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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에서 열차편으로 돈황에 도착했다.
24시간 이나 걸리는 3 층으로 된 침대 열차 를 탔다.
한 아가씨는 북경에서 대학을 다니고 한 아가씨는 서안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둘이 함께 이번에 돈황을 여행하기로 했단다.
중간 정차역에 내려 보았는데 냄새가 좀 심했다. 무슨 냄새일까? 이 열차를 타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돈황은 신라의 혜초스님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돈황석굴이 있는 곳이다.
지금부터 100 여년전 영국의 사학자라는 탈을 쓴 도굴꾼 파울 뻬리오가 이곳 유물 수천점을 강탈하여 영국으로 실어 날랐다.
현재 극히 일부만 소개 되었는데 고선지 장군이 파미르 고원를 넘어 옥서스강유역에서 아랍군과 전투한 기록도 있다.
돈황에는 수많은 석굴사원과 함께 모래사막 속의 오아시스 월아천의 신비로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투루판으로 다시 기차로 달려갔다.
투루판에서는 손오공과 삼장법사가 저팔계와 사오정과 함께 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길을 가로 막았던 불타는 화염산과 사막을 걷던 실크로드의 상인들의 갈증을 풀어주던 포도원을 가보았다.
투루판에는 고창고성이라는 옛 성터가 있는데 이 지역은 고구려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곳이다.
이곳 지명과 관련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내용을 살펴보자.
고구려 제6대 태조무열제 재위 94년 (연호는 융무隆武)
융무 3년 2월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병을 방비 하였다.
융무 69년 (서기121년) 봄에 한의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예맥의 거수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았다.
제는 아우 수성을 시켜 군사 2천을 이끌고 풍환과 요광을 영격할 때, 수성은 거짓항복으로 한군의 진영을 속인후, 험한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한편, 군사 3천을 보내 그들의 본거지 현도, 요동 2군을 우회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획하였다.
濊貊의 渠帥 - 유라시아 제국사의 기사에 의하면 이때의 거수를 신강 위구르의 고성과 투루판의 王이었다고 고증해 주고있다.(유라시아 유목제국사 92쪽, 96쪽-사계절출판-)
유라시아 제국사의 기사를 옮겨보면,
서기 74년 후한의 경병과 두고가 투르판을 공격할때 그 곳은 두개의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동일한 왕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투루판 인근의 남거사와 천산 건너편 기슭의 고성 방면에 있던 북거사였다.
" 북방의 몽골리아에서 두헌과 경병이 북흉노에 대하여 큰 승리를 거두자 북과 남의 거사(고성과 투르판)의 두 왕은 즉시 중국과 관계를 재개했다. (서기 89~ 90년)
이 기사에서 한의 유주자사 풍환등이 공격했던 예맥의 거수가 신강위구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신강지역의 고구려는 즉시 황제의 아우 수성을 시켜 반격한 것 을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있다. 고구려는 신강위구르 지역을 중심으로 제국을 형성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해주는 기사이다.
(권제 15 고구려국 본기 제 3 -삼국사기 363쪽- )
이곳에서 유적 유물들을 보면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제 2년 (서기 19년) 1월 국내성에 지진이 있었다는기록과
또, 태조무열제 융무 72년(124년) 국내성에 지진이 있었다.
융무 90년(142년) 환도성에 지진이 있었다. 등의 기록이 생각났다.
로마시대 봄베이의 유적이 어느날 들어나듯
언젠가는 지하에서 숨쉬고 있을 역사의 감춰졌던 진실이 백일하에 들어 날 것이다.
단군세기에서 말하기를 중요한 역사의 기록들을 후세를 위해 지하 동굴이나 산속 깊은곳에 감추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3 천년이 지난 후 어느날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드러나도 그것을 우리 것이라 주장할 만한 실력과 능력이 있어야 남들이 그리고 우리 자신이 믿을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지명은 대륙에 건국하였던 조선이 멸망하고 나서 영국과 일본에 의해 조선이 대륙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말살되고 왜곡시켜 한반도로 옮겨지고 삭제되고 변형된 지명들이다.
우선 고려의 10도와 5도 양계는 이씨조선에 와서는 12개의 성으로 바뀌었는데 고려와 조선에서 어떻게 변하였는지
알아보자.
고려태조 23년(940) 드디어 전국을 10 개도로 나누고 12 개 절도사를 두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관내도, 2. 중원도 3, 하남도 4. 강남도 5. 영남도 6. 영동도 7. 산남도 8. 해양도 9. 삭방도 10. 패서도 이며 이때의 주, 군, 총 수는 5백 80여개 이다.
