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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유동우(삼각산고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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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보람찬 고등학교 생활을 소개합니다! ㆍ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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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정소연(배화여고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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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장유진(삼각산고 졸업생)
평범한 시작, 특별한 끝 ㆍ 253
_ 박유순(선사고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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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하헌승(인헌고 졸업생)
서울형 혁신학교인 배화여고의 지난 3년을 돌이켜보며 ㆍ 293
_ 정영준(배화여고 교사)
‘성장, 나눔, 평화의 배움 공동체’ ― 삼각산고등학교 ㆍ 305
_ 김정안(삼각산고 교사)
선사고는 진화 중이다 ㆍ 315
_ 이선미(선사고 교사)
인헌고, 혁신 프로젝트 ㆍ 327
_ 김인호(인헌고 교사)
선사고 졸업생 박유순, 권택현, 김채란 학생의 글이 실려있는 책입니다. 꼭 한번 보시길....
그리고 아래 글은 박유순 학생의 글 전문입니다.
평범한 시작, 특별한 끝
박유순(선사고등학교 졸업생)
입학 전 불안감
“선배도 없고, 검증도 안됐고, 신설 학교 가면 너 큰일 난다.”
암사동에 선사고등학교가 들어설 무렵이었다. 선사고등학교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소문이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 역시 신설되는 학교는 피하고 싶었고, 이왕이면 근처의 자율형사립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중상위권의 학생들만 모여 있어서 공부 분위기도 다른 학교들보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추첨에서 떨어지고 말았고, 1지망, 2지망 학교도 아니었던 선사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너무나 평범한 학생이었다. 성적은 중위권. 머리가 비상하지도 않고, 추진력이 강한 편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사귄 친구들 따라서 PC방을 다니거나, 학원 다녀오면 숙제 미루고 놀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살면서 그 흔한 반장 한번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었고, 그저 남들보다 크게 뒤처지지 않게, 목표도 계획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는 그런 인간이었다. 또한 그러한 상태를 딱히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에 듣도 보도 못한 ‘혁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마치 실험용 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학교에 다니게 된다면 나는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극도로 불안하게 느껴졌다.
리더십을 가르쳐준 조별로 함께 하는 수행평가
처음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였다. 특이한 수행평가가 굉장히 많았고, 국악을 배우는 시간도 따로 있었다. 특히, 다른 학교들에서는 자주 접하지 않는 발표과제와 조별 활동이 수시로 있었다. 나는 이 부분에 굉장히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내가 대학을 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고, 나보다 공부를 못하는 친구와 같은 조가 되면 내가 피해를 보는 것처럼 느꼈다. 하지만 곧 그것이 편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유명한 건축물에 대해서 조사하여 영어로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조별 과제였기 때문에 반드시 모두가 각자 맡은 부분을 영어로 발표해야 했다. 우리 조에는 공부에 흥미가 없어 수업 시간마다 잠을 자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나는 솔직히 그 친구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심히 걱정스러웠다. 조별 수행평가는 내신에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신경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그 친구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벽히 해내었다. 같은 조 아이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며 자신이 먼저 적극적으로 발표 연습을 한 것이었다. 오히려 내가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그 친구가 내게 질문해주어서 도움이 되기도 했다. 내가 수많은 조별 활동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과 반감을 가지고 시작한 학교생활이지만 얼마 안 가서 나도 혁신학교에 적응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능동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내가 점점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보는 사람과는 말도 잘 못할 정도로 내성적이던 내가 내 또래의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긴장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발표능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 정도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의 나와 비교해보자면 아주 큰 변화였다. 물론 이것이 꼭 혁신학교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혁신학교에서의 활동들이 내게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물론 역할을 공평하게 나누기는 힘들다. 개인마다 실력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공부를 좀 더 잘하는 친구가 조장이 되어 가장 많은 일을 분담하게 된다. 하지만 조장이 되었다고 해서 불평을 할 필요는 없다. 입학사정관제에 지원할 친구들이라면 이는 자기소개서에서 자신의 ‘리더십’에 대해 강조할 때 많이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나 역시 조장으로서 활동했던 수많은 경험을 자기소개서에 기술하였고, 대학 면접에서 리더십에 관한 질문을 몇 개 받았으니, 분명 그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과제를 마친 후엔, 조원들 각자가 서로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상호평가지가 있어서, 가장 많은 일을 수행한 조장은 조원들로부터 당연히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조장은 그만큼 좋은 내신을 확보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조원들이 경쟁심 때문에 일부러 나쁜 점수를 줄 수도 있지 않느냐? 나는 혁신학교를 3년 동안 다니며 한 번도 그렇게 양심 없는 친구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 정도로 나쁜 인성을 가진 학생은 만나보기 힘들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선사고등학교에서는 매년 고등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선사 연구 과제’라는 학술 발표회를 연다. 모든 학생들은 2인 이상 조를 이루어 자유롭게 주제를 정하고 논문을 작성해야 한다.
