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일 토요일 오후,
30대 무렵 주말이면 서울근교 산을 함께 다녔던 후배교사인 Kim선생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저희 가족 하조대 내려가요. 함께 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시간되시죠~"
실은, 월요일에 철원을 가려는 약속이 있었지만 망설이다가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동해 바다 하조대의 2박3일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2년전 이맘때 갔다 온 기억이 새롭지만
언제 가도 좋은 그곳 하조대~
산과 바다가 그리워 즐거운 여행 짐을 꾸렸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8월5일~7일 2박3일
강원도 여행 (하조대, 무릉계곡, 오대산)
▲ 하조대 해변
하조대 해수욕장은 수려한 경치를 배경으로 백사장 길이가 약 4km이며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가족놀이 해수욕장으로서는 정말 좋은 곳으로 1976년 개장하여 1984년에는 시범해수욕장이 되었다.
후배의 어머니께서는 1977년 부터 민박을 하셨다고 한다.
현북중학교와 강릉고등학교, 고려대학을 졸업한 김선생은 현재 서울 강남에 있는 J고교의 영어교사로 있다.
해수욕장 남쪽으로는 광정천(光丁川)이 동해로 흘러들고 있다.
옥수수와 감자 등 밭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 지역인 상광정리는 현북면의 중심지로 면사무소가 있다.
처음에는 광정진이었던 것이 인구의 증가로 상, 중, 하리로 나뉘어져 상광정리, 중광정리, 하광정리로 불리운다.
광정진은 지금의 중광정리와 본동 경계지인 잣골뒷산 능선에 여진과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광정진을 설치하여
유래된 명칭으로 지금도 진의 성지석축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명지리에서 흐르는 물과 대치리에서 흐르는 하천이 이 곳에서 합류하여 광정천을 이룬다.
하조대 앞에는 해변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군사지역이라 야간에는 출입금지)
또한, 그 일대 항해에 불을 밝혀주는 등대가 있고 그 주변은 바다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해수욕으로 행복감 만끽이다.
도영이 ~
▲ 최근에 만들어진 하조 전망대
▲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조대 해변
♣ 하조대
바닷가에 기암괴석의 절벽과 줄지어 빼곡이 늘어서 소나무가 절경을 이루는 절벽위에
육모정(1955년)이 세워져 있어 바다를 내려다 보기에 좋다.
▲ 계단을 따라 꼭지까지 이르면 정자가 나온다.
▲ 하조대 (河趙臺)
고려말 조선초 하륜과 조준이 이곳에 은둔하며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혁명을 꾀했고
그것이 이루어져 뒷날 그들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 했다는 설이 있다.
조선 정종 때 정자를 세운 것을 19555년에 육각정으로 새롭게 건립했다고 한다.
▲ 육모정 안 - 행서체로 쓰여진 하조대 ▲ 하씨 조씨의 성에서 이름지었다는 설명 현판
▲ 하조대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 하조대(河趙臺)에 얽힌 인물들을 살펴보자
* 하륜 (河崙 1347~1416)
-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태종 이방원을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기틀과 왕권강화의 초석을 다진 인물.
- 최영의 요동정벌계획을 극력 반대하여 경기도 양주에 유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한다.
- 하륜은 이색,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과 초기에는 정치적 입장이 같아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그러나 곧 권근과 함게 정치적 변신을 하지만 정도전과의 불화로 그다지 비중 있는 직책을 맡지 못했다.
-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지지하여 정종이 즉위 후 정사공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진다.
- 태종 이방원의 즉위 직전에는 정승 반열에 올라 서서히 정국을 주도하고 관제 개혁의 중심이 된다.
- 영의정부사, 좌정승, 좌의정을 등을 역임하고 1416년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능침을 돌아보고 오는 도중에 죽는다.
- 시문에 능하고 음양, 의술, 성경(星經), 지리 등에 조예가 깊었다. 문집으로 〈호정집〉이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조준 (趙浚 1346~1405)
-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고려말 개혁파 사류의 대표적인 인물, 조선왕조의 개창과 문물제도의 정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 1382년 도통사 최영의 천거로 왜구토벌에 소극적인 경상도 도순문사를 징벌한다.
