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9년 전주 출생으로 9살에 광주 청계사에서 계허 스님에게 계를 받았다. 14살에 계룡산 만화강백 문하에서 내외전을 섭렵했다. 23세에 이미 계룡산 동학사 강사로 추대되어 명망을 떨쳤다. 8년 후 시신이 널려 있는 참혹한 현장에서 생사의 절박함을 깨달은 후 발심하여 동학사에 돌아와 용맹정진 하다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대오했다.
그 어른이 저 충남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에서 20대에 이미 전강(傳講)을 받아 가지고 학인(學人)들 백여 명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 어른이 저 경기도 관악산(冠岳山)청계사(淸溪寺)에 계신 당신의 은사(恩師) 스님인 계허(桂虛) 스님을 뵈러 가다가 천안(天安)에 이르러 느닷없이 폭풍우와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서 길가 어느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주인이 하는 말이 “나가시오.” 하는 겁니다.
“아!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어찌 그렇게 박절하게 나가라고 하시오.” 하니,
“내가 송장 치우기 싫으니까 나가서 죽으시오.” 하는 거야.
그냥 나가라는 게 아니라. ‘나가서 죽으시오. 여기서 죽지 말고 제발 우리 집 문 밖에 나가서 죽으시오’ 한단 말이지.
“여보시오. 멀쩡히 산 사람을 나가서 죽으라니 대체 무슨 말이오?” 하니, 주인은 담장 밑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게 무엇인지 보시오, 자세히.” 아, 보니까 거기 뭐 상투 있는 사람도 있고, 여자도 있고, 어린 애도 있고, 늙은이도 있고 송장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어. 옛날에는 괴질(怪疾)이 한번 지나가면 동네를 다 쓸었는데, 그래 죽은 사람들이야. 잠깐 쉬어간다고 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한 사람들이라.
기가 막힌 경허 스님이 그 송장들을 보면서 생각을 하니까, ‘내가 일류 강사(講師)라고 하지만 죽음이 닥쳐오는데 죽음 앞에 아무 능력이 없구나.’ 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록 경전(經典)을 배웠지만, 그 경전 배운 것만 가지고 죽음을 막을 수 없다 이 말이야. 경허스님이 키도 크도 근력이 장사지만 완력(腕力)으로 죽음을 막는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야.
또 경허 스님은 말씀을 참 잘했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능변(能辯)이더라고 그 말 가지고서 죽음을 막을 재주가 있어? 글이나 말이나 완력이나, 이것 가지고는 도저히 생사노두(生死路頭)에서 자기를 구출할 능력이 없다고 하는데 부딪쳐서 발심(發心)을 했어. 이것이 바로 발심(發心)입니다. 이게 발심이야!
경허 스님이 거기에서 자기를 다 집어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 순간에 모든 걸 다 버린 거야. 강사고 목탁이고 뭐 그런 것 다 애당초 자신에게 해당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몽땅 다 집어 던져 버린 이것이 바로 결제야. 비를 주룩주룩 맞으면서 내가 여태 무얼 해 놓았느냐?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부러워 하지만 자기처럼 불쌍하고 추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발심이고, 이것이 바로 출가요, 이것이 바로 결제야. 참선(參禪)을 해서 자성을 깨달아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야 만이 이 죽음에서 능히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란 결제를 한 것입니다. 경허스님이 다시 동학사로 돌아오면서 참선을 하기 위해 여러 화두(話頭)를 생각해 보았는데, 의심이 간절하게 드는 화두는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라는 화두였다고 합니다.
영운지근(靈雲志勤)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물으니, 영운 선사가 “나귀의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 일이 돌아왔느니라.” 라고 한 법문에 의심이 일어났어.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나귀의 일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말 일이 돌아왔느니라.’ 이 화두에 의심이 딱 걸린다 이 말이야. ‘옳지, 이것을 내가 의심해야 되겠구나!’
『 이 화두는 8세기 중국 위앙종의 대선사 영운지근(靈雲志勤)에서 비롯됐다. 영운지근은 30년간 반야(般若)의 검(劍)을 찾아 방황하다 대오(大悟)를 이룬 선(禪)의 검객으로 그의 원력은 오늘날까지 심검당(尋劍堂)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찰에 살아 숨쉬고 있다.
한암[漢岩, 1876~1951/조계종 초대종정]은 경허행장에서 이 화두를 여년<驢年ㆍ당나귀 해>이라는 선어(禪語)를 통해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당나귀 해란 돌아오는 기한이 없음을 이른다. 12간지(干支) 가운데 여년(驢年)이라는 이름이 없는 까닭에 만날 기한이 없음에 비유한 것이다.’
