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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현재 중국 각 성(省) 박물관에 가 보면 큰 지도가 붙어 있다. 그 지도에는 예외 없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동쪽 끝을 한반도 깊숙한 황해도까지 연결해놓았다. 만리장성이 황해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면 북한 사람들은 굳이 만리장성을 구경하러 중국까지 갈 필요가 없다. 또 남한 사람들도 금강산 관광단처럼 만리장성 관광단을 구성하자고 제안해야 한다. 북한 지역에 만리장성이 있다는데 굳이 중국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유사(有史) 이내 수천년간 한반도 내에서 만리장성을 구경했다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많은 글을 남겼던 조선의 문인(文人)들도 조선 땅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시(詩)나 기행문(紀行文)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공식 견해를 담고 있는『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은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그려놓고 있다.
중국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한사군(漢四郡)에 있다. 중국 고대 한나라[漢國]가 고조선(古朝鮮)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식민통치기구 한사군의 중심지가 낙랑군(樂浪郡)이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고 나머지 군(郡)들도 대체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주장을 지도로 표시한 것이다.『사기(史記)』「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遂成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이라고 처음 주장한 인물이 일제식민사학자(日帝植民史學者)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다. 이는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적 뿌리가 일제식민사학(日帝植民史學)임을 말해준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아가자 정부가 만든 기구가 고구려사연구재단(高句麗史硏究財團)과 이를 계승한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이다.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홈페이지)의 ‘올바른 역사’라는 항목은 고조선에 대해서 “기원전 3~2세기 준왕(準王) 대(代)의 고조선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은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고조선과 위만조선 도읍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곳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이었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의 기술(記述)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또 실제로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는 중국사의 영역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가 맞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아니다’는 수세적 방어네 나서야 할 것이다.
이나바 이와기치가 만든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成縣)=황해도(黃海道) 수안군(遂安郡)’ 설(說)의 문제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사학계는 이런 문제점을 외면한 채 해방 후에도 이를 정설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가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는 한국 주류사학계의 뿌리도 일제식민사학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말해준다.
중국 학자들은 중국의 국익을 위해 동북공정을 주장한다. 한국 학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를 위해 동북공정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일까? 그들은 이런 이론이 실증(實證)으로 찾은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반대쪽의 실증이 더 많다.
그렇다면 동북아역사재단은 어떤 견해를 따라야 하는가? ‘낙랑군 평양 설치설(樂浪郡平壤設置說)’,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이 맞다고 생각하는 학자라면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기구에 근무해서는 안 된다. 그 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적하라고 설립된 기구이지, 동북공정에 동조하라고 국민세금으로 운영하는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학자 개인의 학문적 자유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낙랑군 평양 설치설’의 신봉자라면 개인 연구소를 차려 연구를 심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낙랑군 평양 설치설’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국가기관에서 국민들의 세금으로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연구를 하는 반면 이와 반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연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란 것이 있다. 서기 3~4세기까지의『삼국사기(三國史記)』초기기록은 김부식(金富軾)이 조작한 가짜라는 것으로 현재 주류 사학계(主流史學系)의 정설(定說)이다. 이 이론의 창안자 역시 일제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律田左右吉]다. 쓰다 소우키치의 한국 고대사관(韓國古代史觀)은 간단하다. 1910년대 남만주철도회사(南滿州鐵道會社)의 위촉을 받아 쓴『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등의 저서에서 소우키치는 고대 한반도 북부에는 낙랑군(樂浪郡)을 비롯한 한사군(漢四郡)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는 삼한(三韓)이라고 불린 78개의 소국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래야 한반도 남부에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존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이 시기 한반도 남부에 삼한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서술할 뿐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서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우키치는『삼국사기』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을 창안해낸 것이다. 