나는 1학년 때는 팀원으로서, 2학년 때는 팀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나는 인원수가 다른 조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6명인 조를 이끌어야 했다. 이과생들이기 때문에 과학이나 공학 분야에서 논문 주제를 찾기로 했다. 그런데 사람이 많다 보니 주제 선정 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주제들이 쏟아져 나오면, 거기에 맞추어 또 수많은 반대 의견이 나타났다. 나는 팀의 리더였기 때문에 상황을 어떻게든 진전시켜야 했다. 일단은 주제 선정 범위를 좁히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학교에서 배우는 물리, 화학, 생명, 지구과학 중 하나를 선택하자고 제안했다. 투표를 진행하여 물리 과목이 채택되었고, 다시 어떤 주제를 선정할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조가 발견한 것은 ‘그래핀’이었는데, 원리가 매우 간단해보여서 우리 수준에서도 실험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 조는 주제를 ‘그래핀의 특성에 따른 활용 방안’으로 정하고 곧바로 실험에 착수했다. 물론 우리가 그래핀을 추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터무니없는 발상이었다. 추출이 되더라도, 추출되는 그래핀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그것으로는 실험이 도저히 불가능했다. 결국 그래핀 활용 샘플을 만드는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실패를 하기는 했지만 팀을 꾸려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직접 논문을 써보는 것은 일반 학교에선 아무나 체험해볼 수는 없는 경험이다. 선사 연구 과제의 경우엔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협동심’과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활용되었다. 또한, 논문 작성 같은 특이한 활동들은 면접관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풀이를 하는 건축가에 매료되다
나는 선사고등학교에서 나쁘지 않은 1년을 보냈고, 이제는 이과와 문과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목표가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대학은 가야겠다’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 어른들은 대학 진학이 더 쉽고, 취업률도 높은 이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 말을 따랐다. 이과생이 된 후, 아무 공대나 가서 취업이나 잘 하자는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다.
나는 이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수학을 아무리 붙잡고 있어도 3~4등급밖에 나오지 않았고,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과학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수학은 거의 혐오를 느끼는 수준이었다. 단순히 내가 수학을 못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답이 정확하게 떨어지는, 떨어져야만 하는 것이 싫었다. 나는 내가 나름대로 생각해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들이 좋았다. 나는 문과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나는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공부했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전과를 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또 전과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당장 진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7년 동안 살면서 찾지 못했던 것을 갑자기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 말,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진로 강연이 눈에 들어왔다.
