가 흘러나왔다. 신의 전언은 대개 전선을 타고 도착했다. 공습, 피격, 지진, 홍수, 아나운서의 열띤 목소리, 짤막한 인터뷰들. 그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천구백구십오 년, 우리는 죄가 없다, 고 베를린이 주장했다. 전 세계가 그 말을 듣자마자 뒤를 흘끗, 돌아다보았고, 그곳에서 아이히만의 후손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은 핏기 없는 납빛이었고, 갈고리 십자가를 저마다 훈장처럼 지니고 있었으므로, 도시의 어느 곳에서나 쉽게 눈에 띄었다. 그들에게 과거는 저 건너편으로 사라져간 무엇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없다, 그들은 고함을 질러댔고, 그때마다 둔탁한 자음의 망령들이 연신 잇새로 흘러나오고는 했다. 도시를 온통 낙서로 뒤덮으려는 것처럼 한밤이면 도시의 곳곳에서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는 소리들이 들려왔고, 어스름할 무렵까지 페인트 통을 들고 있던 많은 손들이 냉정하게 움직여 먼 나라에서 온 후손들의 목을 가볍게 비틀기도 했다. 그러나 갈고리 십자가가 쩌렁거리는 소리에 묻혀 절박한 비명이나 신음은 거의 들리지 않았고, 간혹 부상당한 소리들이 포도를 따라 흐르고, 어느 대로변에선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어느 낮은 담을 기어올라 벽을 타고, 굳게 닫힌 창틈으로 억지로 머리를 들이밀면, 간혹 누군가의 귀에 가 닿게 되는 일도 있었지만, 그 누군가들은 언제나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설령 설핏 깨어 있었더라도, 두 눈을 꼭 감고 애써 자는 체를 하거나, 이불을 덮어쓰고 들려오는 소리들을 막아냈고……, 그러면 소리들은 곧,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피와 육체를 물려준 아버지들은 대개 돌아오지 않았거나 무너져버린 옛집 속에 갇혀 있었으므로, 그 후손들에게는 군데군데를 도난당한 기억만이 남겨졌고, 아이히만이 그렇게 사라져간 아버지들을 대신하여 책상들마다 그득히 쌓여 넘쳐나는 기록들 속에 온전히 남아 있었으므로, 유년 시절의 후손들은 기억의 여백에 그 기록들을 즐거이 복사하고는 했다. 그리하여 오십여 년 전 그들의 냉혹한 선조들이, 세계를 부정하기 위해 노동이 자유를 생산한다, 는 철갑 두른 표어로 어떤…… 사람들을 조롱하고, 전류가 흐르는 가시 면류관을 씌워 차례차례 허공의 무덤으로 호출했던 것처럼, 그들은 죄지은 핏줄을 부정하고, 바람이 심한 날이면 여전히, 어디선가 풍겨오는 역한 비린내를 부정하기 위해, 머릿속에 탄환처럼 박혀 있던 기억들을 불러내어 옛 시절의 쌉쌀한 폭력을 거리낌 없이 재연하고는 했다.
그들이 자라난 도시의 한복판에는 존재와 의식을, 노동과 자유를 쉬지 않고 천명하던 누군가의 동상이 서 있고, 그 동상의 발치에는, 나는 죄가 없다, 라는 스프레이 낙서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동상은 오랜 시간 동안 한자리에 서서, 존재와 의식과 노동과 자유가 모욕당하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참을성 있게 견뎌왔고, 발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스프레이 페인트를 분사하는 한낮의 난폭한 손길들을 감수해야만 했으나……, 도시에 어둠이 내리고, 적막한 포도 위로 탁한 공기가 밀려들면, 동상은 남몰래 어깨를 움츠린 채 태양이 어둠을 긁어낼 때까지, 그래서 한 움큼의 어둠만이 발치에 그림자로 남을 때까지 연신 밭은기침을 내뱉고는 했다: 나는 무죄인가? 그러나 그의 기침 소리는 신의 귀에 가 닿기까지는 너무나 나직했고, 그러므로 신은 가끔 고개를 숙여 지상의 만물을 굽어 살피면서도, 키 작은 동상의 뒷모습은 그저 무심히 지나칠 뿐이었다. 신이 이미 그가 누구인지, 혹은 누구였는지도 이미 잊었으므로 그에게 구원이란, 저 건너편을 열심히 기웃거려야만 간신히 그 끝자락이 아련하게 드러나는 그 무엇에 불과했다. 세계가 진화할수록 사람들이 범하는 죄의 가짓수도 무수히 늘어났으나, 오직 신만이 그러한 변화를 깨닫지 못했고, 신이 죄를 알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은 결코 구원의 빛을 기대할 수 없었다. 자비로움의 다른 이름은 무심함이었다……. 신은 기꺼이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다. 사람들은 누구도 내세를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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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지 환영이었을까? 사람들은 지난날 달리던 광막한 사막을 생각했고, 그 위로 가벼이 내려앉아 있던 하늘과 그 한가운데 무엇이 언뜻, 작은 손톱자국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던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어둠이었을까? 그러나 그 두 가지 동작은 너무 빨리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각에 골몰할수록, 나타나고―사라졌는지 혹은, 사라지고―나타났는지를, 무엇이 먼저 일어났는지를 혼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사람들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전방을 응시했다. 어느덧 밤이 깃들어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곗바늘은 더디게 움직인다. 라디오 주파수도 잡히지 않는다. 잠든 동안 기지는 또 어디로 흘러가버린 것일까. 헤드라이트를 켠다. 꼭 그 빛이 닿는 만큼 아스팔트 포장도로의 거친 살결이 드러나고, 어둠은 저만치 물러난다. 적막. 사람들은 몸을 웅크린다. 팔꿈치 사이로, 무릎 안쪽으로 파고드는 어둠. 그들은 시트를 젖힌다. 그러자 저 멀리, 모호해진 지평선 너머로, 달 하나가 나른히, 떠오르는 장면이 밤하늘에 걸린다. 달은 항상 하나였지, 그런데, ……그것은, 저…… 달이었을까? 다시 적막이 내린다. 사람들은 다시금 기억을 파헤친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그들이 지나온 시간들이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들고 있는 화환, 아들의 요람, 익숙한 체취와 얼룩, 어둡기만 하던 방, 고함 소리, 어머니의 손마디, 키를 훌쩍 넘은 커다란 의자, 아스라이 매달린 천장, 그리고 그 모든 시선을 갑작스레 가로막고 등장하는 그 무엇, 검고 둥근, 한 쌍의 어둠. 불현듯 그들은 몸을 떤다. 구름이 눈을 감기듯 달 위로 지나간다.
