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을 떠나셨던 류시화님은 여행을 떠날 때는 책을 들고 갈 필요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시와 소설이 있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정신은 망고 열매처럼 익어갔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익은 망고 열매 만큼의 깊이를 진하게 우려주셨습니다.
몇 번을 우려먹고도 시간과 함께 멀어간 세상이었지만, 그럴 수록 지구 별은 항상 저에게 황홀한 유혹으로 일렁였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귀하게 다가온 시간은 한정된 공간의 연속이었고, 아무리 내달려도 그 공간은 쉽게 넓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그런 것에 목말라 했고 그런 내 바람 때문인지 마침내 저에게 아주 귀한 행운이 찾아와 주었지요.
달랏으로 향하던 중 식당에서
얼마 전 베트남은 남북이 통일 된 날과 주말, 노동절로 이어지는 황금 연휴로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귀성인파로 붐비던 명절 때와 다르게 많은 사람들의 목적지가 관광지인 까닭에 한달 전부터 대부분의 호텔들은 예약을 마감했고 이미 예약을 했다 하더라도 선불을 미리 보내줘야 하는 조건이 따랐지요. 회사직원을 통해 호텔 예약을 끝낸 우리가족은 산 위의 산, 그 속에 숨어있는 도시, ‘달랏’ 을 향해 먼 여행 길에 올랐습니다.
담리폭포.
영원히 숲속에 잠들어 있을 것 같았던 달랏은 도시로서 110살이 되었고, 1930년경 프랑스 사람들과 베트남 상류층 인사들이 찾기 시작하면서 그 가치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곳은 아름다운 경치와 서늘하고 맑은 공기로 동양의 파리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대표적인 식민지 휴양도시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달랏에서 만난 들꽃
아침 일찍 출발했건만 도로는 크고 작은 자동차와 오토바이들로 가득채워졌습니다. 베트남에서 사차선 도로의 양쪽가장자리는 오토바이들의 전용 도로지만 그날은 오토바이들의 무법천지로 도로마다 몸살을 앓고있었습니다.
관광객을 태우려는 많은 차들은 지난 구정 때처럼 인파가 움집 해 있다 싶으면 여지없이 멈춰 서길 반복하였지요. 더 이상 사람을 포개 싣지 못하는 위험 무지의 차들은 조수 석과 운전 석 옆 창문에까지 사람을 걸쳐 앉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야 했습니다.
담리폭포 상류에서 만난 연인
어느새 울창한 고무나무 숲 사이로 난 갈림길에서 우리는 달랏으로 향하는 북동쪽 도로로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었습니다. 그리 낯설지도, 그렇다고 익숙한 길도 아니었으나 내 안의 정적은 흐르고 또 흘러 평화롭기 그지 없는 숲길을 지나고 있었지요.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마을은 낡은 판자 집과 현란한 커튼을 두른 예식장이 자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통일된 이날은 이 나라의 최대의 길일은 아니었을까 싶게 예식을 올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유명한 달랏 시장
관광객들로 만원인 휴게소를 지나 산길을 앞에 두고 아침을 빵으로 대신했던 우리는 한적한 식당에 잠시 정차하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많은 그곳 식당 뒷편엔 누런 황토 물을 가득 품은 개울에서 때마침 사내 아이들이 한가롭게 수영을 즐기고 있더군요.
산 허리를 얼마나 돌았는지 가늠하기 힘든 시간에 갑자기 멈추어선 자동차는 잠시 후 만신창이가 된 두 대의 오토바이와 대형 버스,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던 공안(경찰)을 스치게 되었지요. 문득 달랏 까지 300KM 나 되는 거리를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다던 내 과외 선생(호치민 대학생)이 생각났습니다. 자주 그렇게 여행을 다닌다는 그들의 모험과 젊음, 그리고 그녀의 추억은 생각만으로 황홀한 부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지 한 장의 시간차로 접어버린 내 부러움은 그 먼 여행 길에 추억처럼 남겨두고 또 다시 이어진 생의 초행길을 저는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두이웬럼 호수주변에서 본 달랏시내
어느덧 영화 배경처럼 펼쳐지던 산 자락에 쏟아지던 빗줄기는 기어이 풍경과 나 사이에 장막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좀처럼 드러나질 것 같지 않던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산 봉우리마다 차 밭으로 변해 있는 그곳을 가끔 파도 같이 밀려오는 구름 그림자만이 어루만질 뿐 세속의 무료함은 하늘 끝 까지 닿아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고원의 차 밭들이 마을을 따라 한 없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길은 산 허리를 감싸고 있었지요.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할 것 같은 골 깊은 산길은 온통 소나무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우리를 태운 차가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마침내 고갯마루에 환하게 웃음짓는 도시가 나타났습니다. 아름다운 프랑스식 빌라가 숲을 이룬 그곳, 산 위의 산, 그 위에 도시,바로 달랏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베트남에서도 보기 드문 깨끗함의 상징이었고, 산 아래 먼지는 좀처럼 올라 올 수 없는 하늘아래 태초의 땅인 듯 싶었습니다.
달랏 대학교 갬퍼스와 목동
하늘만을 가득 담은 호수가 도시 한 복판에 고여 있었고 주위 산들은 일부러 식재한 듯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나지막한 동산에 꼿꼿하게 자라고 있었지요. 비가 올 듯 낮은 하늘은 시간이 흐를수록 짙게만 퍼져갔습니다. 그리고 이내 여행에서 네 번째의 비를 만나게 되었지요. 출발한지 아홉 시간 만에 달랏에 도착했지만, 예기치 않는 사건은 예기치 않는 곳에서 일어났고 그래서 우리는 빗길을 한참동안 헤매야 했습니다.