그러면서 “『삼국사기』상대(上代) 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다”며 마치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과장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는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임에도 8·15 광복 후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은 부인하면서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그대로 존속시켜 정설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대학 내의 강단사학자들과 대학 바깥의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역사인식을 두고 집단적 갈등을 겪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재야사학자들은 강단사학자들을 일제식민사학자들의 후예라고 비판해왔고 강단사학자들은 이들을 실증은 없이 주장만 있는 비전문가들이라고 비판해왔다. 같은 사(史)자를 쓰지만 양 진영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전혀 없다. 사(史)에 대한 양자의 출발선이 전혀 다른 탓이다. 어느 진영에 속하든 해방과 동시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만든 한국사 인식체계, 곧 식민사학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이 수행되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학계는 8·15 광복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연구를 진행한 적이 없다. 총론으로는 정체성론(停滯性論) 비판이니 타율성론(他律性論) 비판이니 하는 식으로 식민사학을 비판했지만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과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듯이 각론은 식민사학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제식민사학자들의 후예라는 비판은 상당 부분 한국의 주류 사학계가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뿌리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한국 주류 사학계의 뿌리를 캐봐야 한다. 한국 사학계의 주류 이론은 두 가지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 노론사관(老論史觀)이다. 이 두 사관의 뿌리는 같다. 조선 후기 내내 집권당이었던 노론(老論)의 상당수 인사는 일제(日帝)의 대한제국 병탄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고, 식민지 시대에도 지배계층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가문 출신 중 일부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식민사관 전파에 일조했고 이들이 8·15광복 이후에도 역사학계 주류를 장악한 결과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한국사를 구성하는 주요 관점이 된 것이다.
이율곡(李栗谷)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한 것처럼 조작하고, 효종(孝宗) 군왕의 북벌정책(北伐政策)에 가장 크게 반대했던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북벌론(北伐論)의 화신처럼 서술하고, 노론 당론과는 상극일 수밖에 없는 실학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최근에는 정조독살(正祖毒殺)의 혐의를 받는 노론(老論) 벽파(僻派)가 정조의 우당(友黨)인 것처럼 주장했다. 조선 후기의 역사를 노론의 시각으로 본 결과물들이다.
노론사관과 일제식민사관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다 보니 민족해방 후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식민사학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이 수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 ‘현대사 연구 금지론(現代史硏究禁止論)’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사학계에서는 ‘역사학자는 현대사를 연구하면 안 된다’는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반역사학적(反歷史學的) 명제가 지배해왔다.
현대사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명분이었지만 객관성은 역사학자의 양식과 연구 자세의 문제일 뿐 시기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고대사가 일제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거듭된 공격을 받는 것 자체가 고대사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현대사는 비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청동기시대에야 국가가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한 식민사학의 숨은 의도였던 것처럼 현대사 연구를 금지한 속내 역시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 연구 금지론’에 따라 역사학자들이 반일독립운동사를 외면하다 보니 대부분 불우한 환경에서 쓸쓸하게 죽어갔고 동시에 반일독립운동사의 1차 사료도 사라졌다. 지금은 반일독립운동사를 연구하려 해도 대부분 사망해 생생한 증언을 들을 방법이 없다.
이 네 가지 문제는 한 꿰미에 꿰어진다.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 ‘노론사관(老論史觀)에 의한 조선후기사(朝鮮後期史) 서술’, ‘현대사 연구 금지론(現代史硏究禁止論)에 의한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 말살’은 노론사관과 일제식민사관이 8·15광복 이후에도 한국사의 주류 이론으로 행세하면서 발생한 문제들이다. 두 사관(史觀)의 소유자들이 한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다 보니 국가에서 어떤 역사학 연구 관련 기구를 만들어도 결국은 이들이 차지하게 되어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적하라고 만든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 누리집에 동북공정을 사실상 지지하는 내용이 ‘올바른 역사’란 명목으로 버젓이 오르는 이상 현상이 필연적 귀결이 되는 구조라는 뜻이다. 이 문제는 이제 전혀 다른 인식구조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우리 사회의 담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는 현상의 문제에 집착한 반면 현상을 발생시키는 본질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왔다. 이 글은 바로 그런 본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2세들이 앞으로도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으로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동북공정을 포함하는 식민사관은 침략사관(侵略史觀)이고 노론사관은 상대에게 닫힌 폐쇄사관(閉鎖史觀)으로 두 사관이 사진 침략적, 폐쇄적 성격은 현재 동북아시아의 화해와 평화적 체제 구축에도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적 체제 구축의 선구가 되려면 그 시발점(始發點)은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의 극복에 두는 것이 옳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지사(志士)는 1929년에 출간된『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통해 “자기가 확신하는 것이 꼭 다 옳은 것이 아니지만 자기는 꼭 옳은 줄로 확신하는 것이라야 세상에 공포(空包)할 용기가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단재가 확신을 갖고 세상에 공포한 많은 논설들은 식민사관과 대척점(對蹠點)에 있기에 현재 방치되어 있다. 몸은 해방되었지만 정신은 아직 해방되지 못한 역사관, 곧 정신도 해방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커진 몸집에 맞는 큰 정신을 가진 성숙한 대한민국이 절실할 때다.