현종 초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5개 도호부와 75 개 도에 안무사를 두었다가 얼마후 안무사를 없애고 4개 도호와 8개 목을 두었다.
그 후로부터 전국을 5개 도와 2개의 계로 정하였으니,
1. 양광도 2. 경상도 3. 전라도 4. 교주도 5. 서해도 6. 동계 7. 북계 이다.
전국에 경京이 4개, 목牧이 8개, 부府가 15개, 군郡 129개, 현縣 335개, 진鎭 29개를 두었다.
이상의 지명들은 조선시대에서는 다음과 같이 변한다.
경기를 봉천성이라 하고, 다음 남쪽은 사천성, 그 다음 남쪽은 완남성, 또 남쪽은 무남성이라 한다.
동남쪽은 영남성이라 하고, 그 서쪽은 황서성이라 한다.
서울에서 동쪽은 열동성, 서울에서 서쪽은 송해성이라 하고, 또 서쪽은 패서성, 또 서쪽은 청서성이라한다. 서울에서 북쪽은 현도성, 또 북쪽은 만하성이라 하여 총 12 성으로 한다.
위의 기록은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기록된 내용이다.
고려의 국경은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수를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 경계에 미치지 못 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 때보다 확장되었다.
고구려는 초창기 중심무대가 신상 위구르의 천산산맥유역 이었는데 한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여 결국은 漢나라의 장안성을 차지하고 백제와 신라와 漢나라 땅인 漢水유역에서 삼국이 대치하게 된다.
한수유역을 중심으로 대치하던 삼국은 신라의 삼국통일로 대륙전체가 하나로 합쳐진다. 이때 신라의 향도역활을 했던 당나라는 장안성을 점령하고 신라는 낙양성에 도읍하여 장안성을 서경으로 낙양을 동경이라 부르며 사이좋게 대륙을 분할하고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당나라는 결국 신라와의 전투에서 패하며 대륙에서 자취를 감추게된다. 드디어는 당 숙종의 태생인 고려태조 왕건에 의해 대륙은 하나로 통일된다.
1107년(예종 2) 12월 윤관(尹瓘)을 원수(元帥),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하는 17만여 명에 달하는 별무반이 정주관(定州關=定平)을 떠나 기습작전으로 여진족을 소탕한 다음 갈라전여진
이에 윤관은 점령 지역의 여러 험준한 곳에 성(城)을 쌓았는데, 우선 웅주(雄州)·영주(英州)·복주(福州)·길주(吉州)의 네 성을 축조하였다. 다음 해 2월에는 함주(咸州)를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웅주·영주·복주·길주·공험진을 방어주진(防禦州鎭)으로 편제하였다. 3월에는 의주(宜州)와 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에도 성을 쌓았다. 그 결과 이른바 9성이 축조되었던 것이다.
이곳 갈라전일대가 신강 위구르의 준갈르분지로 고구려때는 갈사국이 있던 곳이다.
그리고는 무려 6만 9천여 호(戶)에 이르는 남쪽 지방의 민호(民戶)들을 이주시켰는데, 주로 웅주·영주·복주·길주 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길주성에는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국보제사(鎭國普濟寺)를 건립하기도 했는데 이는 장기적인 점령지역의 내치에 도움이 되었다.
이리하여 동쪽은 화곳령까지, 북쪽은 궁한령까지, 서쪽은 몰라골령까지를 정복하여 우리나라 땅으로 만들고 몽골라령아래 주위가 9백 90간이 되는 성을 쌓고 영주로, 하곳산아래 9백 92간이 되는 성을 쌓고 웅주로, 오림금촌에 7백 74간이 되는 성을쌓고 복주로, 궁한촌에 6백 70간이 되는 성을 쌓고 길주로 만들었으며 예종 3년 2월에는 함주와 공험진에, 3월에는 의주, 통태, 평륭의 3개성을 쌓았다.