《건축가 임형남 - 이야기로 집을 짓다》
나는 어쩌면 내 진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진로 강연을 듣기로 했다. 우연히 피어난 그 희망은 현실이 되었다. 건축에는 ‘답’이 없다. 건축가마다 다른 철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이라는 책에 담아내는 건축가의 스토리텔러와 같은 면모에 매료되었다. 이과에 속해 있지만 문과적인 자질을 더욱 필요로 하는 점도 나와 잘 맞겠다고 생각했다. 진로 강연이 끝나고 얼마 후, 내 고민을 알고 계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연락을 해볼 테니 임형남 건축사의 설계 사무소를 직접 방문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설계사무소에 방문해볼 수 있었다. 거기서 그들이 하는 작업을 살펴볼 수 있었고,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설계 사무소 방문 후, 나는 건축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수능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초에, 진로탐색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는 수행평가가 있었다. 자신이 희망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나 관련 학과 교수를 찾아가서 인터뷰하는 수행평가였다. 내심 속으로는 ‘고3한테도 이런 수행평가를 시키나?’하고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했었다. 벌써 고3 1학기가 다 끝나가고 있어서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이다. 나는 건축사를 인터뷰하기 위해서 여러 건축사 사무소에 메일을 보냈다. 한동안 소식 없이 잠잠하다가 며칠 후 경기도 화성에 있는 건축사 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조환진 건축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처음엔 그냥 상투적인 질문 몇 개만 하고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왕 멀리까지 온 거 이것저것 좀 현실적이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결과적으로 이전에 임형남 건축사의 설계 사무소를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진로탐색 보고서는 내가 진로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활용되었다. 내가 얼마나 건축에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면접관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만약 이 활동이 없었다면 면접관들 눈에는 내가 단순히 대학에 진학만을 목표로 뒤늦게 입학사정관 전형을 준비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스펙도 없는데 어느새 쌓인 나의 활동 기록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입학사정관 전형을 준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입학사정관 전형은 1학년 때부터 따로 준비해두지 않으면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련 스펙들을 쌓아두고, 봉사 활동도 많이 다니고, 내신도 좋아야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남들처럼 논술 전형에 지원하려고 했다. 그것이 당시 나에게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후, 얼마 안 가 그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수학 실력이 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만년 3~4등급이 어떻게 그 어려운 수리 논술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해도 실력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고,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버렸다. 이 상태로 논술에 지원했다가는 돈만 버릴 것이 뻔했다. 수학 성적이 좋지 않으니 정시로 원하는 대학교에 지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수능을 몇 개월 앞두고 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재수를 해야 하나?’ 가정 형편상 재수를 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마음을 다잡고 내게 맞는 전형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엔 학생부 전형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신 2.7등급 정도로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내신을 가지고 있었다. 합격 가능성이 있는 대학을 몇 곳 찾을 수 있었지만, 모든 대학에 학생부 전형으로 지원하기엔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선생님께서 입학사정관 전형을 추천해주셨다. 내신도 이 정도면 도전해 볼 만하고, 활동도 다른 일반적인 학생들보다는 많이 하지 않았느냐고 하셨다. 나는 ‘이게 무슨 말씀이지?’ 하고 생각했다. 벌써 고3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아무것도 준비한 적이 없는데 내게 스펙이 존재한다니?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멀쩡히 있던 활동 기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보다 훨씬 많은 활동을 해왔던 것이다. 단지 내가 일반적인 고등학교를 다녀본 경험이 없어서 혁신학교와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의 차이를 체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 학교생활기록부를 살펴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꽤 많은 활동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영어 시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을 직접 방문하여 영어 기행문을 작성하는 수행평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나마 가장 가까운 종묘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정말 귀찮았습니다. 기말고사가 며칠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거든요. 멀리까지 가느라 힘이 빠지는데, 그 날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짜증이 났습니다. 그렇게 종묘에 도착해서 내부를 거닐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종묘 내부를 걷기만 했을 뿐인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힘들고, 짜증나고, 시험 때문에 불안하기까지 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정전에 도착했을 때는 언제 마음이 불편했냐는 듯, 깨끗이 비워진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종묘라는 장소가 주는 경건한 느낌 때문인지, 비에 젖은 흙냄새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전까지 가는 과정에서 저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 근심과 걱정을 지워주는 건축. 저는 이것이 건축에서 말하는 ‘기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우면서도 기능적인 건축’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내가 대학 입시에 제출한 자기소개서의 내용 일부이다. 글에 있듯이, 나는 학교 수행평가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나는 자기소개서에 쓸 말이 없어.” 하고 입학사정관 전형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혁신학교에서는 남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쉽게 접해볼 수 없는 경험들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이러한 기회들을 잘 살리면, 입학사정관제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 활동을 통해 느낀 점과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서술할 수만 있다면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학습 동아리’에서 칼 세이건의 『Cosmos』를 함께 읽다