2009년 8월 천고(遷固) 이덕일(李德溢) 기(記)
4. 대방군(帶方郡)은 과연 황해도(黃海道)에 있었는가?
◆ 현도군(玄菟郡)의 위치
낙랑군(樂浪郡)의 정확한 위치는 이제 밝혀졌다. 한사군(漢四郡)의 중심지인 낙랑군이 현재의 창려현(昌黎縣) 부근에 있었으니 현도군(玄菟郡)·임둔군(臨屯郡)·진번군(眞番郡)도 그 근처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은 창려현 부근에 있었는데 나머지 삼군(三郡)은 수천 리 떨어진 한반도 내에 있엇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는 낙랑군과 현도군만 기록되어 있을 뿐 김정호(金正浩)의 말처럼 임둔군과 진번군에 대한 기록은 없다. 현도군에 대해서는『한서』「지리지」의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에 설치했다. 고구려(高句麗)를 왕망(王莽)은 하구려(下句麗)라고 불렀다.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대목에 응소(應邵)는 현도군을 옛 진번(眞番)으로, 사실상 같은 지역으로 본 것이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현도군에는 고구려현(高句麗縣)과 상은태현(上殷台縣), 서개마현(西蓋馬縣) 등 3개의 현이 있었다. 고구려현에 대해『한서』「지리지」는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와서 서남으로 흘러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고 서북 경계는 새외(塞外)다”라고 설명했다. 현도군 고구려현에 요수가 흐른다는 이 기술은 현도군을 압록강 부근으로 비정한 기존 시각이 잘못됐음을 말해준다. 또한 고구려현의 서북 경계가 새외라는 말은 현도군의 서북 경계가 한나라와의 경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왕망은 상은태현을 하은(下殷)이라고 개칭했다. 서개마현은『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현도군조(玄菟郡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개마현(西蓋馬縣)은 마자수(馬紫水)가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와 합쳐져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2개 군(郡)을 지나는데 길이가 2천 1백리다."
앞서 고구려(高句麗) 미천왕(美川王)이 공격한 서안평에 대해『요사(遼史)』「지리지(地理志)」는 현재의 내몽골 파림좌기(巴林左旗) 부근이라고 비정했다. 염난수는 파림좌기 부근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강이며, 시라무렌강이 서남으로 2개 군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한서』「지리지」의 서개마현에 대한 설명을 보면 현도군이 현재의 내몽골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대방군(帶方郡)은 어디인가?
현도군의 위치 못지않게 대방군의 위치도 중요하다. 대방군은 낙랑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방군의 위치를 바르게 비정하기 위해서는 먼저『한서』「지리지」에 낙랑군의 속현(屬縣)으로 기록된 둔유현(屯有縣)을 찾아야 한다.『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한전조(韓傳條)’에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196년~220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낙랑군 소속인 둔유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았으므로 대방군은 낙랑군 아래에 있게 되는 것이다.
한국 주류사학계는 대방군의 위치를 현재의 황해도 지역으로 보고 있다.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 지역이었으므로 대방군은 황해도쯤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도 이병도에 의해 정설로 확립된 것인데, 이병도는 그의 스승인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조선역사지리』에서 “낙랑군의 남부에는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대방군(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방)이 분치되었다”고 쓴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해 정설로 만든 것이다.