예종 3년 2월 도령할 임언이 영주기를 썻는데 거기에 쓰기를 【 이 번에 새로 설치된 6개 성은 첫째로 진동군 함주 대 도독부인데 병민의 수는 1천 9백 48정호이며, 둘째는 안령군 영주방어사인데 병민의 수는 1천 2백 48정호이며, 세째로는 영해군 웅주 방어사인데 병민의 수는 1천 4백 36정호이며, 네째는 길주 방어사인데 병민의 수는 6백 48정호이며, 다섯째는 복주 방어사인데 병민의 수는 6백 32호정이며, 여섯째는 공험진 방어사인데 병민의 수는 5백 32호정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민지의 역사강목에는 [ 윤 관이 9 개 성을 쌓고 남방 백성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는바 함주는 진동군이라 부르고 1민 3천호를 두었으며, 영주는 안령군이라 불렀고 웅주는 영해군이라 불러서 각각 1 만호를 두었으며 복주, 길주, 의주의 3 개 진에는 각각 7천호를 공험진, 통태진, 평융진에는 각각 5천호를 두었다. ]라고 기록 하였다.
조선시대에 드디어 고구려의 옛 땅을 다 되찾고, 발해땅이었던 몽골지역까지 점령하면서 명실공히 대 제국을 건설한다.
김종서가 이곳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433년 12월 함길도 도관찰사에 제수 되면서 부터 였다.
당시 여진족
세종은 여진족의 내분을 이용해 북방 개척에 적기라고 판단해 그 책임자로 김종서를 임명한 것이었다.
이를 세종 실록 지리지에서 보면 김종서가 주도해서 개척한 6진은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의 여섯 도호부을 말한다.
이 곳은 조선 왕조 건설의 모태가 되었던 땅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었다.
다음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여유당전집에 목민심서, 흠흠심서와 함께 수록된 <대동수경>이란 책에 나오는 기록을 신강위구르지역의 지명과 비교 분석한 내용으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반도땅과 대륙을 가르는 백두산과 압록강과 두만강의 본래 옛 명칭인 장백산과 녹수와 만수에 대한 기록으로 실제로 장백산은 천산 (천산에는 천지라는 큰 못이 있는데 백두산에 왠 천지? 이것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역사를 한반도로 옮겨 놓은 작업을 한 것으로 신강성 천산에 뚜렸이 천산천지 라고 표기 되어 있다)을 말하는것이다.
"장백산은 신주(神州)의 동북에 있다.
이 산은 여덟가지 이름이 있으니 불함, 개마, 도태, 태백, 장백, 백산, 백두, 가이민상견아린이다.-
그 산에서 아홉개의 큰 물이 나오는데, 그 동남 골짜기로 나오는 것이 만수(滿水) 곧 두만하이고, 그 정 동쪽 골짜기에서 나오는 것을 분계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만수와 합하는 것이며, 그 동북 골짜기에서 나오는 것이 낭목랑고하와 극통길하인데 이 두 강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하나로 합하여 다시 꺽어져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며, 그 정 북쪽 골짜기에서 나오는 것을 대토라고하와 소토라고하라고 하는데 이 두 하는 북쪽으로 흘러 낭목.극통의 두하와 합하니 이것이 곧 송화강이며, 그 서북 골짜기에서 나오는 것을 새인눌인하라고 하는데 이하는 흐르다가 다시 꺽어서 동북으로 가다가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그 서남 골짜기로 나오는 것을 압록하라고 하니, 이것이 곧 녹수이다.
<금지金誌>에 이르기를 "금나라는 대대로 장백산 아래에 살았는데 그 산이 곧 압록수의 발원지이고 고려와 인접하여 있다"라고 하였다.
대동수경은 동국(동국여지승람이 그러하듯 조선시대 우리는 스스로 동국이라 하였음)의 물에 관한 기록인데, 만수에 대한 기록에서 -"만수는 곧 두만하인데 이 강에는 여섯가지 이름이 있다. 금나라 때에는 통문수라고도 하고 도문수라고도 하였으며, 명나라 때에는 아야고강이라 하였고, 지금은 토문강이라고도 하고 애호강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두만강이라고 한다". 라고 하였다.
"<금사>(유가전)에는 유가는 통문수와 혼준수가 합류하는 오고륜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 烏古倫이란 지명이 신강 위굴에 있는 지명이다.
위의 지도에서 보면 천산산맥 북쪽으로 오노목제시가 보인다.
우루무치이다. 우루무치 북쪽으로 준가르분지가 있고 그 북쪽으로 아륵태라는 지명이 있는데 영문으로 알타이라고 적혀있다. 그 곳 북쪽의 호수가 오륜고하이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 몽고와의 국경지역에 알타이 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또한 청나라 (성경통지)에 토문강은 영고탑성의 남쪽 600여리 되는 곳에 있는데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조선의 북쪽 경계를 감돌아 흐르다가 다시 동남으로 꺽기어 海로 들어간다. (옛 기록을 보면 사막도 海라 기록함, 고비사막을 말하는 것으로 강이 흡수 되어 버림)하였다.