그러자 어둠이 깊어졌다.
천구백사십이 년의 어느 날 사라져갔던 사람들의 뼈는, 반세기가 지난 뒤에야, 어느 책장의 틈새에서, 혹은 낡은 신문 뭉치들 사이에서, 고스란히 발굴, 되기도 했다. 그들의 뼈는 어둠에 묻혀 세월의 여러 과정을 거치는 동안 희디희게, 표백되었고, 쌓이고 쌓이는 책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서가가 무너져 내리고, 오래전에 폐기된 신문들이 불길에 던져질 때가 되어서야, 책장이 아뜩하니 펼쳐지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했다. 그리하여 어떤 신성한 것을 대하듯이, 조심스레, 그들의 뼈에 손을 내밀었을 때, 손끝이 닿자마자, 오래된 뼈들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설렘도, ……증오도 없이 바스러져 손가락 사이로 가지런히, ……흘러내렸고, 그런 방식으로 그들이 침묵했으므로, 사람들은 결코 그들이 누구인지, 혹은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 수 없었고 다만, 바람이 그들을 실어 갈 수 있도록, 창문을 활짝 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육중한 물의 무게가 가슴팍을 내리누른다. 숨이 가빠온다. 아까 총총히 사라져간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갈라진 벽과 낮은 지붕과 한 폭의 창문으로 남은 그들의 집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물길을 타지 못한 기억들이 손을 뻗어 발목을 부여잡는다. 저 기억들은 몇 겹의 생이 지난 후에 한 알 진주로 남게 될까, 아니면 한 줌 거품으로 끓게 될까. 손을 뻗어 막 기울어지기 시작한 회색 건물의 매끈한 표면을 더듬다가, 빗물을 한 모금 머금고 메마른 입을 축인다. 물에 잠긴 교회 첨탑의 십자가―일렬로 쓰러진 신호등들의 더미가 붉디붉은 마지막 숨을 몰아쉰다. 빗줄기에 가려 달은 보이지 않는다. 방주는 어디에 있는가. 두 발이 서서히 땅에서 밀려난다. 발등을 정교하게 상처 입히던 유리 지느러미들은 물길에 산산이 부서졌을까. 그들은 성령이 되고 물 위를 걸어 하늘로 올라가게 될까.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던 이름들, 타인의 뼈들이 손가락 사이를 마구 스친다. 지금 방주는 어디에 있는가. 신이 인간에게 내려주었던 사진첩이 실수로 펼쳐졌을 때, 갖은 악몽이―혈흔과 잿더미로 남은 기억들이 마구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그 모든 것들이, 눈코 뜰 새 없이 쏟아졌으므로, 사람들은 사진첩을 덮기 위한 최소한의 순간도 가질 수 없었다. 다만 사진첩이 들썩거림을 멈추고, 거의 잦아들었을 즈음에서야, 사람들은 늪처럼 고여 있던 단 하나의 기억을 발견했고, 그것에 권태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렇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야만 감추어둔 밀떡을 잃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지금 사라져간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몸은 지금쯤 머리 셋 달린 문지기의 거대한 강 앞에 다다라 있을까. 물속에서 흐릿하게 번지는 저 잔영들, 한 번도 소유할 수 없었던 기억들이 흩어진 머리채와 손목과 구두 벗겨진 맨발을 휘감아 흔든다. 이 기억들이 물길을 따라 흐르고 흘러 머리 셋 달린 문지기의 강물과 뒤섞이면 저마다 스스로를 잊게 될까.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망각은 안식일까 혹은 면죄부일까. 도시의 휘황한 표지들이 허공을 할퀴며 스러진다. 그것은 달이었을까. 사람들은 일생을 파종하여 값싼 추억을 수확한다. 그렇게 한 철을 살고 나면 누구에게나 죽음이 찾아왔다. 가만히 손을 뻗어 죽음의 기운 얼굴을 더듬는다. 죽은 자들은 어느 알려지지 않은 바다로 흘러가는가. 이미 오래 전에 두 짝 구두는 발에서 벗겨진 채 잠기고 말았고, 그런 식으로 구두 몇 켤레를 살고 나면 누구에게나 죽음이 찾아왔다. 그리하여 간신히 한 줄의 비명으로 남은 생. 그들의 뼈가 소리 없이 가라앉고 있다. 까마득한 천장 수몰지구 갑판 트럭 공복의 나날들―아아, 방주는 어디에 있는가. 한 떼의 사람들이 입 속에 밀떡을 단단히 가두며 무슨 말인가를 되뇌고 있다. 그 말을 들으려는 자는 물길을 헤치고 귀를 열어 빗물 젖지 않은 날 숨을 길게, 길게 들이마셔야 한다……. 그 말을 듣기 위해서는 신조차 숨죽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