낙랑군이 실제로 평안도에 있었다면 대방군의 위치비정도 그럴듯하지만 이미 앞에서 낙랑군은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국 고대 사료들은 대방의 위치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살펴보자. 대방(帶方)은 당초『한서』「지리지」에 낙랑군에 속한 25개 현(縣) 중의 하나로 나온다. 그런데 후한 헌제 때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한 곳이 둔유현 남쪽으므로 대방현과 둔유현은 서로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다.
대방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고구려조(高句麗條)’의 “질제(質帝)·환제(桓帝) 연간(서기 146년~167년)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인과관계를 생각하며 해석해야 한다.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고 대방령을 죽였다고 되어 있으니 대방은 황해도일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군국지(郡國志)」도 “서안평현(西安平縣)과 대방현(帶方縣)은 모두 요동군(遼東郡)에 속해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고구려가 공격한 후한 영역에 대한 일련의 흐름을 말해준다. 서안평·대방·낙랑은 모두 요동에 있었다. 고구려는 서쪽으로 진출해 과거 고조선 강역의 회복을 꾀한 것이다. 대방현이 요동이 있다는「군국지」의 기사 하나로도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는 주류사학계의 학설은 설 곳이 없다.
이병도의 위치비정에 따르면(『국사대관』, 51쪽) 고구려 북쪽에 현도군이 있었고 남쪽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이 있었으며, 그 아래 황해도 유역에 대방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지도에 요동을 만주 서쪽으로 표시해놓은 것에서부터 이병도의 논리는 파탄난다.『후한서』‘고구려조’는 고구려가 ‘① 요동 서안평을 침범하여→② 대방령을 죽이고→③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병도는 서안평을 압록강 대안으로 비정했는데, 그의 위치비정에 따르면 고구려가 ‘① 압록강 건너 서안평을 공격하여→② 다시 남으로 평안도를 건너뛰고 남쪽으로 황해도의 대방현을 공격하여→③ 북쪽 평안도 대동강 유역의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는 것이 된다. 낙랑태수의 처자가 대방현에 놀러갔다가 사로잡혔다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낙랑군의 강역인 평안도를 어떻게 통과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이병도의 논리대로라면 고구려는 개국부터 불가능하다. 북방에 막강한 현도군이 있고 남방에 낙랑군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어떻게 신흥 국가가 존립하겠는가? 현도군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낙랑군을 공격한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는 것이 주류 학설이므로 다시 한번 이 부분을 살펴보자. 이병도는 대방군의 위치를 비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둔유현의 위치라고 설명했으며, 그 대략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이른바 둔유현(屯有縣)이 지금의 어디인가를 밝히면 대방(帶方)의 북계(北界)는 저절로 알게 된다. 둔유현은 그 이름이 대방(帶方) 분립(分立) 전후를 통하여 전후한서(前後漢書) 지리지(地理志)와 진서(晉書) 지리지에 모두 낙랑군의 속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의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이 대방군의 주현(主縣)인 대방현인 것은 이미 위에서 말한 그 시대의 유적과 유물로서 판명되었으므로, 둔유는 그보다 북방에 위치하였을 것은 재언(再言)을 요하지 않는다˝ - 이병도,『한국고대사연구』,「진번군고」