- 도검찰사로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쳐 그 공으로 선위좌명공에 오른다.
- 이후 윤소종 등과 함께 우왕의 폐위를 도모하며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에게 중용되어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올랐다.
- 고려말 사회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국정 전반에 걸친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다.
-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한다.
- 1390년 공양왕 2년에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한다.
- 정몽주 등의 탄핵을 받아 체포, 정몽주 사후 풀려나와 그해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 후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
해진다.
- 그뒤 문하우시중을 거쳐 문하좌시중, 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며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는 등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한다.
- 세자책봉, 요동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어 자연히 이방원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진다.
-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봉해졌다.
-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로 있으면서 한때 투옥되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석방되었으며, 그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
좌정승·영의정부사가 되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 되었다.
- 그의 정치이념은 인정(仁政)과 법치였다.
즉 궁극적인 목표를 유교의 왕도와 인정에 두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경계를 바르게
하고, 기강을 세우는 문제를 강조했다.
- 〈주례 周禮〉의 육전에 의하여 중앙 정치제도의 완비와 재상이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주장하기도 했다.
즉 재상의 역할은 군자를 천거하고 소인을 물리쳐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군주는 다만 적합한 재상을 얻어 그와 함께 의
논할 뿐이라고 했다.
- 주자학적 통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학교교육, 사회윤리의 보급에 주력했다.
-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고 국가의 치난(治亂)과 정치의 득실이 관련되는 곳이므로 근실하고 학식이 높은 사람을 교수관
(敎授官)으로 삼아 학교교육에 힘쓰도록 했다. 시호는 문충(文忠)
▲ 정자에서 멀리 바다가 보인다.
▲ 일명 애국송이라고 부르는 바위 위 소나무
TV 방송 엔딩의 나오는 애국가 끝 부분에 나온다고 한다.
양양군의 보호수로 높이 9미터이고 수령은 200년이 된다.
▲ 해당화와 소나무 사이로 등대가 보인다.
실은 등대를 먼저 갔다 온 후에 하조대 정자에 올랐다.
▲ 하조대 등대 ▲ 등대에서 바라본 하조대
▲ 등대에서 바라본 아침 바다
▲ 이른 아침 조용히 집을 나와 산책을 다녀왔다.
등대와 하조대....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전망대
아래 백사장은 군부대 휴양지여서 민간인은 출입통제이다.
▲ 2박3일 동안 편안히 지냈던 하조대 김선생네 집
우린 2층 가운데 방에서 지냈다.
편안하고 이야기 좋아 하시는 어머니는 인심 후하고 재미있으신 분이다.
하조대는 속초와 함께 38선 이북에 있어서 전쟁 전에는 북쪽에 속해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내년이면 80세가 되시는 어머니의 지난 시절 이야기로 웃음이 가득하다.
처녀시절 6.25 전쟁의 아픔과 전쟁 후의 경제적 어려움,
이른아침 해안으로 나가 톳과 미역, 소라, 다양한 싱싱한 생선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촌의 시집살이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 저녁 먹은 후의 산책
부부교사인 김선생은 중학교 2학년 딸과 초등 4학년 아들이 있다.
공부 잘하고 예쁜 귀여운 소녀 지윤이와 생각 깊고 순발력, 센스와 기억력 뛰어난 도영이
▲ 옥수수
아들과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
어머니께서는 옥수수를 주문해 놓으셨다.
어머니와 함께 김선생의 차를 타고 현북면 대치리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한창 무렵의 옥수수는 이미 지났고 지금부터는 늦 옥수수가 나오는데 맛은 좋은데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접에 100개 짜리 두접을 사셨다.
어머니 옥수수 맛있게 잘 먹을게요~
늘 건강하시구여~
여행후기 1 2013년 8월8일 아침 won sub
첫댓글 옥수수 선물로 나눠 주셔서 덕분에 맛있게 먹습니다. ㅎㅎ 또 다녀오세요 *^^*
저희도 오늘 압력밥솥에 해야 맛있다고해서 그대로 해 보았어요.
싱싱한 강원도의 맛이 제대로 옥수수 먹는 기분이더라구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