선사고등학교는 공부할 뜻이 통하는 친구들끼리 언제든 학습 동아리를 조직할 수 있다. 단순히 친구들끼리 모이는 것이 아니라, ‘정식 학습 동아리’로서 학교에 인정을 받는 것이다. 당연히 학생부에 기록으로 남는다. 학습 동아리가 조직되기 위해서는 지도교사가 필요한데, 학습 동아리의 성격에 맞는 선생님을 찾아가 지도교사를 부탁드릴 수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활동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피드백을 받을 수 있고, 학년 말에는 우수 학습 동아리를 선정하여 상을 수여한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영어 선생님의 지도 아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영어 원서를 읽는 학습 동아리 활동을 했다. 입학사정관 전형에 대비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영어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다. 학습 동아리의 목적은 이과생으로서 과학 상식을 익히고, 영어를 한글처럼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읽는 속도도 더디고, 거기에 과학 용어가 들어가다 보니 읽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솔직히 매일 새벽같이 학교에 나와 책을 읽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힘들어서 도중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인내하며 학습 동아리 활동을 10개월 동안 꾸준히 지속했다. 해석이 어려운 문장은 친구들과 함께 어떻게든 읽어나갔고, 책 속의 과학 개념이 잘 이해가 안 될 때는 해당 과목의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꿋꿋하게 활동을 하며 활동 보고서를 쌓은 결과, 학년 말에 ‘최우수 학습 동아리 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어 실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수상 내역과 활동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스펙이 되었지만, 학습 동아리 활동 역시 ‘꾸준함’과 ‘협동심’을 강조하는 사례로서 자기소개서에서 활용될 수 있었다. 또한, 포트폴리오를 제작할 때 학습 동아리의 활동 보고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그 이전까지는 한 가지 일에 이토록 끈질기게 매달려본 적이 별로 없었기에 입시를 떠나서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우연한 계기로 ‘모션 그래픽’ 영상을 인터넷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영상 편집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때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었다. 그래서 선사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영상제작부에서 활동했다. 영상제작부는 학교 홍보 및 축제용 영상 제작을 목표로 두었다. 나는 일단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시작했다. 당시 학교 축제의 콘셉트가 ‘한국적 이미지’였기에 그 느낌을 살릴 수 있는 소재로 ‘붓과 먹물, 한국적 음악’을 채택했다. 또한 혁신학교의 새로움과 화목한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 영상 소스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아이디어 스케치가 끝난 후에는 저의 모션 그래픽 작업 능력을 활용하여 한지에 붓으로 선을 그리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먹물이 떨어진 자리에 미리 준비해둔 영상들이 비춰지도록 만들었다. 사실 시간이 촉박해서 제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축제 공연에서 상영되어 많은 친구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덕분에 밤샘 작업의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자기소개서에 영상제작부 활동을 통해 미적 감각과 기획력을 기를 수 있었음을 강조하여 건축학과에 대한 ‘전공 적합성’을 보여주었다.
자기 성장을 보여주는 자기소개서
나는 과학 탐구 과목을 배우기 위해 따로 학원을 다닌 적이 없다. 학원을 다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생명과학을 배웠다. 학교 선생님들 모두 실력이 출중한 분들이셔서 자세히, 깊게 공부할 수 있었다. 이는 공립학교의 큰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방과 후 학교 수업을 들은 이후로 생명과학 성적이 급상승하여 모의고사에서 거의 항상 2등급 이상의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과학의 달 행사 때, 생명과학 경시대회가 열렸고, 나는 2위를 하여 은상을 받았다. 입학사정관제는 단순히 특이한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학생을 뽑아주는 전형이 아니다. 면접관들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선호하는데, 나는 생명과학 경시대회 수상 경력을 나의 학업 역량을 보여주는 데 활용하였다.
과학의 달 행사에서는 과학 경시대회만 여는 것이 아니라,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과 대회들이 많은데, 나는 ‘과학영화 글쓰기’ 대회에도 참가했었다. 공상과학영화를 감상하고 그에 대한 감상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대회에서 1위를 하여 금상을 수상했다. 나는 이것을 건축가에게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는 데 활용하였다.
내가 입학사정관제에 활용한 활동 기록은 이정도지만 사실 다른 활동들도 굉장히 많았다. 공과대학 면접에 유리할 이공계 특강, 문과의 경우에는 인문학 특강이 있다. 또한 선사고등학교는 학생회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대부분의 학교 행사를 학생회가 직접 나서서 계획하는 편이다. 만약 학생회에서 활동하게 된다면 역시 입학사정관 전형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활동 기록들을 가지고 입학사정관 전형을 준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활동내용이 많이 있어도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그 전까지 한 번도 자기소개서를 써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면접관들의 눈에 띄기 위해서는 ‘나만의 이야기’를 자기소개서에 녹여낼 필요가 있었다.
