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비열전] 산악인의 상징 '피켈'의 역사
‘최초의 등산용구’로 불리는 피켈은 그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몽블랑이 초등되던 1786년 이전부터 유사한 형태의 도구가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세 알프스 목동들은 알펜스톡(alpenstock)이라고 하는 긴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올랐는데, 초기 등산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양의 도구를 사용한 것이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샤모니에 있는 몽블랑 초등자 미셀 파카르와 자크 발마의 동상에서 이 두 사람은 피켈을 들고 있지 않다. 굵은 몽둥이 같은 알펜스톡을 짚고 있을 뿐이다.
알프스 목동의 알펜스톡에서 시작한 피켈
당시의 사람들이 산에 오르기 위해 사용한 거의 유일한 보조도구는 알펜스톡이었으며, 단순한 막대기에서 출발한 이것은 눈과 얼음, 바위에서의 보다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여러 가지 부속들을 추가하며 발전돼왔다. 처음엔 등산을 할 때 로프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길이 2m가 넘는 이 지팡이를 서로 잡고 의지해 추락에 대비할 뿐이었다. 지팡이는 힘든 오르막에서 몸을 의지해 기댈 수 있는 도구였고, 바위가 많은 너덜을 내려올 때도 균형을 잡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보다 어렵고 보다 힘든 길을 오르게 되며 알펜스톡은 여러 가지 한계를 드러냈다. 사람들은 불편한 점을 개선하며 꼬챙이(스파이크) 뿐인 알펜스톡에 곡괭이(피크)를 달았고 도끼(블레이드)를 붙였다. 산과 들에서 사용하던 평범한 도구들이 만나 훗날 산악인의 영원한 동반자가 된 피켈이 탄생한 것이다.
처음 알펜스톡에 도끼를 붙여 사용한 사람은 1854년 베터호른을 초등한 영국인 알프레드 윌스와 그의 가이드였던 스위스의 라우에너 일행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그전까지 빙하를 오를 때 얼음을 깎아 발디딤을 만들기 위해 손도끼를 따로 가지고 다녔던 것과 달리, 알펜스톡 끝에 도끼를 매달아 사용하며 번거로움을 줄였다고 한다.
윌스가 남긴 <알프스의 방랑>에는 이 새로운 도구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길이는 120cm, 자루는 나무로 되어있으며, 한쪽 끝에는 강철로 된 피크를 달고 반대편에 10cm 가량 되는 무거운 철로 유리를 깎는 칼과 같은 모양의 도끼를 달아 얼음을 깎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때의 모양은 현재의 블레이드처럼 피크와 직각이 아니었고, 일반적인 도끼와 같은 방향이었다.
알프스 황금시대 거치며 현대적 디자인으로 진화
피켈에 대한 연구는 알프스의 황금시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다. 초기 여러 가지 모양의 피켈들이 알프스를 무대로 활동한 등산가이드와 등반가들 사이에서 각자의 고안대로 제작돼 사용됐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아직 무엇이 정답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차츰 등산장비에 대한 표준화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영국 알파인 클럽은 1864년 산악회 내에 장비개발위원회를 창립해 피켈과 로프에 대한 표준화 작업을 하기에 이른다. 초대 위원장을 맡고 훗날 알파인 클럽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찰스 필킹톤은 회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피켈들을 전부 수집해 각각의 특성에 대해 연구했으며, 현재와 같은 형태의 클래식 피켈 원형을 디자인했다.
피크(peak), 블레이드(blade), 샤프트(shaft), 스파이크(spike) 등 4부분으로 구성돼 현재 쓰이는 것과 거의 유사한 모양의 이 피켈은 ‘필킹톤 피켈’이라는 이름으로 영국 알파인 클럽이 공인한 표준 모델로 자리 잡으며, 여러 장비업체에서 이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각종 제품들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알파인 클럽은 가장 먼저 생긴 산악인들의 모임이지만 매우 보수적이었다. 회의 운영뿐 아니라 새로 나온 장비를 받아들이는 면에 있어서도 그랬다. 크램폰의 경우 이미 16세기부터 사용되던 알프스 산골생활의 필수품과도 같은 장비였지만, 크램폰이 본격적으로 등반장비로 개량되자 설빙벽을 오를 때 이를 사용하는 건 자유등반의 등산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라며 꺼렸다. 그런 중 로프와 피켈만은 알파인 클럽 내에서 먼저 표준화 작업을 시작했으니, 이 두 가지는 그때부터 산악인들이 추구하는 정신적인 면과 닿아있던 것 같다.
‘필킹톤 피켈’ 이후 ‘피켈’이라 불리는 장비는 이 원형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20세기 들어 알피니즘 철의 시대와 함께 더 가파르고 큰 벽으로 대상지가 옮겨가며, 그전에 없던 새로운 장비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져 갔다. 자루가 극도로 짧고 피크보다는 망치 부분을 주로 사용하는 아이스 해머와 같은 장비가 사용되고, 이것이 피켈과 결합해 아이스 바일을 낳았다. 빙벽을 오를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부분인 피크와 해머, 블레이드를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조립식 모델들이 출시됐으며, 이는 통칭 아이스 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국산 첫 피켈 모래내 금강과 ‘토왕성’
우리나라에 피켈이 전해진 건 한국 알피니즘의 초기인 1920년대부터로 본다. 서구의 발명품인 피켈은 역시 서구에서 전해진 등산과 함께 각종 장비들이 일본을 거쳐 들어오며 초창기 국내 산악인들에게까지 사용법과 기술 등이 전해졌다. 1927년 한국인 처음으로 몽블랑에 오른 박석윤은 당시 발표한 등반 기록에서 샤모니의 가이드와 안자일렌을 하고 피켈을 사용해 등반했다고 했으며, 1940년대 초반 당시 일본인들이 주축이 돼 만든 조선산악회 회원들의 등반기록을 보면 산에 오를 때 피켈을 짚고 있는 장면들이 나온다.