이병도는 지금의 황해도 봉산군이 대방군의 주현인 대방현이라고 단정하고, 둔유현은 그보다 북방에 있었다는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령을 죽였다”는『후한서』‘고구려조’의 기록을 이병도 식으로 해석하면 고구려가 낙랑군이 있는 평안도를 지나 황해도 봉산군까지 와서 대방현령을 죽였다는 뜻이다. 낙랑군은 고구려 군대가 지나가는 것을 눈 뜨고 보고만 있었을까?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지만 대방현이 황해도 봉산군이라고 단정한 이병도는 둔유현 역시 그 북방에 있었다고 하며 구체적으로 그 위치를 비정했다.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黃州牧)조를 보면 ‘황주목, 본 고구려 동홀(冬忽)’이라고 하고 그 밑의 분주(分註)에 ‘일운(一云)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 하였다. 여기 ‘우동어홀’의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서로 근사(近似)한데 우리의 주의를 끈다. 속히 말하면 ‘둔유’와 ‘동어’는 곧 같은 말의 이사(異寫)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于)는 고구려 지명 위에 흔히 붙는 것으로서 방위(方位)의 상(上)을 표시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추찰된다. 하여튼 둔유현이 지금의 황주(黃州)에 해당하리라고 생각되는 점은 비단 지명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아래에 말할) 실제 지리상으로 보더라도 적중(的中)하다고 믿는 바이다.˝ - 이병도,『한국고대사연구』,「진번군고」
대단히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이병도가 황해도 황주를 둔유현이라고 본 근거는 동어와 둔유의 음이 비슷하다는 주장 하나뿐이다. 표의문자인 한자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같다고 단정한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둔유는 ‘군대가 진 치고 있었다’는 뜻이고 동홀은 ‘겨울에 홀연히 춥다’는 뜻이다. 글자 형태도 다르고 뜻도 다르다. 게다가 ‘우동어홀’ 중에서 우 자와 홀 자는 마음대로 빼버리고 동어만을 취해 ‘동어가 둔유와 같은 말을 달리 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 논리적 비약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아직까지도 주류 학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비단 그의 학설을 지지하고 지지하지 않고의 여부를 떠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방군이 어디였는지 검증을 계속해보자. 문제가 많은 사서이긴 하지만『진서(晉書)』「지리지(地理志)」‘평주조(平州條)’에는 창려군(昌黎郡), 요동국(遼東國), 낙랑군, 현도군과 함께 대방군이 실려 있다. 낙랑군에 속해 있던 여러 현들이 나누어진 것이다.『진서』“대방군은 공손도(公孫度)가 설치했는데 7현을 통괄하고 호수는 4천 9백이다”라며 7현의 이름을 실었다.
〃대방(帶方)·열구(列口)·남신(南新)·장잠(長岑)·제해(提奚)·함자(含資)·해명(海冥)〃
이병도는 열구현을 황해도 은율군이라고 비정했다.
˝은율군은 고구려시대의 ‘율구(栗口)’ 혹은 ‘율천(栗川)’이니 율구는 열구(列口)와 음이 거의 같고 율천(栗川)도 열수(列水)의 이사(異寫)로 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열구현(列口縣)이 오늘의 은율(恩栗) 부근이라 함에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 - 이병도,『한국고대사연구』,「진번군고」
이병도의 주장처럼 열구현이 오늘의 은율이라는 데 한국 주류사학계는 이론이 없을지 모르지만 중국 사서의 기록은 다르다. 열구현은『후한서』「군국지」에는 낙랑군의 속현으로 나오는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 주석에 곽박이『산해경』에서 말하기를 “열은강의 이름인데 열수는 요동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열구 역시 대방과 함께 요동에 있었기 것이다. 남신현에 대해서는『송서(宋書)』「오행지(五行志)」에 “진(晉) 혜제(惠帝) 원강(元康) 2년 9월에 대방, 함자, 제해, 남신, 장잠, 해명, 열구 현의 곡식 잎을 벌레가 먹어 다 슬어 없앴다”는 구절이 있다. 진(晉) 혜제(惠帝) 원강(元康) 2년(292년)은 고구려 봉상왕(烽上王) 원년이자 백제(百濟) 책계왕(責稽王) 7년인데,『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봉상왕 원년조’는 “가을 9월에 지진이 있었다”고만 하며 병충해에 대해서는 적어놓지 않았고,「백제본기(百濟本紀)」아예 기록이 없다.『송서』에 수도가 아닌 일개 지방의 병충해 기록이 실릴 정도면 큰 재해인데, 황해도에 그런 재해가 있었다면 고구려나 백제가 영향을 받지 않았을 리 없다. 남신(南新)이 대방(帶方), 열구(列口) 등과 함께 기록된 것으로 봐서 남신현 역시 요동에 있엇다고 비정해야 한다.