2006년 말, 형의 백혈병이 재발한 적이 있다. 부모님은 형을 돌봐야 했기에 나 홀로 집에 남겨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 철없는 어리광쟁이가 손을 벌릴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생전 처음으로 혼자 밥도 지어보고 설거지와 청소를 하게 되었다. 또한, 심심할 때는 영상 편집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내가 ‘독립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서술했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장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 역경을 딛고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는지를 서술했다. 실제로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혼자 지내면서 밥 먹고, 심심하면 영상 제작 하는 것이 다였다. 그렇지만 내게 어떤 영향을 준 경험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내가 겪은 것이 결코 평범한 경험은 아니라는 점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성장을 하며, 성장하게 된 배경이 있다. 그것을 찾는 것은 자기소개서를 쓰는 본인들의 몫이다.
처음엔 엉망진창이었지만, 국어 과목 담당이셨던 담임 선생님의 비평을 받으며 자기소개서를 점점 개선해나갔다. 한 달을 넘게 고생해서 결국 자기소개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남들과 다른 이야기로 생각을 말한 면접시험
3학년 1학기에 입학사정관 전형 준비는 모두 끝났고, 수시에 지원했다. 5곳은 입학사정관 전형, 한 곳은 학생부 전형으로 지원했다. 내신이 부족했던 탓인지, 수능 이전에 결과가 발표되는 대학들은 모두 서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수능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고, 수능 날에 좋은 컨디션으로 시험을 봐서 학생부 전형 최저 등급을 여유롭게 맞출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남은 대학교의 1차 합격 발표일이 되었다. 사실 이전에 서류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어서 별로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단국대학교에서 1차 합격 통지를 받았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태어나서 처음 받은 합격 통지였다. 하지만 곧 기쁜 마음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직 면접이라는 크나큰 고비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수행평가 발표를 하면서도 긴장을 하는 내가 면접을 잘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 학교 선생님들께서 1차 합격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의 면접을 진행하셨다. 단순히 일대일로 상투적인 질문 몇 개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해당 학과에 어울리는 과목의 선생님들과 다대일 면접을 통해 면접 능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긴장 때문에 얼어버려서 횡설수설했지만, 곧 면접상황에 익숙해져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 생각을 면접관 앞에서 말로 표현 할 수 있게 되었다.
대망의 면접날, 나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에 도착했다. 시간이 남았기에 캠퍼스를 구경하며 긴장을 풀었다. 대기실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예상 면접질문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했다. 단국대학교 건축학과는 입학사정관 전형의 일종인 ‘CT 전형’에 속해있었다. CT 전형은 창의력 등을 평가하는, 어떤 과제를 15분 동안 완성한 후, 면접실에 들어가서 과제에 대한 발표를 하고 심층 면접을 보는 것이다. 이 과제의 방식은 매년 다르다. 나는 담임 선생님이 내주신 과제들로 이 면접에 대비하여 연습했다. 2013년 CT 전형 과제는 한옥, 갯벌, 베인 나무, 공장, 성형수술, 영화 아바타 포스터, 고층 빌딩 등의 사진들 중 네 개를 골라, 개발과 보존의 차원에서 100년 후 우리나라의 모습이 어떠면 좋을지 흐름이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렇게 난해한 과제를 15분 내에 완성해야 한다니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나는 과제에 집중했다. 너무 ‘개발과 보존’에만 초점을 맞추면 식상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예 동화처럼 ‘이야기’를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필름, 베인 나무, 연기를 내뿜는 공장, 들판 사진을 골라서 터무니없지만 동화 느낌이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한 소년이 오래된 사진을 봅니다. 푸른 숲과 아름다운 초원이 펼쳐져 있는 사진입니다. 하지만 소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나무가 고사하여 더 이상 푸른 숲과 들판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소년은 결심합니다. 내가 가뭄을 해결하여 다시금 아름답고 푸른 숲을 보겠노라고. 소년은 후에 과학자가 되어 수십년을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웁니다. 결국 그는 먹구름을 만들어 비를 뿌리는 공장을 만들어 온 세상에 비를 뿌렸습니다. 그 후 세상에 다시 푸른 들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남들과 차별을 두는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발표를 마치자 교수님께서 “발표하는 걸 보니 남들과 다른 점이 많은 것 같다. 