다만 알프스와 같이 만년설이 있는 곳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디자인 된 피켈이 당시 국내 여름등반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이 눈길을 끈다. 서구에서도 암벽등반 중 피켈을 휴대한 경우를 가끔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겐 단지 눈과 얼음을 찍고 오르는 도구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우 희귀했던 산악인 집단에 대해 그들만의 상징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자리하고 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한국은 만년설도 없고 3000m가 넘는 고산도 없어 산악활동 무대의 측면으로만 보면 매우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국산 피켈이 탄생했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현재의 서울 남가좌동 부근에는 전부터 대장간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1970년대 초, 이곳에서 모래내금강제작소라는 대장간을 운영하던 김수길씨는 직접 쇠를 달구고 두들겨 여러 쇠장비들을 만들어 냈으며, 특히 피켈과 크램폰 등 동계등반 장비들을 개선하는데 힘을 쏟았다. 초기 외국 디자인을 바탕으로 유사한 제품들을 만들어내던 모래내금강은 국내외 산악인들의 조언에 힘입어 훗날 설악산 토왕성폭포 초등에 사용되었던 ‘토왕성(T.W.S)’이라는 이름의 획기적인 피켈을 개발하기 이른다.
당시 30여 자루만 한정해 제작한 이 피켈은 블레이드 아래에 해머질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피켈과 아이스바일이 결합된 형태였으며, 피크는 위 아래 모두 톱니가 나 있어 고드름 빙벽에 잘 물리도록 디자인 돼 있었다. 스파이크는 피켈을 박고 수직벽에 매달렸을 때 얼음을 지지할 수 있도록 살짝 구부러져있으며, 한손으로 휘두르기 편하게 샤프트 길이도 짧고 헤드와 스파이크에는 슬링이나 카라비너를 걸 수 있는 구멍을 뚫었다.
모양은 진화했으나 정신은 변하지 않았다
지난 200여 년간 피켈은 조금씩 진화해 왔지만, 그것이 결코 등반자의 편의성만을 고려해 발전되어 온 것만은 아니었다. 피켈은 때로 그 기능보다도 정신적인 면이 강조되어왔는데, 20세기 초부터 히말라야의 황금시대가 시작되며 등산장비와 함께 기록기술의 발달로 피켈이 등정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53년 헤르만 불의 낭가파르바트 초등이다. 당시 단독으로 그 정상에 오른 불은 피켈에 티롤 깃발을 매달아 사진을 찍은 후 피켈을 남겨두고 하산했다. 그가 내려온 후 사람들은 그의 등정을 의심했지만, 전문가들의 사진 판독으로 어느 정도 의혹을 풀 수 있었는데, 초등 후 46년이 지난 1999년 일본 원정대가 정상에서 헤르만 불의 피켈을 발견해 의혹은 완전히 해소됐다.
헤르만 불 뿐만 아니라, 안나푸르나의 모리스 에르조그, 에베레스트의 힐러리와 텐징 노르게이, K2의 리노 라치델리 등도 모두 초등 순간 피켈에 자국 깃발을 매달아 치켜들고 사진을 찍었다. 하늘 높이 뻗었던 그들의 손에 피켈이 들려있었던 이유는 단지 그 장비가 그 순간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알피니스트의 생명을 지켜주는 피켈이지만, 누군가에겐 그 날카로운 모양새처럼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적도 있다. 러시아 혁명 지도자 트로츠키는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후 멕시코로 추방됐다가 1940년 자객의 피습을 받고 사망했는데, 이때 사용된 무기가 바로 프랑스제 시몽 피켈이었음이 지난 2007년 밝혀지기도 했다.
허나 세상의 이런 영욕 속에서도 로제 듀프라의 시 ‘그 어느 날’만큼 피켈이 단지 눈 얼음을 오르는 도구를 넘어 산꾼들에게 묵직한 정신의 무게로 작용하고 있음을 뒷받침하는 말도 없다. 피켈은 알피니즘이 생겨난 바로 그때부터 눈과 바람과 희박한 공기 속에서 고고히 이어온 산악인의 영혼이었으며, 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진보해 온 등산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오늘 문득 그리워 피켈을 움켜쥘 때 차가운 쇳덩이에 전해오는 따스한 온기는 바로 내가 산에 오르는 이유가 된다 .
그 어느 날 내가 산에서 죽는다면 오랜 산친구여 이 한마디를 기억해주게 내 피켈을 집어다오 내 분신이 치욕 속에 녹슬어 가는 것을 나는 원치 않네 어딘가 아름다운 페이스에 가져가주게 그리고 내 피켈만을 위한 작은 케른을 쌓아주게 그리고 난 뒤 그 위에 나의 피켈을 꽂아주게 빙하 위에 빛나는 새벽의 빛을 능선 위에 붉은 저녁 햇빛을 나의 귀여운 피켈이 되쏘아 비칠 수 있도록…
/글 이영준 강사(마운틴저널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