즉 당나귀 해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당나귀의 일은 비실재(非實在)를 뜻한다. 이에 반해 말(馬)의 일은 실재(實在)하는 현재이며 존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은 삶과 죽음, 유(有)와 공(空)의대립을 상징한다. 』
이렇게 일념(一念)으로 생각을 하고 비를 맞아 가면서 얼마쯤 가다가 청계사(淸溪寺)에 계신 은사 계허(桂虛) 스님도 지워버렸어. 체면 차리고, 경우 차리고, 사람 노릇하고, 이것저것 예의 지키고 이거 하다 보면 이 공부는 못해. 공부를 하려면 도무지 사람 노릇을 하지 말아야 돼요. 참말로 중노릇을 하려면 사람 노릇을 하지 말아야 돼요. 참 좋은 말입니다.
이 중 노릇을 하는 데에는 이 이상 명답이 없어요. 참말로 공부를 하고 참말로 중 노릇을 하자면 사람 노릇할 생각을 안 해야 돼. 경허 스님은 거기서 사람 노릇할 생각을 버렸어.
‘오직 생사영단(生死永斷)하는 것만이 급한 일이지 다른 것은 급할 것도 없고 나하곤 상관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 동학사로 돌아와선 학인(學人)들을 다 불러 모았어. 그러고는 “나는 강의(講義)를 하지 아니할 것이니 다른 강원(講院) 가서 다른 강사(講師)스님한테 배우도록 하라.” 하시며 다 흩어 버렸어.
그런 다음 당신 방에 들어가서 용맹 정진(勇猛精進)을 하는데 무섭게 했습니다.
그 용맹 정진을 어떻게 하는고 하니, 시간 같은 것을 아랑곳 않아.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자고 밥 먹고 입선(入禪)·방선(放禪) 시간이 스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어. 깨달을 때가 방선(放禪)이라는 것이지. 항상 입선(入禪) 중이라.
그저 딱 들어가서 문 걸어 잠그고 앉아서는 송곳을 갈아서 턱 밑에다 받치니 졸면 콱 찔려서 피가 나고 하여간 턱에 피가 막 굳어서 딱지가 되도록 꼼짝 않고 앉아서 공부를 하다가, 드러누울 땐 머리를 번쩍 들고 누웠는데, 이것 이야말로 더 어려운 정진(精進)입니다.
이렇게 하기를 주야(晝夜)가 없이 그냥 24시간을 그냥 계속했어. 자신이 깨닫지 못했는데, 자신의 일을 마치지 못했는데, 어떻게 방선(放禪)할 수가 있는가? 방선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뭐가 방선이고 해제(解制)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게 다 필요가 없는 것이야.
그렇게 하다가 이 스님이 언제 방선을 했느냐 하면, 입선(入禪)한지 석 달이 지난,
동짓달 보름께였어요.
동학사에 있던 학명(學明)스님이 마을에 내려갔다가 이진사(李進士)라는 처사(處士)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처사가 하는 말이 “대사(大師)는 요새 중 노릇 어떻게 하시오?” 이렇게 묻거든. 그러니까 “아, 소승의 중 노릇이야 그저 경 보고(看經) 계행(戒行) 지키고 부처님시봉(侍奉)하고 가람 수호(伽藍守護)하고……. 뭐 그것이 중 노릇 아닙니까?” 했더니 “허허, 대사. 그렇게 중 노릇하면 소밖에 더 되겠소.” 하는 거야.
그래 “처사님,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소가 안 되겠습니까?” 하니 “허허, 선승(禪僧)의 대답이 그렇게 나와서야 어떻게 합니까?” 하는 거야.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니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고 해야지.” 이러거든. “거 대체 무슨 소립니까?” 하니 “모르거든 가서 생각해 보아야지, 그것도 모르고서 어떻게 중이라고 하겠소.” 한단 말이야.
무슨 말인고 하니, 속가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가서 그러한 도리를 찾으라고 쫓아 버렸단 말이지. 처사한테 실컷 혼만 나고 돌아온 거지.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분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참 이거 누구한테 얘기할 데가 없어.
경허 스님이 강사를 할 때는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다 일러 주고 해석(解釋)을 해주곤 했어요. 그래서 경허 스님에게 가 볼 수밖에 없다 하여 스님 방에 찾아 들어간 거야. 문을 걸어 잠그고 안 열어 줬지만 가서 이처사한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하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이요?” 하고 물었어.
바로 그때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우무비공처:牛無鼻孔處] 는 그 말에
활연대오를 했어. 경허 스님이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했어. [때는 1879년 11월15일]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모두가 뚫렸어. 통하지 않는 데가 없이 다 통해 버렸어.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자기 일을 마쳤다고 할 수가 없어. 그래서 거기서 나와 가지고 조용한 곳을 찾아 가니 바로 이 연암산(燕巖山) 천장사(天藏寺)야. 천장사를 떡 하니 찾아가서는 거기서 비로소 보임정진(保任精進)을 시작한 거야.
