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 고원을 어찌 넘을 것인가?”
▼ 피미르고원
현재 인도, 파키스탄, 중국, 아프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탄 등이 분할하여 차지하고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고 넓은 이 고원은 힌두쿠시·카라코람·쿤륜·히말라야 산맥 같은, 이름만 들어도 기가 질릴 대 산맥들이 겹쳐진 곳이다. 그렇기에 파미르 고원은 ‘세계의 지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데, 그 아름에 어울리게 만년설이 쌓인 고봉들 사이로 드넓은 고원이 펼쳐지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낮게 날면서 이 고원을 넘다보면 산맥의 말 잔등 같은 고개 사이로 한 가닥 실낱같은 도로가 뱀처럼 굽이치며 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인간들이 만든 인공적인 도로이다. 날개가진 새들을 제외한 동물들의 접근이 불가능할 것 같은 이런 험난한 곳을 유독 인간이란 유별스런 동물만은 어렵게 길을 만들면서까지 하면서 넘나들었던 것이다.
파미르고원은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분수령에 해당되기에 이곳을 넘지 않고서는 미지의 세계나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물 안 개구리 같이, 주어진 울타리 속에 갇혀 안주하기를 거부한, 역마살(驛馬煞)을 타고난 모험가들은 그 너머에 있을 무지개 꿈을 찾아 하나 뿐인 목숨마저도 운명 앞에 담보로 맡겨 놓고 용감하게 걸음을 내디뎌 그 험한 산을 넘고 격류를 건너 그 험난한 고원을 넘나들었다. 처음에는 동서양의 특산물을 운반해서 많은 이윤을 남기려는 대상들이 그 길의 주인이었지만 후에는 가끔은 정복욕에 불타는 전쟁 영웅들도 넘나들었고 나중에는 외골수 신앙으로 중무장한 인간들도 대상 속에 끼여 넘나들었다.
우리의 혜초를 비롯하여 수많은 무·유명의 사문들이 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천축에의 꿈을 가진 모든 구법승에게는 특히 이 파미르 고원은 피해갈 수 없는 필수 코스였다.
기록상의 선두주자로 동진(東晉)의 법현(法顯)율사(律師)가 먼저 등장한다. 그는 중국에 전래된 불경 중에서 율장이 빠진 것을 한탄하다가 직접 그것을 구하고자 399년, 혜경(慧景) 등 4명의 도반과 함께 장안을 출발하여 고생 끝에 파미르를 넘어 스와트계곡을 타고 내려가 오장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 고원을 넘어가면서 길의 험난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서쪽으로 천축을 향해 떠난 뒤 한 달 만에 총령을 넘을 수 있었다. 총령은 겨울은 물론 여름에도 눈에 덮여 있었고 독룡(毒龍)이 있어서 만약 그것이 한번 노하면 바람과 눈과 비를 토하며 모래와 자갈을 날리므로 이를 만나는 사람은 온전할 수 가 없었다. 원주민들은 그것을 설인(雪人)이라 하였다. 총령을 지나면 북천축에 도착한다.』
그러나 총령은 무사히 넘었지만 북천축 소설산인 슐레이만 산맥에서 생사를 같이 하던 도반을 잃게 되는데, 그 때의 비참한 정황을 법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법현 등 세 사람은 남쪽으로 내려가 소설산을 넘었다. 소설산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으로 덮여 있었다. 산 북쪽을 올라가고 있을 때 찬 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치자 모두 숨소리도 못 내고 무서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일행 가운데 혜경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고 입에서는 흰 거품을 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 또한 살아날 수가 없을 것 같군요. 빨리 가십시요. 여기서 우물쭈물하다가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그리고는 마침내 혜경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법현은 그의 몸을 어루만지며 비통해 하였다. 우리들이 아직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런 곳에서 먼저 죽다니 …” 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
도반(道伴)의 시신을 묻은 법현과 도정(道整)은 다시 길을 재촉하여 간다라국을 경유하여 중천축국으로 들어가 불교의 성지들을 순례한 후 경전의 사경 및 연구를 하게 된다. 그 후 법현은 천축에 남겠다는 도정을 뒤로하고 15년 만에 혼자서 바닷길로 중국으로 돌아가 「불국기(佛國記)」를 저술하여 인도여행기의 스타트를 끊었다.