또 <삼한화재도회>에는 "조선의 북쪽 달단과의 경계에 큰 강이 있는데 이름은 보려천이고 강의너비는 15리이다."라고 하였는데 달단은 카자흐스탄을 우리 조상이 부르던 이름이다.
<개국방략>에는 "장백산 동쪽에 포고리산이 있는데 그밑에 포포륵호리라는 못 이 있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천녀 불고륜이 이못에서 목욕하는데 신기로운 까치가 붉은 과실을 물어다가 그녀의 옷에 놓았다.
천녀가 이 과실을 입에 무니 홀연 뱃속에 들어가서 드디어 아이를 베어 한 남자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이 아이의 성은 애신각라이고 이름은 포고리옹순이다.
이 아이가 장백산 북쪽의 아타리성(俄朶里城)에 살았는데 나라 이름을 만주(滿州)라고 하였다.
이 아이로부터 여러대를 지나 시조에 이르러서는 혁도아랍(赫圖阿拉)땅에서 살았는데, 이곳은 아타리로부터 1500리 떨어져 있다.
<통감집람>에는 『포고리옹순은 장백산 동쪽 아막혜(俄漠惠)들판의 아타리성에서 살았다.』 라고 하였다.
만주(滿州는 신강성이다)가 처음 장백산에서 시작되어 후에는 소모하(蘇模河)로 옮겼는데 이는 곧 건주땅이다.
<동사>에 의하면 알타리부락 맹가가 일찍이 알목하에서 살았고 그의 아들 동창이 우리나라에 도망하여 왔다고 하였는데 <박물전휘>에는 "동창이 살던곳을 건주족의 발상지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개국방략>에서 말한 아타리성은 우리가 말하는 알타리부락인듯하다.
왜냐하면 이 부락이 백산의 동북쪽 경계에 있으면서 알목하에 있대어 있기 때문이다.악다리도 아타리와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만수가 시작된 곳은 알타리의 옛 땅이 아닌가 한다.
<황조문헌통고>에는 우리나라는 장백산에서 시작되어 먼 조상 때부터 3성의 난을 평정 하였으며 아막혜 들판의 악다리성에 살았는데, 이 성은 지금의 영고탑에서 서남으로 3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국호는 만주이다. ---
위 <대동수경>의 기록과 아래 첨부파일속의 신강위그르의 지도에 보면 우선 천산산맥 동북에 우랄 알타이 산맥이 있고 그 사이의 준갈르분지가 있는데 이 곳에 아륵태 (영문으로 알타이라 표기 되어 있다) 벌판이 있고 아륵태시가 있으며 오륜고하가 있다.
오국성(해동청의 본산지) 이었던 북정고성이 지도에 나와 있다.
또한 이곳에서 영고탑을 찿아야 하니 천산주위의 지명에서 보면 탑리목(塔里木)분지, 타클라마칸(塔克拉瑪干)사막, 타지키스탄(塔吉克斯坦), 탑성시(塔城市) 그리고 이녕시(伊寧市) 등 영고탑과 관련된 지명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이곳이 영고탑이고 이 곳이 만주땅이다. 이 곳이 만주가 아니면 어디에서 만주땅을 찾아야 할까?
다음 지도는 중국에서 최근 발간한 중국교통지도집 이다.
신강위구르지역입니다.
우루무치 바로 옆에 북정고성(北庭)이 지도에 분명히 표기되어 있다.
바로 이곳이 唐시대의 북정으로 돌궐때 부터 서역에 알려진 위굴의 베시-바르크(Besh-Baliq) 로서 중국에서는 五國城으로 불리는 곳으로 <철경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 고려 이북명 별실팔리 譯言 연오성야. 연오성은 金時의 오국성으로 大唐時 북정이라 한다. 이 곳이 遼東城 狗站으로 금나라에 의해 끌려온 북송의 마지막 황제 휘종과 흠종을 가둔 곳이다." 【 원말 명초 도종의의 철경록에서 】
지도에 카자흐스탄과 기르키스탄에 한자어로 표기되어 있다.
含薩克斯坦, 吉爾吉斯坦, 즉 함의 땅, 길의 땅이란 뜻으로 함주, 길주라는 뜻이다.
이곳이 조선의 함길도이다.