보임정진을 시작하기 전에, 동학사에서 견성(見性)한 경계의 옳고 그름을 점검 받으려고 여러 군데를 찾았는데 당시 선지식(善知識)이 될 만한 분으로 허주(虛舟) 스님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있었어요. 도인(道人)이라고 날리던 스님이었어. 한 학인을 보내 물었지.
그런데 얼토당토 않은 대답을 해 왔어. ‘허주가 아니라 메주로구나! 다시 찾아가 볼 것도 없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천장사에 들어간 거야. 천장사로 들어가서 당신 혼자 공부한 거야. 자신이 손수 누빈 누더기 옷을 한 벌 입고 앉았던 거야.
태허(泰虛) 스님이라고 속가(俗家) 형님 되는 스님이 시봉을 했어. 그 때 어머니도 거기 계셨는데, 아마도 형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계셨기 때문에 그랬던가 봐. 어머니와 형님이 시봉을 하는데, 하여간 제발 옷 좀 벗으라고 그래도 옷을 안 벗어. 양치하는 일도 없고 세수하는 일도 없고, 하는 일이라곤 밥 갖다 주면 밥은 먹고 오줌 똥 누러 나가는 일 밖에 없어.
탁 앉아서는 눕는 일도 없고, 누구하고 얘기하는 일도 없고, 바깥에 나가는 일도 없고 그저 대소변 보러 가는 일 외에는 없어. 세수하는 일도 없고 도무지 목욕하는 일은 더군다나 없고 옷 벗는 일도 없고. 그저 한 벌 누더기 옷에 빈대와 이가 꽉 차 온 몸을 물어뜯어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도 긁는 법이 없었고, 어느 날 구렁이가 문을 뚫고 들어가 스님의 어깨와 등에 올라가 기어 다녀도 무심히 그저 앉아서 정진(精進)만 하셨어, 가만히 그대로…….
금일 대중(今日大衆)에 누가 이렇게 정진할 사람이 있습니까? 한 번 생각을 해보시오. 이렇게 하여 당신 일을 턱 마치고서 1년이 된 뒤에 옷을 벗어 던지고 주장자도 분질러 집어내 버리고, 그러고서는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나서 노래를 부른 것이 바로 이 노래야.
홀문인어무비공 돈각삼천시아가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유월연암산하로 야인무사태평가
六月燕岩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홀연히 사람에게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일세.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들사람이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나무아미타불 南無阿彌陀佛!
이와 같이 노래를 부르고 나서 중생교화의 큰 발걸음을 하심으로써 한국 불교
(韓國佛敎)의 생명을 다시 살려서 이어놓은 분이 바로 경허(鏡虛) 스님입니다.
원담(圓潭) 스님 결제(結制) 법어(1980. 4. 15)
◇ 경순스님[복전암福田庵]구술
깨달음을 얻은 후에 경허 스님은 곧 아산으로 내려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아산에는 양반들의 집성촌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경허(鏡虛) 스님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탁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탁발한 돈으로 고기와 술을 사서 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에 앉아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한 무리의 젊은 양반들이 지나가자 경허(鏡虛) 스님은 그들에게 일부러
지독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험한 말을 듣고 길 가던 이들이 잠시 멈추었습니다.
“아니 저건 웬 땡초야?”
“땡초 정도가 아니라 미친 중일세, 어여들 가세, 저런 각다귀 같은 것 상대할 것 뭐 있나.”
“하긴 예부터 중이 미치면 색중아귀가 된다고 했어. 길이나 가세.”
그러나 경허 스님은 “이놈들! 가긴 어딜 간다는 게냐?” 하며 욕설과 시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젊은이들이 화를 내자 경허 스님은 으름장을 놓는 목소리로 “화가 나면 나를 때리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몰려와 화가 들고 성이 난 주먹과 발길로 경허 스님을 몹시 패고 또 패 주었습니다.
경허 스님은 몸을 비틀며 그 매를 다 맞았습니다. 경허 스님은 자기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과연 매를 맞고 있는 자신의 몸뚱이와 마음이 분리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매를 맞을수록 마음은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이 뭣고?”만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매가 그치자 경허 스님은 털고 일어나 술과 고기를 가져다 그 젊은이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 경허 스님은 이런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법을 전할 만한 마땅한 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느 마을을 지날 때, 경허 스님은 그 마을에 매우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난 젊은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가 자신을 찾아오도록 만들고 싶었습니다. 방법을 찾던 경허 스님은 마침 한 생각이 떠올라 그 마을의 젊은 새댁에게 다가가 갑자기 젖가슴을 주무르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새댁은 깜짝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까무러쳐 땅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주변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이 스님의 무도한 행동을 보고 격분하였습니다. 몹시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돌멩이와 작대기로 경허 스님에게 죽도록 몰매를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한 노인이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사람들이 때리기를 그치자 경허 스님이 찾던 젊은이가 마을의 이 소문을 듣고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곧 출가하게 되었고, 만공(滿空)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나중에 경허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습니다.