자기소개서도 그렇고 문학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하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만들어서 가져온 발표 과제에 대해 공격 질문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발표 주제인 ‘개발과 보존’에 대한 질문만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만든 이야기는 공격받을 만한 점이 전혀 없었다. 그만큼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면접관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이어서 심층면접 질문을 받았다. 다행히도 내가 예상했던 질문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고, 어렵지 않게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학교 모의 면접에서 담임 선생님이 질문했던 것을 면접관이 내게 똑같이 질문했다. “예술 작품과 건축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덕분에 학교 모의 면접에서 대답하지 못했던 것을, 면접관들 앞에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만약 학교에서 면접 연습을 하지 않았더라면 대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면접관이 내게 질문을 하는 사이에 면접 시간이 지나버렸다. 질문을 20개 정도로 굉장히 많이 받았지만, 한 면접관은 질문을 다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가는 학생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한 것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성공적인 면접이었다.
나는 단국대학교와 세종대학교에 합격했다. 나는 여러 가지를 비교해 본 후, 단국대학교를 선택했고,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나는 입학사정관 전형을 고3 여름방학 무렵에 준비했다. 장학금까지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내가 혁신학교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장학금은커녕 대학교에 진학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혁신학교 선사고등학교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좀 진부한 말이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 툴툴대면서도 열심히 했던 수행평가 과제들 …… . 이제 와서야 고백하는 것이지만, 선생님들 몰래 친구들과 교실 시계와 전등을 깨먹고 몰래 치워놓은 적도 있었고, 친구들과 ‘야자 시간’ 빼먹고 교실 TV로 야구 경기를 본 적도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미소가 지어지다가도 아련해지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우리 학교는 졸업식 날 강당 무대에서 교장선생님이 한 명, 한 명 졸업장을 나누어 주셨다. 졸업장을 받은 후엔 지금까지 뵈었던 모든 선생님들과 포옹을 나누었다. 모두가 선생님들의 축하와 격려를 받으며 무대를 내려왔고, 몇몇 친구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여태 보았던 것 중,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졸업식이었다. 내가 선사고등학교에 오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졸업식이 끝나고 학교를 나서는데 홀가분한 마음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지루할 틈이 없었던 선사고등학교에서 우리들의 십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대학에 다니기 시작한 지 6일이 지났다. 좀 놀란 점이 있는데, 선사고등학교에서 배우던 방식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과제 부분. 선사고등학교에서 이미 수많은 리포트들을 작성해 보았기에, 너무나 친숙하게 다가왔다. 또한, 앞으로 있을 조별 과제들도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겪어온 것이 대학교에서 그대로 이어지다니! 혁신학교에서의 활동들 덕분에 대학에 진학했는데, 이제는 대학 생활에도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교육이란 건 이런 것을 의미했던 것일까.
나는 아직 대학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 목표를 세우지 못했다. 건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어떻게 건축가로서의 목표를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당장의 내 목표는 학교생활 열심히 하면서 건축을 배우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내가 나중에 건축설계를 하고 있을지조차 나는 잘 모른다. 지금 당장 배우고 싶은 것은 건축이며 내가 꿈꾸던 것을 한번 쯤 경험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건축이 힘들어서 도중에 전과를 해버릴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나는 아직 20살도 안됐을 정도로 젊다는 것이고, 따라서 나의 길을 건축가로 한정지어놓지 않았다. 나는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이번에 졸업한 선사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의 맏이로서 분에 겨운 사랑을 받았다. 나에게 고등학교란 차가운 감옥이 아닌 따뜻한 모닥불 같은 존재였다. 이제 나는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존재할 고산을 오를 것이다. 1회 졸업생으로서 혁신학교에서 배운 소통, 협력, 돌봄, 이 모든 가르침을 가슴 속에 새기고 실천하는,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될 것임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