이번에는 장잠현(長岑縣)을 살펴보자. 이병도는 장잠현을 황해도 풍천군(豊川郡)으로 비정했다.
˝장잠현은 황해도의 풍천군에 비정된다. 후한 화제(和帝) 때의 거유(巨儒)로 반고(班固)와 이름을 나란히 하던 최인(崔絪)이 장잠장(長岑長)에 임명되었다가 원지(遠地)라고 해서 부임치 아니했다는 곳이었다(後漢書 卷83 崔絪傳). 근세의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의「청구도(靑邱圖)」‘풍천조(豊川條)’에 의거하면 동북쪽에 ‘장잠산(長岑山)’의 이름이 보이고 그 위에 ‘당현(唐峴)’이란 지명도 가입하여 있다. 당현은 아마 장잠산맥(長岑山脈) 중의 어느 큰 고개를 지칭한 것 같은데, 그 이름도 재미있거니와 더욱이 ‘장잠(長岑)’은 장잠현명(長岑縣名)과 일치하고 있지 아니한가? 장잠산은 현재의 지도와 비교해보면 구(舊) 풍천과 합한 송화군(松禾郡) 진풍면(眞風面)의 원주산(猿周山)에 해당한다.˝
이병도의 위치비정 중 장잠현에 대한 기술은 그나마 근거가 조금 있다. 장잠(長岑)자가 들어가는 장잠산이란 지명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후한서(後漢書)』「최인열전(崔絪列傳)」에는 최인이 장잠장으로 임명받았으나 너무 멀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후한서』「최인열전」은 장잠이란 구절에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장잠현은 낙랑군에 소속되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는 것이다.『후한서』「최인열전」을 인용한 이병도가 이 주석을 못 보았을 리는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므로 무시하고 황해도 풍천으로 억지로 비정한 것이다. 장잠은 긴 봉오리, 또는 높은 봉오리라는 뜻이니 황해도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산이다.
장잠현이 어디인지는『요사(遼史)』「지리지」‘동경도, 숭주조’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다.
˝숭주(崇州)는 융안군(隆安軍)이 주둔하고 있고, 자사(刺史)가 있는데, 본래 한나라 장잠현 땅이다. 옛날에는 3개의 현이 있었는데 숭산, 위수(偉水), 녹성(綠城)이 그것인데 다 철폐되었다. 호수는 5백이고 동경(東京)에서 북쪽으로 백오십 리에 있는데 숭신현(崇信縣)으로 통합했다.˝
이 기사는 장잠현이 황해도 풍천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히 말해준다. 요나라 동경은 지금의 요녕성 요양으로 비정하는데, 그 북쪽 150리 지역에 장잠현이 있었다는 것이다.
장잠현은 뜻밖에도 진나라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유명한 난정집(蘭亭集)과 관련한 일화로도 등장한다. 왕희지는 산동성 임기(臨沂) 출신이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곳은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으로 이곳에 유명한 회계산음(會稽山陰)이 있다. 왕희지 등은 진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서기 353년) 회계산음의 난정에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때 왕희지가 쓴 유명한 명필첩이「난정집서(蘭亭集序)」다. 이 자리에는 42명이 참석했는데 그중 한 명이 전(前) 장잠령(長岑令) 화기(華耆)다. 4세기 중반에도 장잠현령이 있었다는 것은 장잠이 황해도에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는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
제해현에 대해서는 중국 고대 사료에서 정확한 위치 정보를 찾기 힘드나『송서』「오행지」의 벌레 피해 기사에서 역시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함자현에 대해서는『한서』「지리지」‘낙랑군조’에 “함자현은 대수(帶水)가 서쪽 대방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방이 요동에 있었으므로 함자현도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는 것은 쓰다 소우키치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일 뿐이다. 중국의 모든 고대 사료는 대방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 출처:{역사의 아침 版}『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2009년 纂)
▶ 해설:이덕일(李德溢)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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