○ 경허스님 선지 (禪旨)
자성(自性) [혜월 스님 에게]
일체 법을 스스로 배워 알게 되면 자성(自性)에는 소유가 없도다.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알면 곧 노사나(盧舍那) 부처를 보리라.
◇인간의 마음을 한없이 가두는 것은 바로욕심 때문이다 욕심(欲心)을 버려라.
청산(靑山)
무엇이 헛됨이고 무엇이 참됨인가 헛됨과 참됨 모두 참되지 못한 데서 왔네
안개 날리고 낙엽 지는 맑은 가을날 의구히 청산이 참모습을 대했네
◇ 마음 안에 벗이 있으니 얼굴을 가슴에 오래 묻어두라.
경계(境界)
붓을 잡으려 하니 마음이 착잡하네 경계(境界)를 누구와 함께하랴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 검은 것은 마음과 말 밖의 일 중생과 부처는 없고 산과 물만 있네
◇ ‘깨달음이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것’ 바로 그것이다.
◇ 원래 구할 것이 없는데 왜 사람들은 궁색할까.
참뜻
뜻을 얻으면 길거리의 잡담도 항상 바른 법이요
뜻을 잃으면 용궁의 보배 경전도 한바탕 잠꼬대로다
비록 이와 같으나 비단옷이 영화스러워도
도인(道人)은 귀(貴)히 여기지 않나니 그러면 낙처(落處)는 어디인가
원앙새 수(繡)놓은 것은 보여주지만 바늘은 보여주지 말아라
◇ 나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긴밤
시끄러움이 어찌 묵묵함과 같으며 수선 떠느니 잠이나 자겠네
긴긴 밤 빈 산(山)의 그 달빛으로 베게 삼았네
◇ 너의 마음을 스스로 들여다보라 너를 붙잡고 있는 것은 바로 너다.
◇ 마음을 가두지 말라. 자유롭게 내버려두라.
◇ 있는 그대로를 보라! 탐진치(貪瞋痴) 번뇌 시비와 명예 또 금전에 정신없이 미쳐 날뛰네
소위 영웅이라고 잘난 체하는 놈도 거기엔 꼼짝없이 왔다갔다하네
◇ 인간은 평생에 탐욕과 성냄 그리고 너다 내다 싸움질만 하네 쯧!
인생 (人生)
천지가 이렇게 넓은데 이렇게 산다는 것 가소롭구나
반평생 벌써 지나갔으니 남은 해는 얼마나 될까
근심 걱정에 늘 시달리고 평안한 시간은 얼마나 되랴
취한 듯 깨지 못하니 공연히 주저만 하네
◇ 자기를 잃어버린 삶, 그것이 바로 중생이다 그래서 중생은 고독하다.
◇ 누구는 거짓스러웠으며 누구는 곧았으니 누구는 편벽(偏僻)하였으니 그건 네가 판단하지 말라.
산은 산 물은 물
누가 물이라 하며 누가 산이라 하는가 산은 구름 속에 있고 물은 돌 사이로 흐르네
대광명(大光明)의 본체가 가이없는데 가슴을 열어젖히고 바라보니 물과 산이더라.
◇ 거짓말은 내 마음 안에 사심(邪心)을 이루니 하지 말 것이요
도둑질은 내 마음 안에 탐심(貪心)을 기르니 절대 하지 말라.
허망과 참됨
허망은 허망대로 참됨은 참됨으로 두어라 장(張) 노인은 취했는데 이(李) 노인은 멀쩡하네.
양고기 달아놓고 개고기로 파는 것은 전부터 해온 일 이것을 분명히 알면 참됨을 알리라.
◇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능히 백발백중하리라.
심우 (尋牛)
본래 잃지 않았거니 어찌 다시 찾을손가 다만 찾으려 하는 이것이 비로(毘盧)의 스승일세
푸른 산 맑은 물과 지저귀는 꾀꼬리 제비 온갖 것에 누설(漏泄)하누나 쯧!
◇ 너는 귀머거리 나는 벙어리네 많은 말을 하지 말고 많은 말을 듣지 말라.
꿈속의 일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모두 꿈속의 일이로다
북망산(北邙山)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