달랏의 프렌폭포
평소보다 두 배나 비싼 호텔 비를 보냈건만 호텔에 도착해보니 한 직원을 따라 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뒤따른 지 10여 분만에 우리가 머물 곳이 호텔이 아니 가정 집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텔측에서는 우리회사 직원한테 우리가 머물 방은 일반 가정집이란 걸 알렸고, 이미 우리가 머물 집에 호텔 비를 지불했으니 우리가 해약한다고 해도 지불했던 돈은 다시 되돌려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확인 결과 우리회사 직원도 모르는 사실 이었지만 그 곳에서 유창하지 못한 이 나라 말로 우리 권리를 찾기는 힘들었고, 그렇다고 아이들 데리고 낯선 가정집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니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달랏에 남아있을 방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지요. 새로운 호텔을 찾아 나서면서 그날 달랏의 대부분 호텔들은 가정집과 연결하여 수용 못한 손님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기대치에는 부족했지만 두시간만에 마지막 호텔에 투숙할 수 있는 운 좋은 손님이 될 수 있었답니다.
탐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본 하늘
일정이 빡빡했던 우리가족은 이튿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고는 참으로 오랜만에 상쾌한 공기를 마셨습니다. ‘어디서 많이 맡아보던 냄새긴 한데 에어컨 바람 보다 차가우면서 기분이 좋다고 말하던’ 딸 아이는 연신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요.
지난 밤 쏟아지던 빗줄기가 사라진 도시의 언덕과 들녘에는 활짝 퍼진 햇살과 함께 나팔꽃들이 보랏빛으로 물을 들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기름진 옥토에는 고랭지 채소와 화초들이 많은 밭을 차지하고 있었고, 언덕 위의 감나무엔 어느새 감이 엄지손톱만큼 커져 있었지요. 토질은 황토 흙으로 우리나라 산과 들에 자라는 들꽃들을 그곳에서도 자주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햇볕 좋은 밭고랑에 서 있는 까마 중 나무의 푸른 열매들은 까만 먹물을 잔뜩 머금고 있더군요. 이렇듯 베트남에서 우리 나라의 풍경을 닮은 산과 들을 보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더 이상 높을 수 없는 주변의 산들이 낮은 동산을 이룬 곳엔 소나무와 솔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흰 구름이 너무도 여유로운 흐름을 타고 있었지요. 언젠가 보았던 만화 영화 속의 한 장면 같기도 한 풍경들이 사방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아름답고 높은 산으로 이름난 ‘랑비앙’ 산은 산속에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두 시간쯤 걸린다고 하는데 아이들이 있는데다 시간이 촉박하여 산 정산까지 10분이면 올라가는 짚차를 타기로 하였습니다.
이른 시간 인데도 산 중턱까지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원주민의 판자 집을 지나 매표소에 도착한지 20분 만에 바쁘게 움직이는 칠인 승 짚차의 뒷자리에 겨우 마주보고 앉을 수 있었습니다.
달랏에서 만난 무궁화
푹신하게 깔려있는 황토색 솔가리와 그 숲속에 어느새 피어버린 고사리들과 철쭉꽃을 코끝을 스치는 싸한 공기와 함께 지나치며 걸을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드디어 발아래 열린 하늘을 보았습니다.
멀리 푸른 이끼를 머금고 있는 옥토는 한 권으로 다 하지 못할 시가 있었고, 그림 같은 사진이 있었고, 아름다운 곡조가 있었습니다. 사방에 떠도는 낮은 구름은 아무리 흘러가도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끝없이 출렁이는 산 봉우리와 이끼인지 농토인지 분간 할 수 없는 땅, 고인 호수는 어느 시대 전설이 잠자고 있을까….너무 곱고 예뻐서 누군가 일부러 그 속에 숨겨둔 것은 아니 였을까…
달랏에는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캠퍼스를 둔 달랏 대학교가 있고, 프랑스시대 총독의 건물과 원조시대 마지막 황제의 별장과 그리고 주변에는 담리와 프렌폭포,탄더호수와 두이웬럼호수, 사랑의 골짜기 등 가 볼만한 곳이 많아 베트남 젊은이들 사이에 최고로 꼽히는 신혼 여행 지로 유명하다 합니다.
슬픈 사랑의 전설을 담은 탄더 호수
그 중 사랑의 골짜기가 있는 탄더 호수에는 녹색의 물을 가득 담은 분지로 가슴 아픈 사랑의 전설이 묻혀 있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던 젊은 연인이 양가의 심한 반대에 부딪치자 결국 죽음으로 사랑을 이루고자 탄더호수에 몸을 던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때는 이들의 무덤이 호수 주변에 나란히 있었지만 남자의 가족이 멀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남자의 묘를 이장해 갔다고 합니다. 죽어서도 함께할 수 없는 이들의 애틋한 사랑이 서린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전설 만큼 빼어난 경치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지요.
랑비앙 정상에서
여행에서 제가 보았던 책 속에는 그 너머의 세상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고개를 내밀면 또 다시 아지랑이 같은 시가 출렁이고, 나의 심금을 울려줄 노래가 흘러가고, 그리고 망고 열매처럼 익어갈 인생이 있을 거라고… 그러나 저는 알고 있어요. 나는 지금 그곳을 다 볼 수 있을 만큼 키가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