다시 518년에는 법현의 뒤를 이어 북위(北魏)의 송운(宋云)과 혜생(惠生)이 파미르고원을 넘어갔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현장이, 다음으로 우리의 혜초가 뒤를 이어 넘어 갔고 오공(悟空)이 마지막으로 뒤를 이었다.
현장 대신에 먼저 송운과 혜생의 궤적을 한번 살펴보자. 이들은 황태후의 명에 따라 불경을 얻기 위해 천축으로 파견되었다. 송운은 뚠황사람으로 혜생사문 등이 그와 동행하였는데, 일행은 청해호(靑海湖)에서 차이담분지를 가로질러 ‘서역남로’의 코탄을 지나 총령에서 역시 스와트계곡을 내려가 거기서 두 방향으로 갈라졌다. 서역의 나라들과 국교 타개를 위한 사신의 신분인 송운은 임무 때문에 그대로 서쪽으로 향해 아프간 방향으로 나가고 혜생은 곧장 남하하여 다르코트 고개를 넘어 오장국을 거처 중천축으로 들어가는 구법승의 일반적인 루트를 이용하였다. 그들의 여행기인 「낙양가람기」에는 총령을 넘어가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서쪽으로 간 지 엿새 되어 총령(蔥嶺)에 올랐다. 다서 서쪽으로 사흘 가서 발우성(鉢盂城)에 이르렀다. (중략) 그곳은 매우 추워서 여름이나 겨울이나 눈이 쌓여 있었다. 총령은 높고 험준하여 초목이 자라지 못했다. 때가 8월인데도 벌써 날씨가 차서 북풍은 기러기를 내몰고 눈이 천리를 덮었다. 산에 독룡이 사는 연못이 있었다. … 』
혜초사문에게도 파미르는 반드시 넘어야 할 난관이었다. 그래야만 스승과 도반들이 기다리는 제2의 고향 장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혜초는 적당한 루트를 통해 파미르를 넘기 위해서 여러 곳을 기웃거리다가 여의치 않았던지 결과적으로는 제일 멀고 험한 코스인 아프간 쪽의 와칸(Wakhkhan)계곡을 타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당나라 병사가 지키는 총령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오만리 길을 혼자서 걸어 다녔던 초인 같은 혜초도 파미르를 넘는 일은 두려운 일이었던지 눈물까지 보이고야 말았다. 그 때의 심정을 혜초는 “파미르 고원을 어찌 넘을 것인가?” 라고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가면서 엄청난 대 자연 앞에서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대는 서쪽의 길이 멀다고 한탄하나
나는 동쪽으로 가는 길이 먼 것을 슬퍼하노라.
길은 거칠고 산마루에는 눈도 많이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 떼도 많고
새도 날아오르다 깎아지른 산에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 지나가기 어렵네.
한 평생 살아가며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오늘 따라 눈물 주체하기가 힘드네.』
▼ 가자, 와칸으로...
▼ 드넓은 판지강
▼ 옛 고성 유지들
첫댓글 생각했던 것보다는 찻길이 잘 되어있네요......지금까지는요......읽으면서 가심이 콩닥콩닥 허네요.....
키르기즈의 오쉬에서 타직의 호로그까지 이르는 이른바 파미르하이웨이(M41도로)는 고속도로가 아니고 높은 도로라는 뜻이어서 달리기 쉬운 좋은 도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그런데로 거기 운전수들은 잘도 달렸습니다. 그래서 "Please! Slowly~~" 를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뭐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사진을 찍어야해서요... ㅎㅎㅎ
우리가 레라닥 갈 때 우리 일행이 기사한테 50루피짜리 돈을 주면서 "야, 야, 야, 제발 천천히 좀 가자, 슬로우 다운, 슬로우 다운...." ....한참 가다가 또 속도가 나 있으면 돈 주면서 슬로우 다운......ㅎㅎㅎ.....돈은 왜 줬는지? 천천히 가달라고 돈을 줘?......ㅎㅎ......그만큼 무서운 길이었다는 거겠죠.....
담 생엔 기필코 유목민으로 태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물론 제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란 걸 잘 알고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동감입니다. 유목민 사진 몇장 올려드리지요.
격조 높은 크라식한 여행기가 기대됩니다.
예, 글재주는 없지만,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이스카심 지나 황량한 산 속으로...
감사히 읽고있습니다.
기회가되면신강성을완주하고파미르고원을넘어가고십습니다.
공부 잘하고 갑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